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 커피의 힘 종교를 넘어 세계를 잇다 

아프리카에서 재배되고 터키가 전달한 커피로 유럽은 전성기 구가… 바티칸은 한때 이교도 이슬람의 풍속으로 간주해 배격하기도 

이스탄불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21세기 정보혁명의 문을 연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전등, 음향기, 차(茶)를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묘사했다. / 사진·중앙포토
나무로 된 바닥과 큰 유리창문이 뒷배경으로 들어서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전등의 따뜻한 불빛이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다. 커튼 하나 없는 창문 밑에는 음향기기와 10여 장의 레코드가 들어서 있다. 나무 바닥 한가운데에는 가부좌를 한 젊은 청년이 앉아 있다. 왼손에 큰 잔을 들고 있다. 어둠으로 얼굴의 반 정도가 가려져 있어 표정을 읽기 어렵다. 그러나 언뜻 보아도 누군지는 전 세계의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스티브 잡스다. 1982년 12월 캘리포니아주 우드사이드 자택에서 찍은 사진이다. 백악관 대통령 전속 사진사로 유명한, 사진작가 다이내나 워커(Diana Walker)가 남긴 것이다.

위대한 파이오니아들이 그러하듯, 스티브 잡스에 관한 얘기도 사후(死後)에 한층 더 많이 나오는 듯하다. 세상을 뜬 지 4년 가까이 흘렀지만, 스티브 잡스에 대한 얘기는 전 세계의 신문·방송·잡지 어딘가에서 무게 있게 다뤄지고 있다. 아이맥(iMac)·아이포드(ipod)·아이폰(iphone)·아이패드(ipad)로 이어지는 디지털 시대의 총아를 만들어낸 인물이 바로 스티브 잡스다.

그러나 필자가 느끼는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은 21세기 정보혁명의 문을 연 ‘IT무대의 혁명아’라는 점에 국한되지 않는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경계선을 무너뜨린 21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이자 음악·영상·통신을 하나로 묶어 전 세계의 모든 이에게 전달한 21세기 ‘글로벌 문화’의 창조자라는 점이 한층 더 중요하다. 애플 나아가 스티브 잡스는 바로 ‘문화’ 그 자체다. 전 세계 모든 IT 회사가 애플 흉내내기에 성공한 듯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창조해낸 ‘애플 문화’는 따라갈 수 없다. 1982년, 27세의 스티브 잡스가 보여준, 정적으로 뒤덮인 사진 한 장은 바로 그 증거다.

“(이 사진은) 나에게 있어서의 아주 일상적 시간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독신이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찻잔, 전등, 스테레오 음향기뿐이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그런 것들이 현재 내가 가진 전부다.”

스티브 잡스가 사진을 찍고 나서 남긴 말이다. 찻잔, 전등, 음향기가 ‘나의 전부’라는 것이다. 1982년, 스티브 잡스는 윈도우를 능가하는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 개발에 착수한 상태다. 매킨토시(Macintosh)다. 성공을 확신하던 잡스는 1982년 타임지(誌)의 ‘올해의 인물’에 자신이 선정될 것이라 믿었다. 디지털 역사를 바꿀 자신만만한 모습이 캘리포니아 사진의 이면에 드리워져 있다.

스티브 잡스와 미니멀리즘


▎커피는 종교의식에 쓰인 성스러운 음료이기도 하다. / 사진·중앙포 토
스티브 잡스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떠오른 것은 <뉴욕타임스>의 비디오 요리프로그램인 ‘미니멀리즘(Mini malism)’이다. 대략 5개 이내의 재료로 만들어낼 수 있는 즉석요리다. 소재를 극소화한 뒤, 간단히 요리해서 먹을 수 있는 요리다. 원래 미니멀리즘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새로운 예술 이념에 해당된다. 극소주의, 최소주의 정도로 풀이될 수 있을 듯하다. 그림·음악·건축에 통용되던 세계관으로, 쓸데없는 장식이나 무기능적인 것은 빼고, 가장 간단하게 쉽게 표현되는 극소, 최소주의 예술이다.

스티브 잡스가 보여준 ‘나의 전부’는 바로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가 아닐까 싶다. 단순, 간단으로 특징지워지는 미니멀리즘이다. 그러나 기능이나 가격에 가치를 두는 식의 경제적 관점의 ‘싸구려’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삶을 의미 있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인간의 품격을 높이는 지름길로서의 미니멀리즘이다. 유일한(The Only), 최고(The Best)로서의 미니멀리즘이다. 눈으로서의 전등, 귀로서의 음향기, 혀로서의 차(茶)가 필요한 전부다.

