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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욱의 對話(8)] 오명 전 과학기술 부총리 

“한국 IT 제2의 퀀텀점프 절실하다”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지미연 객원기자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시작으로 체신부, 건설교통부, 과학기술부 장관을 거쳐 엑스포 조직위원장, 언론사 회장, 대학 총장 등 오명 전 부총리만큼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관료는 드물다. 한국 IT 혁명을 이끈 테크노크라트가 제2의 IT 부흥을 위한 제언에 나섰다.

20여 년간 네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한 유일한 관료. 대중은 오명이라는 이름에서 IT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정보통신산업의 초석을 떠올린다. 육관사관학교 졸업 후 서울대 전자공학과, 뉴욕주립대학교 전자공학 석·박사를 이수한 그는 오늘날 한국 IT의 초석을 놓은 테크노크라트로 명성이 자자하다. 한국 전자산업 경쟁력을 몇 단계 끌어올린 전전자교환기(TDX) 개발과 반도체산업 육성, CDMA로 상징되는 이동통신산업 R&D, 경부고속철도(KTX)와 인천국제공항 건설, 한국 최초 위성발 사체 나로호 등 대한민국 과학·산업이 퀀텀점프를 이룰 때마다 그의 발걸음이 함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 전 부총리가 한국 IT 혁명의 밑그림 그리기에 나선 지 어느덧 40여 년 세월이 흘렀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 이제껏 겪지 못한 변화의 파도 앞에 선 한국 IT의 현재와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20년 전 정보통신 혁명을 주도했던 아시아 강자의 포효가 갈수록 힘을 잃는 이유는 무엇일까? 손욱의 대화 여덟 번째 순서에선 우리 IT 혁명의 그랜드 디자이너로 평가받는 오 전 부총리를 만났다. 오 전 부총리는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정책이라면 과감한 집행이 필요하다”며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나라들이 최근 한국을 앞서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돌파력 차이 때문”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오명 전 부총리는 “우리 IT는 다른 나라와 달리 처음부터 통신과 융합해 발전했다”며 한국이 정보통신 강국으로 성장한 배경을 설명했다.
손욱: 2020년은 쥐띠 해입니다. 12지 중 맨 처음이 바로 쥐죠. 그런 만큼 항상 쥐띠 해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고 하더군요. 오 전 부총리께선 1980년 전자산업 발전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의 IT 혁명을 설계하셨습니다. 2020년이면 공직에 입문하신 지 딱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국 IT 산업 발전을 위한 귀한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오명: 공직에 들어선 건 1980년이지만 사실 1970년대 말부터 고민이 많았습니다. 뜻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글로벌 흐름을 논의했죠. 왜 우리는 일본보다 뒤처졌나, 산업혁명의 물결에 재빨리 올라탄 일본은 서구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여 저렇게 발전했는데 왜 우리는 쇄국과 당파에 무너졌을까. 우리가 과연 일본을 따라갈 수는 있을까. 사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죠.

손욱: 당시만 해도 일본과 우리의 격차는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죠. 영원히 일본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전망도 많았습니다.

오명: 맞아요, 1970년대 초만 해도 그랬죠. 산업혁명 이후 산업사회는 기반기술이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시대였어요. 일본과 우리의 기술 기반 자체가 다른데 경쟁에서 이기는 건 어불성설이었죠. 그런데 1970년대 말부터 제3의 물결, 즉 정보화 물결이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자공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새로운 기회가 왔음을 알아챘죠. 정보산업, 즉 IT는 일본이나 우리나 큰 차이가 없었거든요. “잃어버린 제2의 물결을 넘어 일본과 경쟁할 수 있다. 선진국의 꿈을 이룰 수 있다”며 논의를 많이 했습니다.

손욱: 공직에 들어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1980년 청와대 근무가 시작이셨지요.

오명: 운이 좋았죠. 정보화 물결을 이끌고 나가는 선두에 제가 서는 기회를 우연히 잡았으니까요. 당시 청와대 김재익 경제수석을 만나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선진국이 될 수 있나’를 놓고 밤늦도록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3의 물결, 기술집약산업이 살길이라고 강조했죠. 1960~1970년 대 들어 카터 미국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말했던 터라, 가장 다급했던 게 기계공업 중심의 방위산업, 즉 군수산업 육성이었어요. 국가 산업 정책도 그쪽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게 중지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김재익 수석은 선지자와 같은 분이에요. 기술집약산업이라야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다는 제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청와대에 들어와 직접 일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하더군요. 곧장 경제과학비서관 타이틀을 달고 김 수석을 모시게 됐어요. 그렇게 전자산업 중심 정책을 펼 수 있게 됐죠.

