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로 조직검사 없이 피부에 레이저만 쏘면 종양인지 그냥 점인지 알 수 있는 기술이 나왔다. 한국 스페클립스가 해낸 일이다. 이 기술은 이미 제품화됐고, 호주·유럽 시장 진출을 앞두고 있다.
▎변성현 스페클립스 대표는 광물 분석에 쓰던 레이저 분광기술을 피부암 진단에 활용했다. 그는 “앞으로 피부암 환자들이 고가의 조직검사를 하지 않고도 조기 진단해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 자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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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핀란드에서 한국과 핀란드 양국 정상회담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박 3일 ‘핀란드 순방’ 일정에 한국 스타트업 사절단 53개사와 동행했다. 이 중에서 한-핀 스타트업 서밋의 혁신성장포럼에서 기조연설을 맡은 이가 있었다. 바이오·헬스케어 스타트업 ‘스페클립스’를 이끄는 변성현(39) 대표였다.스페클립스는 이미 업계에서 유명하다. 지난해 초부터 미국 헬스케어 전문 매체 ‘메드 테크 아웃룩’이 선정한 ‘피부과 솔루션 톱 10’에 선정됐다. 미국의 의료용 레이저 제조사 큐테라(Cutera), 이스라엘의 알마레이저스(Alma Lasers) 등 글로벌 피부과 기술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한국 기업으로는 유일했고, 심지어 유럽을 비롯한 서구권에서 의료기기 인증(유럽 CE)을 획득하기도 전이었다.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벤처스도 일찌감치 점찍고 30억원을 투자하기도 했다.이 회사의 기술은 이렇다. 레이저 분광 기술과 딥러닝 알고리즘을 활용해 피부 조직을 손상하지 않고도 1㎜ 이하의 피부암을 진단할 수 있다. 진단 정확도는 임상 결과 피부 조직을 떼어내 정밀 검사한 결과 기준으로 95%에 육박한다. 이미 2017년부터 미국과 호주에서 임상시험을 시작해 부착형(애드온), 독자형(스탠드얼론) 개발을 마쳤다. 부착형의 경우 지난해까지 호주(TGA), 유럽(CE) 의료기기 인증을 마쳤고, 독자형은 올해 4월이면 호주, 유럽 인증을 마친다. 스페클립스는 독자형의 인증 절차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대로 피부암 환자가 많은 유럽과 호주 등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참이다. 특히 독자형은 지난해 ‘메드 테크 아웃룩’에 소개된 이후 미국피부과학회(AAD), 유럽피부암학회(EADO), 호주 피부암학회(ASCC) 등에서 의사 고객의 선주문이 쌓인 상태다. 지난해 말 스페클립스의 최대주주로 올라선 미용기기 전문업체 셀리턴도 이들의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다.스페클립스의 거침없는 행보 뒤엔 변 대표의 화려한 이력이 자리한다. 카이스트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기계공학 석, 박사 학위를 받은 공학도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인 보스턴컨설팅을 거쳐 한국기계연구원으로 왔다. 이곳에서 연구한 광물 분석용 레이저 분광 기술을 피부병 진단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스페클립스가 탄생했다. 지난 3월 12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본사 사무실에서 만나 그의 얘길 더 들어봤다.
보스턴컨설팅, 한국기계연구원을 거쳐 의료기기 업체 창업까지. 경력이 화려하다.결국 갈 길이었다. 학부 때부터 의료기기에 관심이 많아 생물과학까지 부전공했다. 기계공학적으로 뭔가 진일보한 결과를 내려면 엄청난 시간과 자금이 필요한데, 의학계에서 스텐트(막힌 혈관을 뚫는 철망 구조) 시술이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대단했다. 간단한 기계공학적 지식이 이런 식으로 터질 수 있구나 싶었다. 박사과정 중에도 바이오 엔지니어링 분야에 계속 관심을 가졌지만, 한계가 있었다.
어떤 한계였나.의학박사가 아니란 점이었다. 미국 의료기기 업체 보스턴 사이언티픽이 그땐 롤 모델 같은 존재였는데 이곳 부사장이 특허 대부분을 갖고 있었다. 그는 기계공학 석사이자 의학박사였다. 미국 바이오업계엔 이런 경력을 가진 이가 부지기수라 전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시장으로 꼽힌다. 잠시 방황했다. 보스턴컨설팅에 갔다가 원래 하던 연구를 하고 싶어 정부출연연구소를 찾다가 한국기계연구원에 왔다. 우연한 기회였다 .
스페클립스가 탄생한 계기였나.
▎스페클립스 피부암 진단기기 ‘스펙트라스코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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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한국기계연구원에서 플라즈마연구실에 있었다. 연구실에선 ‘심해 유인 잠수정’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고, 레이저로 심해 광물을 분석하는 일을 맡았다. 고출력 레이저를 활용해 실시간으로 대상물질을 분석하는 레이저 유도 플라즈마 분광 기술이 활용됐다. 심해 광물을 분석하는 것뿐 아니라 가동 중인 로켓 엔진 상태를 보거나 달 탐사선에 장착하는 등 극한에선 유효한 분석법이었다. 그러다 2014년 분당 서울대병원과 공동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레이저 분광 기술을 이용한 인체 조직 분석 실험’ 프로젝트 결과를 발표했다. 이를 눈여겨본 허창훈 분당 서울대병원 피부과 교수가 피부암 조직 분석에 써보자고 제안했다. 그 후 허 교수, 스탠퍼드 동기 2명과 함께 스페클립스를 차렸다.
