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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 영호남 물렀거라 ‘엄청도’ 나가신다 

‘미풍에서 강풍으로’ 정치권에 부는 충청바람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충청권 정치, 박근혜 대통령 신임 업고 한국정치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 중…인구 규모에서 호남 제쳤지만 표의 응집력 약하고, 지역 대변하는 리더십은 미흡

▎4월 4일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에서 거행된 충남도청 신청사 개청식.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2009년 타계한 김용래 전 충청향우회 총재는 생전에 ‘엄청도(엄청난 충청도) 전도사’로 불렸다. 지역 출신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충청인의 단결과 힘을 강조하면서 ‘엄청도’론을 설파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총무처 장관·서울시장·경기도지사 등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충청도민과 충청출향 인사가 전 국민의 25%나 되는데 왜 정부 고위직 인사에서는 충청인을 찾아보기 힘든가”라며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한국 정치권의 이른바 ‘충청권 홀대론’에 대한 불만이다.

대전, 충·남북, 세종시 인구와 출향 인구 수를 합하면 대략 1200만 명에 달하며 국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한다는 셈 법을 폈다. 이때만 해도 세상은 소수파의 넋두리 정도로만 여겼을지도 모른다. 한국은 누가 뭐래도 영·호남이 패권을 다투는 사회라는 인식이 컸던 까닭이다.

실제로 해방 이후 최근까지도 충청권은 한국 정치의 변방으로 치부됐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이 지역의 출신 인사는 제 4대 윤보선 대통령(충남 아산) 한 명뿐이다. 재임기간(1960년 8월~1962년 3월)은 2년도 채 안됐다. 호남 또한 제 15대 김대중 대통령뿐이지만 영남 후보를 내세워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고, 영남 출신 대통령은 무려 6명인데다 집권 기간도 40년을 훌쩍 넘는다.

이에 더해 영호남은 새누리당과 민주당이라는 한국 정치를 양분하는 정당을 확실하게 밀어준다. 새누리당은 영남, 민주당은 호남이라는 확실한 교두보를 끼고서 전국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충청권은 지난 총선에서 새누리당과 민주당, 자유선진당(후신인 선진통일당은 지난 대선 전 새누리당과 합당)에 조금씩 의석을 나눠줬을 뿐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충청권을 보는 세상의 눈이 조금씩 달라지는 듯하다. 먼저, 올 5월 현재 충청권의 인구가 호남권을 앞질렀다. 해방 이후 아니 조선건국 이래 처음 있는 역전이다. 주민등록인구 기준으로 충청권의 인구는 525만136명, 호남권은 524만9728명으로 충청권이 408명 더 많았다. 9월 말엔 충청권이 526만3233명으로 호남권 525만329명보다 1만2904명 앞섰다. 호남권은 인구가 제자리걸음인데 충청권은 매달 3000명씩 인구가 늘어난다.

이런 추세라면 2017년 19대 대선에서는 두 지역 인구 격차가 31만 명 이상 벌어질 거라고 통계청은 전망한다. 이제는 영·호남 지방 구도가 아니라 영·충·호 지방 구도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온다. ‘엄청도 시대’를 예견한 김 전 총재의 주장은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역 정치권의 행보도 부쩍 활발해졌다. 한글날인 10월 9일 충북 음성의 한 골프장에서 새누리당 충청권 국회의원들이 단합을 겸한 골프 회동을 가졌다. 이 지역 출신 의원 14명이 참석했다.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에서 울려퍼진 ‘고향의 봄’

“근래 새누리당이 이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의석을 보유한 일도 없거니와 이렇게 많이 모이기도 처음”이라며 충남지사를 지낸 이완구 의원이 반겼다. 새누리당은 한동안 충청에서 마이너 그룹이었다. 2008년 총선에서는 자유선진당과 통합민주당에 눌려 충청권 25석 중 달랑 1석(제천·단양)을 건진 게 고작이었다.

2004년 총선 또한 탄핵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지역을 석권하다시피 하면서 역시 1석(홍성·예산)을 얻는 데 만족해야 했다. 1992년 총선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이후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쳐 새누리당으로 당명 변경)이 충청 선거구에서 14석을 획득한 이래 실로 20년 만에 새누리당이 다수를 점하게 됐다.

골프장에 모인 의원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충청권 국회의원 선거구 증설 문제로 모아졌다. 인구 수나 유권자 규모에서 호남을 앞질렀건만 국회의원 의석 수는 충청 25석(세종 1·대전 6·충남 10·충북 8)으로 호남 30석(광주 8·전남 11·전북 11)에 5석 뒤졌기 때문이다.