손욱: 불혹이라 하지만 공직사회에서 나이 마흔은 비교적 소장파에 속할 텐데요. 이전엔 없던 새로운 정책을 펴나가는 과정에 어려움은 없으셨습니까.

오명: 경제정책에 한해선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분위기였어요.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며 경제수석에게 일임했죠. 기술집약산업 역시 제가 의사결정 권한을 갖게 됐습니다. 청와대와 달리 관료사회는 반발이 컸어요. 특히 경제관료들 저항이 거셌죠. “우리는 후진국이라 스스로 기술 개발이 불가능하다. 빨리 선진국 기술을 베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더구나 전자기술은 급속히 바뀐다. 컴퓨터, 반도체를 우리가 따라 가면 선진국은 저만치 가 있을 텐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는 인식이 팽배했어요. 당시 상공부도 마찬가지였죠. 중공업과 기계공업에 대해선 박사급이었지만 전자공업은 잘 몰랐어요. 심지어 “반도체가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투자가 될 리 없었죠.

손욱: 관료사회야 그렇다 쳐도 기업은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오명: 그때 저를 제일 많이 찾아왔던 분이 작고하신 강진구 삼성전자 회장입니다. 당시는 전자에서 일하고 계셨죠. 제 전공이 전자공학이니 전자업계 분들도 절 편하게 생각했어요. 한국 전자산업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당시만 해도 전자업계 투자가 대단히 미미했습니다. 강 회장도 정부 무관심에 대해 하소연하기 일쑤였죠. 관료들도 상과대, 법과대 졸업자들이 주류였어요. 결국 관료사회부터 설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뭐든 밀어붙이기보다는 컨센서스를 갖는 게 중요하니까요. 제일 먼저 한 일이 『전자공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 출판이었어요. ‘전자산업은 노동집약적 측면과 기술집약적 면이 다 있다. 노동집약을 먼저 이룬 후 기술로 나아가면 된다. 그러니 전자산업이 지금 우리에게 딱 맞는 산업이다’라는 내용이었죠. 관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책 절반은 만화로 꾸몄어요. 이걸 관료사회에서 좍 뿌렸죠.

손욱: 지금은 ‘산업의 쌀’로 평가받으며 우리 경제의 주축이 됐지만, 반도체산업이 본격 개화한 것도 그 즈음 아닙니까.

오명: 반도체가 뭔지도 모르는 상공부 관료가 수두룩했습니다. 믿어지세요? 궁리 끝에 못 쓰는 반도체를 집어넣어 넥타이핀과 문진을 만들어 돌렸어요. “이게 뭐냐”고 물으면 “이게 반도체라는 건데 말야”하면서 저절로 홍보가 됐죠. 상공부 전자공업국장을 단장으로 하고, 각 관계 부처에서 과장급을 한 명씩 차출했죠. 민간 전자회사에서도 상무·전무급 중 비전 있는 사람을 뽑아 합류시켰어요. 그렇게 모인 21명이 ‘전자산업육성장기정책’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참여한 그룹이 삼성, LG, 현대예요. 지금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출발이었죠. 이와 별도로 ‘반도체산업육성 정책’도 만들었습니다.

반도체가 뭔지 모르는 관료 수두룩


▎손욱 전 회장은 오명 전 부총리에게 “한국의 IT 혁명을 이끈 그랜드 디자이너”라며, 최근 중국 등에 비해 부진한 산업 발전 양상을 안타까워했다.
손욱: 청와대에서 나오신 후 바로 체신부 차관으로 가셨습니다. 41살 젊은 차관의 등장이 당시에도 화제였습니다.

오명: 당시 최광수 체신부 장관은 외교관 출신이었습니다. 행정에선 누구보다 훌륭한 역량을 보여주셨죠. 그분이 “행정은 내가 다 하겠는데, 기술적 결정은 판단하기 어렵다”며 김재익 수석에게 보좌진을 요청했던 모양이에요. 결국 대통령께 건의해 갑자기 체신부 차관으로 발령이 났죠. 1981년 5월로 기억합니다. 체신부에 가보니 실제로 정보화 사회를 이루기 위한 모든 수단이 다 있더군요. 바로 통신이죠. 그때는 편지나 전화 놓는 일이 다였지만,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해 발전시키면 정보화 사회를 앞당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다른 선진국들이 산업부 위주로 IT 정책을 편 것에 비해 한국만 유독 체신부, 즉 정보통신부 주도로 관련 산업 발전이 일어난 배경이에요.