아이폰은 설명서가 따로 없다. 주문하면 그냥 디바이스 하나만 ‘달랑’ 배달된다. 전원과 기동 버튼, 음향 조절기가 아이폰 외부에 붙어 있을 뿐이다. 이미 나온 지 8년째이기에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겠지만, 2007년 6월 29일 첫 등장한 아이폰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트랜지스터 라디오, 선풍기 하나에도 사용설명서가 따라 붙던 시대다. 스티브잡스는 그 같은 관념을 어제의 세상으로 돌린다. 25년 전에 찍힌 27세 청년의 방안 모습은 바로 나만의 삶의 스타일을 글로벌 문화로 창조해나가는 ‘전조(前兆)’였다고 볼 수 있다.

찻잔, 부연하자면 차가 스티브 잡스의 ‘나의 전부’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흥미롭다. 앞서 혀로서의 차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차는 미각으로서만이 아닌 인간의 오감과 육감을 지배하는, 입체적 성격의 기호품이다. 차는 인류 모두가 받아들이는 문화, 나아가 문명의 범주 속에 들어간다. 문화와 문명은 서로 공존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그 방향은 결코 뒤가 아닌 앞으로 나아간다. 혁명·개혁·발전·개선… 그 어디쯤을 오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주목할 부분은 문화와 문명의 차이점이다. 문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문명은 제한된 곳에서만 만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아프리카 정글이나 인도네시아 식인사회에도 문화는 있다. 그러나 문명은 없다. 문명은 인간을 품위 있고, 아름답게 하고, 모두가 흉내 내고 입에 올리고 싶은 부분이다. 태국이나 남미에서 성행하는 닭싸움을 문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문화로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글로벌 차원의 가치로 받아들일 만한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재미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살생이기 때문이다. 개고기를 문화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해되지만, 문명적 관점에서 세상 모두에게 보편화하려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남의 극단적인 예를 통해 합리화 하려는 자세는 자신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 열등문화의 증거다.

차는 문화이자 문명을 통합한 인류 지혜의 총아에 해당된다. 차를 한잔 마시는 것 그 자체만이 아니다. 차를 마시기 전후의 과정과 풍경을 통해 인간의 품격을 한층 더 높일 수 있다. 물론, 반드시 차를 마셔야만 문명화된다는 말이 아니다. 차만이 아니라, 커피·와인·디저트 같은 것도 문화이자 문명에 들어 간다.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극단이나, 생존을 위해 위장을 채우는 서바이벌 문화가 아니다. 풍부한 인생과 평화로운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는, 사색하고 공유하는 시간으로서의 문화와 문명이다. 스티브 잡스가 ‘나의 전부’ 중 하나로 찻잔을 손꼽은 이유는 바로 그 같은 배경 속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유럽 커피의 원형은 터키 커피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커피전문점. 커피에 생크림을 올려 마시는 비엔나 커피는 터키 커피를 원류로 한다. / 사진·유민호
터키는 문화와 문명으로서의 차를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의 중심에 해당된다. 유명한 터키 차(Turkish Tea)다. 터키에서 차는 차이(Cay)로 발음된다. 중국인들은 중국에서 전해진 문화, 문명이라 말하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인도와 중국 그 어디쯤에서 탄생된 것이 차다.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다리 역할을 해온 터키는 중국산, 인도산 차를 유럽에 넘기는 과정에서 홍차(紅茶) 대국으로 성장한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배경으로 한 호리병 같은 잔에 가득 채워진 홍차야말로 터키의 자화상이자 상징에 해당된다.

