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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관승의 파스텔 인생⑥] 피나투보 화산에서 제2 인생 일구는 박윤희 씨 

“예순 넘은 나이지만 사업은 활화산입니다”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
휴양지 삼아 찾아온 필리핀에서 화산 모래계곡 만나 새 사업 일궈… 40년 가까이 무역업 하며 말레이·사우디 등에서 실패 딛고 일어선 오뚝이 사업가

▎필리핀의 클락/앙헬레스 지역에 있는 자신의 골재생산 공장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박윤희 씨.
“필리핀, 위험하다던데, 괜찮아요?”

“그곳에도 믿을 만한 사람들 있어요? 온통 범죄와 연관된 것 투성이던데…?”

마닐라행 항공기에 오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앞다퉈 내게 우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만하다. 인터넷에 필리핀을 검색해보니, ‘납치’, ‘청부살인’, ‘카지노’, ‘매춘’ 같은 단어가 튀어나온다. 물론 세부와 보라카이의 투명한 바다 같은 아름다운 이미지가 없진 않지만, 부정적이고 끔찍한 것부터 선입견으로 다가온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추형 화산이라는 마욘(Mayon). 마닐라 공항에 도착하면 마욘의 환상적인 사진이 여행자들을 유혹한다.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 유독 M으로 시작되는 단어들이 귓전을 많이 울렸다. 수도 마닐라라는 이름이 그렇고, 필리핀의 고유어인 타갈로그어로 ‘마부하이’(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말, ‘마간다’(아름답다), ‘마사랍’(맛있다) 같은 단어도 아름답다. 이 나라의 대표 과일인 ‘망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복싱 8체급을 석권한 영웅 매니(Manny) 파퀴아오, 대통령 궁인 ‘말라카냥’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M으로 시작된다. 공항 청사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추형 화산이라는 마욘(Mayon)의 환상적인 사진이 여행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M의 절정이다.

그렇다. 화산 마욘처럼 극단적인 두 개의 얼굴을 지닌 곳이 필리핀이다. 정신 못 차리게 할 정도로 푹 빠져들게 하는 매력과 그 매력만큼이나 치명적인 위험을 동시에 지닌 땅이다. 내가 지금 가는 곳은 마욘과 함께 필리핀을 상징하는 또 다른 화산의 길목에 있다.

피나투보 화산. 1993년 6월 15일 대폭발하면서 인근의 클락 미국 공군기지와 수빅 만의 해군기지를 모두 거대한 잿더미로 덮어버린 뒤 철수하게 만든 유명한 화산이다. 클락과 앙헬레스 지역은 바로 그 화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인천공항에서 클락공항까지 항공기 직항편이 있지만,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85㎞ 남짓 떨어져 있기에 나는 마닐라를 경유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군의 지프차를 개조해 서민들이 미니버스처럼 애용하는 ‘지프니’, 오토바이에 옆자리를 만든 트라이시클 등에서 뿜어 나오는 매연과 악명 높은 교통 체증을 뚫고 자동차로 3시간 정도 달려서야 겨우 도착했다.

멀리 구름 사이로 웅장한 피나투보 화산이 얼굴을 수줍게 감추고 있었다. 포락 강가에서는 쉼 없이 모래를 퍼내는 굴삭기와 이를 실어 나르는 대형 트럭, 규격에 맞게 거르고 분류하는 시설인 바이브레이터와 페이로더 같은 중장비들이 눈 아래 펼쳐졌다. 박윤희(66) 씨. 그는 이곳에서 건축자재를 생산해내는 회사 ‘Orum JF’의 사장이자 이번 달 ‘파스텔 인생’에 소개하는 주인공이다.

“이곳의 생산 부지는 3 헥타르(㏊=1만㎡) 정도, 모래를 채 취할 수 있는 권한이 허용된 바운더리까지 합하면 약 10헥타르가 제가 일하는 공간입니다. 50여 명의 필리핀 현지 직원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산되는 모래는 주로 마닐라 건설현장의 골자재로 공급됩니다.”