손욱: 말씀하신 것처럼 우체국과 전화국이 전부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정보화 사회나 IT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손욱: 리더는 조직 구성원에게 큰 꿈을 심어줘야 합니다. 꿈을 그리는 과정 역시 직원들과 함께해야죠. 1980년대 초에 벌써 ‘2000년대 정보화 사회’라는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매주 한 번 직원들과 정보화 사회에 대한 포럼을 열었죠. 제 얘기, 외부 인사 강연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국·과장이 자기의 비전을 이야기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1년쯤 지나니 모두가 정보화 사회 박사가 되더군요. 이를 통해 체신부가 미래 IT 산업 청사진을 주도적으로 그려나갔죠. 1985년에는 정보사회연구원(KISDI)라는 싱크탱크를 발족했습니다. 당시 이미 2000년대까지 연도별로 기술발전 플랜을 짜놓았어요.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니 모든 부처가 깜짝 놀라더군요. 경제기획원 엘리트 관료들도 정보화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손욱: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정보통신 강국으로 거듭난 배경을 듣고 있으니 지금도 가슴이 벅찹니다. 이후에도 체신부 주도로 IT 산업 발전의 밑거름을 놓으셨습니다.

오명: 한국의 IT가 선진국보다 빠른 성장을 이뤄낸 게 처음부터 통신과 융합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미 2000년대 들면 양극화 등 불균형 사회가 될 것으로 예상했어요. 복지사회를 위한 밑바탕으로 빈부격차, 도농 간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를 위해 누구나 같은 비용으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게 하자고 생각했죠. 그때만 해도 시외전화 요금이 엄청 비쌌어요. 대부분의 정보가 서울에 몰려 있는 상황이라 상대적으로 지방은 처음부터 엄청난 손해를 안고 출발하는 구조였죠. 결국 전국 전화요금을 하나로 통일하기로 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획기적 정책이었죠. 경제 관료 설득에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손욱: 돌이켜 보면 정보화 사회에 대한 열망이 정말 가득했습니다. 초등학생부터 노인들까지 컴퓨터 배우기에 열을 올렸어요.

오명: 모든 국민이 정보화 사회를 이해하도록 교육하자는 취지로 전국에 정보문화센터를 만들었습니다. 누구든 컴퓨터를 만지고 배울 수 있게 했죠. 컴퓨터학원에 정부 보조금을 주었더니 실제로 연인원 200만 명의 주부가 컴퓨터를 익혔어요. 대학에 보조금을 줘 시니어교실도 열었죠. 또 하나 획기적이었던 게 군대에서 컴퓨터 교육을 의무적으로 시행했습니다. 국방부장관과 협의해 ‘군대에서 컴맹을 없애자’는 캠페인을 벌였죠.

면밀한 정책 수립과 과감한 추진력 절실


손욱: 정부의 비전 수립과 적극적인 정책 집행, 기업의 노력이 어우러진 결과가 건국 이후 최고의 성과를 냈던 밑바탕이었습니다. 아쉽게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든 지금은 예전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명: 정책 수립은 신중한 판단이 기본입니다. 심사숙고해야죠. 하지만 일단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면 주저 없이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더 중요합니다. 계획은 신중히 세우되, 과감히 밀고 나아가는 것이죠. 이후 평가는 역사에 맡기면 돼요.

1980년대를 돌아보세요. 통신이 엉망인 건 물론이고 컴퓨터 생산도 제대로 못하던 시절입니다. 전화를 신청하면 1년을 기다려야 했어요. 전화기 하나가 서민주택 한 채보다 비샀던 때도 있었죠. 국가(체신부)가 직접 전화 사업을 하니 예산 편성, 인력 충원이 국회에 다 묶이는 바람에 우수한 기술자 채용도 어려웠어요. 공사화나 민영화 이야기가 이미 1970년대부터 나왔지만, 어느 누구도 이를 실행하지 못했던 겁니다.

손욱: 민영화 이슈는 지금도 해결하기 쉽지 않은 과제인데, 당시 통신산업의 공사화·민영화가 일사천리로 이뤄진 저력이 궁금합니다.