충청권 의원들은 영호남 패권주의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이인제 새누리당 의원은 “인구 대비 의석 수로 따져보면 호남뿐만 아니라 영남도 충청보다 많은 편”이라며 “이는 영호남이 자기네끼리 나눠 먹던 낡은 정치를 일삼은 결과”라고 말했다.

민주당 국회의원들도 이 같은 불균형은 2016년 20대 총선 전에 바로잡혀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박병석 국회 부의장, 양승조·박수현·이상민 의원 등 충청권의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9월 30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국회정개특위를 만들어 선거구 획정을 논의하자고 새누리당에 제의했다. 20대 총선을 앞둔 선거구 획정과정에서 영남·호남·충청 간의 치열한 샅바싸움이 예고되는 장면이다.

5월 15일 국회에서 열린 충청권 의원들과 정부 4개 부처 장관이 참석한 조찬간담회는 최근의 달라진 충청권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이날 모임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처음 열린 새누리당 충청권 의원과 장관들 간의 간담회였다. 정부에서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유진룡 문화체육부장관,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이 참석했다.

충청권에서도 정우택 최고위원을 포함해 이인제·이완구·홍문표·이에리사 등 충청 출신 17명의 의원이 자리를 함께 했다. 정 최고위원은 “충청의원들이 정부부처 장관을 한데 불러 지역 현안을 집중적으로 다루기는 아마 1998년 공동여당이던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 이래 처음일 것”이라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냅둬유, 누가 되겠지유~.” 선거 때 마다 충청권 유권자들은 판세를 묻는 말에 곧잘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누가 당선되든지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며 그저 조용히, 편하게 살게만 해달라는 충청권의 관조적 자세를 대변하는 표현이다. 한국 정치의 주변부에 머물던 충청권이 박근혜 정부 들어 한국 정치의 중심부로 이동 중이다.

먼저 국회는 충청권 천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의장(강창희·대전 중구)과 민주당 몫 부의장(박병석·대전 서갑), 국회 사무총장(정진석·충남 공주 출신) 등 요직을 충청 출신 인사가 장악했다.

충청권의 약진을 대변하는 사례를 한번 보자. 9월 25일 서울 한남동 총리공관에서는 동심을 자극하는 ‘고향의 봄’ 노래가 은은히 울려퍼졌다. 충청권 유력 인사들의 모임인 ‘백소회’ 회원 수십 명이 강창희 국회의장 초청으로 의장 공관에서 만찬을 가진 자리에서였다.

1992년 충청권 사람들이 모여 후배를 돕고 지역발전을 도모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백소회는 전·현직 장·차관, 국회의원, 법조인, 금융인 등 충청 출신의 저명인사들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백제의 미소’ ‘100번 웃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날 국회의장 공관 모임은 백소회가 설립된 1992년 12월 이후 21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 의장이 헌정사상 최초 충청권 출신 국회의장이라서 그렇다. (3·4대 국회 이기붕 의장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으나 서울에서 성장한 까닭에 충청권 정치인으로는 분류되지 않는다.) 그전까지는 서울·경기·인천·영남·호남 등 많은 지역에서 의장을 배출했지만 유독 충청은 예외였다.

강 의장은 이른바 친박계 원로그룹인 ‘7인회’의 멤버로 박근혜 대통령과도 가까운 여권의 실세 정치인이다. 하지만 강 의장이 7인회 멤버라서 입법부 수장이 된 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새누리당의 한 영남권 중진 의원은 “강 의장은 7인회 몫이라기 보다는 본인 스스로가 국회에서 그만한 입지를 다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 2009년 11월 당시 박성효 대전시장, 정우택 충북지사, 이완구 충남지사(왼쪽부터) 등 충청권 3개 시·도지사가 세종시 원안건설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2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자리를 함께한 야권 연대의 주역들. (앞줄 왼쪽부터) 김종필 자민련 총재,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박태준 전 포철 회장.



국회·새누리당·정부 요직에도 충청권 강세

충청권의 강세가 후반기 원구성에서도 계속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전반기 국회의장 임기는 내년 6월이면 끝난다. 후반기 국회의장은 다수당인 새누리당에서 새로 선출해서 본회의 투표를 통해 결정하게 되는데 또다시 충청권 인사가 입법부 수장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다.

10월 30일 치러지는 경기 화성 갑 보궐선거에 나선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충남 천안 출신)가 원내 재진입에 성공한다면 말이다. 서 전 대표는 1998년 한나라당 사무총장 시절 박 대통령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공천하면서 인연을 맺은 뒤, 2007년 박근혜 대선 경선 캠프의 상임고문을 지냈고, 18대 총선에서는 낙천한 친박계 인사들을 모아 친박연대를 이끌었다.

