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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욱의 對話(15) 유진녕 전 LG화학 CTO 사장 

“배터리 1등, 20년 실패를 용인한 결과”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내연기관 시대가 저물고 전기자동차가 뜨면서 중대형 배터리 업체가 수혜주로 떠오른다. 한국의 자동차 배터리 산업은 패스트 팔로어에서 퍼스트 무버로 진화한 대표적 사례다.

스탠퍼드 출신 물리학자이자 바이오테크 기업 CEO인 사피 바칼은 그의 책 『룬샷(Loon Shots)』에서 ‘미치광이 조직’이 어떻게 기업을 변화시키는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례를 들어 증명한다. 그가 ‘나사 빠진 사람’이나 ‘대다수가 무시하고 홀대하는 미친 프로젝트’라고 정의한 룬샷은 기업의 혁신 차원을 넘어 국가 경쟁력의 씨앗을 뿌리는 창의의 원천이다. 오늘날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것도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 연구개발(R&D)의 성과가 종전 후 기업 R&D로 이어졌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설립 초기 몇몇 연구원이 주도했던 기업 산하 연구소들은 이후 한 기업이 많게는 수천, 수만 명에 이르는 연구 전문 인력을 확보할 정도로 R&D 혁신을 주도하는 그룹으로 변모했다. 한국도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조선, 자동차 등 대부분의 주력산업이 기업이 주도한 혁신과 R&D를 거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손욱의 대화 열다섯 번째 순서에선 유진녕 전 LG화학 최고기술경영자(CTO) 사장을 만났다. 유 전 사장은 지난 1981년, 당시 LG화학 기술연구원 고분자연구소 연구원으로 입사해 연구원장과 CTO를 거쳐 지난해 현직을 떠나기까지 38년간 회사의 R&D를 주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LG화학은 디스플레이, 2차전지, 생명과학 분야 등에서 연구원 5500여 명이 일하는 세계적 R&D 캠퍼스로 성장했다.

38년 넘게 R&D 조직에 몸담았던 유 전 사장은 뛰어난 연구조직이 갖춰야 할 첫째 조건으로 A급 인재나 자본력이 아닌 ‘조직문화’를 꼽았다. 개별 연구원이나 프로젝트 팀이 신바람 나게 몰입할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조직이 종국엔 글로벌 시장을 리드할 창조적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손욱: 한국 사람은 ‘거시기’ 한마디면 다 통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척하면 척 알아듣는다는 말일 수도 있지만, 명확한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죠. 한민족이 같은 언어로 수천 년을 살아왔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런데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더라도 서구는 좀 달라요. 말에 대한 이해나 반응이 사람마다 다르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평소 소통이나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이고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게 몸에 배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거시기’가 통용되는 상황에선 대부분의 리더가 ‘내가 옳은 생각을 지시하면 밑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놓고는 소통을 잘했다고 생각해요. 아랫사람은 정반대로 생각하는데 말이죠. 이제까지는 20세기 문화, 즉 남을 따라가는 문화가 효율적이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어요. 유진녕 사장께서 얼마 전 펴내신 『연구원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R&D는 바로 문화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조직문화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대목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유진녕: 원래 생각했던 책 제목은 ‘기술혁신과 조직문화’였는데 너무 딱딱한 것 같아 지금 제목으로 정해졌죠. 정확히 38년 2개월간 사원부터 사장까지 R&D 부문에서만 일했습니다. 연구원에서 출발해 그룹 리더, 연구소장, 마지막 CTO까지 역임하면서, 매번 팀원과 관리자 간의 괴리감을 경험했어요. 아랫사람은 이런 걸 원하는데, 바로 윗사람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식이죠. 38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문화 관점에서 구성원과 리더의 역할을 풀어냈습니다. 제 생각이 정답은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 R&D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가장 절실한 게 조직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손욱: LG화학은 한국 첨단 소재산업의 큰 기둥 같은 기업입니다. 그 원천이 LG화학 만의 독특한 조직문화 아닐까요. 일례로 한 번 연구소장에 임명되면 10년 이상 장기근속하면서 장기적인 비전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조직문화를 면면히 이어왔죠. 바로 ‘계승 발전’이라는 훌륭한 문화입니다. 미국에서는 대학 총장이 20년 넘게 자리를 지키는 경우도 있죠. 바람직한 철학이 한번 자리 잡으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선순환이 이뤄져야 합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국가 연구기관장도 3~4년 하면 끝이고, 기업들도 R&D 책임자야 누구라도 맡으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아요. LG화학의 힘도 R&D 부문의 조직문화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유진녕: LG화학을 비롯해서 소재 산업은 제품이나 상품의 라이프사이클 자체가 매우 깁니다. 한번 길을 잘못 들면 오랜 기간 해악을 끼치죠. 그러니 지속성과 일관성이 특히 더 중요합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기업의 리더, 즉 오너가 R&D를 대하는 마음가짐이라 생각합니다. LG화학 기술연구원은 1979년 12월 대전 연구단지에 처음 문을 열었습니다. 작고하신 구자경 명예 회장께서 직접 연구소를 세우셨죠. 이후 고(故) 구본무 회장과 현재 구광모 회장에 이르기까지 R&D에 대한 관심과 의지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룹 경영이념 중 하나가 바로 연구개발이죠. 오너 경영인들의 전폭적인 뒷받침 아래 최남석 1대 원장이 15년간 재임하셨습니다. 고분자 중심이었던 연구 분야가 바이오로 확대된 게 1980년대 초였죠. 당시 구자경 회장께서 바이오산업을 일궈보자며 꾸준히 밀고 나간 게 오늘날 LG화학이 대한민국 바이오 사관학교가 된 배경입니다. 요즘 바이오 벤처 인력의 70~80%가 LG화학 출신들이에요.

