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로마를 멸망으로 이끈 검투사의 저주 

시민 결속시키고 즐겁게 하는 초대형 살상극으로 변질되면서 건국 정신 황폐화… 21세기 한국에서도 다수에게 지목되는 사람이 한순간에 검투사 명단에 올라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콜로세움을 세운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로마의 대형 건축물 건립에 나선 황제다.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바닥을 긴다고 한다. 학생·청년·장년·노인 할 것 없이 모두 오늘에 매달리면서 내일을 상실하고 있는 듯하다. 둥둥 떠다니며 방향도 없이 흘러간다. 100세 장수를 잘 보내기 위한 퇴직자의 조건으로 최소한 ‘억’ 단위의 노후자금이 필요하다는 말도 들린다. 그 같은 조건을 갖추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은 걱정과 불안으로 내일을 맞이한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정신적 도피처는 있다. 검투사(글래디에이터, Gladiator)는 그중 하나다. 자신을 대신해 피를 흘려줄 현대판 검투사다. 스스로의 행복지수를 끌어올리지는 못하지만, 남의 피와 불행을 통해 상대적으로 우위에 설 수도 있다. 행복감을 증폭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서의 검투사다.

21세기 스타일의 검투사는 노예 같은 ‘을’에 국한되지 않는다. 민주주의 체제의 다수를 점하는 을의 반대편에 선 ‘갑’이 검투사 명단에 올라간다. 자신이 을이라 호소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다수의 을이 갑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아레나(Arena, 원형경기장)로 내던져진다. 신문·방송·인터넷을 통해 보도되는 지도급 인사들의 이전투구나 막장 스토리가 그 같은 검투사들의 실황기다. 행복지수 하한가의 시민들을 위한 감칠맛 나는 흥밋거리다. 수뢰 사실이 드러나면 자살하겠다고 외치는 정치인, 이혼과 재산 문제로 고민한다는 재벌 딸, 수십 년간 가면을 뒤집어쓰고 살아온 잉꼬부부, 제자 성희롱으로 인생 3막을 장식한 60대 국립대 교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과 연령대의 호화판 검투사가 등장한다.

이들이 뿌리는 스토리가 피범벅이 될수록 나의 행복지수는 ‘상대적’으로 올라간다. 갑으로서의 검투사들의 인생과 주변 전부가 깡그리 벗겨진다. 아레나의 관객들에게 ‘그놈 나보다도 더 엉망이네!’라는 자신감을 안겨준다. 막장 스토리가 많아질수록 을의 상대적 행복감은 더해진다. 갑에게 말 한마디 못하는 평소의 억눌린 심정이, 개판 싸움이나 막장 스토리를 통해 시원하게 치료된다.

영화나 텔레비전으로 본 검투사는 피를 불러일으키는, 야수의 본능을 일깨우는 자극제로 와 닿는다. 검투사 자체가 한국이나 동양의 역사나 문화와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0년도에 제작된 러셀 크로우 주연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처럼, 영상물을 통한 이미지가 인식의 대부분일 듯하다. 필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로마 바티칸 박물관은 그 같은 기존의 관념을 바꾸게 된 원점에 해당된다.

15년 전 바티칸 박물관에 들렀을 때 로마 관련 전시관에서 검투사의 흔적을 발견했다. 검투사의 모습이 새겨진 2차원 조각과 함께 짧은 묘비명이 새겨져 있었다. 묘비명 내용은 대략 ‘죽음으로서 신을 찬미한 검투사’라는 식으로 이뤄져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칼싸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신으로 연결되는 신성한 의식이란 사실을 알게 된 첫 출발점이다.

이후 책을 통해 검투사의 기원이 죽은 자를 기리는 ‘군무(軍舞)’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쟁에서 숨진 장군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기리는 ‘무(武)를 통한 기도’로서의 검투사다. 노예의 죽음은 애완견의 죽음보다도 낮게 취급되던 시대다. 중무장을 한 병사가 벌이는 춤인 동시에, 무덤을 지키는 호위병으로서의 의식이 검투사 이벤트의 기원이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검투사 관련 기록은 기원전 264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형제가 부모의 장례식을 추모하는 과정에서 검투사를 고용했다고 한다.

