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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시리즈 기획 | 애완의 철학(마지막 회)] 모든 개의 행복과 불행, 그 인과의 사슬 

공포 가득한 축생의 삶에 사랑을! 

한경심 자유기고가 icecreamhan@empal.com
제각각 자식을 키우듯 개를 키우는 양상도 제각각… 비록 사람과 개가 교감한다 해도, 개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어

▎2.18m의 키로 세계 최장신 견공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그레이트데인 종 깁슨이 19.05㎝에 불과한 치와와 종 조이와 함께 서 있다. / 사진·중앙포토
“…아름다웠지만/ 허영은 없었으며,/ 힘이 있었으나 거만하지 않았고,/ 용기를 지녔으되 포악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모든 덕을/ 갖추고 있으면서/ 인간의 악덕은 없었다.

이러한 찬양이 인간의 유해에/ 새겨지면 뜻 없는 아첨이 되겠지만/ 개 ‘보우선’을 기리는 데는/ 꼭 적합한 헌사가 되리라.” _바이런이 키우던 개 ‘보우선’의 묘비명에서



▎개는 사람과 있을 때 비로소 개가 된다. 애초에 개라는 동물이 있어 사람이 길들인 게 아니라 사람과 접촉하면서 개가 된 것이다. / 사진·중앙포토
늑돌이를 키우는 내게 사람들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이렇게 묻곤 한다.

“개가 꼭 자식 같지요?”

“네. 하지만 사람을 키우는 것과 비교할 수야 있나요?”

남편조차 아들이 없을 땐 아들을 ‘큰 늑돌이’라고 부를 만큼 늑돌이는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고 내가 ‘개 엄마’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개를 키우는 것과 사람을 기르는 일이 같을 수는 없다. 자식은 성인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양육하며 버릇과 가치관도 가르치고 공부도 시켜야 한다. 그 기간이 최소 20년이고, 요즘은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사람에 비해 강아지는 자연에서라면 아마 1년 이내에 제 어미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개는 묘한 존재다. 제 어미를 떠나 사람을 다시 부모삼아 일생을 사니 말이다. 다 컸으면서도 한편으로 평생 어린애같이 산다. 그러니 개가 자식 같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의 아이는 언젠가 부모를 떠나야 하지만, 한번 인연 맺은 개는 사람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어쩌면 자식 못지않게 깊은 인연인지도 모르겠다. 개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개에 비해 수명이 긴 사람에게 키우는 개는 일생의 한 시기를 같이 보내는 거지만, 개는 평생을 사람에게 의지하고 산다.

동물 가운데 사람과 이토록 깊고 진한 유대 관계를 맺는 동물이 있을까. 만약 유인원을 키운다면 유대감이 더욱 깊겠지만, 유인원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는 사람과 있을 때 비로소 개가 된다. 애초에 개라는 동물이 있어 사람이 길들인 게 아니라 사람과 접촉하면서 개가 된 것이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인류가 가장 먼저 길들인 동물이 개라고 한다. 개의 조상은 회색늑대로, 14만 년 전부터 사람과 함께했다.

사람이 왜 개를 그토록 좋아하는지, 왜 맨 처음 개를 사람의 삶 속으로 끌어들였는지 아직 밝히지 못했지만 개가 사람에게 ‘아기’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귀여운 개’라는 관념이 생기고 개를 키우는 것이 영국에서 풍족한 부르주아의 표식이 된 이후의 얘기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회색늑대에게 ‘아기’를 연상시킬 귀여움이란 게 있었을까? 어찌됐건 개는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비로소 개가 된 것이니, 사람과 가장 잘 어울리는 동반자인 건 틀림이 없다.

개를 자식에 빗대는 쪽에서 자주 거론하는 학설이 개와 사람이 교감할 때 크게 증가하는 옥시토신 수치다. 옥시토신은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자궁을 수축시키고, 젖을 먹일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과 함께할 때 분비가 급증해서 행복 호르몬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호르몬은 낯선 사람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신뢰하게 해주는 긍정 호르몬이기도 하다.

