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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한시로 읽는 역사 |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에 매진할지니” 

이곡의 ‘김 장원에게 주는 시’를 통해 생각해보는 관리의 자세 ... 유머와 해학이 있는 집단은 자유롭고 건강하다는 증거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하면 벼슬길이 열렸다. 경기 여주준 세종대왕릉에서 열린 조선시대 과거시험 재연행사에서 장원급제자가 말을 타고 금의환향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동방삭(東方朔, BC 154~BC 93)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초등학교 때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삼년고개’ 전설이 실렸던 단원에서 그 이름을 들었던 것 같다.

산골에 살던 노부부가 있었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장에 다녀오다가 그 고개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그곳에서 넘어지면 3년밖에 못 산다는 전설이 있었기에 할아버지는 걱정에 휩싸인다. 근심이 병이 돼 결국은 자리에 눕게 됐는데 어떤 이가 그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를 찾아와 말했다. “그 고개에서 한 번 넘어지면 3년을 산다고 하니 그곳에 가서 더 넘어지세요. 한 번 더 넘어지면 6년을 더 살고, 또 한 번 넘어지면 9년을 더 살게 되는 겁니다.”

할아버지가 그 이야기에 설득돼 ‘삼년고개’로 가서 데굴데굴 굴러서 병도 고치고 장수했다는 이야기다. 삼년고개에서 여러 번 더 넘어지라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그는 할아버지에게 “삼천갑자(三千甲子) 동방삭도 여기에서 굴렀기 때문에 그렇게 장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동방삭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할머니께 동방삭 이야기를 여쭸더니 재미있는 설화를 말씀해주셨다. 동방삭이 오래 살게 된 것은 서왕모의 선도(仙桃)를 훔쳐 먹은 까닭이었다고 했다.

선도는 한 개를 먹을 때마다 3천 년을 더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도를 훔쳐 먹고 달아난 동방삭을 찾기 위해 저승사자를 보냈지만, 얼마나 변장을 잘하고 도망도 잘 치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동방삭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하던 저승사자는 꾀를 하나 냈다. 그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앉아서 숯을 물에 씻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숯을 물에 씻는 것을 보고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동방삭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그 모습을 봤다. 호기심 많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던 동방삭이 그런 광경을 지나칠 리 만무했다. “여보시오.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요?” 그러자 저승사자가 대답했다. “지금 숯을 씻어서 하얗게 만드는 중이라오.”

이런 황당한 대답이 나오자 동방삭이 배꼽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검은 숯을 씻어서 하얗게 만든다는 사람은 처음 봤소.” 그순간 저승사자는 그가 동방삭임을 알아차리고 잡아서 저승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 먹는 바람에 오래 살게 됐다는 이야기는 원래 <유양잡조(酉陽雜俎)>와 같은 잡록류(雜錄類) 책에 수록돼 있어서 중세 동아시아 사회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승사자에게 잡혀가는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나라 설화에서 유통된 소재인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동방삭은 장수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얕은 수작에 걸려서 저승으로 끌려간 안타까운 마음이 교차하는 인물로 기억됐다. 그 뒤로도 나는 이따금 책에서 그의 이름을 보거나 누구에겐가 들었고, 그의 행적을 궁금해했다.

역사적 인물로서 동방삭을 처음 본 것은 조선 전기 자료를 읽을 무렵이던 대학원생 초년 시절이었다. 그의 행적을 뒤져봤더니 <한서(漢書) 권65 ‘열전(列傳)'>에 자세히 수록돼 있었다. 이것이 동방삭과의 본격적인 첫만남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그가 오래 살았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골계적이고 해학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고, <한서>에서의 기록도 그런 측면에서 작성된 것이었다.

비판과 인간미 겸비한 지식인의 표상


▎중국 역사에서 인재를 적재적소에 가장 잘 배치했다는 평가를 받는 한고조 유방의 화상(畵像). / 사진·중앙포토
시대를 비판하거나 황제에게 간언을 올릴 때도 늘 해학이 넘치는 말솜씨와 촌철살인의 표현, 설득을 위한 논리 등을 잘 갖춰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동방삭은 한무제(漢武帝) 시절의 비판적 지식인의 표상이나 다름없었다.

