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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살롱] ‘세계 톱100 아트컬렉터’ 선정된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 

“예술은 삶 자체! 우리 모두가 아티스트입니다” 

글 김포그니 기자 pognee@joongang.co.kr / 사진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작은 매점을 운영하던 청년, 연매출 3500억원 규모 사업가로 ‘승승장구’… 남다른 안목(眼目)으로 세계적인 미술가 발굴한 데 이어 서울·제주에 갤러리 세워 운영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의 작품 컬렉팅 기준은 뚜렷하다. 그는 “제아무리 작품이 아름답다 해도 작가의 삶이 묻어나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1978년 작은 매점을 운영하던 한 청년이 20여 년 만에 천안의 낡은 버스터미널을 연매출 3500억원 규모의 대형 백화점·멀티플렉스로 일궈냈다. 사람들은 이를 ‘성공’이라 불렀다.

그랬던 그가 국내외 주요 미술품을 수집하더니 1999년 ‘씨킴(CI KIM)’이라는 예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자 “천안 ‘졸부’가 감히 예술을 넘본다”, “미술계에 괴짜가 나타났다”는 눈총이 쏟아졌다. 김창일(65) 아라리오 회장의 얘기다.

그러나 해외 미술계의 반응은 달랐다. 최근 세계적 권위의 미술매체 ‘아트넷(Artnet)’은 김 회장을 ‘세계 톱 100인의 아트컬렉터(art collector)’로 선정했다. 한국인으로는 그가 유일하다.

김 회장은 1981년 사업차 LA현대미술관 전시를 우연히 접한 후 국내외 미술품 수집을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의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 영국의 현대미술가 데미언 허스트, 독일의 현대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한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등 유명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중국·인도·동남아 지역 신진작가의 작품까지 총 3700여 점을 모았다.

매년 작품 구입비로 들인 돈은 약 20억~30억원. 평균적으로 3~4일에 한 작품씩 구입한 셈이다. 수집한 작품을 보관하는 3000평 규모의 수장고는 연간 5억원에 달하는 유지비가 든다.

미술관 운영은 업계에서 ‘돈 먹는 하마’로 불린다. 말 그대로 유지비용은 높은데 반해 수익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2014년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건축가 김수근의 ‘공간’ 사옥을 매입해 미술관을 개관했다. 그의 ‘아라리오’ 갤러리는 천안, 서울에 이어 최근 중국 상하이까지 진출했다.

“최고의 걸작만 구입하라”


▎김창일 회장이 아티스트 ‘씨킴’으로 작업하는 제주도 스튜디오. 그는 1999년부터 현대미술가로도 활동해왔다. / 사진·중앙포토
‘뛰어난 사업가’, ‘미술계 괴짜’. 이들 수식처럼 김 회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그는 “장사꾼이 돈이나 벌지, 왜 허튼데 돈을 쓰냐는 비아냥도 들었다”고 말한다. 돈을 좇아야 하는 사업가가 예술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8월 30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그를 만났다. 낙서가 그려진 헐렁한 티셔츠에 모자를 쓰고 나타난 김 회장의 모습은 사업가가 아닌 자유로운 예술가에 더 가까워 보였다. 덥수룩하게 난 흰 수염 사이로 다소 낯을 가리던 그는 ‘꿈’, ‘삶’, ‘예술’, ‘직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만큼은 상기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티셔츠가 참 특이한데요. 평소에도 이렇게 입으시나요?

“옷을 자유롭게 입은 지 꽤 오래 됐어요. 처음 사업 시작했을 때는 매일 아침 면도한 뒤 깔끔하게 하얀 와이셔츠를 입었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다르게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허름한 모자를 쓰고 티셔츠를 입어봤는데 그게 퍽 마음에 들었어요. 옷차림처럼 생각도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죠. 특히 모자는 제게 ‘투명 망토’같아요. 무의식에 희미하게 내재돼 있는 열등감을 가려주거든요.”

성공한 사업가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트컬렉터인데, 열등감이라뇨?

“어릴 때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했어요. 사회성이 부족했죠. 혼자 있는 게 편해서 고독을 택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제 모습이 낙오자처럼 느껴졌어요. 그런 성격은 우리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캐릭터잖아요. 열등감이 자연히 생길 수밖에 없었어요.

