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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 예수의 위대한 질문⑱ 선한 사마리아인과 영생의 길 -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누가복음 10장 36절) 

일상에서 스치는 모든 이가 우리의 이웃… 의로운 이타심을 삶의 척도로 삼아야 

배철현 인문학 인재양성기관 건명원(建明苑) 원장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기준과 원칙을 제시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평판, 배움 정도, 정직성 등이 떠오르지만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그 사람이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만일 당신이 지하철에서 짐을 지고 위태롭게 계단을 내려오는 할머니를 만났다고 가정하자. 당신에게 선택의 여지는 있다. 먼저, 모른 체한다. 사실 모른체하기보다는 그런 상황을 상상해본 적이 없고, 할머니를 도와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지나친다. 혹은 휴대폰에서 게임을 하거나 서핑을 하느라 못 볼 가능성이 더 많다. 혹은 그 할머니를 쳐다보긴 하지만 거들지는 않는다. 내가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다가가서 거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과학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이기적인 유전자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이라고 착각한다. 그 마주친 사람이 다윈교(Darwinism)를 신봉하는 영국 옥스퍼드 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라고 생각해보자. 다윈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아무런 이유 없이 선행을 하지는 않는다. 양심은 자신과 자기와 관련된 가족과 공동체의 보전을 위해 일종의 해상보험처럼 발동되는 오랫동안 학습되고 진화된 습관이다. 이런 행동은 도킨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기적 유전자’를 잠시 억제하고 나중에 자신의 행동에 걸맞은 대가를 바라면서 행동하는 호혜적 이기주의(reciprocal altruism)의 한 예다. 양심은 그 행위자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공포를 유발하지 않기 위한 생물학적인 욕망이다. 양심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다시 만나서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을 할머니니까 그냥 모른척하는 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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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호 (201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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