손욱: 최남석 원장 이후에도 LG화학 연구원장은 장기근속으로 업계에서 유명합니다.

유진녕: 2대 원장인 고(故) 여종기 사장께선 구본무 회장의 지원 아래 본격적으로 배터리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여 사장께서는 CTO 재임까지 11년간 일하셨어요. 당시 소형전지는 이미 시작했던 때인데 여 원장은 “이거 가지고 세계 1등 하겠느냐”고 하셨죠. 일본 소니가 벌써 10년 이상 앞서 있던 차였으니까요. 당시 일본은 자동차용 2차전지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어요. 안전성과 가격, 성능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결론 내렸죠. 여 사장이 “우리가 자동차용 증대형 2차전지에 도전해보자”며 R&D에 착수했던 게 2000년 7월입니다. 2004년 말까지 여 사장께서 키워오시다가 2005년에 제게 원장 자리를 넘겨주셨습니다. 저 역시 지난해 3월까지 원장으로 14년간 일했습니다. 최 원장부터 저까지 세 사람이 40년간 리더십을 이어온 겁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일관성 있게 R&D에 몰두한 결과 소재는 물론 배터리같이 적자 보는 사업도 밀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룹 오너 경영인들이 25년간 서포트해주신 것도 컸죠. 이에 비해 정부출연 연구기관장의 임기가 대부분 3년 안팎입니다. 3년 사이에 문화를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옆에서 보기 안타깝습니다.

조직문화 만드는 데 10년, 망가지는 건 1년


손욱: LG화학 연구원의 조직문화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유진녕: 문화를 만드는 데 10년, 20년 걸리지만 망가지는 건 1년도 안 걸립니다. 제가 재임할 때 LG화학 연구원이 지향한 건 한 마디로 자율과 창의였습니다. 과거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우리가 세계 1등에 오른 분야가 5~6개 됩니다. 공교롭게도 대개 일본이 이미 개발해 양산한 것을 우리가 빨리 따라잡은 경우가 많죠. 이미 양산된 제품의 경우 제조 과정이 알려진 터라 해당 제품을 어떻게 만드는지가 이미 다 공개돼 있어요. 그러니 밑에선 사업을 추진하는 리더의 말만 들으면 되죠. 이런 배경에 대한민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까지 어우러지면서 세계에서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둬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전략이 불행의 씨앗이 됐어요. 모든 걸 효율로만 재단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거죠.

손욱: 패스트 팔로어 시대가 저물었다는데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유진녕: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된다는 건 기존에 없던 길을 새로 걷는 것입니다. 가본 적 없는 길이니 리더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수밖에 없어요. 리더 혼자 힘으로 될 수도 없고요. LG화학 연구원이라면 5500명 모두의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아이디어를 낼 수 있고, 리더는 그중 성과를 낼 수 있는 걸 취사선택해야 하죠. 한국은 이미 퍼스트무버를 만들어낼 시기가 많이 지났어요. 지금이라도 집단지성, 구성원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효율 중심은 이와는 정반대 문화죠. 리더의 변화 없이는 퍼스트 무버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자율과 창의를 바탕으로 협업하고 높은 목표에 도전해야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손욱: 자율적으로 창의를 발휘하는 문화라는 게 말은 쉽지만, 막상 이를 어떻게 실현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진녕: 리더가 조직과 조직원의 특징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먼저입니다. 연구소라면 R&D 하는 연구원들의 본성을 이해해야 하죠. 1995년 한 신문에서 외국 논문을 인용해 ‘연구원의 여섯 가지 특징’을 보도한 적이 있어요. 연구원은 자율적인 분위기를 좋아해서 관리자의 감독을 극도로 싫어한다, 조직의 목표에 열광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방향이 잡혔다고 생각하면 무섭게 집중한다, 독립성이 강하지만 지나친 경쟁 분위기는 불안감을 조성해 연구에 차질을 빚게 할 수 있다 같은 내용이었죠. 기업이나 관리자 입장에서 보면 바람직하지 않은 특성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저는 신뢰, 창의, 도전, 프로정신이라는 네 가지로 축약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연구원의 모든 제도를 이 가치에 준해서 만들려고 노력했죠. 연구원들이 상사한테 물어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판단해서 실행하도록 말이죠.