5만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콜로세움을 무대로 한, 찌르고 자르는 혈투극이 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뒤다. 피에 굶주린 인간들의 호기심이 만들어낸 전대미문의 집단 혈투극이 로마 한복판에서 거의 매일 이뤄진 것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바로 그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한, 피에 초점을 맞춘 21세기의 또 다른 엔터테인먼트에 해당된다.

검투사와 검은 여신 아르테미스의 기구한 운명


▎헤라클레스는 모든 검투사가 수호신으로 여기는 힘의 상징이다. 헤라클레스와 비슷한 이름을 갖는 것이 검투사들의 희망이기도 했다.
검투사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바티칸 박물관에서의 새로운 경험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유적이 전시된 박물관에서 특히 눈여겨 보는 것이 검투사 관련물이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그리스·로마 유적을 풍부하게 갖고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2000년 전의 유물·유적이란 점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기독교가 지배한 유럽역사의 ‘만행(蠻行)’도 이유 중 하나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정착된 것이 서기 4세기다. 이후 유럽은 14세기 말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일신교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로마 관련물이 컬트(Cult, 사교)로 규정되면서 의도적으로 파괴·변형된다. 그리스·로마는 신화와 다신교를 근간으로 한 체제다. 일신교의 기독교 정신에 어긋나는 이교도 체제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하드(Jihad)보다 더 강력한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그리스· 로마 문화가 사탄의 흔적으로 규정된다.

그리스·로마는 인간의 모습 자체를 미의 근원이라 본다. 남성 조각상의 경우 성기(性器)를 노출하는 것이 당연하다. 로마 교황은 다르다. 저속한 야만인의 문화라 비난하면서 성기 주변을 나뭇잎으로 가리도록 명령한다. 남성 조각상의 성기가 나뭇잎으로 가려져 있다면 로마 교황의 입김이 서린 결과라 보면 된다.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는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다. 온몸이 유방으로 장식된 검은 얼굴의 신으로, 양 팔을 벌려 상대를 안으려는 모습으로 똑바로 서 있다. 유럽 공동묘지 어디에 가도 쉽게 볼 수 있는, 사슴과 함께 있는 짧은 치마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원조에 해당되는 존재다.

기독교에 의해 말살된 검투사 관련 유물·유적


▎이탈리아 남부 폼페이에서 발견된 검투사 아레나의 벽화. 콜로세움에서는 하루에 세 차례 초대형 이벤트가 진행됐다.
필자는 그리스·로마 박물관의 수준을 유방으로 뒤덮인 아르테미스의 유무로 판단한다. 다산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보유하고 있다면, 규모와 관계없이 세계 최고 수준의 박물관에 들어간다. 아무리 크고 번듯해도 검은 여신 아르테미스가 없다면 2류에 그친다고 믿는다. 이유는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서 풍요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거의 대부분 파괴됐기 때문이다. 동방에서 넘어온 컬트의 잔해란 명분과 함께 전부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풍만한 검은 여신을 가진 박물관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검투사도 검은 여신 아르테미스와 똑같은 상황에 직면했다.

기독교는 로마에서의 검투사 이벤트를 금지하는 데 앞장선 일등공신이다. 다신교를 근간으로 하는, 로마의 신앙에 반하는 종교가 기독교다. 일신교를 믿는 과정에서 신의 대열에 들어선 로마 황제를 부정한다. 서기 2세기는 로마의 최전성기다. 로마 대제국이 진출하는 곳에는 ‘반드시’ 아레나와 공중 목욕당이 들어선다. 당시 로마 전역에는 콜로세움을 비롯해, 무려 186개의 아레나가 세워졌다. 로마가 아닌, 현지 주민들이 비공식으로 만들어낸 아레나도 86개가 존재했다. 아레나 하나의 수용 인원은 최소한 1만 명 정도다.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기 전 이들 일신교도는 로마의 적으로 처형된다. 아레나에 끌려와 동물의 밥이 되거나, 기독교 신자 서로를 죽이는 식의 공개처형이다.