서 전 대표는 보선 출마에 앞서 당 안팎의 지인들에게 국회의장이 정치 인생의 종착역임을 강조해왔다. 물론 여권 내 역학구도 변동에 따라 당 대표 경선 참여 쪽으로 방향을 틀 가능성도 남아있지만 현재로선 국회의장 쪽에 무게가 실려있다.

그가 국회의장을 겨눈다면 당내 위상이나 선수(보궐선거 승리 시 7선)로 볼 때 ‘떼어 놓은 당상’이다. 국회의장실의 한 관계자는 “선수가 차서 국회의장을 한다면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느냐”면서 “충청 출신 인사가 국회의장을 교대로 한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게 없다”고 말했다. 국회의장을 특정지역 출신들이 독식한 예는 과거에도 수두룩하다.

18대 국회에서는 김형오·박희태 등 PK(부산·경남) 인사들이 의장석 바통을 이어받았다. 17대(김원기·임채정), 16대(이만섭·박관용), 15대(김수한·박준규) 국회에서도 호남 또는 영남 출신 인사들이 의장직을 도맡았다. 충청권이 국회의장을 잇따라 배출한다면 충청권의 정치력이 그만큼 신장됐다는 방증이라고 하겠다.

집권 여당을 들여다 봐도 친박계 자문 그룹의 좌장이자 박 대통령과 오랜 교분을 다져온 김용환 고문(충남 보령 출신)을 위시해 충북지사를 지낸 정우택 최고위원, 충남지사를 지낸 이완구 의원 등이 친박계 실세그룹이 포진해 있다. 이에 더해 서 전 대표가 원내로 ‘컴백’한다면 당내 권력의 중심추는 충청권으로 현격하게 쏠릴 전망이다.

박근혜 정부의 지방자치 정책의 얼개도 충청 라인에서 짜게 된다. 새 정부 들어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에 심대평 전 충남지사(충남 공주),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에는 이원종 전 충북지사(충북 제천)가 발탁됐다. 지방자치발전위는 기존의 지방분권촉진위와 지방행정체제개편위를 통합해 새로 설치됐다. 지역발전위는 정부부처의 지역정책을 총괄 조정하고 대통령에게 자문한다.

박근혜 정부의 2대 총리가 영호남 대립구도 완화와 국민 통합 차원에서 충청권에 낙점될 가능성에도 정치권은 주목한다. 심대평 지방자치발전위원장은 이명박 정부에 이어 현 정부에서도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된다. 이명박 정부에서 행정경험과 정무적 판단능력을 갖춘 심대평 당시 자유선진당 대표를 여러 차례 총리로 기용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자유선진당의 반발로 무산됐다.

하지만 지난 대선을 앞두고 자유선진당의 후신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이런 걸림돌이 제거됐다. 또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과 합당해 박 대통령의 충청권 공략에 일조한 데다 행정 경험도 풍부한 이인제 의원, 충남지사 출신으로 박 대통령과의 신뢰관계가 돈독한 이완구 의원, 이원종 지역발전위원장 역시 총리 후보감들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사람을 쓸 때 지역·연령·출신학교를 아예 안 보기 때문에 막상 인사를 해놓고 나면 한쪽으로 쏠리는 경우도 있다”면서 “대통령이 사람을 쓸때면 일을 잘하는가, 믿을 수 있는가만 본다”고 했다. 이런 기준이라면 충청권에서도 차기 총리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이와는 별개로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경남 하동 출신인 정홍원 총리를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우는 방안도 거론된다. 후임 총리에 충청권 인사를 앉혀 대선에서 지지를 아끼지 않은 충청권에 보답하고, 또 당면한 지방선거에서도 충청 표심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나름의 계산이 작용한다. 나아가 충청 총리의 등장은 지방선거 최대 접전지역인 수도권의 충청 출신 유권자 표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지난 8월 고향인 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1리 윗행치마을을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가운데)이 생가 마루에 앉아 환영객에게 답례하고 있다.
충청은 박근혜 대통령의 제1.5의 고향

충청권 파워의 부상을 이해하자면 박 대통령과 충청권의 특수한 관계를 알아야 한다. 대구에서 태어나고 국회의원 지역구도 대구 달성이었지만 박 대통령에게 충청은 어머니의 고향이다. 충북 옥천엔 박 대통령의 어머니인 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다. 충청 출신의 김근식 새누리당 수석 부대변인은 “충청은 박 대통령에게 제 2의 고향, 아니 ‘1.5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라고 했다.