손욱: 우리는 전임자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여유가 없어요. 계승 발전할 틈이 없고 마음이 급하죠. 리더는 자기 생각만 마구 내놓고, 조직원들은 굳이 새로운 것을 제안하려고 하지 않아요. 10년 이상 조직의 비전과 문화를 장기적으로 정립하면 조직원들도 자연스럽게 그 문화를 체험하고 체득하게 됩니다. 오랜 기간 장단점을 파악했기 때문에 계승 발전의 지혜를 얻을 수 있죠. 유 사장께서 상향 발전의 좋은 조직문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연구기관에는 대체로 조직문화라는 게 없어요. 그러니 힘이 분산되고 효율만 중시하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마련이죠.

유진녕: 전임인 여 사장께서 제게 넘겨주신 제일 큰 과제가 자동차용 2차전지였습니다. 4년 반가량 추진하다 넘겨주셨죠. 제가 원장으로 취임해 5년 정도 더 연구한 끝에 현대자동차에 처음 납품하는 데 성공했고 언론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어요. 2010년 들어선 미국 GM에도 납품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런 성과를 저 혼자 이뤄낸 게 아닙니다. 수많은 연구원의 노력과 더불어 전임자인 여 사장께서 시대의 화두를 짚어내 도전에 나섰기에 가능한 결과였습니다. 전임자가 묘목을 심고 가지를 쳤는데 제 대에 와서 열매를 딴 것이죠. 저 역시 후배들에게 이런 유산을 남기려 노력했습니다. 자동차 전지 사업이 각광을 받으면서 저도 두어 번 상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여 사장과 구본무 회장께서 만든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1년에 2000억원 적자를 본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두 분이 “R&D에 더 매진하자”며 격려하셨어요. 중대형 2차전지 개발에 나선 지 25년 만에 비로소 올해 흑자전환에 성공했죠.

손욱: 세계시장에서 LG화학의 배터리가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유진녕: 확고부동한 1위죠. 2014년부터 줄곧 해외 리서치 업체의 배터리 기술 평가에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올해 1분 기부터는 물량과 매출로도 파나소닉과 닝더스다이(CATL)를 제쳤습니다. 수주 잔고도 160조원 이상으로 월등한 1위죠.

손욱: 파나소닉은 거의 모든 사업 부문을 접고 배터리에 올인했는데도 이를 넘어섰다는 게 정말 대단합니다. 리더의 도전 의지와 지원 아래 R&D를 계승 발전하는 문화가 이뤄낸 성과 아니겠습니까.

유진녕: 물론입니다. 특히 실제 연구에 나선 행동부대, 즉 우수한 연구원이 많이 모여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죠. 배터리는 웬만한 이공계 전공이 모두 필요한 분야입니다. 배터리 전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전기와 화학을 비롯해 모두가 협업해야만 개발이 가능하죠. 수많은 전공자가 협업해서 성과를 이끌어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팀워크를 증명한 것입니다. 연구원들의 고생이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고생하고 있어요.

한국 기업 성과주의는 결국 결과주의


손욱: LG는 그룹 문화 자체가 인화를 강조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가치를 알고 중히 여긴다는 뜻이죠.

유진녕: 요즘은 사실 인화라는 말 대신 인간존중을 강조합니다. 사람을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생각하는 역대 오너 경영인의 철학이 바탕이죠. 저 역시 가장 존중받아야 할 이들이 일선 연구원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행복해야 성과가 나죠. 구본무 회장은 생전에 “우리 구성원은 소모품이 아니다. 자산이다”라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연구원에서도 연구원 개개인을 인간적으로 존중하도록 항상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경쟁사에 비해 협업하는 문화가 잘 자리 잡았죠.