다행히 군대가 인생에서 마지막 단체생활이었어요. 사업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적응할 수 있었죠. 돌아보면 열등감이 꼭 나쁜 건 아니었어요. 종국에는 애써 사회성 있는 척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자고 마음 먹게 됐어요. 나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된 계기였던 셈이죠.”

와이셔츠를 입고 다녔을 당시의 삶은 어땠는지요?

“예술을 알기 전의 삶은 마치 전쟁 같았어요. 사업가로서 생존해야 했으니까요. 아주 작은 티끌에도 모든 게 어긋날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규칙적으로 살았어요. 물질적 성과는 있었지만 어느 순간 공허해지더라고요. 그러다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됐죠.”

어떤 경험을 했는지요?

“사업차 우연히 LA현대미술관과 뉴욕 인근에 위치한 미술관 ‘디아 비컨(Dia Beacon)’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일종의 ‘무지개’를 봤거든요.”

무지개를 봤다고요?

“네. 자연의 아름다움을 접하고 ‘살아있다’는 감동을 느꼈다는 사람이 많잖아요. 저 역시 어린 시절 비 온 뒤 갠 하늘에 뜬 무지개를 보고 황홀경에 빠진 경험이 있죠.

그런데 그 미술관에서 제 인생의 두 번째 ‘무지개’를 본 거예요. 처음으로 현대미술을 접하고는 자연에서나 느껴봤던 벅찬 기분이 요동쳤어요. 아마도 그때였을 거예요. 미술관을 짓겠다고 마음먹은 건.”

왜 하필 미술관을 짓겠다고 생각했나요?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이 안 들었어요. 꽃이 화려해도 향기가 있어야 진짜 꽃이잖아요. 성공에만 몰두했을 때는 제 삶이 향기를 잃은 꽃 같았어요.

황당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예술을 보고 눈이 번쩍 뜨인 거예요. 이런 빛나는 경험을 타인에게도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트컬렉팅’을 하게 된 것도 미술관 전시를 위해서예요.”

10억원 상당의 미술품, 5분 만에 구입한 이유


▎김창일 회장이 제주도에 있는 탑동시네마에서 전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서울·제주 등에 미술관 네 곳을 개관한 그는 “3700여 점의 컬렉션 중에서 전시하지 않을 것을 빼는 게 어려웠다”고 말했다. / 사진·중앙포토
아트컬렉터는 어떤 일을 하지요?

“말 그대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일을 해요. 많은 아트컬렉터가 작품의 미적·투자적 가치를 살펴 (작품을) 구입하죠.”

어떤 기준을 두고 미술품을 구입하나요?

“사람과의 만남에도 연이 있듯이 작품도 마찬가지에요. 꼼꼼히 따져보는 것도 좋지만 저의 경우 미술가의 유명세보다 직관에 따르는 편이에요. 무명(無名)의 신인이더라도 내면을 이끄는 작품이 있거든요? 그 찰나의 교감이 이뤄지면 무조건 그 작품을 구입해요. 그 시간이 5분도 채 안 걸릴 때가 있어요.

잘 알려진 미술가의 작품을 사 모으는 분도 있던데. 저는 유명 미술가의 작품 중 최고의 걸작만 구입하는 걸 선호해요.”

걸작이란 무엇일까요?

“제아무리 작품이 아름답다 해도 미술가의 삶이 묻어나지 않는다면 (작품을) 신뢰할 수 없어요. 책에서 배우고 남에게 들은 얘기로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없듯이 작품에는 오직 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고뇌가 담겨 있어야 해요.

실제로 유명 미술가의 작품이라고 항상 값이 오르는 건 아니에요. 본인이 영감을 느껴 만든 첫 작품만이 가치 있어요. 이후 자기복제로 만들어진 작품은 값이 오르기 힘들어요.”

“작품 구입을 결정하는 데까지 5분이 채 안 걸린다”는 그의 선택은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2002년 약 7억원에 산 독일 미술가 지그마 폴케의 작품 <서부에서 가장 빠른 총>은 2010년 그의 사망 이후 약 110억 원을 호가하고 있다.

