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빗물의 가치 

 

이근화

고구마 밭에 물 주러 간다
나 말고 우리 엄마
빗물은 어디로 갔나 누가 다 퍼갔나
제철소의 증기가 구름의 씨앗을 말린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소나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영원히 국수를 먹지 못할 입 속처럼 허전하다
목구멍 가득 넘어가는 밀가루 없이 여름을 어떡해
고구마 밭에 물 주러 간다
엄마가 화가 나면 빗자루로 호스로 막 때렸는데
구석에 몰려 용서받을 때는 시원한 감도 있었는데
공용 화장실 수도꼭지에 호스를 꽂고
뱀처럼 끌고 나와 고구마 밭에 물줄 때
아버지는 소나기처럼 내릴 것이다
구청 직원이 뭐라 해도
죽은 아버지를 이길 수는 없다
사라진 소나기를 이길 수는 없다
빗물의 가치를 따져보는 여름 저녁
나도 엄마도 돌아간 아버지도
다 같이 외롭다
가슴 속에 노랗고 뜨거운 고구마 하나씩 얹는다

이근화(李謹華)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문학> 통해 등단. 시집으로 <칸트의 동물원>(2006), <우리들의 진화>(2009) 등이 있다.

시작메모
변화의 속도에 둔한 편인데, 그건 내 자신을 보호하는 방편인 것도 같다. 새로운 것, 빠른 것이 두렵다. 태양에너지를 모아 저녁밥을 짓거나 빗물을 받아 재사용하는 아이디어야 환영하지만, 우리는 종종 너무 빨리 변화하는 것 같고 그 변화를 발전이라고 믿는 것 같다.

성공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가 놓치는 것도 있을 텐데 말이다. 여기저기 목소리가 크고 높다. 귀를 닫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선택적으로 들으며 서로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아닌가? 새벽 내내 비가 왔고 중랑천이 불었다. 비행기는 비행기의 속도로 날고, 강물은 강물의 속도로 흐르는 것이 좋다.


200908호 (200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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