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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비정신의 미학⑦] <유교유신론> 저술하고 퇴계 학맥 이은 해창 송기식 

공자의 차별 없는 ‘대동세계’를 꿈꾸다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일제강점기에 신학문 섭렵하고 선비 양성, 유교 혁신운동 이끌어… 부녀자에게도 경전 교육해 여성계 이끌 인재 키우자고 역설

▎경북 안동시 송천동 안동대학교 인근에 세워져 있는 하락정(河洛亭). 해창의 주손 송시양(왼쪽) 씨는 “이곳이 본래 봉양서숙이 있던 자리”라고 말했다.
안동 도산서원은 2002년 4월 당회(堂會)를 열어 여성에게 알묘(謁廟)를 허용키로 결정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도산서원의 상덕사(尙德祠)에 여성도 들어가 참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상덕사에 여성 출입이 허용되기는 1574년 도산서원 건립 이후 42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지는데 도산서원을 남존여비의 공간으로 두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그해 7월 대구 안심여중 여교사 15명이 상덕사에서 첫 알묘 의례를 했다. 벽을 허무는 혁신은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했다.

유교(儒敎)를 혁신하자는 움직임은 100년 전인 암울한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다. 유교의 유(儒)는 선비를 가리킨다. 선비정신으로 뭉쳐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운동이었다. 운동은 치열했다. 그 중심 인물은 안동에서 퇴계 학맥을 이은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해창(海窓) 송기식(宋基植, 1878∼1949) 선생이었다.

긴 폭염이 끝난 8월 26일 기자는 서울 금천구 시흥동을 찾았다. 안희찬(66) 금천문화역사포럼 이사장의 안내로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있었다는 자리를 둘러봤다. 삼성산터널을 지나 독산로 24길. 빌라가 밀집해 있는 주택가다. 한쪽에 빌라가 뜯겨나간 빈 터가 있었다. 담벽에 노란 표석이 보였다. ‘단군전터’라는 이름 아래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이 1930년 사재를 털어 이곳에 녹동서원과 단군전을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안 이사장은 “1972년 목격한 녹동서원은 왼쪽에 단군전이 있었다”며 “이 일대가 서원 터”라고 설명했다.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21대손인 안순환은 탁지부 관리를 거쳐 1909년 서울에 궁중요리집 명월관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 그는 회헌의 후손으로 쇠락한 유교를 부흥시키려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조선 500년을 지탱한 유교는 망국(亡國)과 함께 존재가 희미해지는 시기였다. 그는 유교 재건에 번 돈을 쏟아부었다. 1930년 거금 2만원을 들여 녹동서원을 짓고 팔도의 수재를 뽑아 유교를 일으킬 인재를 양성키로 결심한다.

서당에서 제자 기르다가 녹동서원으로


그 무렵 중국 산둥성 취푸(曲阜)의 공자 사당인 공묘(孔廟)가 국공(國共)내전 중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안순환은 유림을 향해 현지에 조선 위안사를 보내자고 제안한다. 전국 유림 8400여 명은 연명으로 그에게 임무를 맡겼다. 안순환은 모든 경비를 지원해 1931년 위문사절단을 파견한다. 대표단은 취푸에서 공자 77대손 공덕성(孔德成)을 만나 위로했다. 안순환은 이 일을 계기로 유림의 지지를 받는 ‘조선유교회’를 조직한다. 고종 황제의 아들인 의친왕(義親王)도 참여했다.

녹동서원 자리 뒤편은 나지막한 산이었다. 산자락은 ‘삼성산시민공원’이다. 공원 한쪽에 조선유교회의 내력을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안 이사장은 “본래 녹동서원에 있던 비가 서원이 사라지면서 길거리에 방치돼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안순환은 녹동서원에서 인재를 가르칠 석학을 팔도에서 찾았다. 퇴계의 고향이자 유림의 본거지인 안동을 빼놓을 수 없었다. 거기서 추천받은 인물이 경전은 물론 신학문까지 섭렵한 해창 선생이었다. 해창은 당시 안동시 남선면 신석리 인곡서당(麟谷書堂)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1932년 녹동서원의 양사(養士: 선비양성) 계획에 기꺼이 동참한다. 안순환과 뜻이 통했기 때문이다.

해창은 녹동서원이 건립되기 10년 전인 1921년 유교 개혁을 담은 <유교유신론(儒敎維新論)>을 저술했다. 내용 중 일부는 이렇다.

“(…) 열 번째는 부인 교육이다. 부녀자는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국문에 숙달하고 품행이 착한 사람을 뽑아 경전의 뜻을 강습케 하여 장래 여성계에 활동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유교 반정(反正)’의 한 방법이다. ‘반정’이란 본래의 바른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여성의 경전 교육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도산서원이 최근 여성에게 알묘를 허용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학교 교육도 강조했다.