황금모래 가져다주는 태풍이 반가운 존재


▎상공에서 내려다본 포락강. 박윤희 씨는 이곳 강가에서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회사 ‘Orum JF’를 운영하고 있다.
1㏊가 1만㎡이니 그의 공장은 3만㎡ 정도다. 채취 허용공간까지 합하면 10만㎡의 드넓은 부지다. 마닐라 신축 건설현장에 쓰이는 모래는 상당수가 여기서 공급되는 것이다. 이 화산에서 계곡을 따라 흘러나오는 강물이 그에게 황금모래를 가져다줬다.

“필리핀은 태풍이 시작되는 길목입니다. 대부분 태풍을 걱정합니다만, 저와 저희 회사에는 오히려 긍정적입니다. 태풍이 불어오면 저기 피나투보 화산 계곡에 몰려있던 모래더미와 자갈들이 쓸려 내려오기 때문이지요. 지난해부터 2년 동안은 엘니뇨 현상으로 이곳이 건조했습니다. 비가 적어서 모래가 쓸려 내려오는 게 적었는데, 올해는 라니냐 현상으로 태풍이 다시 많이 분다고 하니 10월부터는 많은 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흔히 ‘창조적 파괴’, 혹은 ‘파괴적 창조’(Destructive Creation)이라는 말을 하지만, 화산처럼 그 말에 딱 들어맞는 곳은 없다. 화산이 터지면서 분화구 안에 숨겨 있던 것들이 용암과 함께 분출되어 인근 지역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는데, 건축자재로 꼭 필요한 민물 모래를 얻게 된 것이다. 글로벌 경제가 침체되고 있다고 하지만, 필리핀은 지난 몇 년 동안 오히려 성장을 멈출 줄 몰랐고 건축 경기 또한 활황이어서 건축자재의 수요도 크게 늘었다.


▎포락 강가의 모래 작업장에는 하루에도 수백 대의 덤프트럭이 드나든다.
피나투보 화산이 하루아침에 이 지역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던 것처럼 그의 운명도 이곳에서 바뀌었다. 9년 전인 2007년, 이곳에서 그는 제2의 인생을 찾았다.

“원래는 이곳 필리핀에서 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휴양차 왔었지요. 55세까지는 열심히 일하고 56세에 은퇴해 쉬겠다는 것이 원래 제 인생계획이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피나투보 화산과 모래 계곡을 만나면서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필리핀은 연중 내내 뜨거운 태양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이곳 날씨를 가리켜 ‘덥다’(hot), ‘더 덥다(hotter)’, ‘최고로 덥다(hottest)’로 규정한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런 필리핀으로 찾아오는 이유는 실로 다양하다. 그가 발견한 매력은 뭘까?

“무엇보다 연중 춥지 않은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입니다. 다녀보세요, 바다와 산, 들판 모두 너무 아름다운 곳입니다. 필리핀 사람들은 비교적 순진한 편이고 때가 덜 묻었어요. 한국 사회처럼 각박하지 않아요. 악다구니 쓰지 않는 곳이죠. 그것 때문에 정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요즘은 이곳에도 한국인들이 많이 들어온다. 화산 폭발로 미국 공군부대가 떠난 뒤 한동안 비어 있던 미군부대 기지가 ‘클락 특별경제지역’(Clark Special Economic Zone)으로 지정돼 외국 기업에 관세 면제 등 혜택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클락공항이 인천공항에서 불과 3시간 반이면 직항으로 연결될 정도로 경제와 교통의 허브 역할을 한다는 점도 강점이다. 클락 주변에는 세계적인 미모사 골프장, 경비행장 같은 훌륭한 리조트 시설이 있고, 특별경제지역은 마치 미국의 캘리포니아의 고급 주택가를 연상케 할 정도로 좋은 풍광을 자랑해 은퇴 이민자들을 유혹한다. 필리핀에선 타갈로그와 함께 영어가 공용어로 지정된 탓에 영어교육 시설도 갖춰져 있어 유학생들도 자주 눈에 띈다.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사람들이 낙천적이며 친절하다.