스티브 잡스가 지칭한 ‘나의 전부’로서의 잔이 커피가 아니라 차를 위함이란 점이 흥미롭다. 스티브잡스가 동양사상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커피가 아닌 차에 방점을 둔 이유를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다른 배경도 하나 찾아낼 수 있다. 스티브 잡스의 유전적 배경이다. 스티브 잡스는 입양아다. 태어나자마자 캘리포니아 거주 아르메니아 출신의 가족에 입양된다. 스티브 잡스의 원래 아버지는 시리아 출신으로 당시 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있던 사람이다. 시리아는 현재 IS로 불리는 이른바 이슬람국가의 현장이다. 지리적으로 볼 때 터키 동남쪽과 국경을 접한 나라가 시리아다. 시리아는 터키와 거의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다. 마시는 차의 경우, 터키 차를 대신해 맛이 한층 강한 시리아 차(Syrian Tea)가 일상화돼 있다. 이름만 바꿨을 뿐 사실상 거의 똑같다. 터키에 거주하는 시리아인들에게 물어봤지만, 터키인과 마찬가지로 보통 하루에 평균 10잔 정도는 마신다고 한다. 스티브 잡스가 들으면 화낼지 모르지만, 커피를 대신해 차를 ‘나의 전부’ 중 하나로 잡은 이유를 유전적 차원에서 설명해낼 수 있을 듯하다.


▎이슬람 술탄 체제는 유럽의 귀족들을 자극하는 선진문화의 모델이 됐다. 술탄과 주변 귀족들의 커피문화를 유럽의 귀족도 흉내 내기 2 시작한다. / 사진·유민호
흥미롭게도 터키는 차만이 아니라 문화와 문명으로서의 커피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기점에 해당되는 곳이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커피를 이해하는 첩경(捷徑)으로 꼽을 만한 나라가 바로 터키다.

에스프레스의 원조인 이탈리아나, 비엔나 커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이슬람의 나라인 터키가 원조다. 터키 커피는 원두분말기의 가장 오른쪽 버튼에 해당되는, 가장 세밀하게 간 커피에 해당된다. 에스프레스보다 한층 더 가늘게 갈아서 만든, 세밀한 후춧가루 수준에 준하는 것이 터키 커피의 원료다.

필자를 포함한 한국인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터키 커피는 쉽게 즐기기 어려운 음료다. 작은 잔이지만, 한 잔을 다 마시기가 어렵다. 너무나 강하다. 향도 독특하다. 터키 커피는 가루를 뜨거운 물에 직접 넣어 서서히 저어가면서 만든다. 1945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발명된, 강력한 증기압력을 통해 커피 엑기스만 추출하는 에스프레소와는 격이 다르다. 원두가루 그 자체를 끓여서 전부 마시는 식이다. 에스프레소도 엄청 강하지만, 세밀한 원두가루와 함께 마시는 터키 커피는 머리를 뒤흔들어놓는다. 과학적 근거와 무관한 느낌이지만, 원두를 필터로 걸러 마시는 이른바 아메리칸 커피의 카페인 효과지수가 50이라면, 에스프레소는 100, 터키 커피는 200쯤에 해당되지 않을까?

바티칸, 커피를 금지하다


▎예멘의 이슬람 종파 수피의 이맘 (종교지도자)들이 즐기는 커피. 카페인 성분의 중독성이 강한 커피는 종교적 성격에서 출발했다. / 사진·유민호
터키 커피가 세계 역사상 의미를 갖는 이유는 유럽 커피의 원형이 바로 터키에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터키가 없었다면 유럽 커피의 역사도 지금과 상당히 달라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터키 이스탄불은 유럽에서 즐기는 커피 문화의 원적지(原籍地)에 해당된다.

터키 커피가 유럽에 들어간 것은, 크게 봐서 두 개의 경로를 통해서다. 이탈리아 베니스와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시기는 17세기다. 터키의 전신인 이슬람의 대형(大兄), 오스만투르크가 전달자다. 1453년 기독교국가인 비잔틴 제국이 무너진다. 베니스는 비잔틴을 이은, 새로운 비즈니스 파트너인 오스만 튀르크를 통해 커피문화를 수입한다.

커피(Caffe)라는 말이 이탈리아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585년이다. 16세기 오스만튀르크는 21세기 중국에 해당된다. 인간에게 필요한 세상의 모든 물건이 오스만튀르크를 통해 거래된다. 비잔틴이 갖고 있던 동방무역권이 술탄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동(東)의 향신료를 서(西)에 되파는 중개무역을 주도한다. 유럽의 무역권을 장악한 베니스는 당시 오스만 튀르크의 현지 중개상과 같은 존재였다.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이 이슬람 공격에 맞선 지원을 요청할 때 베니스는 응원단을 늦게, 그리고 소규모로 파견한다. 형제국인 비잔틴이 넘어가더라도 오스만튀르크를 통해 더 큰 경제·정치적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고 계산한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비잔틴 대제국의 몰락 후 오스만튀르크와 베니스의 교류와 교역은 한층 더 활발해진다. 커피는 그 같은 과정 속에서 넘어 들어온 이국 문화다.

