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살아남은 자들이 온갖 소설 쓰는 사회 

그는 왜? 억측과 진실 사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자살의 의미는 모든 자살처럼 살아남은 자의 반성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남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사람은 있어도 스스로 의미를 새겨 반성하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5월23일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자신의 고향을 지켜주던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이승과 작별을 고했다. 이에 대해 의학박사인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근후 전 이화여대 교수는 특별한 분석을 했다. 이 교수는 네팔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도 네팔 화가들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는 대표적 친(親)네팔 석학이기도 하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택시를 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답니다.”
“네?”
반사적으로 묻는 나의 경악에 택시기사는 “자살했대요”라고 담담하게 일러준다. 그가 담담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놀라는 것을 보고 담담한 대답을 들려주었을지 모르겠다.
“왜 자살했답니까?”
“만날 청렴결백하다고 소리쳤는데 온 집안 식구가 돈을 먹은 것으로 알려졌으니 자살 안 하고 배기겠어요?”
“…….”

나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차에서 내릴 때까지 운전기사의 푸념을 듣고만 있었다. 저녁 때 퇴근하면서 역시 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보도가 특집으로 계속 나온다.

“옛날 대통령들이 먹은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데 그걸 갖고 사람을 그렇게 몰아붙이니 자살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사회가 사람 하나 병신 만들기가 그렇게 쉬운 겁니다. 자살하지 않고 어떻게 배기겠습니까?”

“…….”

나는 역시 출근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나라고 해서 왜 생각이 없겠는가? 하지만 혼돈스럽다. 그때 내가 알고 있던 정보는 뉴스를 통해 나오는 상황 이야기가 전부였다. 아침 일찍 경호원과 함께 등산을 갔다 부엉이바위에 올라 “담배 있느냐?” “가져올까요?” “됐다” “저기 동네사람이 걸어 가네…” 이 말을 남기고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다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단순한 사실 보도가 자살의 원인이라면 많은 학자나 임상가들이 자살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복잡하게 떠들 이치가 없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자살을 놓고 자살이 보도되는 순간부터 너나 없이 한마디씩 거들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허탈해 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여러 착잡한 정서를 표출했다.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빌어본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왜 자살했을까 곰곰이 생각에 젖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내 자신에게 확신할 수 있는 대답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좀 멍청한 대답이었다. 멍청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대답은 나의 진실이다. 망자인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그 이유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바보 같은 대답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원인이라면 자살과 직접 연관되는 요인이 있어야 한다. 지금 한창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신종 인플루엔자A(신종 플루)는 그 질병을 일으키는 독특한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일어난다는, 명확한 원인이 되는 증거가 있다. 그 바이러스를 증명할 수 있다.

그 바이러스가 전염되면 누구나 감염돼 증상을 앓는다는 의학적 명확성이 있다. 이는 누구도 피하지 못하는 보편적 현상이다. 이에 비해 자살이라는 행동은 그런 의학적인 명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점이 고민이다. 불확실성이다. 자살한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어, 그가 가졌던 이유를 알 수 없다.

자살을 기도했다가 살아난 미수자의 진술을 모아 연구한 내용은 많이 나와 있다. 그래서 ‘원인’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선행요인’이라는 의학적 용어를 사용한다. 자살에 이르게 만든 상황적 요인이라는 뜻이다. 좌절이 있다고 해서 모두 자살하는 것은 아니다. 좌절은 자살의 원인이 되지만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바보 같지만 원인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 자살이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다. 이런 사전적 의미를 정신의학에서는 좀 더 어렵게 정의한다. 자발적 또는 의도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이는 정의라기보다 하나라도 더 자발적 의도에 의한 것을 강조했을 뿐이다.

자살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 기준으로 치명적 자살(성공)과 비치명적 자살(실패)로 구분하기도 한다. 어떤 기준으로 보든, 어떤 양상으로 나누든 자살이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이상으로 덧붙여 설명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공익과 연관한 자살을 주장하는 분도 있다.