“(…) 자제들은 모두 학교에서 신교육을 받고 강연회에 참석해 도덕성을 배양하며 여학생도 동일하게 교육받아야 한다. (…) 이런 것을 실행하지 않고는 유교를 유신(維新)하기 어려우리라.”

녹동서원을 연구한 황영례(53) 박사는 “해창은 일제 식민지 아래서 광복하려면 급선무가 인재 배양임을 역설했다”며 “유학자로서 그 지향점은 차별 없는 공자의 대동(大同)세계였다”고 말했다. 해창은 유교의 정신으로의 광복은 물론 장차 태평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안 이사장은 해창의 <유교유신론>이 만해 한용운이 1910년 발표한 <조선불교유신론>과 비견된다고 말했다. 불교유신론은 불교가 산속에서 사람들 곁으로 내려오고 승려도 결혼이 허용돼야 한다는 등의 혁신적인 주장을 담았다.

해창의 <유교유신론>은 녹동서원 양사의 이론적 바탕이 됐다. 녹동서원은 1933년 ‘명교(明敎)학원’이란 이름으로 유교를 일으킬 인재 20명을 팔도에서 골고루 선발했다. 대우는 파격적이었다. 학생들에게 매월 7원20전의 식비와 교과서·학용품 등 교육비 일체를 지원했다. 제1기 시험엔 전국에서 152명이 지원해 7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보였다. 신입생은 모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이미 공부한 이들이었다. 황영례 박사는 “명교학원은 당시 공립인 명륜학원 경학원(현 성균관대학교의 전신)과 쌍벽을 이룬 사학(私學)이었다”고 평가했다.

“공자의 위대한 뜻 누구나 알도록 국역해야”


▎녹동서원의 역사가 새겨진 ‘조선유교회 기념비’. 해창의 손자 송시우(왼쪽) 씨가 안희찬 씨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해창은 교수부장 역할을 맡았다. 그는 녹동서원에서 경전 국역과 신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1기생으로 명교 학원에 입학한 심상석(1909∼1986)은 194일간의 유학 기록인 <녹동일기>를 남겼다. 한문으로 쓴 일기엔 당시의 수업 내용과 일과가 세세히 기록돼 있다. 자칫 묻힐 뻔했던 유교혁신 운동의 타임캡슐이다. 해창 관련 기록은 곳곳에 등장한다.

“(…) 반드시 경전을 국문으로 해석한 연후에야 농민이나 여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 수 있는 것이다. 국문으로 가사를 지었으니 (…) 요즘 사람을 힘써 나아가게 하는 방도가 될 것이다.”

해창의 주장이다. 그는 “대동세계와 같은 공자의 위대한 뜻이 한문으로 돼 있어 일반인이 알지 못한다”며 “성현의 뜻을 고루 전달하기 위해서도 경전 국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해창은 사서(四書)를 직접 국역했다.

기자와 현장답사를 동행한 해창의 손자 송시우(76) 씨는 “국역한 사서는 당시 한 선비가 빌려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며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라고 안타까워했다. 조선유교회는 그래서 작문과 자료 등에 국한 혼용을 권장했다. 해창이 신학문 수용을 강조한 대목도 일기에 나온다.

“(…) 아침에 송 선생이 우리에게 훈시하시기를 고금(古今)의 일에 능히 밝은 연후에야 선비가 될 수 있다. 옛 일을 잘 알고 요즘 일을 모른다면 과거에 묶여 쓸 데가 없고, 요즘 일은 잘 아는데 옛 것을 모른다면 경박해 도를 잃게 되니 이에 제군들은 마땅히 고도(古道)에 밝고 시무(時務)에도 통해야 할 것이다.”

해창은 당시 유입된 루소(盧梭)의 민약론, 다윈(達爾文)의 진화론, 마르크스(麥略士)의 유물론 등 서구 학설도 폭넓게 접했다. 명교학원의 교과목도 경전 이외에 국어·산술·공민에 영어까지 포함됐다. 시대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강매는 신 학문을 담당했다.

해창은 유교를 부흥시키는 방법으로 복일(復日, 일요일) 의식도 주장했다. 유교가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려면 기독교에서 신자들이 교회에 모여 예배하듯 일요일마다 한데 모여 성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교학원은 일요일마다 조선유교회 서울본부에서 복일 의식을 철저히 거행했다. 의식은 염성(念聖) 2분 뒤 찬화문을 복창하고 강연 등으로 이어졌다. 향사 때나 두어 차례 향교에 모이는 침체된 유교를 벗어나는 대안이었다. 명교학원 졸업생은 이후 고향에 내려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한동안 복일 의식을 실천했다. 2기 졸업생 이수락은 대구향교에 경전 강습소인 홍도(弘道)학원을 설립했다. 홍도학원은 이후 30여 년간 대구에서 유학을 가르치고 전파하며 유교 부흥에 앞장섰다.