<한서>의 ‘동방삭 열전’ 부분을 읽노라면 여러 사람의 흥미로운 일화가 삽입돼 있다. 그 일화들은 동방삭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 아닌데도 동방삭의 기록 속에 들어 있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의 일화를 보여준 뒤 그에 대한 동방삭의 반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한무제가 몰래 궁을 빠져나가 벌인 일도 나오고, 관도공주(館陶公主)와 동군(董君)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자세히 나온다. 이들 일화 뒤에는 어김없이 동방삭의 날카로운 비판이 이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동방삭은 비록 우스갯소리를 잘했지만 때때로 황제의 안색을 관찰해 준절히 간언하니 황제가 그의 말을 항상 채택했다. 공경(公卿)을 위시해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을 동방삭은 모두 경시하고 조롱해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사기(史記)>의 ‘골계열전(滑稽列傳)’에 수록돼 있는 걸 봐도 골계적 성향의 인물로 그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은 예부터 있던 태도였다. 동시에 그 웃음이라고 하는 것이 재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늘 시대에 대한 비판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동반한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동방삭의 골계적 성격은 일찍부터 드러난다. 그런데 <한서>의 기록을 펼쳐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한무제에게 올린 그의 글이다. 당시 한무제는 황제에 즉위한 뒤 천하에 명을 내려 뛰어난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조서를 발표한 때였다. 이 조서에 힘입어 전국의 선비들이 황도로 몰려들어 거의 1천 명에 이르렀다. 동방삭은 평원군(平原郡) 출신인데 이 소식을 듣고 황도로 올라와서 황제에게 글을 올린다.

글의 첫머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신(臣) 동방삭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수에게 길러졌습니다. 열세 살이 돼서야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겨울 석 달 동안 공부를 하니 각종 문체와 암송한 전고가 시험에 응시할 정도였습니다.”

몇 글자 되지 않는 글이지만 행간을 통해 그의 어린 시절이 매우 험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겨울 석 달 동안의 공부가 시험을 보기에 충분했다고 하니 공부에 대한 그의 집념과 집중도가 대단히 높았다는 사실 역시 짐작할 수 있다. 이 일화는 훗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서 자주 이용되는 전거(典據)가 되었다.

“벼슬길에 나아가면 공부할 시간이 줄어든다”


▎정조가 박제가 등과 함께 중용했던 이덕무의 서찰. / 사진·뉴시스
游宦皇都意未闌(유환황도의미란) 황도에서 벼슬할 뜻 다함이 없어/ 滿天風雪到燕山(만천풍설도연산) 하늘 가득 눈보라 무릅쓰고 연경에 이르렀지/ 請君且勉三冬學(청군차면삼동학) 청컨대 그대여, 삼동의 공부에 힘쓰시라/ 他日功名不放閑(타일공명불방한) 훗날 공명 이루면 한가한 시간 없으리니 -이곡(李穀), ‘김 장원에게 주는 시(寄金壯元)’(<가정집(稼亭集)> 권19)

이 작품은 고려 후기의 뛰어난 문신관료였던 가정 이곡(1298~1351)이 지은 것이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고려의 뛰어난 젊은이들이 원나라로 가서 과거시험인 제과(制科)에 응시해 이름을 날리고자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사람에게 지어준 작품이니 그런 맥락 속에서 읽어보면 흥미롭다.

원나라 황제의 조정에서 벼슬하고 싶은 청운의 뜻을 이기지 못해 눈보라를 뚫고 연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눈보라 가득한 만주 벌판을 지나 연경으로 가는 한 선비의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과거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찬탄을 한 뒤 이곡은 김 장원에게 당부한다. 겨울 석 달 동안의 기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벼슬에 힘쓰라고 했다. 훗날 관직에 나아가 근무하게 되면 일에 치여서 한가한 시간이 없을 것이고, 결국 책을 읽고 글을 배울 시간이 없으리라는 것 때문이다. 이렇게 쓸 때 그는 동방삭이 자신의 공부 시간을 지칭했던 ‘겨울 석 달(三冬)’을 사용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학문에 매진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황제가 총애하는 광대와 얽힌 이야기는 동방삭과 관련된 일화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동방삭이 자기를 소개하는 글을 올려 황제의 눈에 들기는 했지만 공거서(公車署)에 머물면서 낮은 녹봉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를 만날 방법도 없었다. 당시 대궐에는 황제의 말을 보살피는 난쟁이[주유(侏儒), 광대로 보는 사람도 있음]들이 있었는데 동방삭은 장차 황제가 그들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농사도 짓지 못하고 관직에 나아갈 수도 없고 전쟁에 참여할 수도 없는데 밥과 옷만 축내고 있으니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서 죽이려 한다고 속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떨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결국 황제가 다니는 길목에서 자신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청하니 황제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말이 동방삭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평소에 동방삭을 꾀가 있는 인물로 생각하던 차에 이런 일이 생기니, 황제는 동방삭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자 동방삭은 이렇게 말을 했다.