아레나 이벤트의 일정은 오전, 대낮, 해가 넘어가는 시기로 삼분된다. 실력 있는 검투사의 이벤트는 해질 무렵에 이뤄진다. 아침 일찍 이뤄지는 이벤트는 동물의 처형이나, 동물을 통한 기독교 신자 처형이나 화형(火刑)이다. 많을 때는 1천 명 이상이 한순간에 아레나에 던져진 채 로마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즉시 검투사 이벤트를 불법시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기독교도들은 검투사는 죽어서도 지옥으로 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로마 변방에서 검투사 이벤트가 벌어지기는 하지만, 검투사 희망자가 한순간에 줄어든다. 결국 이벤트만이 아니라, 검투사에 관련된 모든 유물 ·유적도 기독교에 의해 말살된다. 풍요의 신 아르테미스처럼 컬트와 악의 상징물로 전락한다.

검투사, 나아가 아르테미스와 같은 반(反) 또는 비(非) 기독교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터키의 박물관만한 곳도 없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는 물론, 하다못해 시골의 작은 박물관에 가도 중세 로마 교황이 싫어할 유물·유적이 즐비하다. 현대의 터키는 두 개의 권역으로 나뉜다. 유럽권에 들어가는 보스포로스 해협 서쪽의 지역과, 이른바 아나톨리아(Anatolia)로 불리는 아시아 권역이다. 아시아 권역의 경우 5세기부터는 페르시아 문화권으로 존속해왔다. 중세의 최강국이던 비잔틴 제국의 경우 로마 교황처럼 일신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지만, 페르시아 현지 문화의 통합과 교류를 지속해온 개방된 종교관이 비잔틴의 모습이다. 터키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은 원래 그리스·로마의 영토다. 5세기 이후 페르시아 문화가 지배하면서 기독교의 영향과 간섭에서 멀어지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고고학이 본격화된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로마 ·그리스 문화의 흔적이 터키 고고학자들에 의해 속속 드러난다. 사실상 종주국이던 영국이 엄청 파내 가져가지만, 터키도 상당수 발굴하게 된다. 그 흔적이 현재의 터키 박물관 곳곳에 남아있는 것이다. 터키에 검투사에 관한 흔적이 많은 이유는 바로 그 같은 배경에서 풀이될 수 있다.

이스탄불 터키 국립고고학 박물관은 무려 20여 개에 달하는 검투사 묘비명을 전시하고 있다. 전 세계 최대 규모다. 검투사에 관한 모자이크나 작은 액세서리 자료도 그 어떤 나라보다 많다. 창에 찔린 채 숨진, 20대 검투사 집단 매장소가 발견된 곳도 터키다. 이들에 관한 유물·유적은 곳곳에 전시돼 있다. 검투사 연구가 일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다. 묘비명은 검투사 연구의 원점에 해당되는 기본 자료에 해당된다. 비문의 글을 통해 검투사의 흔적을 추적하는 식이다.

검투사의 땀과 피는 병을 고쳐주는 신통제


▎그리스인들의 군무. 이탈리아 남부에서 시작된 의식으로 알려졌지만, 그리스라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터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가자마자 검투사 전시관으로 갔다. 독립관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로마 유물·유적들과 함께 진열된 곳이다. 검투사 묘비명이 그림·조각과 함께 늘어서 있다. 다른 무덤이나 묘비명에 비해 작고 보잘것없다는 느낌이 든다. 검투사의 대부분은 노예 출신이다. 전쟁에서 패했거나, 로마에 흡수되면서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이 활용됐다. 가끔씩 검투사로 나간 로마 시민도 있지만, 전체 80% 정도는 노예다.