개와 함께할 때 증가하는 행복 호르몬


▎애완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스마트폰 앱이 개발됐다. 개는 제 어미를 떠나 사람을 다시 부모 삼아 사는 묘한 존재다. / 사진·중앙포토
사람이 개와 10분간 놀아주면 개의 옥시토신 분비가 무려 57.2% 증가한다고 한다.(고양이도 증가하지만 12%로, 개의 5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이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 증가하는 양과 비슷하다. 그러니 개가 사람에게 느끼는 유대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감과 맞먹는다. 개는 이렇듯 인간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충실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보다. 개가 학대하는 주인에게도 충성심을 보이고 의지하는 것은 이 호르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개와 함께하는 사람의 옥시토신도 는다. 개와 사람이 100초 이상 눈을 마주치면 사람 몸에선 옥시토신이 네 배 이상 증가하며, 개에게도 옥시토신 분비가 40% 는다. 사람과 오래 눈을 맞추는 개에게 치유력이 있다는 말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재미난 것은 눈을 맞추면서 가볍게 쓰다듬는 것은 괜찮지만, 말을 하면 개의 옥시토신 분비는 오히려 준다는 사실이다. 진짜 깊은 유대감은 언어를 뛰어넘고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일까?

늑돌이를 안고 작고 따뜻한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들을 때면 아기를 안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럴 때 분명히 개는 아기를 떠올리게 하기는 한다. 그래서일까, 아기 키우듯 개에게 철철이 옷을 바꿔 입히고, 발톱을 깎아주거나 신발까지 신기고, 털을 다듬고 염색하고 리본까지 달아주는 소위 ‘미용’이라는 것을 해주는 사람도 있다. 산책길에서 만난 ‘개엄마’ 가운데는 개만을 위한 휴대용 물통 따위의 용품을 골고루 갖춘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개엄마들은 만나면 유기농 사료나 개 용품 등에 관한 정보를 나눈다. 그 모습이 꼭 초등학생을 둔 학부형들 같다.

개를 기르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사랑의 표현법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고 건강하게 관리해주는 것이 사랑에서 최우선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함께 산책하기’가 사랑의 표현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잘 관리하고 보살펴주는 사람들 입장에선 물도 내가 마시는 물통에서 손바닥에 따라주는 것은 성의 없는 양육으로 보일 테고, 내 입장에선 이렇게 앉아 수다만 떨지 말고 저렇게 부산하게 움직이는 애들을 데리고 좀 걸어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식을 키우는 모습이 제각각이 듯 개를 키우는 양상도 제각각이다.

개와 함께 살려면 힘보다 신뢰를 얻어야


▎먹이를 먹는 애완견. 개는 사람의 언어를 쓰지 않기에 사람은 개의 의사와 요구를 다 알 수 없다. / 사진·중앙포토
사람 사는 세상에 문제아가 있듯, 개에게도 문제아가 있다. 키우는 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신경질적으로 짖거나 주인까지 공격적으로 무는 개는 훈련소에 보내거나 다른 이에게 양도하기도 한다. 훈련소에 보낸 개가 버릇을 고쳐서 왔다는 소리도 들었고, 더 나빠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사람도 제자식을 감당하지 못하기 일쑤인데, 종이 다른 동물을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왜 없겠는가. 사람과 개가 비록 교감한다 해도, 개의 마음을 나는 완전히 모르겠다. 늑돌이가 자주 내 몸에 제 엉덩이를 갖다대고 산책하러 가자면 좋아 펄쩍 뛰다가도 갑자기 제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놀자고 하는 걸 의아하게 여겼는데, 그게 개가 사랑을 표현하는 법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개는 사람의 언어를 쓸 수 없기에 우리는 개의 요구와 의사를 다 알 수가 없다. 개 역시 우리말을 다 알아듣지 못한다. 그럴 때 누가 더 노력을 해야 할까. 나는 당연히 더 많은 재량권을 가진 사람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남편만 하더라도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지”라는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이유로 강아지 늑돌이를 야단치려고 했다. 지금은 ‘늑돌이 바보’가 된 남편이지만 어릴 때 늑돌이가 버릇없이 굴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때려서라도’ 버릇을 확실히 고쳐주고 싶어 했다. 힘으로 제압하고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를 힘으로 길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믿지 못하지만 개를 꽤 키워 본 언니도 개가 말을 듣지 않을 땐 신문지를 말아 콧등을 때려주면 된다고 내게 충고했을 정도다. 나는 작대기로 때려주려는 남편과 반항하는 늑돌이 사이에서 늑돌이를 무조건 안아 보호했다. 그 덕택에 늑돌이의 발톱에 할퀴고 남편의 헛방에 내가 맞기도 했다. 그때 나는 늑돌이에게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절대로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비록 늑돌이 마음을 다 알아듣진 못해도 최소한 나무라고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웬만한 늑돌이의 말썽에도 눈감아주고(한 살이 넘으면 오히려 너무 차분해져 안쓰러울 정도다) 나무라지도 않지만(내 눈에는 나무랄 일이 없다) 늑돌이가 휴지를 먹는 것만은 잘 보아내지 못한다. 늑돌이가 휴지를 입에 넣으면 나는 간식 같은 걸로 유혹해서 늑돌이의 입이 벌어지자마자 순식간에 휴지를 빼내곤 했는데, 한번은 내 손이 늑돌이의 이빨에 걸리고 말았다. 손이 좀 아픈 거야 별 거 아니지만, 늑돌이가 순간적으로 물듯이 반응하는 동작에 나는 우습게도 서운함을 느꼈다. 제 입에 들어온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동물의 본능적인 반응이라는 걸 알았지만, 한편 남편의 화가 이해될 정도로 섭섭하니 내 마음속에는 늑돌이는 언제나 내 말을 잘 듣는다는 환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후로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간식 따위로 유혹하는 얄팍한 속임수 대신 정면돌파하기로. 이제 늑돌이가 어쩌다 휴지를 물면 나는 늑돌이의 입이나 삐져나온 휴지 끝을 잡고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놔! 늑돌아, 놔야지!”하고 말한다. 이렇게 하면 처음엔 몇 번 속으로 그르렁대도 곧 입을 벌려 뱉어낸다.