때묻지 않은 사람들 좋아서 정착 결심


▎휴식시간에 직원들과 담소하는 박윤희 씨. 박씨는 50여 명의 필리핀 현지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물론 필리핀에 좀도둑이 없진 않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여긴 적은 없어요. 큰 이권관계가 아니라면 어울려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언론에 보도되는 강력사건은 필리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한국인들끼리 벌어진 일이 대부분입니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한국인끼리 싸우다 현지인을 킬러로 고용한 형태이거든요. 적지 않은 한국인이 서양인에게는 저자세인 반면, 동남아 현지인들에겐 오만하게 굴죠. 이곳 필리핀 사람들은 부자이건 가난하건 서로 융합하며 잘 지냅니다.”

박윤희 사장이 사는 곳의 지명은 Angeles,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와 똑같은 철자를 쓰지만 발음은 스페인 식으로 ‘앙헬레스’로 부른다. 뜻은 천사이지만, 한편으론 악마의 어두운 그림자도 깔려 있다. 인근에 대형 카지노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흥지역이 있는 까닭이다. 조직폭력배와 연계된 도박은 불법 외환거래, 강력범죄 사건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워킹 스트리트로 이름을 바꾼 ‘필즈 애비뉴’는 미군 주둔 시절부터 유지되어온 유흥가다. 돈이 없으면 여자도 없다는 뜻의 ‘No Money, No Honey’라는 문구가 공공연한, 저급한 밤문화 지역이다. 박 사장에게도 악마의 손길이 닿아 스쳐간 적이 있다.

“벌써 7년 전의 일이군요. 2009년 4월이었어요. 현장에서 퇴근하려고 차를 몰고 나오는데, 후미진 곳에서 두 명이 총을 들고 차를 세우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도 무섭지 않았으니까요. 그들의 총 앞에서 웃으며 손들고 내리며 가방 여기 있으니 가져가라고 줬죠. 그랬더니 현금과 수표가 가득 든 가방을 갖고 도망치더군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의 두둑한 배짱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필리핀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사고가 생긴 뒤 뉴스를 보는데, 마닐라 검문소에서 총격전 끝에 8명의 범죄조직원들이 현장에서 전원 사살되었다는 소식이 나오는 거예요. 혹시나 했는데, 다음날 경찰에서 연락이 왔더군요. 차 안에서 제 가방이 나오고 서류가 있어서 연락했다고 했습니다. 8명 가운데 두 명이 저를 총으로 협박한 강도였습니다. 제가 지금 타고 다니는 SUV는 차량 열쇠가 하나밖에 없어요. 범인들은 도망가다 돌아와서 자동차 키를 빼앗아 인근 억새밭 어딘가에 던져버렸거든요. 열쇠가 하나뿐이라 가끔 불편할 때도 있지만 저를 지켜준 수호신이라 생각하고 항상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하하하!”

내가 <파스텔 인생>에서 인터뷰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삶의 최전선에 서있기를 자청한 ‘프론티어(frontier)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스스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위험 감내자’(Risk-Taker)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최전선 가운데 하나가 해외 사업장이다. 과거 대기업 위주였다면 이제는 중견기업, 혹은 소기업 형태의 진출도 눈에 띄게 많다. 그가 생각하는 필리핀 시장의 장점은 무엇일까?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필리핀 사람들과 비즈니스하는 것이 한국인 상대할 때보다 훨씬 쉽습니다.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달리 필리핀 사람들의 신용이 훨씬 좋거든요. 여기서 8년간 사업하면서 부도난 수표 한 장이 없습니다. 여기는 한국과 달리 수표는 배서하는 것도 없고 일대일의 개념입니다. 일단 수표를 받아놓으면 고의 부도가 없고 떼일 염려도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거래할 때 갑을(甲乙) 개념이 없다는 점입니다. 물건과 가격만 맞으면 공연한 것으로 트집을 잡지 않아서 좋아요. 서로 동등한 입장입니다. 이점이 우리보다 신선하죠.”