오명: 데이터 통신량이 급증할 거란 사실은 자명했어요. 일본도 여러 여건상 데이터와 음성통신의 분리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81년 5월에 전기통신공사(현 KT, 당시 KTA) 분리 작업에 나섰어요. 공무원 5만 명을 내보낸다는 게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다. 최광수 체신부장관이 행정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거죠.

조직원 반발이 적었던 건 정책 기능만 정부(체신부)에 남기고, 알짜 사업은 모두 정보통신공사에 넘겼기 때문이에요. 이른바 정책과 집행의 분리죠. 체신부에는 통신정책국 하나만 두고 나머지 실무는 모두 공사에 권한을 이양했습니다. 일본도 일찍 공사를 만들었지만 몇 년간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이에 비해 우린 공사 창립 이후 지속적인 발전을 이뤄갔죠.

데이터통신의 분리도 곧장 단행했습니다. 공사만 해도 반민반관이니, 데이터통신은 아예 민간으로 떼어내자 결정했어요. 일본도 하지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일본보다 정책적인 결정에 앞선 첫 사례가 바로 데이터통신 민영화입니다. 당시는 전자통신 업계마저 데이터통신이 뭔지 잘 모르던 시절이에요. 할 수 없이 차관인 제가 나서서 업계 사장들을 불러 모았죠. “데이터통신이 황금알 낳는 사업”이라 설명하며 설득하던, 웃지 못할 시절입니다. 정부가 5년간 적자를 보전해주고, 미국의 우수한 박사급 인재들을 대거 끌어오는 등 적극적인 투자에 나섰습니다. 1986년 시작된 게 바로 데이콤의 천리안 서비스예요. 이동통신주식회사 설립도 허가해 지금의 SK텔레콤이 등장한 배경이 됐어요. 전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로 한국 전자통신산업의 위상을 드높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도 획기적인 투자를 통해 통합 발전시켰습니다. 전 세계 통신 분야에서 지금도 특허 1위예요. 관료와 학계, 업계 전문가들이 모인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가 지금까지 우리 IT 산업의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손욱: 오늘날 정보화 사회의 큰 그림을 이미 그때 다 그리셨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한국 IT 혁명의 그랜드 디자이너라는 별명처럼요.

오명: 정부의 역할과 정책 집행 의지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반증이겠지요. 당시엔 한번 마음먹으면 웬만한 관료들은 물론이고 청와대 이야기도 안 듣고 직진했어요. 덕분에 대통령에게 몇 번 기합을 받기도 했죠. 대통령만 4분 모셨지만, 결정된 정책은 한 번도 물러난 적이 없어요. 국회는 물론이었고요.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되 이후에는 일사천리도 밀어붙여야 합니다. 특히 IT는 한번 실기하면 회복하기 쉽지 않아요. 리더가 결단을 보여야 아래 직원들도 믿고 끝까지 뛰는 겁니다. 한 번 사인한 사안에 대해선 재벌 로비, 국회 압력, 심지어 청와대 압력에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어요.

손욱: 컬러TV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던 시절에 정보통신 강국의 꿈을 꾸셨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대단합니다.

오명: 전전자교환기(TDX) 개발이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1980년대 초 가장 시급했던 과제가 전화요금 인하였어요. 전화기나 요금이 너무 비쌌거든요. 당시는 전화국 교환기가 기계식에서 반전자식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이럴 바에 우리 손으로 TDX를 개발해야 획기적인 통신요금 인하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죠. 컬러TV 겨우 만들고 컴퓨터는 턱도 없던 기술 수준의 한국이 TDX를 개발한다고 하니 모두 비웃었습니다. 첫 모델 개발에 240억원을 쏟아부었어요. 과학 프로젝트에 10억원도 안 쓰던 시절입니다. R&D라는 개념조차 없던 때에 40대 젊은 차관이 240억원이라는, 당시로선 단군 이래 최대 규모 R&D에 도전장을 내민 겁니다. 2차 대용량 모델 개발에 560억원을 투입했어요. 800억원 넘는 돈을 쓴다 하니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의 전자산업이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정부와 함께 R&D에 뛰어든 삼성과 LG, 대우도 비로소 세계에서 인정받는 전자기업이 됐죠. 전전자 교환기를 자체 기술로 개발한 나라가 당시 10개국밖에 안 됐어요. 한국이 하루아침에 세계 일류의 통신 기술력을 가진 나라로 점프한 셈입니다. 반신반의하던 이들에게도 ‘R&D가 곧 돈이 된다’는 인식의 전환을 이뤄냈어요.