“난쟁이들은 키가 3척 남짓인데도 녹봉이 좁쌀 한 부대에 돈이 240입니다. 그런데 저는 키가 9척이 넘는데도 그들과 똑같이 좁쌀 한 부대에 돈 240을 받고 있습니다. 난쟁이는 배가 불러서 죽을 지경이고 저는 굶어서 죽을 지경입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크게 웃으면서 점점 그를 가까이하게 된다. 이 일화는 동방삭이 난쟁이들을 비난하거나 그들을 모함해서 쫓아내려 한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과 큰 사람의 차이를 대비시키면서 똑같은 녹봉을 말함으로써 웃음을 유발시키려 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무슨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당시 황제 입장에서는 정말 재미있는 우스갯소리였다. 이 일화는 훗날 많은 문인의 작품에 활용된다.

뛰어난 인재 찾아 중용하는 것은 지도자의 능력

長官迎送敢言勞(장관영송감언로) 장관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일을 어찌 감히 수고롭다 하랴/ 祗幸微臣晟世遭(지행미신성세조) 다행스럽게도 미천한 신하가 태평성대 만났다오./ 方朔呼飢知曠達(방삭호기지광달) 동방삭은 굶주림 외쳤으니 활달한 성품 알겠고/ 揭斯徒步自淸高(게사도보자청고) 게해사(揭奚斯)는 걸어서 출근했으니 맑고 높은 지조라./ 韶風暖拂芸香帙(소풍난불운향질) 훈풍은 따스하게 향기로운 책을 살랑거리고/ 瑞旭鮮添草色袍(서욱선첨초색포) 상서로운 햇빛 선명하게 푸른 도포에 더해진다./ 深院蕭然無一事(심원소연무일사) 깊은 내원 쓸쓸해 아무 일도 없는데/ 滿聽丹壑沸松濤(만청단학비송도) 귀에 가득 골짜기 솔바람 소리 들려온다. - 이덕무, ‘봄날 이문원(摛文院)에서 숙직하면서(춘일우직이문원, 春日寓直摛文院)’(<아정유고(雅亭遺稿 4)>, 청장관전서 제12권)

이 작품은 조선 후기 뛰어난 문인이었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글이다. 이 글은 당시 규장각(이문원은 규장각의 별칭임)에서 검서관(檢書官)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펼칠 길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정조는 당시 이덕무,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유득공(柳得恭, 1748~1807), 서이수(徐理修, 1749~1802) 4명을 검서관으로 등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서얼허통의 상징적 조처였을 뿐이어서 그들의 경제적 사정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사정을 드러내기 위해 이덕무는 두 사람을 작품 속에 끌어들였다. 한 사람은 동방삭이고, 또 한 사람은 게해사였다. 이덕무 자신의 주석에 의하면 게해사는 원나라 문종 때의 사람으로, 규장각 각료가 됐는데도 집이 가난해 걸어서 출퇴근했다고 하는 인물이다.

그가 끌어온 동방삭 이야기가 바로 그가 처음으로 황제 가까이 가게 된 일화다. 난쟁이와 키다리, 똑같은 녹봉을 해학적으로 표현해 황제의 환심을 샀지만, 그 이면에는 능력 있는 선비를 뽑았으면서도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자리에 있든 지도자의 중요한 능력은 인재를 알아보고 잘 등용하는 일이다. 작은 조직이라면 최고 책임자가 조직의 모든 일에 해박해서 처리하고 판단할 수 있지만,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최고책임자가 알 수 있는 부분은 급격히 줄어든다. 그럴 경우 자신이 모든 것을 처리하고 판단하기보다는 해당 분야에 뛰어난 인재를 찾아 그것을 처리할 수 있도록 등용하기만 하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방대한 인적 네트워크가 있어야 한다.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신장되기도 한다. 아울러 그 이면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능력이 필수적이다.

여기에 또 하나를 추가하라면 나는 웃음을 꼽겠다. 그것은 지도자뿐 아니라 구성원들 모두에게 필요한 소양이다. 적절한 유머와 해학이 흐르고 있는 집단이라면 그만큼 자유롭고 건강한 상상과 토론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지도자의 인재 등용 능력과 구성원들 사이에 넘치는 해학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멋지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동방삭이 절실히 필요하다.

김풍기(金豊起)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더불어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503호 (201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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