그런데 왜 필리핀에서 성공한 한국인은 드물까? 강력범죄와 사기당하는 사람들이 왜 아직도 끊이지 않고 생기는 것일까? 필리핀은 외국인에게 개인 자격으로 사업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현지인의 명의를 빌리는 일명 ‘더미’가 유행한다. 사기와 배신, 강력범죄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그로 인해 만들어진 ‘더미 방지법’(Anti Dummy Law)도 있다.

필리핀의 비즈니스엔 갑을(甲乙)이 없어


▎황혼 나이에 접어든 박윤희 씨 부부는 필리핀에서 새로운 사업을 일궈내 행복감에 젖어 있다. 포락강 작업장의 박씨 부부.
“더미는 신중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죠. 대부분의 사업상 사고는 조급증에서 발생합니다. 저는 이곳에 처음 오는 분들에게 ‘절대로 서둘지 마라! 오래 살았다고 현지 교민의 말 100% 믿지 말고, 우선 최소한 1년 정도 살면서 스스로 발품을 팔아 정보를 수집한 뒤 자신에게 맞는 아이템을 찾으라’고 권합니다. 남의 말만 듣고 덜컥 시작했다간 큰일 납니다. 한국인과만 거래하면 실패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이곳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식당과 마사지 가게가 늘어납니다. 이 부근만 해도 한식당이 100개가 넘을 겁니다. 제대로 돈 버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죠. 자본과 노하우가 부족한 상태에서 소자본으로 제한된 한국인을 상대로 출혈경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하려면 무조건 로컬 시장을 뚫어야 합니다. 현지인을 상대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팔아야 합니다.”

필리핀은 한국보다 훨씬 오래전에 글로벌 시장에 뛰어든 나라다. 해외에 파견된 필리핀 사람의 수는 무려 1200만여 명. 세계에서 가장 인력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다. 2차대전 직후만 해도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발전된 나라였으며, 필리핀 항공은 1941년에 창설되어 1946년에는 아시아 최초로 태평양 횡단 노선을 개설했을 정도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산 미구엘 맥주는 동남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1890년에 생산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의 필리핀은 그때와 다르다. 비효율과 부패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관공서를 대상으로 할 때는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네, 그렇습니다. 여기 권력자들 피해갈 방법이 솔직히 없습니다. 특히 인허가권을 가진 공무원들의 보이지 않는 횡포는 두려울 정도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도 정말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는 듯싶어요. 사업자등록이나 법인등록을 1년에 한 번씩 갱신하는데, 이때 보이지 않는 비용이 발생하죠. 여기서 만약 어떤 공사를 한다고 하면, 필리핀 특유의 ‘바랑가이’라는 이름의 기초단체가 있는데, 그 지도자들의 눈에 벗어나면 어떤 식으로든 트집을 잡아서 공사를 좌절시킵니다. 필리핀은 겉으로 보기와 달리 각 지자체가 마치 독립왕국처럼 군림하기도 하거든요. 절대로 만만히 봐선 안 됩니다.”

해외에서 사업한다는 것을 가리켜 흔히 이문화(異文化) 경영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현지인들과 다른 관습, 법, 규정을 헤아려가면서 진행해야 한다. 그가 보는 관점은 어떨까?