손욱: 1980년대 정보통신산업의 개화와 발전으로 화려하게 2000년대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20년은 지나간 시간보다 성장 속도가 더딘 것 같습니다. 이미 중국의 경쟁력이 한국을 넘어섰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고속 질주하던 한국의 IT가 주춤한 배경은 무엇일까요.

오명: 정책은 늘 양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가 잘되면 부작용도 있죠. 우리는 유독 부작용을 없애는 데 관심이 커요. 영국의 적기조례가 좋은 예입니다. 영국에서 처음 자동차가 개발돼 다닐 때, 안전을 위해 항상 자동차 앞에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안내하는 규제를 뒀어요. 인명을 중시하는 영국 입장에서 당연한 조례였조. 결과는 어땠을까요? 사람을 좇는 영국에 비해 미국과 독일 자동차들은 쌩쌩 달렸습니다. 영국 자동차 산업이 뒤진 배경이죠. 물론 어느 쪽이 좋다고 단정할 순 없습니다. 우리는 최근 국가 전체의 발전보다는 고른 성장을 중시하고 있어요. 부작용에 대한 걱정이 크니 공무원들도 과감한 승부수 대신 부작용이 적은 범위안에서만 정책을 집행하려 합니다. 발전에는 걸림돌이죠. 그러는 사이 우리보다 뒤처졌던 나라들이 저만치 앞서가기 시작했어요.

손욱: 특히 중국의 부상이 무섭습니다. 산업경쟁력, 특히 IT 산업에선 이미 한국을 초월하지 않았습니까.

오명: 중국은 기본적으로 공산국가입니다. 국가가 정책을 밀어붙이기 쉬운 구조라는 뜻이죠. 그만큼 부작용을 감수하기도 쉽습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비슷했어요. 요즘 기업인들이 “우리가 잘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정부는 일만 하게 방해나 하지 말라”고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입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전자산업과 IT 부흥 중 기업의 힘만으론 이루어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미래를 더 큰 눈으로 봐야 합니다. 지금의 가치관과 제도로는 4차 산업혁명은 고사하고 몇십 년 후의 미래도 장담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2020년 태어난 아이들의 평균수명이 120세, 2050년은 150세로 예상한다고 해요. 과연 지금의 교육 시스템이 이들에게 적용될까요? 지금처럼 20대에 모든 교육을 끝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 될 겁니다. 대학 등 현재의 고등교육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 평생교육 체제로 옮겨야 해요. 과연 누가 해야 할까요? 1980년대만 해도 이런 리더십이 있었는데 지금은 잘 보이질 않아요.

정치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의회제도는 봉건체제가 무너지면서 생겨난 대의제죠. 정보화 사회가 되고 나선 모든 국민의 지식수준이 높아졌고, 실제 민의가 무엇인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과 같은 의회제도가 필요할까요? 사회와 국가 전체가 근본적인 시스템의 혁신을 이뤄내야 할 겁니다. 지금과 같은 관료사회는 더는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어느 나라도 아직은 정확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어요. 여기서 앞서가는 나라가 결국은 세계를 지배하게 되겠죠.

손욱: 결국 국가와 사회의 인식 변화가 선행돼야 할 것 같습니다. 1980년대에 정보화 사회에 대한 밑그림을 그렸던 것처럼요.

오명: 일단 나이 차이부터 하루빨리 없애야 합니다. 정년과 직급도 다 필요 없이 능력껏 일해야 해요. 윗사람이라는 개념은 나이나 직급이 아니라, 그만큼 임무를 더 많이 받은 것으로 이해해야죠. 전임자를 존중하는 문화도 절실합니다. 전임자가 이뤄놓은 바탕 위에 조금 더 얹는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해요. 다 엎는 것처럼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이 없습니다. 조그만 배는 금방 방향을 바꾸지만 큰 배는 먼 목표를 보면서 조금씩 조정할 수밖에 없어요. 대한민국은 이미 큰 배입니다.

※ 손욱 전 회장은… 40여 년간 삼성그룹에서 근무한 정통 ‘삼성맨’이자 국내 최고의 기술경영자(CTO)로서 평생을 혁신에 전념해왔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최측근에서 보좌했고, 삼성그룹의 프로세스 혁신과 정보 시스템 구축도 그의 작품이다. 삼성인재개발원장, 삼성종합기술원장 이후 농심에서 현역 생활을 마친 손 전 회장은 현재 한국형리더십연구회 회장, 감사나눔운동 전파 등 사회문화 운동으로 또 다른 혁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2002호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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