하지만 우울증이라는 질병으로 시작한 것이든 건강한 사람이 사회적 선행요인에 의해 자살했든 의학적으로 보는 ‘자살’ 순간의 행위는 병리적인 것으로 본다. 자살에 대한 명확한 원인(의학적)이 밝혀지지 않은 이상 자살에 실패한 미수자를 통해 얻은 정보를 취합해 여러 양상의 자살을 살아남은 타인이 재단할 뿐 원인을 밝히지는 못했다.

앞서 말한 원인이라는 개념을 생각한다면 자살에 대한 원인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무모하기조차 한 것임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는 자살 성공자와 무관하게 자신의 정서·사고·공상 등을 규합해 마치 그런 원인(etiology)으로 자살했다고 착각하는 신념을 갖는다.

그래서 정신의학에서는 원인과 소인(predisposing factor), 그리고 유발인자(precipitating factor)로 구분해 접근한다. 물론 다른 신체의학에서 질병단위도 원인 이외에 소인과 유발인자를 가지고 있다. 이 점은 신체의학이나 정신의학에서 공통성을 지니지만 신종 플루처럼 확실한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 같은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다.

자살뿐 아니라 정신의학적 사고·정서·행동 등이 더욱 확실한 원인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다만 소인이나 유발요인으로 추정해간 것을 원인이라고 오해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된다.

자살하는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의 시각 차이

자살에 성공한 사람은 침묵한다. 말이 없다. 말하지 않더라도 그 원인 규명에 필요충분한 요인을 신체의학처럼 가지고 있다면 살아남은 자들의 구구한 공상은 말끔히 씻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망자는 말이 없고, 의학적 원인은 규명되지 않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소인이나 유발요인에 매달려 정말 그런 ‘원인’ 때문에 자살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그럴 듯한 시나리오를 쓰게 된다.

지금까지 학자들이 소인과 유발요인을 부분적으로 증명해냄으로써 자살의 원인으로 혼용하는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먼저 소인을 보자. 유전적 소인을 말하는 학자도 있으나 유전인자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가계 연구를 통해 보니 자살자가 있는 가계의 구성원이 그렇지 않는 가족 구성원에 비해 자살률이 높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것도 유전인자를 증명해내기 전까지는 일부에 국한하는 소인 주장이다. 체질을 소인으로 설명하는 학자도 있다. 체질은 유전인자와 산전산후 과정에서 작용하는 여러 가지 영향에 의해 형성된 개개인의 신체적 유기체를 말한다. 체질적 요소나 유전적 요소 등은 매우 복잡해 아직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연령을 소인으로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요즈음 연구된 논문을 보면 어느 특정 연령군에서 다른 연령군에 비해 자살률이 높기는 하지만 전 연령군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한계다. 성별에서 소인을 찾으려는 경향도 있다. 종족에 따라서 자살률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론도 있다.

이런 주장들도 필자가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던 때와 현재를 비교하면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 우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죽음이 그 당시에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에서 제일 높았으며, 우리나라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의 자살률이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통계적으로는 세계 1위 수준이다.

인구 10만 명당 29.3명이라는 통계가 나오니 약 40분마다 1명씩 자살한다는 말이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아직도 자살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여전히 소인이나 유발요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유발요인을 보자. 유발요인에서 가장 빈번하게 거론되는 것은 환경이다.