안순환은 해창의 <유교유신론>을 그대로 수용했다. 녹동서원은 유교혁신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개혁은 순탄치 않았다.

유교혁신 끝내 안동 유림의 벽에 부딪히다


▎1. 1933년 명교학원 제1기 수료생들이 녹동서원 앞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맨 뒷줄 왼쪽에서 첫째가 송기식. / 2. 1921년 송기식이 저술한 <유교유신론>. 국한문 혼용으로, 녹동서원의 이론적 바탕이 됐다.
해창은 3년 만에 안동으로 돌아왔다. 1935년 그도 고향에 유교회 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안동향교에서 유림을 모아 놓고 취지를 설명했다. 도산서원과도 의논했다. 많은 이가 공감했으나 끝내 반대에 부딪혔다. 유교 개혁은 안동 유림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유교유신론>의 실험이 미완에 그친 것이다. 이완재(85) 영남대 명예교수는 “새 시대에 맞게 유교 혁신을 시도한 것 자체가 유교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 것은 분명 성과”라고 말했다.

8월 31일 취재팀은 해창이 태어난 안동시 송천동을 찾았다. 송천동에는 그가 만년에 지은 하락정(河洛亭)이 남아 있다. 안동향교·안동대학교와 지척이다. 해창의 손자인 송시양(67) 주손이 내력을 설명했다.

1895년 명성황후(민비) 시해로 안동에서도 왜적을 토벌하자는 의병이 일어났다. 해창의 조부 송구현은 지역 책임자인 부통을 맡았다. 당시 안동지역의 거유(巨儒)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가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당시 19세였던 해창은 글이 뛰어나 의병장 막하에서 대장영 서기로 종군한다. 송시양 주손은 “그때 의병들이 우리 집에 숙식하며 일주일간 머물렀다는 말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의병 활동은 오래지 않아 해산됐지만 해창은 그때부터 항일지사들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게 된다.

이듬해인 1898년 해창은 퇴계 학통을 잇고 의병장을 지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로 들어간다. 여기서 후일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등과 동문 수학한다. 해창은 20년 선배인 석주의 애국심에 감동을 받았다.

2년 뒤 스승이 작고하자 해창은 7년 동안 문집 간행에 앞장선다. 1905년에는 퇴계 후손으로 의병장을 지낸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문인이 된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 향산은 울분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해창의 세 스승은 모두 대학자이자 의병장을 지낸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석주는 국가 위기를 극복할 대한협회를 만들고, 류인식 등은 안동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 학교를 설립했다. 해창도 선배들의 일을 도우면서 인재양성에 나설 것을 다짐한다. 교육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909년 그는 근대식 학교인 봉양서숙(鳳陽書塾)을 건립했다. 현재 하락정이 들어선 위치다. 봉양서숙은 협동학교·보문의숙·동화의숙과 함께 안동의 4대 사숙(私塾)으로 청년 교육에 전념했다. 1911년 해창도 스승을 따라 식음을 전폐하고 순국을 맹세했다. 그때 조부가 “수치를 참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장부의 도리”라고 하자 해창은 그 길로 서숙을 증축하고 인재 배양에 더욱 매진한다.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자 울분 속에 세상을 지켜보던 해창은 협동·보문·동화 등 3개 학교와 만세운동을 약속했다. 3월 18일 해창은 안동에서 봉양서숙 제자, 송연식·송장식 등 친지들과 함께 만세 대열의 선두에 선다. 그는 그날로 일경에 체포됐다. 해창은 팔·다리가 꺾이고 뼈가 드러나는 고문을 당하고도 시위 이유를 묻자 “밤이 깊어 새벽이 오면 우는 것은 닭의 생리”라고 태연히 말했다고 한다. 해창은 선동죄로 2년형을 받고 안동·대구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감옥 안에서 조병국 지사가 기독교를 전파하자 수형자 다수가 경도됐다고 한다. 그걸 보고 해창은 <중용>을 암송하고 해설하며 유교의 참 뜻을 설파했다. 같이 수감된 제자들에겐 암송으로 경전을 강의했다. 1920년 석방된 해창은 이후 저술과 교육에 열중한다. 그 무렵 쓴 것이 전통 유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혁신을 주장한 <유교유신론>과 <한문훈몽(漢文訓蒙)> <격치도(格致圖)> <대동광의(大同廣義)> 등이다. 이 가운데 <대동광의>는 석주가 초고를 쓴 뒤 북간도로 떠나면서 해창이 탈고한 저술로 전해진다. 안병걸(62) 안동대 교수는 그의 사상에 대해 “유교의 근본 취지에 충실하면서도 시대와 어긋나는 것은 과감하게 혁신을 주장한다”고 분석했다.

