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언맨]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밖에서 투명 스마트폰을 쓴다. 현실에선 밝은 빛 탓에 스크린을 볼 수 없다. 하지만 한국 제조 스타트업인 립하이가 방법을 찾았다.
▎김병동 대표가 디스플레이·반도체를 만들 때 쓰는 박막 증착 기술로 만든 전기 변색유리 앞에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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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세계 최대 IT 가전박람회인 ‘CES 2020’에서는 OLED 패널의 진화가 이슈였다. 특히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기존 TV 모니터 분야 외에 각종 홈 기기는 물론 자동차·항공 등 운송용, 커머셜, 오피스, 리테일, 인테리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LG의 경우 투명한 OLED를 자동차 앞 유리 앞에 설치해 실시간으로 도로 상황, 교통안내는 물론 영화까지 볼 수 있는 상황을 제시했다. 백미러나 사이드미러도 차량 실내 OLED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자동차 유리 자체를 터치스크린 모니터처럼 쓸 수는 없을까. 영화 [아이언맨],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미래 기술이 곧잘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 속 자동차에선 자동차 유리에 정보가 나타나거나 터치해 자율주행차를 조종할 수 있다. 각종 날씨 정보나 뉴스가 창문에 뜨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에선 쉽지 않은 일이다. 실내에서는 투명 디스플레이를 어둡게 만들면 되지만, 자동차 유리의 경우 외부 채광 탓에 유리에 뜬 정보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립하이라면 가능하다.“지금도 투명 디스플레이는 존재합니다. 영화나 CF를 보면 자동차 유리에 각종 정보가 뜨거나 내비게이션 화면이 나오잖아요. 필요한 기능을 터치할 수도 있죠. 하지만 현실에선 쓰지 않습니다. 낮엔 빛이 너무 강해 유리에 뜬 정보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변적으로 외부 빛을 차단하는 전기 변색유리가 필요하죠.”지난 4월 16일 충남 아산시 아산밸리로 립하이 본사에서 만난 김병동(50)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전기 변색유리는 지금도 자동차 룸미러나 백미러, 선루프에 쓰이고 있다. 특히 미국 젠텍스라는 회사가 유리 사이에 전기변색 액체를 주입하는 기술로 4조원대 세계 자동차 룸미러 시장의 90% 가량을 점유한 상황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바이올로젠’이라는 액체형 변색 물질을 두 유리 사이에 바르는 방식이라 제품이 두껍고, 크기를 키우거나 곡면 형태로 만들기 어려웠다. 부품 설계도 복잡해 단가도 비싼 편이다.여기에 립하이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김 대표는 “디스플레이·반도체를 만들 때 쓰는 박막 증착 기술을 응용해 액체 물질을 두 유리 사이에 주입하는 대신 플라즈마 증착 방식으로 금속 산화막을 유리에 코팅한다”며 “기존 제품보다 훨씬 얇아진 것은 물론 대형화, 곡면화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다. 구조도 단순해 전력 소모도 3V(볼트) 수준으로 다른 기술(헤드업 디스플레이·HUD, 100V 수준)보다 훨씬 적고, 생산단가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정부 지원이 잇따랐고, 기업 투자자도 나왔다. 2017년엔 미래부 K-Global 300 선정, 충남창조경제 혁신기업 인증, 팁스(TIPS, 중소벤처기업부가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민간투자주도형 기술창업 지원 프로그램) 대상에도 선정됐다. 이듬해인 2018년엔 한라그룹과 국내 1, 2위를 다투는 자동차 부품 계열사 만도에서 3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전기 변색유리가 자동차용 룸미러, 건축자재, 웨어러블 기기까지 활용 분야가 다양해질 것이란 기대가 크다. 전량 해외 수입에 의존하는 시장구조도 바꿀 수 있다. 김 대표도 자신했다.
시장을 바꿀 제품인가.그렇다. 전 세계 시장을 독점하는 경쟁사 제품보다 가격, 구조, 기술, 편의성 측면에서 훨씬 뛰어나다. 기존 제품은 이중 유리 사이에 액체 화합물을 주입해야 하는데 정밀하게 도포하는 과정이 정말 까다롭다. 그래서 우린 방식을 달리해보기로 했다. 디스플레이 LCD 생산 방식처럼 대형 유리를 만들어 자르는 식으로 생산 비용을 줄이고자 했다. 경쟁사와 달리 아예 특수 박막을 씌우는 방식이라 크기, 모양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시장엔 없는 것 같다.제조업 특성이다. 기술이 현장에 반영되는 속도는 느리지만, 탄력을 받으면 거대한 파도가 된다. 자동차, 건설업, 조선업 등 중후장대 산업에선 신기술을 함부로 반영하지 않는다. 워낙 규모가 크고, 한번 반영하면 파급력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그 거대한 파도를 기다리고 있다. 관련 회사들과 끊임없이 제품을 개선하고, 성능을 따져보고, 안정성을 테스트하는 과정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한국 반도체 공정이 세계적인 수준이 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린 것처럼 말이다.