로마 최전성기, 이들은 21세기판 셀리브리티와 같은 존재였다. 경기에 이긴 검투사는 돈을 벌고 시민들로부터 박수도 받았다. 노예·창녀들로부터 잠자리를 요청받는 ‘강한 남성’의 상징이다. 검투사의 땀과 피는 병을 고쳐주는 신통제로 통했다. 땀을 긁어 모아 병에 담아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 시민으로서 검투사로 나선 것은 셀리브리티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유명한 검투사라 해도 사회적 존경이나 권위와는 무관했다. 백전백승 검투사라 해도 로마 시민의 발 아래에서나 움직이는 하류인간으로 취급됐다. 작은 무덤과 왜소한 묘비명은 당시의 분위기를 입증하는 좋은 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검투사는 높이 약 70㎝의 라임스톤 무덤이다. 레바논에서 발견된 것으로 서기 1세기에 건립된 것이다. 칼을 들고 선 모습으로, 생전의 모습을 붉은색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머리부분의 그림은 훼손됐다. 묘비명은 그리스어로 기술돼 있다. “친구들은 테아테리아(Theateria) 출신의 헤카타이오스(Hecataios)를 존경한다. 메노고네스(Menogones) 아들이자 모두의 영웅으로서 살아간 헤카타이오스. 그대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한다.” 묘비명의 근간은 어디 출신, 누구의 자식, 누구의 남편이란 식의 설명과 함께, 이승세계에서의 마지막 인사로 끝맺는다. 용감한 검투사였다는 찬사가 들어간다.

기본적으로 검투사는 가족이 없다. 셀리브리티 검투사의 경우 따로 부인을 가질 수도 있지만, 보통은 고독하게 혼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 줄 직계가족이 없다. 무덤과 묘비명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함께 싸운 상대 검투사나, 동료를 통해 자신이 숨질 경우 무덤을 만들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약속한 다른 검투사들이 만든 것이다.

검투사는 다른 지역 출신의 검투사는 물론, 자신과 함께 훈련받은 검투사와도 싸웠다. 살기 위해 동료의 목을 쳐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로 돕는 형제들이다. 상대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 친구가 경쟁 검투사로 나서는 순간, 살아남는 사람이 상대의 무덤을 책임지는 식이다. 따라서 헤카타이오스의 친구들이란, 같은 운명 속에서 살아간 검투사를 지칭한다. 검투사는 살육전의 대가로 받은 돈을 저축해두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비한다. 따라서 검투사로서 무덤을 갖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평소 승률이 높은 전사이자, 사후(死後)의 세계에 투자한 검투사였다고 볼 수 있다.

검투사, 흥행사, 양성소라는 3박자


▎1. 헤카타이오스의 묘비명. 터키의 박물관은 유럽에서 보기 힘든 고대 그리스·로마 유물·유적의 보고다. / 2. 나르시소스의 묘비명. 검투사라고 하지만, 해맑은 10대의 얼굴을 하고 있다.
라임스톤에 비해 대리석에 새겨진 묘비명과 무덤은 한층 더 고가에 해당된다. 셀리브리티 검투사의 위상을 나타내주는 증거다. 나르시소스(Narcissos)란 이름의 검투사로, 높이 약 50㎝에 달하는 대리석 무덤이다. 서기 2세기 로마 최전성기에 건립된 것이다. 콜로세움이 세워지기 전인 서기 80년 이전 검투사의 사망률은 10%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열심히 싸우다 질 경우 살려두는 것이 정석이었다. 종교 의식으로서의 검투사다. 2세기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피에 굶주린 로마시민을 위해 패전한 검투사 대부분이 즉석에서 처형된다. 로마가 최전성기를 지나 하락세로 접어들면서 사망률과 사망자도 고공행진을 한다.

나르시소스 무덤은 입체 조각과 함께 그리스어로 된 묘비명을 갖고 있다. “레이크데이모니아(Lakedeimonia) 출신의 티베리우스(Tiberius)가 자비로 건립한 것으로, 세쿠터(Secutor)로 활동해온 검투사 나르시소스를 기리는 묘비다. 티베리우스 : 나르시소스여 안녕히. 나르시소스 : 그 누구든 모든이여 안녕히…. ”

묘비명은 정면을 응시하는 나르시소스의 얼굴과, 검투사로 활동할 당시의 완전무장한 모습이 조각으로 표현해두고 있다. 얼굴을 보면 10대 정도의 앳된 얼굴이다. 2세기 검투사의 평균수명은 22세였다고 한다. 로마 전체의 평균수명이 30세를 넘기지 못하던 시대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낮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의 원인은 병이 아닌 상대 검투사의 의한 처형이라 볼 때 공포가 남달랐을 것이다. 나르시소스의 헤어 스타일은 머리를 단정히 짧게 깎은 모습이다.