지난 대선 당시 충청민들은 박 대통령에게 표를 몰아줬다. 대전 서구, 유성구와 충남 천안시 서북구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박 대통령이 우세를 보였다. 옥천을 중심으로 한 친박 정서가 충청권 전반으로 확산된 결과로 해석된다. 박 대통령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여권 지도부에 분개했던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은 대전에서 전멸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선대위원장으로 나선 지난 19대 총선에서는 대전 중(강창희), 동구(이장우), 대덕구(박성효) 등 3곳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됐다.

이와 관련해 김 수석 부대변인은 “대전의 6개 선거구 가운데 중구·동구·대덕구는 인근의 충북 옥천·영동 지역의 인구와 정서가 유입되는 지역”이라며 “이런 지리적 이점이 여당 후보의 당선에 보탬이 됐다”고 풀이했다. 이 지역 출신의 중앙정부 고위 공무원은 “개인적으로 박 대통령이 충청을 얼마나 생각하는 지는 잘 모르겠으나 충청민들의 박 대통령에 대한 애정은 정말 각별하다”고 현지 기류를 전했다.

박 대통령과의 특수한 관계, 각종 선거에서의 기여도, 인구의 역동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충청권은 아직 한국 정치의 ‘종속변수’ 정도로 치부되는 걸 왜일까? 국회의장·국무총리·당 대표에 이르기까지 박근혜 정부의 주요 포스트에 빠짐없이 충청권 인사들이 거론되는데도 말이다. 이는 표가 갖는 응집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이다. 영호남이 갖는 표의 응집력이 충청권에는 결여돼 있다. 영호남은 역대 대선에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70~90% 선의 표를 몰아주었다. 반면 충청권은 모든 선거에서 표를 고루 나눠주는 편이다.

18대 대선을 보자. 대전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49.95%)와 문재인 민주당 후보(49.70%)는 표밭을 공평하게 반타작했다. 충남·북도 박 후보에게 56% 선의 지지를 보낼 때 문 후보에게도 43% 안팎의 적지 않은 표를 보탰다. 플러스 마이너스를 따지면 누구에게도 크게 남는 게 없는 지역이 충청권이다.

영남과 호남은 화끈하게 표를 몰아줘 특정인 당선에 기여하고 발언권을 행사한다. 충청의 나눠진 표심으로는 당락에 주는 영향력이나 발언권도 미미할 따름이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현재로선 충청권이 영호남을 인구 수에서 압도하지 않는 한 판세 결정력에서 이들 두 지역을 당해낼 수 없다”고 분석한다.

이는 지역민들의 열망과 정서를 한데 묶어낼 구심점이 없는 데서도 일정 부분 기인한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이후 지역의 맹주라 할 인물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 게 오늘날 충청권의 고민이다. 한때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심대평 전 자유선진당 대표 등 충청 출신 정치인들이 ‘충청 대망(待望)론’을 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충청 지역에서조차 압도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충청권 인사들에 따르면 지역민들도 유력한 대선 주자의 출현을 갈망한다고 한다. 그 잠재의식이 세종시에 보여준 충청민들의 집착으로 표출됐다는 것. 2009년 11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세종시 수정안’을 제시하면서 촉발된 세종시 논란 국면에서 충청권은 ‘세종시 원안’을 끝까지 고수했다.

세종시 원안은 ‘행정중심 복합도시’다. 대통령은 ‘교육과학중심 경제도시’로 가자고 했으나 충청민들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당시 충청권 일각에서는 이를 ‘왕도(王都)의 꿈’으로 불렀다. 충청권이 세종시 원안에 그렇게 매달린 건 비록 인구 구조상의 열세로 인해 대통령은 배출하지 못해도 수도만은 충청권으로 가져와야겠다는 집단의식이 근저에 흘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당초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충청권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세웠고 집권 후 신행정수도특별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수도 이전에 관한 법률을 국민 투표를 거치지 않고 제정한 건 국민투표권을 침해한 위헌이라고 판결해 행정수도 건설은 무산됐다. 대안으로 나온 게 ‘행정중심복합도시’였고 충청민들은 원안 사수에 올인했다는 것이다.


▎지난 8월 고향인 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1리 윗행치마을을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가운데)이 생가 마루에 앉아 환영객에게 답례하고 있다.