손욱: 협업이라는 게 정말 쉽지 않습니다. 부서 간 칸막이를 없애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유진녕: 조직 구성원이 ‘내가 경쟁력을 가져야 생존할 수 있다’고만 생각하면 협업이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능력을 나눌수록 자기 경쟁력 떨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다른 사람을 잘 도와야 자기도 필요할 때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거든요. 협업을 잘하는 사람이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항상 강조했죠. 특히 과학자나 엔지니어들이 협업을 잘 못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성과 공유(Credit Share)가 제대로 안 되기 때문이죠. ‘일은 내가 다했는데, 공은 저 사람이 다 가져가네’라고 생각하면 협업이 좋은 걸 알아도 안 하게 돼죠. 그러니 리더가 개인별 공헌도를 꼼꼼히 파악하고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리더가 부지런해야 하죠. 모든 프로젝트 과정을 꿰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어떤 일의 성과라는 건 결과와 과정의 합을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결과 자체만 성과로 보죠. 한국 기업이 말하는 성과주의가 대개 그렇습니다. 그건 성과주의가 아니라 결과주의죠. 결과만 보면 맨 마지막에 아웃풋을 가져온 사람에게만 크레디트를 주게 마련입니다. 협업을 저해하는 문화죠. 인정받지 못하는데 누가 도와주려 나서겠습니까. 조직원 간, 또 조직과 조직 간 협업을 어떻게 이끌어내느냐가 전 세계 1등에 오른 LG화학 연구원 만의 차별화 요소입니다. 리더가 부지런하게 움직여 크레디트 셰어를 공정하게 하면 구성원들 사이에선 ‘언젠가는 나를 인정해 준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보든 안 보든 알아서 일하는 문화가 돌아가게 마련이죠. 내 일이 아니어도 저쪽이 힘들면 달려가서 도와줍니다. R&D 스피드도 엄청나게 빨라지죠.

손욱: 연구원들의 협업은 실제로 어떻게 이끌어내셨습니까?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있었나요?

유진녕: 여러 가지가 있었죠. 먼저 ‘오픈 이노베이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기술을 외부에서 가져오는 걸 말하는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연구원들은 오픈 이노베이션에 아주 인색합니다.

LG화학 연구원은 외부 조직에서 수혈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을 넘어서 연구원 내 팀 간 협업 개념으로 범위를 넓혔어요. 연구원 안에만 500개에 달하는 개별 연구팀이 있습니다. 제품 목표와 타깃은 제각각이지만, 개발하는 데 필요한 기술은 중복된 게 굉장히 많죠. 시간이 오래되면 이러저러한 기술을 개발해놓았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상황이 오더군요. 어떻게 하면 5500명 개별 연구원의 자질을 프로젝트 단위 팀들이 공유하며 활용하느냐, 38년간 축적해온 기술들을 어떻게 하면 완전히 활용할 수 있나 고민이 컸습니다. 하나의 연구팀 기준으로 보면 나머지 499개 팀과 과거 연구팀의 업적이 모두 오픈 이노베이션이라고 결론 내렸죠.

손욱: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군요.

유진녕: LG화학 수준의 큰 조직이면 조직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오픈 이노베이션이 가능합니다. 가장 먼저 조직원, 즉 연구원들의 지적 역량(Intellectual Capability)을 자극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 지식 관리(Knowledge Management) 기반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든 게 잘 알려진 예죠. 예를 들어 사내 인트라넷에 개인이 겪는 어려움을 올리게 했습니다. 이걸 보고 다른 연구원이 답을 잘 달아줄 거 같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거부감을 갖게 마련입니다. 이를 활성화한 게 마일리지 제도였습니다. 이를테면 문제 하나와 답 하나에 1000원을 주는데 이걸 사내 매점에서 쓸 수 있어요. 초기에는 저부터 나서 답변을 자주 올렸죠. “확실치는 않은데 A팀에 한번 가보라”는 식으로요. 저도 24번이나 마일리지를 받았습니다.(웃음) 그렇게 1년 반 정도 지나니 하루 4~5개 질문이 올라오고 그중 80~90%가 다른 연구원의 답변으로 해결되더군요. 한 달에 1번 2개 팀이 강당에서 테크니컬 이슈를 발표하는 자리도 만들었어요. 플로어에서 직접 답을 구하게끔 말이죠. 연구원 안에 모든 이공계 전공자가 모여 있으니 가능한 일이죠. 전문가 데이터베이스 시스템도 만들었습니다. 연구를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나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키워드로 등록해야 합니다. 연구원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을 사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검색할 수 있는 거죠. 키워드를 입력하면 누구누구가 딱딱 나옵니다. 과거의 연구 유산과 현재의 지적 역량을 원하는 팀이 완전하게 활용하는 데 중점을 둔 제도들입니다.