그리스·로마 당시, 신분을 알 수 있는 최적의 증거는 헤어스타일에 있다. 머리가 길면서 단정하게 빗겨져 있다면 상류계층이다. 여성의 경우 위로 올리면서 겹겹이 이어간 머리가 상류층의 상징이다. 노예 서너 명이 달려들어 2시간 이상 걸리는 수작업이 상류층 여성의 헤어스타일이다. 따라서 머리가 짧고 헝클어질수록 하류층이다. 나르시소스는 단정하긴 하지만, 로마 황제처럼 긴 머리와는 다른 스포츠형 헤어스타일이다.

묘비를 세운 사람이 티베리우스라고 하지만,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에 관한 자료가 따로 없다. 유럽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유적은 파손되고 훼손된 불완전 작품의 집산지다. 조각상이라고 해도 머리가 훼손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머리를 붙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몸은 십대지만, 얼굴은 50대인 로마황제도 있다. 나르시소스 묘비명을 세운 인물에 대한 설명이나 흔적이 있을 법도 한데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자비로 묘비명을 세웠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르시소스를 키운 흥행사가 아닐까 판단된다. 라니스타, 즉 흥행사는 검투사 관련 비즈니스맨이다. 원래 검투사 출신으로 라니스타가 된 인물도 많다. 이들은 검투사 양성훈련소인 루드스(Ludus)를 만들어 운영한다. 검투사를 21세기 아이돌에 비교할 때, 라니스타와 루드스의 관계는 연예소속사 사주와 엔터테인먼트 양성소에 해당된다.

검투사는 힘이 세고 잘 싸우는 것만이 아닌, 여러 가지 흥행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노래와 춤에 능하다고 셀리브리티에 오르던 시대는 끝났다. 요리,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고, 나름대로의 특별한 취미나 스토리를 갖고 있어야 스타로 클 수 있다. 멋진 몸매에다 뛰어난 실력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검투사 셀리브리티가 등장한다. 라니스타는 그 같은 노하우를 길러주는 검투사의 대부(代父)에 해당된다. 상품성을 가진 검투사를 데리고 다니면서 로마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보여준다.

어떤 조건 하에서 이벤트가 벌어지는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검투사가 숨질 경우 개최자의 돈으로 사자(死者)에 대한 보상이 이뤄진다. 로마 황제, 지방장관 같은 권력자가 개최자들이다. 라니스타는 로마 황제로부터 받은 돈의 일부로 죽은 검투사의 묘지를 세웠다. 물론 흥행이 보장되지 못한 3류 검투사에 대해서는 ‘따뜻한’ 정을 베풀지 않았다. 평소에 돈을 많이 벌게 해준 검투사를 위해, 라니스타가 자비로 무덤을 세웠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로마군단의 강인함을 유지시키는 수단


▎스페인 화가 고야가 그린 투우 장면. 투우는 검투사처럼 성스러운 의식에서 비롯된 집단 이벤트에 해당된다.
묘비명에서 나르시소스는 세쿠터(Secutor)로 활동했다고 한다. 검투사는 무장 상태로 보아 다섯 가지 부류로 구분됐다. 무기나 방어복을 통해 다섯 종류의 검투사로 나눠져 아레나에서 싸운다. 세쿠터는 대형 방패를 통해 수비력을 강화하면서 작은 칼로 승부를 거는 검투사다. 이밖에 트라케스(Thraces), 삼니테(Samnite), 물밀로(Murmillo), 레티아리이(Retiarii)와 같은 검투사가 있다. 이들은 그물이나, 긴 삼지창(三枝槍), 투구의 모양에 의해 구별된다. 공격과 수비, 기동성과 강인성 가운데 어디를 중시하느냐가 5종의 검투사를 구분하는 근거다. 흥행사 라니스타는 훈련 중에는 모든 종류의 검투사를 경험케 한다. 이후 최종적으로는 5종류의 검투사 중 단 하나를 부여한다. 다른 종류의 검투사로 변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한 번 지정받은 검투사 유형을 죽을 때까지 갖게 된다.

로마 흥망사는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잽 부시는 로마 시민들이 고급 기호품에 빠지는 과정에서 국력이 약해졌다고 말한다. 기호품을 보호하고 수입하기 위해 로마 군대를 멀리 변방에까지 주둔시키면서 국방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더불어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21세기 미국도 그 같은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형인 43대 부시 대통령과 달리, 잽 부시가 대통령이 될 경우 미국의 무관여 외교정책은 한층 가속화될 듯하다.