여야 러브콜 받는 반기문 총장의 행로

지난 대선 박근혜 후보는 108만 표차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영호남 지역 대결 구도가 해소되지 않는 한 앞으로 있을 대선에서도 박빙의 승부는 불가피하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충청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후보가 나타난다면 영남 또는 호남과의 연대를 통해 정권을 창출할 수도 있다는 게 정우택 새누리당 최고위원의 진단이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충청 출신의 대선주자를 옹립하면 ‘제 2의 DJP(김대중+김종필)연대’를 성사시키게 된다 .1997년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손잡고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당시는 충청이 호남을 밀어줬다면 이번에는 호남이 충청을 밀어주는 모양새가 되면서 1997년 당시에 진 빚을 갚는다. 그 시절 김종필 총재는 사석에서 “호남의 한을 풀어주고자 그랬다”고 DJP 연대의 속뜻을 풀이했다. 여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충청 출신의 유망주라면 민주당 대선 필승카드의 하나로 손색이 없다.

새누리당에서도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연거푸 영남출신 후보를 내 승리한 것을 내심 부담스러워한다. 당내 충청 출신 인사들은 17, 18대 대선에서 영남 후보를 밀어줬으니 다음에는 영남이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속내를 내비치기도 한다. 정우택 최고위원은 “아마도 다음 대선에서 새누리당이 영남 후보를 내면 호남과 중부권의 강한 반감을 살 것”이라고 말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쏠리는 관심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올 9월 국내에서 실시된 차기 대선후보 호감도 여론조사에서 반 총장이 24.9%로 1위로 올라섰다. 안철수 무소속 의원(19.9%), 문재인 민주당 의원(8.7%), 박원순 서울 시장(7.0%), 김문수 경기지사(4.3%),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4.1%) 등 국내파 주자들을 모두 따돌렸다.

그는 여러모로 매력적이다. 유엔 사무총장 임기가 끝나는 시점(2016년 12월)과 다음 대선(2017년 12월) 일정이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국제사회의 저명인사이자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도 이미지가 좋다. 외교·안보 전문가다. 게다가 대선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게 될 충청(충북 음성) 출신이다.

올 8월 방한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정치권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는 한국의 새마을운동 경험이 개발도상국 빈곤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며 새마을운동 이슈를 환기시켰다. 박 대통령의 측근이자 ‘새마을운동 전도사’로 통하는 최외출 영남대 부총장과도 만나 새마을운동 세계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새마을운동의 세계화를 매개로 박 대통령과 반 총장이 모종의 교감을 나누리라는 추측이 뒤따랐다.

반 총장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박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현관까지 나와 고개 숙여 맞이한 것도 뉴스가 됐다.(청와대는 일상적인 의전에 불과하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에 온 것”이라며 “설령 그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라도 대통령이 극진하게 환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민주당은 진작부터 반 총장에게 추파를 던졌다.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 때부터 반기문 영입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반 총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외교비서관을 지내고 외교통상부장관에 이어 유엔 사무총장까지 꿰찼다. 반 총장에게 연고권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지난 8월 반 총장이 방한 중일 때 언론에다 “반기문 총장은 만약 본인이 원한다고 하면 상당히 경쟁력 있는 대통령후보가 될 것임은 틀림없다”며 ‘반기문 대망론’에 다시 군불을 지폈다. 반 총장의 정치적 의사도 불분명하거니와 한평생을 외교 공무원으로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커온 그가 거친 광야와 같은 정치권에서 자생력과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일단 여야는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충청의 맹주가 다음 대선의 주역?

새누리당 친박계의 한 인사는 “반 총장은 과거 대선 출마설이 나돌았던 고건 전 총리보다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내다보았다. 2008년 대선을 앞두고 고 전 총리는 여론조사에서 한때 가장 유력한 주자로 꼽히기도 했으나 이후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실제 대선 레이스에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고 전 총리는 국무총리와 대통령 권한 대행을 지내면서 정치권력의 생리를 간접체험이라도 했지만 반 총장은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이런 점을 중시하는 이들은 ‘반기문 대망론’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는 편이다.

반 총장이든 누구든 충청권의 정서를 휘어잡는 맹주가 부상한다면 그는 차기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다. 이를 위해 충청권 정치인들도 암중모색이 활발하다. 이런 기류와 관련해 이인제 새누리당 의원은 충청권이 한국의 낡은 정치 구도를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는 “국민적 여망이나 시대적 변화에 따르자면 지금과 같은 영호남 지역패권 구도로 가서는 안 된다”면서 “패권주의로부터 자유롭고 정치적 기득권을 누리지 않는 충청이 후진적 정치 구도를 깨는 데 촉매제 기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충청의 야심과 영호남의 패권이 충돌하는 순간 한국 정치의 지형이 크게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201311호 (20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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