나는 늑돌이에게 신뢰를 잃고 싶지 않다. 믿음을 얻지 못하면 버릇을 잘 들이겠다는 희망은 애초에 물 건너간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하나고 같은 말이다.

중성화 수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람의 감성이 이입된 개의 패션. 사람과 개의 유대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감과 맞먹는다. / 사진·중앙포토
처음 늑돌이를 키우면서 가장 고민했던 문제는 중성화 수술이다. 예방접종을 하러 간 동물병원에서는 수놈의 중성화 수술과 항문낭 수술을 동시에 하면 싸게 해준다고 선전했다. 중성화 수술은 수놈일 경우 물론 거세수술을 말하며, 암놈의 경우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이다. 새끼를 얻을 생각이 없다면 이 생식기관은 쓸모가 없고 괜히 병만 일으키므로 제거하는 게 좋다는 게 요즘 수의사들의 입장인 것 같다.

항문낭 수술은 항문 주변에서 분비되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하는 수술이다. 중성화 수술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항문에서 냄새가 난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라 ‘그 냄새가 어떻기에 수술까지 해야 하나?’ 의문을 가졌는데, 곧 알게 되었다. 늑돌이가 우리 집 마룻바닥에 그 냄새를 묻혔기 때문이다. 마른오징어 100마리에서 풍기는 냄새를 농축한 것과 맞먹는다고 하면 상상이 가려나. 다행히 냄새는 빨리 사라진다. 항문낭에서 나오는 액은 개가 똥을 눌 때 힘을 주면 자연스럽 게 분비되지만, 분비가 제때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짜줘야 한단다. 나도 늑돌이를 씻길 때 짜보려고 애써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자주 산책하며 똥을 누이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 같다.

문제는 중성화 수술이다. 유기견이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나는 개인적으로 개의 개체수가 느는 데에 반대하므로 늑돌이가 짝짓기하기를 원치는 않는다.(‘미안하다 늑돌아.’) 중성화 수술을 고민하던 시기, 나는 개를 만날 때마다 중성화 수술을 했는지 물어보곤 했다. 수술을 시킨 사람들의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언제나 강아지처럼 천진난만한 개를 원해서 수술시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데나 마운팅(교미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하고 심지어 손님들 몸이나 다리에 비벼대 수술시켰다는 사람도 있었다.