검투사는 로마 흥망사를 거론할 때 언급되는 중요 키워드 중 하나다. 원래 종교적 의미에서 시작된 성스러운 의식이 피에 굶주린 로마시민들의 요구에 의해 초대형 살상극으로 변질해가면서 로마의 건국정신이 황폐해졌다는 것이 로마 흥망사로서의 분석이다. 초기에 이뤄진 검투사 이벤트는 무(武)를 숭상하는 로마의 이념에 적합했다고 한다. 로마 공화정 초기의 철학자인 키케로는 말한다. “잔혹하고 비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전쟁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고통과 죽음을 시각적으로 확산시키는, 평상시의 훈련으로서 최상의 효과를 내는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 몽케스키외(Montesquieu)도 검투사를 로마 흥망과 연결해 설명한다. “로마인의 잔혹성을 과시한 이벤트이기는 하지만, 피가 흐르고 부상을 입는 처절한 현실을 통해 로마군단의 강인함을 유지시킬 수 있도록 도와줬다.” 평화시에 잊기 쉬운 현실로서의 전쟁 감각을 초대형 이벤트를 통해 로마 시민에게 알린 것이 검투사였다는 의미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죽인 이유


▎부상병을 옮기는 기원전 4세기 초기 로마 군인들. 자신의 칼에 사라진 경쟁자라 해도 존경과 애정을 잊지 않는 것이 검투사들의 상식이다.
로마 황제는 그 같은 광란의 현장을 집대성한 주인공이다. 1세기 이후 로마가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시민들을 즐겁게 할 황제 찬미 프로파간다(Propaganda)로서 검투사가 활용된다. “황제 만세. 죽음의 길에 들어서는 저희들이 황제에게 경의를 표합니다.(Ave Imperator, morituri te salutant)” 아레나에 들어서기에 앞서 검투사 대표가 황제에게 표하는 인사다. 황제가 검투사의 운명을 결정한다. 오해하기 쉬운데, 엄지 손가락을 위로 올리면 죽이라는, 아래는 살리라는 의미다. 검투사의 이벤트는 기본적으로 공짜다.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아레나 최상단의 경우 노예도 무료로 들어간다. 초대형 무대인 콜로세움은 로마 황제의 인기와 권위를 유지시킬 최적의 공간이다. 검투사를 종교적 의미에서 오락으로 바꾼 인물은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다. 브루투스에게 암살된 독재자다. 기원전 46년, 죽은 딸의 추모를 위해 1200명의 검투사들을 싸우게 했다. 카이사르는 모의 해전을 통한 초대형 이벤트를 연출해낸 발명가이기도 하다. 엄청난 크기의 초대형 아레나에 물을 넣어 배를 띄운 뒤 행해지는 가상 해전이다. 배가 불타고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민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된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독재자라 부른 이유는 서커스를 만들어 우민화(愚民化)하는 행위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는 검투사 이벤트에 한층 더 주목한다. 서기 80년 콜로세움이 세워지면서 1년 중 100일 정도가 검투사 이벤트로 채워진다. 하루에 5천 마리의 동물들이 살육되고 한 번에 1천여 명씩 하루 1만 명이 싸우는 대형무대도 등장한다. 검투사가 시민을 결속시키고 즐겁게 만드는 최고의 오락으로 부상하면서 황제 자신도 살육의 무대에 참여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인 황제 코모두스(Marc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통해 비쳐졌지만, 코모두스는 직접 콜로세움에 나서 싸운, 초유의 황제 검투사다.

