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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3) 실크로드에서 돈 번 사람들: 고대의 벤처, 실크로드 상인_2 

 

소그드 상인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중심 세력이었다. 이들은 세계 각지로 이주해 국제적인 활동 거점을 마련함으로써 힘을 키웠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중국, 인도뿐 아니라 신라와도 활발한 교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의 기업들이 글로벌화를 위해 세계 주요 시장에 거점을 만드는 전략과 많이 닮았다.

▎소그드 상인들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낙타의 카라반으로 타클라마칸 사막과 키질쿰 사막을 횡단했다.
1932년 우연히 발견된 버드나무 바구니에 담겨 있던 8세기 소그드인들의 결혼계약서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었다.

신랑 우테진은 신부 최태를 맞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이며 신부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동의 없이 다른 여자를 취하면 아내에게 30드라크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더는 원하지 않으면 아내가 가져온 모든 물건을 돌려주고 이혼해야 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서기 710년 3월 25일 작성. - NHK ‘실크로드’

1500년 전 소그드인들의 결혼계약서는 그 시대에 남편이 바람피우거나 이혼할 때를 예상해 돈으로 계산하는 투철한 상인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그드인들은 이미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인 아무다리야강·시르다리야강 사이의 좁고 긴 골짜기 ‘소그디아나’에 거주하던 이란계 사람들이다. 주로 유목과 농경에 종사했다. 소그드라는 민족명은 이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미 다리우스 대제 때 새겨진 비스툰 비문(기원전 519년)에도 소그드가 언급됐다. 이들은 중세시대와 동일한 언어에서 비롯된 방언을 사용했다. 소그드인은 처음에는 페르시아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기원전 4세기 이후에는 알렉산더의 제국에 편입됐다. 그러다 기원전 3세기에는 그리스화된 박트리아 왕국에 편입됐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으로 동서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소그드인들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중심 무대에 등장하게 됐다.

200년 후 흉노가 북방에서 쫓겨 온 대월지의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소그디아나 지역은 전란에 휩싸였다. 전화위복으로 소그드 상인은 장사에 꼭 필요한 예리한 외교 감각과 탁월한 언어능력을 기르게 됐다.


▎우즈베키스탄 키질쿰 사막에서 소그드 상인들이 타던 단봉낙타를 타는 필자.
호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 중국 측 자료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후한대, 즉 1세기 이후의 일이다. 중국 측 문헌에는 “장사하러 오는 호상들이 매일 변경에 온다”는 기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당시에 소그드인들은 대월지가 창업한 쿠샨 왕조의 무역망에 속해 있었고 중앙아시아~인도~중국을 연결했던 교역로를 장악했던 인도나 박트리아 상인의 영향권에 있었다.

3세기 쿠샨 왕조와 한나라가 쇠락하면서 소그드인들은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3세기경부터 소그드인들은 대상을 꾸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부터 장안과 낙양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고 4세기 이후 소그드 상인들은 유라시아 무역과 상권을 주도했다. 5세기부터 10세기까지 전성기를 구사한 소그드 상인들은 다양한 정보와 국제적 시각을 가지고 흉노, 돌궐, 위구르 등 유목국가는 물론 당나라에도 통치에 필요한 고문 역할을 했다. 그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점차 정치·외교·군사·문화·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 무역으로 돈을 벌어 거대도시를 유지했다. 사실상 세계의 중심이었다. 13세기 칭기즈칸이 파괴했지만 곧 복원됐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하면서 역사 기록에 등장했고 소그드 상인이 활동한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사마르칸트는 장안, 바그다드, 비잔티움(이스탄불)과 어깨를 겨루는 도시이며, 지리적으로 동서양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티무르 제국 시절에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대단한 도시였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역사박물관에 걸린 6·7세기 돌궐(투르크)의 강역도, 돌궐은 몽골제국에 앞서 6·7세기에 동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유라시아의 드넓은 강역을 지배했다. 소그드 상인은 돌궐제국의 파트너로서 유라시아의 무역을 주도하면서 한반도에서 이집트까지 유라시아 통합을 이루어내며 일종의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었다.
현장은 646년 저술한 『대당서역기』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사마르칸트 지역은 둘레가 약 800㎞에 이르고 남북보다 동서의 폭이 더 넓다. 중심가의 둘레는 10㎞쯤 되고 울퉁불퉁한 땅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으며 인구가 아주 많다. 외국 각지에서 들어온 값진 상품이 이곳에 집하되어 있다. 땅이 비옥해서 농작물이 많이 난다. 숲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꽃과 과일이 풍부하다. 여기서는 선마라는 품종의 말을 사육한다. 기술과 교역에서 이곳 주민들은 어느 나라 주민보다 뛰어나다. 기후는 온화해서 살기 좋고 사람들은 용감하고 정력적이다.”