환경이란 우리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자연환경, 사회·문화적 환경,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족의 환경 등 개인 유기체를 둘러싼 모든 존재가 환경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이런 환경 가운데 가족, 근대화 과정에서의 도시화, 사회·경제적 요소, 결혼 상태나 성, 임신, 직업의 선택과 실직, 작업 과정에서 경험하는 여러 형태의 스트레스, 알코올, 마약, 신체적 결함과 질환, 신체 또는 심리적 외상, 대뇌의 일반적 기능 손상감염, 독성물질에 노출…. 적자면 한이 없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살아남은 자들의 상상력이나 공상·망상에 이르기까지 본질에서는 아주 먼 여행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주장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박탈(deprivation)이라는 부분이다. 이는 물론 신체나 정신 모두에서 언급된다. 신체적으로는 산소의 결핍, 영양의 결핍, 수면의 박탈, 감각의 박탈, 사회적 격리, 부모자녀관계에서의 박탈, 사별 등이 빈번하게 논의된다.

자살도 비언어적 의사표현이다. 자살자가 죽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주고 싶은 비언어적 언어다. 성공자로부터는 그 언어조차 핵심을 풀어내지 못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임의로 재단해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신문에 이름 한 자 올리지 못하고 죽어간 자살자가 많지만 우리에게 더 익숙하고 친숙한 이름을 남긴 사람의 자살은 정서적으로 많은 파급과 별별 공상과 상상, 심지어 망상적 사고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괴롭힌다.

박탈이라는 용어에 주목하는 뜻은, 인간은 나름대로 사회를 살아가면서 제각각 가장 지존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가지고 산다. 내가 가지고 살기도 하지만 그런 가치를 가지고 사는 동일시 모델의 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함입하고 살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이 동일시하고 지존의 가치로 생각하는 그 무엇으로부터 박탈된다면 깊은 좌절과, 이에 따르는 분노와 우울, 그리고 무력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자살을 한다는 이론이다.

이때 반드시 그를 좌절시킨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메시지를 남긴다. 자살 그 자체가 메시지다. 그 메시지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내용을 담는다. 그것은 적개심을 갖는 복수거나 회피 또는 막연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뜻을 전하고자 하는 의미 등 복잡한 동기를 가진다.

하지만 이런 비언어적 자살 행동의 메시지는 일반적으로 교통이 가능한 보편성 있는 것이 아닌 무슨 암호 같은 것이기 때문에 산 자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고, 그나마 이해라는 것이 자기 나름의 정서와 사고를 투사해 마치 망자의 비언어적 행동인 자살을 대변하는 것처럼 인위적 퍼즐 맞추기를 한다.

이 부분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자살이란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 언제 자살했는가를 알 뿐, 그가 왜 자살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기본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르기는 하지만 자살을 자신의 죄의식이나 분노, 연민을 통한 미화나 폄하가 없는 객관적 자세로 볼 수 있다면 선행요인의 분석으로 원인에 근접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조차 마치 있을 법한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남을 것이다.

결론 없는 생각

노 전 대통령이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른 일반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 본인만 안다. 소인이나 유발요인조차 본인만 안다. 언론을 포함한 많은 사람은 그저 안다고 추측할 뿐이다. 실은 모른다. 원론적인 말을 하나 덧붙이자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살고 싶은 마음을 본능의 성적인 것으로, 죽고 싶은 마음을 본능의 공격성으로 연구한 초기 정신분석 이론이 있다. 이 두 상반되는 본능은 실은 잘 조화를 이루면서 인간을 정신적으로 성장시킨다는 이론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이든 보통사람이든, 사회적으로 별 볼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 본능적 바탕은 같다.

많은 부분 살아남은 자들은 “무엇 무엇 때문에…”라는 투사적 용어로 자신의 심리적 고통을 방어하려고 한다. 혹자는 연민이나 죄의식 아니면 적개심을 가진 분노를 투사함으로써, 자신은 그 자살자로부터 멀찌감치 물러서 있는 국외자로 치부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방어하려고 한다.

그러니 목소리 큰 사람들은 자살자들을 우상화하거나 폄하하는 데 모든 소인과 유발요인을 퍼즐처럼 끼워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살자와 얽힌 이해관계, 정서적 관계, 이념적 관계, 종교적 관계, 정치적 관계 등 모든 사회·문화적 엮임이 작용해 객관화하기 어렵다.