“저도 처음에는 한국식으로 직원들을 대했죠. 업무태도나 사는 방식이 우리와는 많이 달랐어요. 그래서 고쳐줘야겠다고 생각해 크게 고함치고 그랬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먼저 변해야 이들이 따라오겠다는 생각에 도달했어요. 내 방식, 내 시각만 고집해서는 사업하는 데 해결책을 찾기 힘들어요. 이렇게 그들의 생활습관이나 사는 법, 문화를 이해하고 서로 교감하는데 거의 1년 가까이 걸리더군요. 그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임을 알게 된 거죠.”

사업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능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에겐 로미라는 이름의 엔지니어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로미에게 두둑한 연봉뿐 아니라 자동차도 보너스로 안겨주었다. 경영에서는 과감한 권한과 책임의 이양이 중요하다. ‘임파워먼트(empowerment)’가 그것인데,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걸 잘해야 조직이 클 수 있고 신사업 개척도 가능하다. 연륜의 결과인가

한상연합회에 관심… 동남아로 시야 넓혀


▎마욘과 함께 필리핀을 상징하는 또 다른 상징인 피나투보 화산의 분화구. 1993년 6월 15일 대폭발로 인근에 있던 미군의 클락 공군기지와 수빅 만 해군기지를 삼켜버렸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는 무역과 해외 업무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으니 벌써 40년의 경력이다.

“무역상사에서 일하다가 오퍼상(무역대리업)이란 업무에 흥미가 생겼어요. 마침 명동의 대연각 호텔에서 화재가 난 이후 불 난 집에서 사업이 잘된다는 속설을 믿고 그 호텔 안에 사무실을 얻어 제 일을 시작했어요. 아직도 기억나는데, 그 호텔 506호에 56평 사무실을 내서 호기롭게 시작했어요. 그런데 보기 좋게 실패했죠. 도망치다시피 떠난 곳이 사우디아라비아였는데 그곳에서 재기를 시도했죠. 말레이시아에선 한국인 최초로 봉제공장을 세워 한때는 제법 잘나갔는데 친구의 배신으로 사업을 접어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결국 모든 걸 잃고 씁쓸하게 귀국해야 했죠.”

박씨의 부인이 당시의 고통을 잊을 수 없었던지 한마디 거들고 나선다. 주변의 도움으로 다시 재기를 시도했지만 하루에 50~100군데 신규 바이어에게 우편물을 보내는 우표 값이 없을 정도로 자금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사무실 부근에 있는 간이 우편취급소에 읍소한 끝에 월말에 우표 값을 정산하기로 하고 그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요즘도 힘들 때는 그때의 우표 값을 생각하지요. 우표 값 사정하러 다니던 기억을 떠올리면 뭐든 버틸 수 있어요!”

박씨 부인의 회고다. 두 사람은 부부이자 동시에 사업에서는 둘도 없는 동지다. 한 사람이 치고 나가면, 다른 한 사람이 꼼꼼히 뒤를 챙긴다. 그렇게 36년 세월을 사업의 현장에서 함께 지켜왔다.

사업가로서 반전은 88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미수교국인 소련 사람들이 사무실에 찾아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형제 관계인 두 사람인데 우리한테는 귀인 같은 사람들이었죠. 당연히 처음엔 반신반의했어요. 소련은 공산국가였잖아요. 비즈니스에 능숙한 것 같지도 않고 언어소통에도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일단 시작해보기로 했어요. 한 가지 신뢰할 만한 것이 있었는데, 그들이 중립국가인 오스트리아에 신용장을 개설할 수 있는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그들이 요청한 것은 섬유를 비롯해 가전제품, 철근 등 다양했어요. 이를 대기업에 얘기하면 모두 미쳤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갑을방적이란 회사가 우릴 믿어줘 56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의 첫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한국이 한창 성장가도를 달리던 무렵의 성공신화다. 우리에게 점차 잊혀지는, 도전의식이라는 DNA가 아련히 떠오르는 에피소드다. 그는 당초 해외 비즈니스 체질이었을까?