8세기 사마르칸트가 인구 100만이 사는 세계 최대 도시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소그드 상인들의 활약 덕분이었다. 소그드 상인들의 영향력은 오늘날 유태인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유럽의 정치·외교·군사·문화 등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당나라 시대 도자기, 소그드인 신랑과 쌍봉낙타.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며 길에서 가무하기를 즐긴다. (중략) 아이를 낳으면 석밀을 먹게 하고 손에 아교를 쥐여주는데 장성해서는 달콤한 말을 하고 보화를 손에 잡으면 마치 풀처럼 달라붙으라는 것이다. 옆으로 쓰는 글을 읽히고 장사에 능하며 이익을 좋아하고 사내가 스무 살이 되면 이웃 나라로 가고 또 이익이 있는 곳이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12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고 부도법(浮圖法)을 숭상하거나 사천신(祠祆神)을 섬긴다.” -『신당서』 『서역전』 ‘康’조

소그드인들은 다섯 살만 되면 글을 배우고 조금 알게 되면 각지에 보내져 장사를 배웠다. 자식을 낳으면 석밀(꿀)을 먹이고 손에 아교를 쥐여주는데 이는 아이가 성장했을 때 항상 입으로는 꿀처럼 달콤한 말을 하고 손에 돈이 들어오면 아교가 붙듯 절대 놓지 말라는 의미다. 부도법은 불교를 말하고 사천신은 조로아스터교를 말한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 앞에선 필자, 사마르칸트는 고대에 인구 100만의 세계 최대 도시였다.
특히 소그드 상인들은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여러 곳에 이주해 교역과 교통을 위한 활동 거점을 만들었다. 현대의 글로벌 기업들이 세계 주요 시장에 거점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 형태다. 국제무역에 종사하는 소그드 상인들은 중국의 비단 등을 대대적으로 구입하여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 페르시아·비잔티움·이집트까지 고가에 판매했다. 수입은 막대했다. 따라서 국제적인 교역망을 유지·운영하기 위해서 고향이 있는 실크로드 교역로의 중간 곳곳에, 중국 내 여러 도시에 집단 거점을 형성했다. 당나라 때는 파미르고원 서쪽 출신으로 중국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강·조·석·미·안 등 소무9성(昭武九姓) 호인이라 불렀다. 이 9성은 사마르칸트(강국)·부하라(안국)·타슈켄트(석국) 등 출신지 이름을 딴 소그드인이었다. 소그드 상인들은 중국 전역에 창고 수천 개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장안에서 서역으로 가는 관문 둔황의 동편에는 안성이라는 소그드인 집성촌이 있을 정도로 중국에 많이 이주해 살았다.

8세기 중반 장안에 40년 이상 거주하며 처자식을 두고 전택과 가옥을 소유한 ‘호객(胡客)’의 수가 4000명 정도였다는 기록에서 소그드 상인이 가진 세력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한 중국 측 문헌에 ‘시장의 큰 이익이 모두 그들에게 돌아갔다’ 혹은 ‘소그드인과 위구르인은 모두 공사(公私)의 큰 우환이 되고 있다’라는 기록이 남을 정도였다. 소그드 상인들은 당나라 장안에 호풍이라는 서역문화를 유행시켜 문명 교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시안시립박물관에 있는 당나라 장군 석상. 얼굴을 보면 호인(페르시아계)인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여포도 섬서성 출신의 페르시아계로 알려졌다.
소그드 상인들은 위진남북조 시대로 정권이 계속 교체되는 동쪽의 중국, 북쪽의 강성한 유목국가들, 서쪽의 로마제국에 공물을 바치는 방식으로 관계를 쌓으며 자신들만의 방대한 상업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국에서는 실크를 구매하고 서쪽에서는 유리구슬, 옥 장신구, 마노, 진주 등 값어치는 높으면서 크기가 작은 상품을 가져왔다. 소그드 상인은 보석 감정 능력이 뛰어났다. 가축·노예를 파는 동시에 고리대금업자이기도 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곳곳에 이주 정착했던 소그드인들은 장사를 위해 당시 정치적으로 권력이 셌던 유목제국, 오아시스 국가, 중국과 협력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소그드 상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냐에 따라 국가와 왕조의 흥망성쇠가 결정될 정도로 그들의 세력은 크고도 중요했다. 흉노·돌궐·위구르 등 유목제국의 지배 아래 초원과 사막에 걸쳐 광범위한 질서가 형성되면서 유목제국과 오아시스 국가 간의 사절 파견이 다양하고 잦아졌다. 소그드인들은 이 사절단 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상업 활동에도 종사했다. 중국·인도·서아시아는 물론 페르시아와 비잔틴에까지 퍼져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양을 왕래하는 국제 교역망을 구축했다. 또 중국의 비단, 인도의 후추, 페르시아의 은 제품을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페르시아계 무장들이 중국 고대에 많이 활동했다. 안녹산도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한자로 바꾼 이름인데 아버지가 소그드인이어서 페르시아계라고 할 수 있다. 경주 괘릉에 있는 신라시대 무인상도 얼굴 생김새가 페르시아계인으로 보인다. 처용가, 아랍 문헌 등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페르시아와 신라가 교역을 해서 페르시아계 무장이 해상무역을 통해 신라에 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에는 이미 소그드인들이 1000개가 넘는 창고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진출해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 사람들은 육·해상을 통해 소그드인 등 페르시아계인과 활발히 교역을 하고 있었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송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003호 (202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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