늑돌이가 처음 마운트 자세를 보여준 것은 아들이 친구 집 개가 쓰던 개 방석을 얻어왔을 때다. 솜으로 채우고 테두리가 조금 올라와 있어 개가 들어가 앉거나 자기에 좋은 그 방석을 늑돌이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들어가 벌러덩 눕기도 했지만 곧잘 그 방석을 껴안고 마운트 자세를 취했다. 늑돌이는 가뜩이나 천이나 실 같은 것을 좋아하는데, 세탁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암놈 냄새가 밴 그 방석을 끌고 다니며 수시로 마운트하고 물어뜯고 하며 신이 났다. 아들은 늑돌이가 방석을 끌고 다니는 것을 귀여워하다가, 내가 실상을 말해주자 뜨악해 하며 당황했다.

마운트보다 나를 성가시게 한 것은 방석의 실밥을 뜯어 솜을 죄다 파헤쳐놓는 것이었다. 마운트야 개의 본능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다. 사실 남 보기에 부끄럽지, 누구에게도 해 될 것은 없다. 그런데 솜이 집안에 널려 있는 광경은 보기만 해도 심란했다. 솜을 다시 넣고 꿰매주기 수차례. 더 이상 꿰맬 수 없을 정도로 너덜거리게 되자 늑돌이가 그토록 좋아하지만 어쩔 수 없이 몰래 버리고 말았다. 대신 메밀껍질을 채운 낡은 베개를 주었는데, 방석보다 단단한 이 베개가 마음에 들었는지, 산책하고 돌아오거나 밥을 맛나게 먹고 기분이 좋을 때면 한 번씩 올라탄다. 방석과 베개 덕분인지 늑돌이는 산책길에 만나는 암놈에게 올라타려거나 사람에게 제 몸을 문지르는 행동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중성화 수술을 시킨 사람들 말에 따르면, 수술 뒤에도 마운트가 아주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나는 마운트 자세를 하는 것이 하나도 거슬리지 않고(‘그래 늑돌아, 그렇게 해서라도 위로가 된다면 실컷 하렴.’) 늑돌이도 한두 번 흉내를 내다 마는 정도니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그러면 중성화 수술을 해야 할 이유는 ‘짝짓기하지 않으면 생식기관에 병이 잘 생긴다’는 우려뿐이다. 얼마 전 앤젤리나 졸리가 유방암 걸릴 위험에 대비해 미리 절제술을 받은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사람이 자신의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하든 나는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나 아닌 존재의 몸을 두고 내가 결정해야 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어떻게 하는 것이 늑돌이를 위한 것일까.

너무나 많은 떠돌이개가 배회하는 도시


▎초복날 손님이 벗어놓은 신발이 가득 들어찬 한 보신탕집. 서울의 보신탕집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중성화 수술에 대한 의견을 주변에 물어보면 대체로 남자들은 반대였다. 여자들은 ‘짝짓기도 못하면서 욕망에 시달리게 하는 것은 잔인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수의사들은 대체로 중성화 수술을 권한다. 효용성을 따진다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산부인과 의사들도 출산이 끝나면 자궁을 들어내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그대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무엇보다 개는 자신이 왜 이런 수술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고 그 과정을 치러야 한다는 게 나는 꺼려졌다. 신체 일부가 사라지는 경험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겪는 것은 끔찍할 것 같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어릴 때 수술 시킬 것을 권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한 살 이내 이 수술을 받을 경우 따르는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다는 보고가 있다.

이런 부담스러운 결정은, 개를 키우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안아야 할 몫이다. 각자 사정이 있고 생각이 다르니 무엇이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만 도시에 사는 사람이 개를 집안에 들이며 맞닥뜨리게 된 중성화 수술과 성대수술 등의 문제를 생각하면 개에게도 또 키우는 사람에게도 서글플 따름이다.

우리 동네를 돌아다니던 떠돌이 개 두 마리가 최근 사라졌다. 풀과 쓰레기가 무성한 공터에 머물던 암수 두 마리는 사이 좋게 지내다가 암놈이 먼저 개장수에 잡혀가고, 그 뒤로 수놈(늑돌이처럼 까매서 사람들은 검둥이라고 불렀다)은 골목 어귀에 앉아 있거나 고양이처럼 자동차 주변에 숨어 있었는데 지난 말복 즈음 사라졌다. 검둥이가 사라질 무렵, 개를 잡는 사람이 왔고 사람들의 항의에 “민원이 들어왔다”며 유기견 보호소에서 나왔노라고 했다 한다. 이즈음 늑돌이와 산책 중에 동네 어귀에 서 있는 작은 트럭을 지나다 늑돌이가 자꾸 냄새를 맡기에 보니 수상쩍은 도구가 차 안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 개장수의 트럭이었나 보다. 동네의 무서운 진돗개에게 물어 뜯기기도 했던 검둥이가 사라지자 평소 검둥이를 돌보아온 사람들은 다들 안타까워했지만 별 수가 없었다.