10억원이 넘는 작품을 불과 5분 만에 구입했다면서요. 망설였던 적은 없었나요?

“머리가 아닌 가슴을 따르면 망설임이 없어요. 나중에 남 탓하기 싫어서 작품 구입 시 타인의 조언에도 귀 기울지 않아요. 오로지 제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직관의 힘을 믿습니다.

2002년 영국의 미술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꽤 거액을 주고 구입했는데 당시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작가라 모든 이가 반대했죠. 그런데 지금 한번 보세요. 데미안 허스트는 현대미술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습니다.

때문에 좋은 작품이라면 값에 구애받으면 안 돼요. 돈을 더 주고서라도 살 수 있어야 해요. 예술이야말로 ‘시간’의 가치를 고스란히 담는 분야거든요. 좋은 작품은 반드시 값이 오르게 돼 있어요.”

항상 ‘감’으로만 작품을 구입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글쎄요. 정말 제 느낌이 통했을 때만 샀어요.(웃음) 아, 작품 하나를 사면 화풍이라든지 배경에 대해서 공부합니다. 덕분에 미술사에 대해 조금씩 깊이가 생긴 것 같아요.”

그는 “좋은 작품은 놓치지 말라”고 강조했다. 영국의 미술가 제이크 채프먼·다이노스 채프먼 형제의 작품 <독일병정들>은 홍콩아트페어 화이트큐브에서 약 11억원을 주고 샀는데 나중에 약 89억원까지 올랐다. 이 작품을 두고 당시 김 회장이 제이크에게 “사겠다”고 했더니 “다른 사람이 먼저 15% 디스카운트(할인) 조건으로 사기로 했다”고 했다.

이에 김 회장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노디스카운트.” 할인 안 받고 사겠다는 그의 말에 작품 <독일 병정들>은 단 5분만에 주인이 바뀌었다. 김 회장은 “작품에 대해선 경의를 가져야 한다. 할인이 웬 말인가?”라며 “세월이 지나면 당시 할인율은 아무 의미가 없다. 좋은 작품은 마치 와인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가 높아진다”고 말했다.

오래된 작품이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요?

“썩 어울리는 비유는 아니지만 위스키도 10년 산, 40년 산과 엄청난 차이가 있잖아요. 예술도 시간의 연속선 상에서 존재하고 점차 역사가 돼요. 한 작품이 오랜 시간을 견뎌내 하나의 역사로 오롯이 서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래서 작품을 돈벌이 수단으로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희 ‘아라리오’ 갤러리를 찾는 미술가가 상당수 있어요. 아무리 유명한 분이라도 순수성이 안 느껴지면 함께 작업하지 않아요.”

내 마음의 스승은 프랑스 미술가 마르셀 뒤샹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김창일 회장이 자신의 작품을 모아놓은 코너에 서 있다. 그는 “버려진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 사진·중앙포토
좋은 작품을 선택하기 위해 평소 어떤 노력을 하세요?

“국내 해외를 막론하고 좋은 전시는 다 보러 다녔어요. 900번 가까이 비행기를 탔죠. 여행 다녀서 좋겠다는 분도 있는데, 저는 그림 보는 것 외엔 다른 즐거움이 없어요.(웃음) 낮에는 전시장에서 작품을 보고 밤에는 숙소에서 낮에 본 것을 복기해요. 그렇게 작품을 제 안에 담습니다. 굉장히 즐거운 일입니다.”

현대미술 위주로 작품을 구입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계획한 건 아니었는데 자연스레 그렇게 됐어요. 저의 컬렉션 순서를 보면 기존의 미술사와 흐름이 비슷해요. 서정적인 회화풍에서 시작돼 실험 정신을 담은 현대미술로 넘어옵니다.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지만 오직 작품과 나, 이렇게 독대하다 보니 작품의 아우라가 제게 일종의 미술사를 가르쳐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가 1990년대에 수집한 작품은 서정적 회화가 돋보이는 독일 ‘라이프치히’파의 미술가 토비아스 레베르거 등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현대미술로 분류되는 영국 미술가의 작품을 주로 수집했다. “새로운 세기가 열리던 시점이라 발칙한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현대미술에 자연히 끌렸다”고 그는 말한다.