이 엮음은 대부분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죄의식에 의한 목소리, 다른 하나는 이해관계에 얽혀 이득을 얻고자 하는 목소리다. 그러니 결론이 날 수 없는 자살의 원인이고 소인이고 유발인자이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우연이라는 것도 없다는 정신결정론적 입장에서 보면 이유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가 아직은 모른다는 뜻이다.

나의 부족한 상상과 생각

지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보는 일반적 시각에서 서로 충돌하는 부분은 선행요인을 개인의 성격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요인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부분은 학자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토론되는 문제다. 개인이 모여 사회가 되느냐, 사회 속의 개인인가 하는 관점은 한 스펙트럼에서 놓고 보면 양 극단의 목소리다.

한 극단은 유기체 중심적 설명이다. 개인은 기질을 갖고 태어나지만 태어난 이후에는 그가 속해 사는 가족·사회·문화·정치·경제 등 잡다한 환경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성격이 발달한다. 이 성격 발달의 기본은 살아남는(survival) 적응 양식을 배우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기질과 후천적 학습에 의해 터득한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살아간다.

특히 좌절이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유형이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른 중요한 이유가 된다. 자살자를 주체로 보고 자살자가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적응 양식으로서의 자살을 미시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에 비해 사회적 환경을 깊이 있게 논의하는 분들은 아무리 개인이 건강하게 살아남는 적응 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가 체계적으로, 아니면 선택적으로 압박한다면 자살 외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 여지가 없지 않겠는가 하는 설명이다. 거시적 시각이다. 필자는 이 두 가지 논의를 모두 수용하는 입장이다.

다만 어느 쪽에 좀 더 무게를 두는가의 차이이지, 이 두 개가 별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순서를 비록 사회적 선행요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종 선택은 그런 적응 양식을 가진 개인의 성격에 겨자씨만큼의 무게를 더 얹고 싶다. 자살의 뿌리는 적개심이다. 이 적개심을 충족하지 못하면 분노를 삭이지 못한다.

이 분노는 좌절을 낳고, 좌절은 우울감을, 그리고 마지막 적개심의 향방을 결정한다. 남을 향하면 살인, 자신을 향하면 자살이다. 그래서 자살이나 살인의 메커니즘을 한 뿌리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은 무엇에 좌절했는가? 그의 성격에 살아남을 적응 양식을 포기할 만한 개인 또는 사회적 사유는 무엇일까?

보통은 ‘대통령까지 오른 사람이 자살을?’ 하고 의문을 제기하지만, 대통령도 앞서 설명한 개인 유기체로서 학습된 개인의 적응 양식이 있기 때문에 자살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필자는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을 두고 각 개인들(살아남은 개인)이 상상과 공상을 엮어 가는 것은 자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나 자신의 문제가 투사된 상상은 아닌지, 그 자살로 인해 이차 이득을 얻으려는 무의식은 없는지 차분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필자의 눈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자살의 의미는 모든 자살처럼 살아남은 자의 반성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남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사람은 있어도 스스로 의미를 새겨 반성하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반성의 의미는 객관적이고 확인된, 그리고 검증된 방법에 의해 자살 그 자체를 냉철하게 보는 것을 말한다. 감정이나 숨겨진 무의식적 욕구를 앞세워 자살을 자살보다 높이지도 말고, 자살을 자살보다 낮추지도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반성하는 사람은 없고 활용하려는 사람만 눈에 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유서는 그 내용이 교훈적인 것이든, 하소연이거나 적개심의 표출이든 우리에게 종국적으로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는다. 지금 여러 공상이나 상상·망상 같은 원인을 목소리 돋우면서 투사하는 반응은 반성과는 거리가 멀다. 차분하고 객관적이고 진실에 가까운 사실 규명을 통한 정신의학적 백서 같은 것이 하나 꼭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0907호 (2009.07.01)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