“1만 마리 말이 달려도 한 발 들여 놓을 여지 있어”

1922년 해창은 봉양서숙을 아우인 송연식에게 맡긴다. 만세 사건 이후 해창이 일경의 요시찰 인물이 됐기 때문이다. 송천동 앞에는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반변천이 흐른다. 해창은 3년 뒤 안동팔경의 하나인 반변천 선어대의 건너편에 인곡서당을 지었다. 하락정도 본래 그곳에 세워졌다. 해창은 거기서 녹동서원으로 초빙된 것이다.

1990년 해창에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은 구학문의 전당인 안동향교와 신학문을 연구하는 안동대학교가 모두 송천동에 자리 잡고 있다. 해창이 일찍이 강조한 신구 학문의 조화가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해창은 녹동서원 제자들이 유교 혁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 마리 말이 달려가는 중에도 오히려 한 발을 들여 놓을 여지가 있다….” 어려움이 닥쳐도 정신을 지키면 언젠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스승 척암이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의 말을 인용해 들려준 가르침이었다. 개혁은 그렇게 어려웠다.

-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박스기사] 인재 양성하는 일에는 ‘난형난제’ - 형은 독립운동으로 충(忠)을, 아우는 가솔을 이끌며 효(孝) 실천…대대로 곡식창고를 열고 전답을 팔아 빈민구제에 나서


▎1990년 정부가 추서한 송기식의 건국훈장 애족장. 그는 1919년 안동지역의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혁신 유학자’ 해창 송기식 선생은 본관이 진천(鎭川)이다. 해창의 선대는 벼슬보다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서왔다.

해창의 5대조 송서린은 1814년 큰 흉년이 들자 곡식창고를 열어 많은 사람을 구제했다. 그 공으로 한성좌윤의 증직을 받았다. 해창의 고조 송덕영도 1836년 다시 흉년이 들자 창고를 열고도 부족해 전답을 팔아 빈민 구제에 힘썼다고 한다. 대를 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것이다. 해창의 증조 송재기는 모친이 뒷머리에 종기가 나자 입으로 빨고 백초탕을 만들어 완치시켜 영가효행록에 올랐다.

해창은 문사들과 폭넓게 교유한 조부와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아버지 아래에서 유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해창은 다섯 형제 중 맏이였다.

해창에겐 동지 같은 든든한 아우가 있었다. 넷째인 봉산(鳳山) 송연식(宋淵植, 1893∼1968) 선생이다.

앉아 글 읽는 데만 도가 있지 않다

1919년 해창이 봉양서숙 제자들과 안동에서 3·1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자 아우 봉산도 함께 했다. 그러자 해창은 열다섯 살 아래 봉산을 타일렀다. “형제가 몸을 바쳐 나라를 위하는 건 의리는 옳으나 인정에는 어긋나는 것이니 자네는 집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내 뜻을 편케 해다오.”

그때부터 봉산은 해창을 대신해 어른을 받들고 조카들을 돌보는 일을 책임졌다. 봉산은 해창에 이어 척암 김도화의 문하에 들어갔다. 형제는 스승이 같았고 우애는 돈독했다. 해창이 만세사건으로 대구감옥에 있을 때는 의논할 일이 생기면 봉산은 수백 리 길을 하루 사이 도보로 오갔다. 해창은 출옥 뒤 일경의 요시찰 대상이 되자 봉양서숙 운영을 29세 봉산에게 넘겼다. 봉양서숙의 명성은 그 뒤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해창과 봉산에겐 ‘난형난제’란 수식어가 붙었다. 그때부터 형제는 반변천 남쪽에 인곡서당, 북쪽엔 봉양서숙 등 동시에 두 서당을 운영했다.

봉산은 마을에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창설하고 농경에 필요한 수리시설을 추진하는 등 공익을 앞세운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주력했다. 경제도 강조했다. 그는 “선비가 재물 모으기에 급급해선 안 될 일이지만 몸소 호미를 잡더라도 부모 섬기고 자식을 기르는데 구차함이 없는 것이 곧 도(道)일 것”이라고 말했다. 앉아 글 읽는 데만 도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광복 뒤 닥친 이념의 혼란은 이 집안을 비켜가지 않았다. 해창의 자제도 포함됐지만 형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봉산은 장수가 군사를 다루듯 사랑과 위엄으로 집안을 추슬렀다. 큰집이 어려워지자 넷째지만 4대를 모시는 제사도 대신했다. 또 형님이 남긴 글들을 모아 <해창문집>을 낸 이도 봉산이었다.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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