주목할 대목은 커피가 갖는 종교성이다. 모든 음료가 그러하듯 커피 역시 종교적 성격이 강하다. 학자에 따라 이설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커피의 원산지는 현재의 에티오피아다. 일설에 따르면, 커피 잎을 먹은 양들이 활발해지고 번식력도 높아진다는 것 알게 되면서 마시게 됐다고 한다. 불에 익힌 원두를 끓는 물에 넣어 마시는, 옥수수, 차와 비슷한 음료가 에티오피아식 커피다. 이후 커피는 에티오피아를 통해 예멘으로 건너간 뒤, 오스만튀르크 술탄에게 선물로 전해진다. 예멘은 이슬람 신비주의로 유명한 수피즘(Sufism)이 번성했던 곳이다. 커피는 사원에서 종교의식을 행하는 도중에 마시던 성스러운 음료다.

오스만튀르크의 술탄은 당초 커피를 에티오피아나 수피즘에 물든 예멘의 미개한 문화로 받아들인다. 아무리 입에 맞아도 노예들이 좋아하는 음식일 경우 거리를 두게 된다. 커피의 확산을 금지한다. 그러나 커피의 중독성이 그러하듯, 한번 맛을 들인 사람들은 잊지 못하게 된다. 술탄을 비롯한 권력자들도 입으로는 금지하지만, 자신들만의 식후 음료로 커피를 애용한다. 커피문화가 이스탄불에 퍼져나간다. 베니스에 전달된 것은 그 같은 배경 하에서 이뤄진 것이다. 당연히 로마 바티칸도 커피를 이교도 무슬림의 풍습으로 보면서 금지한다. 그러나 아무리 신의 뜻을 집행하는 성전(聖殿)이라 해도 사람들의 입맛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가장 오래된 커피전문점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한쪽에 있는 유럽 최초의 대중 커피전문점 플로리안. 베니스에 들리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세계적 명소다. / 사진·유민호
무슬림 풍습인 커피를 멀리하라는 얘기는 바하가 남긴 코믹 오페라 [커피 칸타타(Coffee Cantata)]를 통해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아버지가 젊은 딸에게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하자, 딸은 ‘1천 번의 키스보다 커피가 더 달콤하다’고 항변한다. 결국 1600년 당시 교황 클레멘트 8세는 커피금지론을 해제한다. 입맛도 입맛이지만, 커피를 수입·수출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돈이 유럽에 흘러 넘친다는 이유가 작용했다. 종교적 의미에서 시작된 커피지만, 이슬람·기독교 모두가 받아들이는 종교를 초월한 공통음료로 정착된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커피전문점은 베니스에 있다. 오스만튀르크나 예멘에도 있었겠지만,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없다. 산마르코 광장을 중심으로 왼쪽에 위치한 카페 플로리안(Caffe Florian)이 가장 오래된 커피전문점이다. 커피라는 말은 터키어로 커피를 의미하는 ‘카베(Kahve)’에서 온 것이다. 커피나 간단한 음료와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카페(Caffe, Cafe)라는 말은 커피를 파는 곳이란 의미다. 따라서 ‘커피=카페’인 셈이다. 커피를 중심으로 팔던 곳이 카페지만, 나중에 와인·맥주·음식도 팔게 된 것이다. 플로리안이 탄생된 것은 1720년이다. 로마의 패션 1번지에 해당되는 콘도티(Via Condotti) 거리에 위치한 ‘안티코 카페 그레코(Antico Caffè Greco)’는 플로리안에 이어 둘째로 오래된, 1760년에 문을 연 커피전문점이다.