우리 동네는 물론 백사실 계곡에도 나는 못 봤지만 떠돌이 개가 몇 마리 있고, 이 도시에 너무나 많은 떠돌이개가 있다. 한해 5만 마리 정도의 개가 버려지고 고양이와 다른 애완동물까지 합하면 10만 마리 이상의 동물이 유기된다고 한다. 그래도 개를 사육해서 내다파는 사람들은 언제나 공급이 달린다고 하니, 결국 개 사육을 부추기는 것은 개를 기르고 싶어 하는 사람의 욕망이다.

강아지 한 마리쯤이야 쉽게 살 수 있고, 그만큼 또 쉽게 버리는 세상이 되었다. 도시가 재개발되어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 이사하면서 버리고 간 개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맴돈다. 휴가철 피서지에 두고 오는 개도 해마다 늘고 있고, 병이 나면 보험처리가 되지 않기에 아픈 개를 버리는 사람도 있다. 유기견은 보호소에 간다 해도 일정 기간 지나도록 입양이 되지 않으면 안락사를 당한다. 사육장의 좁은 우리에서 태어나 강아지 가게의 진열장 우리 속에서 살다 다시 보호소나 개장수의 우리 속에서 삶을 마감하기까지 개들이 느끼게 될 공포를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이 모든 개의 불행은,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어온 개들의 역사와 본능 때문이니 사람과 더불어 살도록 진화돼온 개의 생존전략이 곧 그들의 운명을 고통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셈이다. 늑돌이를 키우면서 알게 된 것은 축생의 삶은 ‘공포’라는 것이다. 처음 산책에 나선 늑돌이는 비닐봉지가 날아와도 깜짝 놀랐고, 지금도 못 보던 플래카드가 거리에 펄럭이면 화들짝 놀란다. 심지어 어릴 때는 내가 무심코 쓰다듬는 손길에도 움찔거렸다.

행복한 삶은 거기서 거기지만 불행한 삶은 다양하다고 했던가. 의학 실험실에서 시달리는 동물과 한정된 공간에서 고된 훈련과 통제된 생활을 견뎌야 하는 군견의 노후는 또 어떤가.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이들의 삶을 접하면 며칠 동안 심란하게 지내게 된다. 현재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누구인지 틀림없이 개 주인이었을 텐데 자동차 뒤에 개를 매달고 시속 80㎞ 달렸다는 뉴스 보도다.

자연과 동물과 사람을 관통하는 삶


▎크기가 작기로 유명한 멕시코산 치와와. 이 귀여운 개를 안으면 작고 따뜻한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 사진·중앙포토
나는 대학 때 키웠던 개 봄이가 산에서 뛰놀다 주택가로 이사 온 뒤 동네를 돌아다니다 쥐약을 먹고 괴로워하며 죽어가던 모습을 기억한다. 속이 불타는 듯 미친 듯이 집안으로 뛰어들어와(봄이는 마당에서 키우던 개였다) 피난처를 찾듯 피아노 밑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할 때 나는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졸음을 느꼈다. 평소 낮잠은커녕 밤잠도 없는 내가 봄이가 날뛰는 광경을 보자마자 대낮에 방으로 들어가 쓰러져 죽은 듯이 잠을 잤다. 봄이가 어떻게 숨을 거두었는지, 봄이의 시체를 어머니가 어떻게 거두었는지 나는 끝내 어머니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죽어가는 봄이를 한번이라도 안아주지 못한 나 자신을 나는 아직도 용서하기가 힘들다. 봄이가 죽은 뒤로 나는 아주 한참 동안 그 충격을 떨쳐내지 못했다. 나는 가끔 늑돌이의 죽음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내가 먼저 죽을지, 늑돌이가 먼저 죽을지 알 수 없지만 만약 늑돌이가 먼저 죽게 된다면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고 많이 슬퍼해주리라.

