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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의 ‘바닷가 서재’] 광주 출신 두 여성 작가의 울림 

이 여름에 바친다! 순백을 향한 혼(魂)의 엘레지 

함정임 소설가, 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소설 장르를 뛰어넘은 존재론적 서사로 치유의 힘 극대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여름을 맞이하는 것이 때로 설레고, 기다려지기도 한다. 소설을 쓰는 일이, 그것으로 살아가는 일이, 비록 천 개의 바늘 끝이 머리 한쪽을 수없이 찔러대는 고통에 시달리는 일이라 해도, 황홀하고 감사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아니, 이것으로 부족하다. 문장을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축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행동, 이런 마음, 이런 기억, 이런 세계와 맞닥뜨릴 때다.

“오래전 그녀는 바닷가에서 흰 조약돌을 주웠다. 모래를 털어낸 뒤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서랍에 넣어두었다. 파도에 닳아 동그랗고 매끄러운 돌이었다.”(한강, ‘흰돌’, <흰>, 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만드는 소설’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이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붙잡고, 뜯어보고, 정의하려는 소설의 내용과 형식, 그러니까 소설이라는 장르 개념으로부터 훌쩍 벗어난, 소설 너머의 글쓰기 같은 것이다. 혼(魂)의 울음, 또는 울림. 자기 자신, 또는 누군가를 위한 추모와 애도.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 당시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사택에 살았다. 산달이 많이 남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 오전에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아무도 주변에 없었다. (…)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한강, ‘배내옷’, <흰>, 난다)

<흰>은 한강이 언젠가는 써야 할 ‘어떤 것’이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녀는 시인이 되어야 했고, 소설가가 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위해 작가가 선택한 장르는 ‘이야기’다. 소설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야기만으로는 소설이 아니다. 이야기가 소설이 되려면, 최소한 한두 가지 장치가 추가로 필요하다. 한강의 ‘흰’에 관한 이야기는, 그러나 소설이다. 작가도 출판사도 ‘소설’이라고 밝히고 있고, 분명히 새기고 있다. 이야기라도 소설가가 소설로 의도하고 소설로 쓰면 그것은 소설이다. 단, 그 소설가는 지속적으로 공적인 무대에서 소설을 쓰고, 발표하고, 자신의 창작방법론을 인정받았을 때 가능하다.

“지난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이 어릴 때, 슬픔과 가까워진 어떤 경험을 했느냐고. (…)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른 것이 이 죽음이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나는 자랐다. (…)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 그이가 죽은 자리에 내가 태어나 자랐다는 이야기.”(한강, ‘달떡’, <흰>, 난다)

하나의 목록은 하나의 이야기다. <흰>은 태어난 지 두 시간만에 죽은, 달떡처럼 얼굴이 희었던 갓난아기, 그러니까 작가의 언니에 대한 애도 또는 추모의 글을 써야겠다고 작가가 다짐한 뒤, 내면을 들여다보며 길어 올린 목록들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작가가 불러낸 목록은 ‘강보’로부터 ‘수의’까지 15가지. 이들이 시간과 공간, 세계로 점점 확산되면서 63가지 목록으로 늘어난다. 이들은 ‘나’와 ‘그녀’, ‘모든 흰’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재구성되고, ‘The Elegy of Whiteness’라는 부제가 붙여진다. 흰에 바치는 비가(悲歌)의 흐름을 통해 작가는 목록으로서의 서사, 목록을 통한 애도의 서사라는 새로운 소설 형식을 선보였다.

뫼비우스 띠처럼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편, 박솔뫼가 듣고 싶고, 하고 싶은 또 다른 이야기 세계도 있다.

“내가 언제나 듣고 싶은 이야기는 어떻게 그해 여름이 지나갔느냐 하는 것인데 이건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해 여름은 매해 여름으로 나는 늘 여름이 어떻게 지나갔는가 하는 것을 집중해서 떠올린다.”(박솔뫼, <머리부터 천천히>, 문학과지성사)

박솔뫼의 장편소설 <머리부터 천천히>는 보통 소설 문법에서 작동되는 인물의 시점, 인물들 간의 관계, 현재 또는 과거형의 선택과 집중, 공간성 등이 통일되지 않은 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형태로 펼쳐진다. 이야기와 이야기가 서로 손을 내주고 받으며 나아가는데, 그 형상이 도마뱀의 꼬리처럼 잘려지거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긋나며 이어진다.

“이곳은 무덤은 아니지만 무덤이 되지도 않겠지만 그 옆에 역시나 큰 바위를 세워 누구를 또 누군가를 누군가의 누구의 이름을 새기고 그 사람이 누구를 죽이고 그 사람이 누구에게 죽었는지를 적습니다. 누구는 아들의 이름이고 딸의 이름이거나 할머니의 이름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버지이거나 친구, 할아버지, 고모의 이름이 됩니다. 그러고 나면 이 바다는 무엇이 되며 사람들은 이 바다를 무어라 부를까. 이 바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나의 오래된 숙제라면 나는 이 바다의 이름을 무어라 붙여야 할까.”(박솔뫼, <머리부터 천천히>, 문학과지성사) 한강과 박솔뫼의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이란 호명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한강과 박솔뫼의 공통점은 두 작가가 광주 태생이라는 것이다. 박솔뫼는 1980년대에, 한강은 1970년대에 그곳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광주를 대상으로 근래에 문제작들을 발표했다.(박솔뫼 단편 ‘그럼 무얼 부르지’, 한강 장편 <소년이 온다>)

한강이 태어나 두 시간 만에 죽은 언니를 애도하는 제의의 뜻으로 세상의 ‘흰’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하나하나 정갈하게 풀어나간다면, 박솔뫼는 여름, 소설, 무덤, 바다 등과 같은 보통명사와 속리산, 카프카, 부산 등과 같은 고유명사, 그리고 병준, 이덕자와 같은 익명에 가까운 인물들을 호출하여 뒤섞어 놓음으로써 다성적이고 다형적인 이야기들의 ‘카니발’을 벌인다.

한강의 목록으로서의 애도 서사든, 박솔뫼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묘한 이야기이든, 자기 안에 갇혀 있던 오래된 슬픔, 또는 자기 안팎에 떠도는 이름들을 제대로 호명해줌으로써 치유해주는 신비로운 힘을 선사한다. 치유란 가벼워지는 것, 곧 자유로워지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몸을 움직여 멀리 떠나는 것만이 휴가 여행이 아니다. 뜨거운 여름, 그곳이 어디든, 시원한 그늘 찾아, 일독을 권한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화여대 불문과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소설집〈버스, 지나가다〉〈네 마음의 푸른 눈〉, 장편소설 〈춘하추동〉〈내 남자의 책〉, 예술기행서 〈인생의 사용〉〈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소설가의 여행법〉〈먹다 사랑하다 떠나다〉, 번역서〈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행복을 주는 그림〉등을 썼다.

201607호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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