플로리안은 유럽 역사나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는 관광명소다. 산마르코 광장 중심에 위치한, 베니스 역사의 최전선에 해당되는 곳이다. 바닷물이 밀려드는, 이른바 아쿠아알타(Aqua Alta)에 관한 해외 토픽 기사가 있을 때 사진 속의 어딘가에 반드시 끼어서 등장한다. 바로크 시대의 모습을 재현한 벽화와 실내 장식이 인상 깊다. 카푸치노 한 잔에 ‘무려’ 1만원이나 하지만, 기념으로 한번쯤 찾아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베니스인들처럼 점심 때에 들러 카운터에서 서서 마실 경우 가격은 음료·음식 모두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지난해 말부터 연초에 걸쳐, 필자는 이스탄불과 베니스를 오가면서 커피가 갖는 문화·문명사적 가치와 의미를 비교해봤다. 먼저 유럽 커피의 원조인 터키 커피부터 살펴보자. 터키 차에 비할 때 터키 커피는 크게 평가절하된 상태다. 터키 차, 즉 홍차는 터키 어디를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초면의 터키인 이라도 대화를 하는 동안 터키 차가 자연스럽게 ‘무료’로 제공된다.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에 손을 갖다 대면서 예의를 표하는 이슬람식 예법과 함께 검붉은 홍차가 ‘신속하게’ 준비된다.

그럼, 커피는 어떨까? 필자의 경험이지만, 터키인 가운데 커피를 권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공장소도 극히 제한돼 있다. 이스탄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확인한 것이지만, 관광객이 모이는 중심가에 커피점이 있을 뿐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아예 없다. 집에서 직접 끓여 마시는 사람은 많지만, 밖으로 나와 일부러 커피를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유럽 커피의 원조가 커피를 멀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싼 가격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보통 홍차의 경우 한 잔에 1리라(500원) 정도이지만, 커피는 5리라에 육박한다. 커피는 주문한 뒤부터 만들어 마시는 전형적인 슬로푸드(Slow Food)에 속한다. 홍차는 주문 즉시 곧바로 마실 수 있다.

이스탄불에서 만난 커피 운명감정


▎터키 커피를 만드는 청동 도구. 커피를 만드는 모든 도구가 청동이란 점도 터키 커피의 특징 중 하나다. / 사진·유민호
그러나 터키인들과 대화를 통해서, 가격이나 신속성이 커피의 일상화를 가로막는 이유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됐다. 커피가 갖는 역사적인 ‘특별함’도 중요한 이유다. 전통적으로 터키 커피는 비교적 특별한 사람들이 즐기는 고급 문화로 받아들여진다.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술탄이나 주변의 권력자, 나아가 이슬람 고위성직자만이 즐길 수 있는 음료라는 성격이 강하다. 커피 원두 자체가 터키에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유럽 커피의 기점이 이스탄불인 것은 사실이지만, 터키의 커피는 대중성과 무관한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베니스가 주의 깊게 바라봤던 터키 커피는 술탄과 그 주변 사람들이 즐기던 ‘특권’의 하나였다. 터키인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 대중문화로서의 커피가 아니다. 사실 커피가 이슬람 교도 대부분이 즐기는 대중문화였을 경우, 거꾸로 베니스인의 눈밖에 났을 가능성이 높다.

이스탄불의 터키인들에게 원조 터키 커피를 마실수 있는 곳이 어딘지 물어보면 십중팔구 똑같은 대답이 나온다. 탁심(Taxim)이다. 2013년 5월, 터키 젊은이들의 반정부 데모로 전 세계에 유명해진 탁심 광장이 있는 이스탄불 신시가지다. 탁심광장에서 큰 길을 따라 서쪽으로 15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터키 커피 전문 거리다. 가장 많은 사람이 언급하는 커피점은 ‘메레크렐 카베시(Melekler Kahvesi)’다. 천사의 커피란 의미다.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외국의 유명인이 오면 반드시 들르는 명소이기도 하다. 터키 정부가 세계 무형문화제로 신청한 ‘카베 팔리(Kahve Fali)’로도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카베 팔리란, 커피 운명감정을 의미한다. 커피를 통해 인간의 내일을 가늠하는 점(占)이다.