확신이 선 이유가 있었겠다.일단 기술이 확실했다. 우리가 연구한 레이저 기술이라면 피부 조직을 떼어내지 않고도 초기 피부암을 알아낼 수 있다. 기존엔 최대 7㎜까지 피부 조직을 떼어내 조직검사를 해야 했고,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흉터도 남았다. 피부암을 진단하는 기기도 대당 1억원을 훌쩍 넘고, 진단 정확도도 60~70% 정도로 낮은 편이라 대다수 환자가 몇 배의 돈을 더 내고 조직검사를 의뢰한다.
진단 정확도가 높다고 입증하려면 임상 결과가 있어야 하는데.그렇다. 사실 피부암은 서양에서 특히 백인에겐 흔한 질환이라 발병 환자도 호주, 유럽, 미국 등지에 많다. 유럽 CE 인증, 호주 TGA 인증, 미국 FDA 인증을 받아 이 지역에 진출하려면 임상 데이터 수집 과정은 필수다. 더군다나 세계 최초로 만든 기계라 해외 임상 데이터는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투자를 받자마자 호주, 미국 내 병원 피부과부터 찾아다녔다. 한국 정부의 해외 프로그램에도 참석해 존슨앤드존슨 매니저와 보스턴대학병원 피부과 학과장도 만났다. 네트워크란 네트워크는 다닿으려 노력해본 것 같다.
진행이 정말 빨랐겠다.그렇지도 않았다. 2015년 말쯤 스페클립스를 창업했는데, 이미 프로토타입의 장비는 만들어둔 상태였다. 2016년엔 미국과 호주에 지사부터 차리고, 소프트뱅크 벤처스로부터 30억원을 투자받았다. 이듬해 미국과 호주 병원을 수배해 임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면 임상 진행이 더뎌졌다. 나중엔 간호사 3명을 더 채용해 현지 의료진 옆에 붙였다. 호주와 미국을 얼마나 오갔던지 100kg 넘게 나가던 체중이 90kg로 줄었다.
임상 결과에 제품까지 나왔다. 현지 의사들 반응은 어떤가.놀랍다는 반응 일색이다. 정말인지 몇 번이고 묻는다. 영국에선 헥스톨(Hextall)이란 피부과 의사가 현지 장소를 잡고 우리 장비를 기다린 적도 있다. 이미 진단이 끝난 피부암 환자들을 수배해 우리 진단기기의 정확도를 보기 위해서였다. 0.5㎜ 단위로 위치가 찍히니 조직검사에서 몰랐던 피부암 전이 방향까지 알게 되자 깜짝 놀랐다. 호주,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 현지 의사들 반응은 비슷하다. 입소문이 퍼지자 처음엔 그렇게도 주기 꺼리던 임상 데이터를 공개하겠다며 연락이 온다.
의료기기라는 게 한 번 사면 꽤 오래 쓰지 않나.우린 기계만 팔면 끝이 아니다. 레이저 기술로 한층 정확해진 피부 병변 측정값에 임상 데이터를 엮는 식이다. 우리를 인공지능(AI) 기반의 피부암 진단분석 전문기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경쟁사보다 기기 값도, 진단비도 10분의 1 수준으로 저렴하다. 레이저 진단 횟수를 담은 분석 모듈을 팔기로 했다. 현지 의사에겐 진료 시간을 줄여주면서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주고, 환자에게 진료비 부담을 획기적으로 낮춰주는 ‘윈윈(Win-Win)’ 전략이다. 현재 테스트 중인 유럽 일부 지역의 의사와 환자들도 만족해한다. 앞으로 계속해서 임상 데이터가 쌓이면 95% 수준의 현재 진단 정확도는 100%에 가까워지고, 이를 응용한 의료 진단 솔루션도 다양하게 내놓을 수 있다.변 대표와의 인터뷰는 투자 유치 현장을 방불케 했다. 이날 회의실 스크린에서 본 회사 자료엔 그의 공학박사, 컨설턴트,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 경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정교한 기술은 물론 공급자와 수요자를 아우르는 치밀한 비즈니스 모델, 50여 개에 달하는 특허 등록까지. 개발을 넘어 시장 진출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다. 변성현 대표는 글로벌 의료기기 회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날도 꿈꾸고 있었다.“주위에서 처음엔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이젠 스페클립스의 레이저 기술이 피부암 조기 진단과 치료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듣는다. 한국에서도 전 세계 생명과학 분야에서 경쟁력이 충분한 기업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많은 후배 창업가가 도전하면 좋겠다.”-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사진 지미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