행복한 조직이 성과도 좋다

손욱: 삼성종합기술원장을 5년 동안 하면서 겪은 일이 생각납니다. 매년 유망 기술 몇 개를 정해 회장상을 수여하고 진급도 시키고 했죠. 해당 팀 연구원 중 공이 큰 5~6명을 골라 상을 줬어요. 좋은 일이니 동료들도 기뻐해주고 축하할 줄 알았는데 웬걸요, 나중에 보니 상 받은 사람과 아닌 사람이 원수가 돼 있더군요. 기술 달성 때까지는 협력을 잘하던 사이였는데도 불구하고요. 연구원들이 학계 등 외부 협력자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것도 거의 보지 못했어요. 유 사장께서 말씀하신 공정한 크레디트 셰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죠. 모두가 협력해 이뤄낸 과제는 상대방의 공을 10배로 쳐주는 마인드를 심어주려고 리더가 노력해야 합니다.

유진녕: 조직문화라는 건 결국 구성원의 행복이 전제돼야 합니다. 우수한 연구원을 뽑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요. 원장인 제가 해외를 돌면서 직접 면접을 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리 회사는 좋은 회사다, 돈도 많이 준다”고 이야기해봤자 최종 결정은 결국 재직 중인 연구원들의 평판에 달린 경우가 많더군요. 입사 희망자가 기존 직원에게 어떤 회사인지를 물었을 때, 회사에 불만이 많은 사원이라면 “다 거짓말이다”라고 하겠죠. 반면 직장생활이 행복한 사람이라면 “우리 회사는 일할 만하다”며 추천할 겁니다. 저 혼자 떠들고 다녀봐야 좋은 사람 뽑기 어려워요. 한 헤드헌터가 제게 “LG화학 연구원은 재미있는 회사”라며 “거의 대부분의 연구원이 레퍼런스 체크에서 ‘일해도 좋은 회사’라고 말한다”는 거예요. 심지어 회사를 떠난 이도 ‘결국은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제 경험으론 연봉과 자기성장, 조직문화 중에 지속성 있는 건 역시 조직문화였어요. 경쟁기업보다 영원히 돈을 더 줄 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도 허황된 이야기입니다. 대신 일하는 게 즐겁고 보람도 느낀다, 내가 하는 일이 국가 경제는 물론 인류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사명감까지 더해지면 몰입도 자체가 달라지죠. 월급만을 위해서 일한다는 건 슬픈 일이에요.

손욱: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의 행복경영과 맥이 닿는 것 같습니다. 일본항공(JAL)이 2010년 도산해서 완전히 무너졌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모든 경영 목표를 구성원의 행복 추구로 바꾼 것이었어요. 직원이 행복하면 모든 지혜와 힘을 발휘해 바꿔나갈 거란 생각이었죠. LG화학 연구원처럼 직원 행복 추구라는 철학을 가진 기업이 대한민국에 몇 개나 될까요. 이제라도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유진녕: 100% 공감합니다. 직장 내 스트레스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어요. 발전을 위한 바람직한 스트레스, 긍정적인 스트레스는 필요하죠. 하지만 상사의 불합리한 요구, 실책 전가 등 없애야 할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요. 육체적인 병을 얻고 급기야 회사를 떠나기까지 하죠. 얼마나 큰 낭비입니까. “아랫사람은 적당히 조져야 된다, 가만두면 기어오른다”고 말하는 경우가 지금도 많아요. 정말 말도 안 되는 구닥다리 사고입니다. 구성원 개개인 성과의 합이 내 성과잖아요. 다그치면 ‘내가 잘못했구나,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 생각하나요? 백이면 백 다 반발하죠. 성과가 안 나오니 또 다그치고….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구성원이 내 성과를 만드는 사람인데 왜 사랑하지 않습니까? 퍼스트 무버는 절대 이런 환경에서 나올 수 없어요.

※ 손욱 전 회장은… 40여 년간 삼성그룹에서 근무한 정통 ‘삼성맨’이자 국내 최고의 기술경영자(CTO)로서 평생을 혁신에 전념해왔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최측근에서 보좌했고, 삼성그룹의 프로세스 혁신과 정보 시스템 구축도 그의 작품이다. 삼성인재개발원장, 삼성종합기술원장 이후 농심에서 현역 생활을 마친 손 전 회장은 현재 한국형리더십연구회 회장, 감사나눔운동 전파 등 사회문화 운동으로 또 다른 혁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2010호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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