디스플레이 생산 방식과 비슷하다.나를 비롯한 창업 멤버가 국내 대기업 삼성전자에서 디스플레이, 태양전지 사업 등을 담당했던 베테랑이다. 립하이 제품도 텅스텐 계열의 금속산화물을 고체 박막으로 만들어 유리에 덧씌우는 기술로 개발했는데, 디스플레이 생산 공정을 응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기 변색유리와 거울 샘플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자동차용 전기변색 내·외장 미러, 스마트 윈도, 스마트 선루프, 건축용 스마트 윈도, 선글라스, 스포츠 고글 응용제품 등 당장 활용할 수 있는 곳이 많다.
양산이 본격화되면 경쟁사들도 뛰어들지 않겠나.비슷한 제품은 나올 수 있으나 아무나 할 수 없다. 우리는 기술만 개발한 게 아니다. 샘플을 만들기 위해 연구 개발용 기계부터 생산용 장비, 시설, 공정, 원천기술을 모두 갖췄다. 누구나 비슷한 장비를 산다고 해서 만들 수 없다. 물론 우리 기술만으론 영원한 장벽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는 게 특허 설계다. 영국의 반도체 설계 기업인 ARM처럼 설계자산을 제공하는 기업이 되고 싶다.
ARM 말인가.그렇다. 공정 노하우와 장비 노하우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바닥은 특허자산을 지키지 못하면 헛똑똑이다. 특히 원천기술이 아닌 경우 경쟁사가 기존 특허를 피해 가는 식으로 유사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천기술과 원천기술을 개발하는데 꼭 필요한 ‘길목 기술’ 관련 특허, 일명 ‘브리지 특허’를 구축하는 일에도 신경 썼다. 연구개발 때부터 특허 법무법인의 전담 변리사 3명이 함께한다. 이젠 투자 IR 행사에서 기술 설명은 이들이 따로 나와서 할 정도가 됐다. 항상 기존 기술 스타트업이 곧잘 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낸 국내외 특허는 30건 정도다.
기술이 뛰어나니 어려움은 없었겠다.그렇지 않다. 우리 회사에는 이사 직함을 달고 있는 직원이 많다. 다들 대기업에 10년 넘게 다녔고 공학박사급 인력이다. 제조업엔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다고 믿었기에 노트북 한 대를 들고 종잣돈을 구하러 다녔다. 국내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생산 공장에서 중고 장비가 나오면 사서 고쳐 쓰길 반복한 것도 여러 번이다. 투자금을 아끼고 아껴 설비를 갖춘 공장을 지었다. 제조업에 뛰어든 탓에 일단 시제품이 나오려면 상당한 수준의 설비가 필요했다. 우리 같은 제조 스타트업은 양산 체제를 갖추기 전까지 투자 가뭄에 시달린다.
한국은 창업하기 척박한 곳인가.아니다. 창업하기 좋은 곳이다. 실제 우리도 제조업 관련 스타트업을 표방했을 때 중앙 정부, 지방 정부의 각종 지원 프로그램 혜택을 많이 받았다. 미국보다 대규모 투자를 받기는 어렵지만, 이것도 일장일단이 있다. 한국엔 반도체, 자동차, 조선업 등 공고한 제조업 인프라와 이곳에 줄이 닿은 협력체가 수만여 곳이 있다. 미국에서 양산 초기까지 수천억원이 들 수 있지만, 한국에선 10분의 1 수준만 있어도 같은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부품 하나가 망가져 주문해도 하루 이틀 만에 오고, 그걸 또 고쳐낼 수 있는 나라가 많지 않다. 미국에 사무실을 내더라도 제조시설은 한국에 둬야 한다는 지론은 여기서 비롯된다.
김 대표는 해외 기업의 숱한 유혹에도 한국에 뿌리를 둔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한국 제조업은 부가가치가 낮고 환경오염을 야기하는 ‘굴뚝 산업’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없는 첨단 제조 강국이라 이곳에서 제조 스타트업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김병동 대표는 한 가지 바람을 덧붙였다.
▎충남 아산밸리로에 위치한 립하이 생산시설 내부. 김병동 대표와 한 연구원이 독자 개발한 전기 변색유리를 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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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기업에서 일한 경험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에 엮인 수많은 협력업체, 우리 기술을 알아본 대기업이 없었다면 지금 립하이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기술 창업은 원래 힘들지만 분명 알아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양산까지 달려가는 과정을 돕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더 많은 제조 스타트업이 나올 수 있습니다.”-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사진 김성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