기록에 따르면 무려 735번에 걸쳐 검투사로 나섰다고 한다. 로마사를 통틀어 코모두스는 살아 있는 황제 아버지를 통해 후임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다. 불만이 넘치고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볼 수 있다. 20세에 황제에 오른 이후, 살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살아간다. 스스로를 환생한 헤라클레스라 말하면서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녔다. 콜로세움 이벤트를 일상화하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검투사로 나선다. 그러나 상대 검투사는 무장이 아예 안 된 상태거나, 약물에 중독된 혼수상태에서 황제에 맞섰다고 한다. 식은 죽 먹듯이 상대를 칼로 제압한 뒤 시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은 비겁한 인물이다. 코모두스는 192년 31세 되던 때, 목이 졸린 시체로 목욕탕에서 발견된다. 자신을 지도해준 노예 출신 검투사가 암살범이다. 40세 가까이 된 한국계 미국 시민권자 연예인이 ‘제발 좀 군대에 보내달라’고 눈물로 호소한다. 10여 년 전 국방의 의무를 피해 미국으로 ‘도망친’ 가수다. 군대 가서 한국 국적을 취득한 뒤 한국인으로서 다시 활동하고 싶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는 법적으로 군대를 갈 수 없을 만큼 나이를 먹은 상태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저버린 ‘비애국자’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군대에 가고 싶다는 연예인의 모습은 마치 승자의 칼에 목을 내밀고 있는 패자 검투사처럼 느껴진다.

한국에 등장한 대통령 검투사


▎1.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모습의 코모두스 로마 황제. 자신을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 믿고 직접 검투사로 나서기도 했다. / 2. 오일 램프에 그려진 검투사의 모습. 밤을 두려워한 로마인들은 검투사의 모습을 그린 램프를 사용해 화를 물리치려고 했다.
인터넷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아레나에 해당된다. 실시간으로 군대에 가고 싶다는 연예인 검투사의 행적이 전해진다. 인터넷에 몰려든 아레나 관람객 99%는 관용이 아닌 복수, 사랑이 아닌 증오에 빠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성인군자들이지만, 아레나에 들어서는 순간 피에 굶주린 관람객으로 돌변한다. 당장 처형하라는 목소리만이 인터넷 아레나에 울려 퍼진다. 동정파 관람객이 있을 경우 곧바로 왕따의 대상이 된다. ‘얼마 받아 먹었느냐, 친척관계냐?’라는 비난이 이어진다.

검투사 대상으로 대통령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지난 6월 5일 국립의료원에 들른 박근혜 대통령은 한 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초라하고도 연약한 여성처럼 느껴진다. 5천만 관람객이 주목하는 가운데 아레나에 홀로 들어선 여성 검투사다. 메르스 광풍으로 나라 전체가 흔들거리는 상황 속에서 급조된 연출이기 때문이다. 병원 의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들렀다고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그 자리에 간 것은 ‘결코’ 자발적으로 간 것은 아닐 듯하다. 여론에 떠밀려서 간 것이다. 정부의 무성의한 대응책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하늘을 찌르면서 ‘대통령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여론이 빗발쳤다.

사실, 메르스 광풍의 원인은 정부 실책에 국한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면서 중국까지 빠져나가 병원균을 퍼트린 무책임한 ‘시민’에게도 있다. 많은 한국인은 정부가 세상의 모든 것을 전부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박 대통령을 국립의료원이란 아레나로 몰아세운 주역들이다. 국립의료원 방문은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먹는 시식회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대통령 옆에 선 의사 가운데 메르스 감염자가 있을 경우 전염될 수도 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지지 여부를 떠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 치사율 40%라는 바이러스에 중독됐다고 가정해보자. 혼란과 비극을 생각하면 국립의료원 방문을 우려와 걱정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같은 ‘상식적인 생각’은 한국 신문·방송 그 어디에도 찾아보기 어렵다. 아레나로 몰아 세운 핏빛 눈길만이 대한민국 전체를 맴돌고 있다. 살벌한 분위기를 타고 차기 대통령에 오르려는 검투사 흥행사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평범한 을을 위한 주된 화제로 검투사 관련 가십만큼 만만한 것도 없다. 로마가 그랬듯이 검투사의 고통·불행·슬픔이 커가면서 로마 전체가 망해갔다. 갑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의 검투사가 아니라, 족치고 죽일 목적 아래 검투사가 양산된다.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외국에서 보면 경계선을 넘기 직전의 살벌한 상태가 2015년 여름의 한국이다. 검투사를 지켜보는 흥미본위의 관람객이 아니라, 죽은 검투사를 무덤으로 옮기는 동료 검투사의 마음이 절실하다. 살벌하고도 더운 여름도 여유롭고 시원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 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507호 (2015.06.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