주인 없는 고양이는 도시를 배회하고(늑돌이와 다니며 알게 된 것은, 거리의 지배자는 고양이라는 사실이다), 버려진 개는 산으로 떠돈다. 북한산에 부쩍 늘어난 유기견들은 몇 세대를 지나면 들개로 변한다. 떼 지어 다니는 들개와 멧돼지는 먹이와 서식지를 두고 경쟁을 벌이게 되고-거기다 가을이면 사람들이 멧돼지가 잘 먹는 도토리까지 주워간다-멧돼지는 먹이를 찾아 주택가로 내려와 결국 총에 맞아 죽고 만다. 가뜩이나 개발로 야산은 점점 줄어드니, 앞으로 멧돼지와 들개가 등산객을 공격하고 주택가로 난입하는 사태가 더 자주 발생할는지도 모른다. 개를 버리고 야산을 개발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멧돼지 출현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개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먹기도 한다. 개를 먹는 문화를 크게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 자신은 개를 먹지 않는다. 개에게 특별히 깊은 유대감을 느껴서라기보다 육고기 자체를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기자 시절 미국의 쇠고기와 돼지고기 도축시설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돼지농장에서 아기돼지가 그렇게 귀여운 줄 처음 알았고, 미국의 도축 시설이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는 것을 인상 깊게 보았다. 좋은 시설만 골라서 보여줬겠지만, 도축 장면을 보지 못했으니 끔찍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출처를 모르는 고기는 사람들이 먹기에 부담스럽지가 않다. 만약 내가 먹는 고기의 동물이 어디서 나서 자라서 살다가 어떻게 죽는지 과정을 다 안다면 사람들은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먹지는 못하리라.

지난봄, 친구가 가게를 운영하는 파주에 들른 적이 있다. 늑돌이를 산책시키기 위해 가게를 나와 농지와 들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가운데 해가 저쪽 나무숲 너머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숲 너머에서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마리, 어쩌면 백 마리 이상의 개가 한꺼번에 미친 듯이 짖는 소리였다. 울부짖음 같기도 하고, 개들이 낯선 자가 올 때 쫓아내려고 짖는 두려움을 담은 소리였다.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올리다

늑돌이와 나는 동시에 발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해가 지고 있는 나무숲 쪽을 바라보았다. 숲이라고 해봤자 밭이 끝나는 곳에 울타리처럼 서 있는 나무들이다. 아직 잎이 나지 않은 성긴 나뭇가지 사이로 축사 같은 집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개들은 마치 비명처럼 울부짖는데, 컹컹대는 소리에 하울링처럼 길게 빼는 울부짖음까지…. 그야말로 공포에 질린, 절박하면서도 듣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긴장시키는 소리였다. 그러다 한바탕 울부짖음이 사그라들더니 오직 한 마리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백구가 사람 손에 들려 트럭에 실리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중에 친구에게 사육장에 관해 물어보니 역시 식용 개를 키우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 설명이 없어도 개들의 울부짖음(개를 선택할 때 모든 개가 흥분해서 비명을 지르는)과 선택된 개의 울음소리로 개들의 처지를 알았지만.

늑돌이와 산책 중에 하필 이런 장면을 맞닥뜨리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늑돌이도 놀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가슴 아픈 내용도 언제나 훈훈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물농장’ 같은 프로그램도 심란해서 잘 못 보는 나는 이날 의외로 이 광경을 잘 견뎌내고 있었다. 공포와 흥분이 내 안에서도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 개가 정해진 운명대로 가는 것이라면, 되도록 고통 없이 죽어 속히 사람으로 윤회하길. 꽤 간절하게 기도한 것 같다. 기도하고 난 뒤 마음이 많이 고요해진 걸 보면. 사육과 식용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내 눈앞의 세상이고, 그 가운데 윤회와 인과(因果)를 생각하면 애잔하면서도 마음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보살은 중생에게 연민을 느껴 함께 슬퍼하고 돕지만, 스스로는 그 슬픔으로 하나도 상처받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끝>

한경심 -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기자로 15년간 일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월간중앙> <이코노미스트>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 문화와 관련한 글을 썼다. 저서로 전통공예 장인들을 소개한 <우리는 어떻게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가>, 한식의 철학을 담은 <우리는 왜 쌈 싸먹고 비벼먹고 말아 먹는가>등이 있고 번역서로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 김병연의 한시를 소개한 (공역)이 있다.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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