“제가 선린상고 출신인데, 원래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어머니 반대로 꿈을 접고 대신 영어에 취미를 붙였죠. 젊었을 때는 ‘잉글리시 900’이라는 교재가 유행이었는데, 그 60장 짜리 디스크를 매일 들으며 배운 것이 큰 힘이 된듯합니다. 저는 무역이 재미있어요. 시장을 개척한다는 것도 흥미롭고요. 예를 들어 새로운 바이어를 찾아가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하는데, 저는 이러면서 하나하나 이뤄간다는 것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아들 잃고 한국 떠나와 필리핀서 외손녀 얻어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고 나서 필리핀에 정착한 박씨 부부는 현지에서 외손녀를 얻었다. 박씨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며 웃었다.
박씨는 최근 들어 시야를 동남아 전역으로 넓혀 한상(韓商) 연합회에 관심을 갖고 있다. 지난 6월 베트남 다낭에서 열린 아시아 한상연합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곳 한인회장의 권유로 참석했는데, 가족들을 포함해 참석자가 약 250명이나 됐어요. 그분들과 대화하며 많은 것을 느꼈죠. 선진국 사업도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동남아 쪽에서 사업은 더더욱 어렵죠.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시장을 개척하고 기반을 닦기까지 고충을 들으면서 그분들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정말 많이 배우고 왔습니다. 해외에서 시장을 개척한다는 자부심도 생겼고요!”

이제 11회째를 맞는 모임은 그 역사가 오래되고 뿌리도 깊은 중국의 화상(華商)과 비교할 때 아쉬운 점이 물론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한국 정부가 지원에 앞서 시장 개척자들의 발목 잡는 행위는 안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비쳤다.

최근 그는 그의 인생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선물을 받았다. 미국에 거주하던 딸과 사위를 필리핀으로 불러와 사업 노하우를 전수하던 중에, 딸 내외 사이에서 새 생명이 태어난 것이다. 이 반가운 소식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그에게 숨겨진 과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고 했다. 한국을 떠나온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피나투보 화산 자락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그의 오래고 깊은 아픔을 씻어주고 있다고 했다.

“아, 지금도 자다가 가끔 벌떡벌떡 일어납니다. 그걸 잊으려고 정말 미친 사람처럼 살아왔거든요. 그 상처를 잊기 위해 왔었지만, 여기서 다시 할 일을 찾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외손녀를 보면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필자는 그의 인생을 보면서 올해 미국 버클리 대학 졸업식에서 셰릴 샌드버그가 했던 축사가 떠올랐다. 페이스북의 주역이며,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1년여 전 휴양지에서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이 축사는 그녀가 공개석상에서 그 사실을 언급한 첫 번째 자리였는데,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회복탄력성(Resilience)’라고 강조했다.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아픔과 위기가 있지만 그걸 이겨내는 복원능력이다. 가까운 사람의 사고와 슬픔을 나의 탓이라는 도덕적 책무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였다.

그렇다. 위기는 말없이 찾아온다. 우리의 인생이란 어쩌면 파괴와 생성이 이뤄지는 화산과 같은지도 모른다. 숱한 상처 속에서 그는 멋지게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딘가 생기(生氣)가 넘친다. 묘한 아우라도 감돈다. 애써 어두운 쪽보다는 환한 쪽을 보려고 하는 마음자세 때문일 거다. 그에게 르네상스는 피렌체가 아니라 바로 피나투보 화산이었다. 이곳을 떠나오면서 화산 앞에서 자문했다.

“너는 힘차게 불꽃을 뿜어내고 있는 활화산인가? 혹은 에너지를 잠시 숨고르기 하는 휴화산인가? 아니면 이미 마그마 활동이 모두 끝나 식어버린 사화산인가? 어느 쪽인가, 너는?”

손관승 - 세한대학교 교수. MBC 기자와 베를린특파원, 국제 부장 등을 거쳐, iMBC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중앙대학교에서도 미디어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ceonomad@ gmail.com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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