이어 김 회장은 “입체파, 인상주의 등 어려운 말이 많은데 뜯어보면 화풍을 설명하는 단어”라며 “과거에는 화풍이 중요했지만 현대에는 작가의 철학이 더 각광받을 것이라 예상했다”고 말했다.

최근 눈여겨보고 있는 작가가 있다면요?

“볼펜과 신문지를 주재료로 쓰는 현대미술가 최병소와 일본의 현대미술가 코헤이 나와를 좋아해요.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정신이 멋있어요. 최근 코헤이를 지원하게 된 것도 그 신선한 발상 때문이죠.”

미술 사랑은 작품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1999년부터 현대미술가로도 활동해왔다. 2년에 한 번씩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직접 예술활동에 뛰어들었던 당시 국내 미술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사업만 하던 사람이 무슨 그림이냐?”라는 말도 나왔다.

사업과 예술을 겸하는 것을 두고 평이 엇갈리는데요.

“예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세간의 오해를 받은 건 사실이에요. ‘졸부가 그림 그린다’는 얘기도 나왔죠. 원체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갑작스러운 시선을 받으니 힘들었어요. 그러나 곱씹어보면 삶 자체가 바로 예술 아니겠어요?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있다면 우리 모두가 예술가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학교에서 (예술을) 배우진 않았지만 외식업에 종사하며 수많은 레스토랑을 새로 지었어요. 일종의 작품 활동을 한 겁니다. 매일 새벽녘 어둠 속에서는 찰나의 의미 있는 생각을 메모해왔죠. 내면의 드로잉을 했다고 말하고 싶군요. 이렇듯 현대미술은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아요. 예술가 뒤샹의 가르침을 따랐어요.”

마르셀 뒤샹. 프랑스의 혁명적인 예술가다. 전통적인 제작 방식에 반기를 든 그는 “예술가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면 일상 용품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례로 그는 자전거 바퀴, 남성 소변기를 주요 작품으로 선보여 미술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했다.

마르셀 뒤샹에게서 어떤 영감을 받았나요?

“뒤샹이 없었다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지 못했을 거예요. 식당을 꾸미는 게 설치미술이고 식당 운영은 퍼포먼스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예술이 있는 곳에 먹고 즐길 수 있는 곳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미술관은 품격 있고 푸드코트는 천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심신을 채우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합니다.

예술활동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17년이 됐어요. 사업가로서 성공하고 ‘안목’을 가진 아트컬렉터가 되는 일은 쉬웠어요. 반면 아티스트로 사는 것은 주변 반응을 민감하게 의식하느라 힘들었어요. 다행히 제가 보는 사람, 사물 등이 곧 예술이라는 걸 깨닫고 나선 자유로워졌어요. 앞으로 작품에 제 삶을 녹이는 데 전념하고 싶어요.”

아트컬렉터, 예술가, 사업가로서 자신의 장단점을 말한다면요?

“굳이 구분하고 싶지 않군요. 이 모든 직업이 하나의 삶 속에 연결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생각해요. 저 같은 사람이 세계적인 아트컬렉터가 되고 미술관을 지었다는 건 결코 흔한 일은 아니죠. 이런 특별한 경험이야말로 예술이 가진 힘이 아닐까요.”

세 직업이 서로 영향을 주는지요?

“사업가로서의 재능이 미술관에 필요한 요소를 개발하는데 도움이 돼요. 갤러리 옆에 레스토랑을 만드는 식이죠. 전시 관람 뒤 커피를 마시며 자신이 봤던 예술을 음미하는 겁니다.

돈만 좇는 사업은 사람을 메마르게 합니다. 사업도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예술과 함께 가야 해요. 그래서 천안터미널에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 아르망 페르난데스의 작품을 설치했어요. 많은 시민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해요. 이렇게 사업에도 ‘향기’가 있어야 고객이 다가와 꿀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해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 있는 김창일 회장의 스튜디오. 그는 “미래세대에 필요한 가치는 예술에 있다”고 말했다. / 사진·중앙포토
직업이 여러 개라 바쁠 것 같은데 컨트롤하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꼭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최대한 심플하게 사는 게 철칙이에요. 그래서 작품 활동할 때는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지내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고 식사도 직접 해결해요. 과거에는 머릿속이 아이디어로 너무 복잡해 터져버릴 것 같았는데 이제는 단순해졌어요. 가장 ‘단순한 게 온전한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저도 점차 성숙해져 가고 있나 봅니다.”