메레크렐에 들른 것은 오후 시간이다. 이슬람의 문화는 밤에 이뤄진다. 천일야화(千一夜話)로 불리는 [아라비안나이트]가 그러하듯 뜨거운 낮을 피한 선선한 밤이 삶의 중심시간으로 활용된다. 메레크렐도 늦은 밤까지 사람이 몰릴 뿐, 낮에는 텅 빈 절 같은 느낌이다. 터키 최고의 커피집답게 실내장식이나 규모도 남다르다. 오래된 흔적이 묻어나고, 터키 유명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사진도 곳곳에 걸려있다. 밤에 안 가봤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분위기는 사색을 위한 조용한 공간으로 와 닿는다. 터키에서 ‘나르길레(nargile)’, 인도에서 ‘후카(Hookah)’라 불리는 물담배 전문집에서 느끼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이스탄불 중앙 바자르(시장)의 커피 전문상점.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에는 하루 5천명가량의 손님이 몰린다고 한다. / 사진·유민호
터키 커피와 함께 커피 운명감정까지 신청했다. 가격이 대략 40리라로 2만원 정도다. 터키인들이 보면 엄청 비싼 가격이다. 커피를 주문하자 바로 옆 작은 주방에서 커피를 만들기 시작한다. 구석에 있던 운명감정원도 자리에 앉았다. 이스탄불에서 영어가 가능한 희귀한 남성 감정원이라고 한다. 점이란 것이 그러하듯, 커피 운명감정의 대상은 서민이다.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커피를 통해 미래를 읽는, 일종의 의식이다. 따라서 영어가 가능할 정도의 ‘고학력자’가 운명감정사로 나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여성이 아닌 남성이 감정사로 나선다는 것도 어색하다. 진짜 터키식 운명감정을 원한다면, 터키어로 이뤄지는 나이 많은 여성과의 만남이 한층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커피 운명감정은 커피를 마신 뒤 남은, 잔 속의 커피 가루의 흔적을 읽으면서 진행된다. 특정 형상으로 나타난 커피의 흔적을 감정원이 분석하면서 상대방의 운명을 점친다. “6월의 건강 위기를 넘기면, K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물적·정신적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알 듯 모를 듯한 결론과 함께 운명감정은 3분 만에 끝이 났다. 다른 도구를 사용하거나 손금도 읽지 않은 채, 오직 커피잔만을 보면서 미래를 예측해낸다.

‘멋’과 ‘문화’를 파는 스타벅스


▎스타벅스는 증기압축 커피를 통해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 사진·중앙포토
터키 커피와 대중성과의 관계는 터키 커피와 운명감정을 경험하면서 주목한 부분이다. 터키 커피는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먼, ‘특별행사’에 들어가는 것인듯하다. 터키 커피보다 미국발 스타벅스나 맥도날드커피가 터키 중심가의 곳곳을 차지하고 있다. 대중들이 즐기는 음료는 커피가 아닌, 홍차다. 베니스에 처음으로 생긴 커피전문점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베니스의 보통 시민을 위한 음료였다는 점은 이스탄불의 커피와 크게 구별되는 ‘문화적 현상’이다.

사실 베니스는 특별계층이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시민 민주주의 체제로 유지돼왔다. 베니스 1100년의 역사는 권리와 의무를 바탕으로 한, 도시공화정 책임제 민주주의의 현장이기도 하다. 시민과 노예를 확실히 구분한 뒤 시민이 될 경우 거기에 맞는 세금과 권리가 부여된다. 특권을 주장하면서 나만의 권위를 강조할 경우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극형에 처해졌다. 베니스 정치체제의 대통령에 해당되는 ‘돗지(Dodge)’도 단두대의 칼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스탄불의 커피는 그 같은 배경하에서 베니스에 상륙해 한순간에 대중음료로 정착된다. 특권이나 종교를 넘어선, 대중들의 기호품으로 피렌체와 로마로 퍼져나간다. 대중 소비품이기에 값도 저렴하다.

대중을 기반으로 한, 값싼 커피는 문화를 넘어서 문명으로 발전될 수 있다. 터키 나아가 에티오피아나 예멘은 커피문화의 원조다. 그러나, 커피를 문명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이탈리아 베니스다. 원두가루를 넣어 끓여 마시는 수프와 같은 커피가 아니라, 필터를 통해 걸러내거나 에스프레소를 통해 커피의 정수만을 마시는 식의 문화가 이탈리아에서 개발, 확산된다.

미국에서 탄생된 스타벅스는 현재 전 세계 커피애호가가 즐겨 찾는 글로벌 커피의 대명사다. 2014년 11월 기준으로 전 세계 68개 국에 무려 2만 1160개 매장이 들어섰다고 한다. 스타벅스의 성공비결은 여러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가장 간단하고 분명한 것은 증기압축 커피라는 것이 성공의 가장 큰 열쇠다. 아메리칸 커피라 불리는, 필터에 걸러 마시는 묽은 커피가 아니다. 강한 증기압을 통한 강한 커피 엑기스가 스타벅스의 성공비결이다. 이탈리아 에스프레소를 모방했지만, 미국이 자랑하는 대규모 글로벌 체제를 통해 한순간에 세계 커피를 주름잡았다.

그러나 맛으로서의 커피가 스타벅스의 전부는 아니다. 스타벅스는 맛으로서의 커피문화를 기반으로, 멋으로서의 21세기 청년문화를 커피매장 안에 장식한다. 고급의자와 무료 인터넷, 신문·잡지가 비치된 ‘모두의 거실’로 진화된 것이 스타벅스 매장이다. 스타벅스가 들어선 곳에는 청년들이 모이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생겨난다. 시애틀에서 탄생된 미국의 커피 문화는 이후 글로벌 문명으로 자리 잡는다. 미국 문화를 넘어선, 전 세계 청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로벌 문명으로 정착한 것이다. 유럽 커피의 원조인 이스탄불의 터키 커피가 도시 한복판의 고급카페로 명성을 이어가는 동안, 커피 후진국인 이탈리아와 유럽 나아가 미국은 글로벌 차원의 커피문명을 새롭게 창조해간다.

흥미롭게도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스타벅스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다. 반대로 베니스에 커피를 전해준 터키는 스타벅스 매장이 넘쳐나는 이슬람 내의 유망한 시장으로 떠올랐다. 문화와 더불어 문명수준으로 발전된 이탈리아 커피가 스타벅스의 공격권에서 벗어난 데 비해, 문화는 먼저 시작됐지만, 문명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없었던 터키 커피는 스타벅스에 간단히 점령된다. 시민사회를 기초로 한 대중음료로서의 커피 유무가 원조인 터키 커피와 후진국 이탈리아 커피의 운명을 가른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커피 한잔 속의 가치를 찾아서


▎일본식 커피와 서비스. 일본은 사이폰을 이용한 증류식 커피를 애용한다. 유럽의 귀족문화를 흉내 낸 가정부를 통한 커피문화가 특징이다. / 사진·유민호
한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커피 소비국이다. 2013년 4월 서울에서 커피 엑스포가 열렸고, 서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커피점을 가진 곳이라고 한다. 대략 1만여 개 커피점이 서울에 집중돼 있다(2013년 기준). 커피점이 많아질수록 문화대국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양적 팽창을 과시하는 서울의 커피는 보다 높은 문화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반영한다고 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커피 문화는 한국에 넘치지만, 한국인 스스로가 창조해 낸 커피문화가 전혀 안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한 대중사회다. 새로운 커피문화를 만들어낼 주변환경은 충분하다. 일본에서 탄생된 캔커피나, 증기압과 진공관을 활용한 사이폰으로 걸러 마시는 슬로커피 같은 독자적 커피문화가 전무하다.

굳이 거창하게 찾고 개발할 필요는 없다. 필자의 생각이지만, 탑골공원 근처에서나 볼 수 있는 200원짜리 자동판매기 커피도 한국형 커피문화의 대명사로 키울 수 있을 듯하다. 설탕 맛이 반 이상인 미지근한 한국형 식후 커피를 좀 더 세련되게 만들어 ‘코리안 커피’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는 것은 어떨까? 커피 자체만이 아니라 커피를 둘러싼 입체형 문화도 중요하다. 코리안 커피가 제공되는 곳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만의 특별한 문화다. 내부장식은 스타벅스형이지만 노인들에게만 제공되는, 60대 바리스타가 제공하는 장수만세 코리안 커피전문점은 어떨까?

스티브 잡스가 말한 ‘나의 전부’는 세 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류 모두가 공감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해주었다. 화장실이 다섯 개나 된다고 자랑하는 탤런트, 재벌에 대한 비방과 재벌 2세에 대한 결혼 스토리로 날과 밤을 새우는 드라마, 1천 달러가 넘는다는 캐나다산 오리털 외투 경쟁에 빠진 청년들…. 남을 의식한 전시형, 경쟁형 삶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전혀 낯선 문화이자 문명으로서의 라이프스타일이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찻잔은 차만으로 한정된 것이 아닌, 커피도 포함된 의미일 것이다. 종교를 넘어선 동과 서의 합작품으로서의 커피, 문화를 넘어서 문명으로 발전돼 온 커피, 시민사회를 바탕으로 한 대중사회의 상징물로서의 커피…. 커피 한잔에 새겨진 수십, 수백 가지의 가치와 의미가 스티브 잡스가 남긴 사진 한 장 속에 선명히 드리워져 있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 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503호 (2015.0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