주로 어떤 작품을 만드나요?

“버려진 사물을 활용한 작업을 많이 해요. 사물에도 생명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제주도 돌담에 핀 야생초, 선인장 바위틈에서 자란 야생화 무리의 선연함….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이런 생명력이라고 생각해요.

드로잉도 그런 관점에서 하죠. 매일 새벽 4시30분이면 일어나 거르지 않고 드로잉 작업을 하고 있어요. 뭔가 멋진 것을 그려내려고 하지 않아요. 사업 구상이나 아이디어를 적어요. 그 순간의 나의 생존, 살아있음을 기록하는 거죠.”

오래된 냉장고, 버려진 신발, 녹슨 건축 자재 등이 그의 작품 소재로 쓰인다. 버려진 사물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은 버려진 공간으로 이어졌다.

2014년 김 회장은 제주도의 한 폐건물을 개조해 미술관을 열었다. 과거 소규모 영화관, 모텔로 사용됐으나 경영 악화로 8년간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이곳에 10개국 작가 21명의 작품 72점이 채워졌다. 독일의 신표현주의 거장 지그 마르 폴케의 5m에 달하는 대형 페이팅 등을 볼 수 있다.

30여 년 전 미술관을 세우겠다는 꿈이 이뤄졌는데요. 남은 목표가 있는지요?

“‘Life is short, art is long,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미술관 5곳을 오픈했어요. 사람들은 말해요. ‘그렇게나 미술관을 지어댔으니 이제 당신 꿈을 다 이룬 것이 아니냐’고요.

꿈에 끝이 어디 있을까요? 꿈은 또 다른 꿈의 시작이에요. 많은 이에게 현대미술을 소개할 수 있는 더 좋은 미술관을 만들고 싶어요.”

시련도 쾌락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라

목표 의식이 확고하시네요.(웃음)

“그런가요?(웃음) 미래세대에게 필요한 가치는 예술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미술관이 반드시 필요할 겁니다. 제 직관을 믿고 따르려 해요.

일례로 과거 천안에 2만 평 규모의 터미널을 만든다고 하자 다들 반대했어요. 터미널에 14개 영화관이 있는 멀티플렉스를 만든다고 했을 때도 다들 ‘8개관이면 족하다’고 했지만 저는 듣지 않았어요. 영화관 지을 때도 대기업에서 하듯 해외 샘플을 떼다 중국 현지공장에서 카피 제품을 주문하는 방식을 차용하지 않았죠. 관객에게 최고만을 선사하고 싶어서 의자는 미국, 카펫은 뉴질랜드에서 공수해왔어요. 그 과정이 무척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잘한 일이라 생각해요.”

그는 “한번뿐인 인생이지 않은가? 남들이 무모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가슴이 이끄는 대로 꿈을 좇아라”라고 강조했다.

최근 홍콩에서 아트페어가 성황리에 끝났는데요. 앞으로 어느 국가·도시가 세계미술을 선도할 것으로 보세요?

“중국 상하이가 앞으로 전 세계 미술을 이끌어갈 것 같아요. 현재 아시아 작가 대부분 상하이에서 전시를 하고 싶어해요. 홍콩이 다소 서양화 됐다면 상하이는 아직 무궁무진한 느낌을 주죠.”

예비 미술가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일희일비하지 마세요. 시련도 쾌락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미술가라면 철학이 있어야 해요. ‘내가 누군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영어를 공부하세요. 세계인과 대화할 줄 알아야 해요. 자신이 왜 이 작품을 그리게 됐는지 최소한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도 필요해요. 관객 입장에서는 작품과의 시각적 교감도 중요하지만 미술가와의 대화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될 수도 있어요. 늘 시도하고 뭐라도 해보세요. 적어도 어제보다는 앞으로 나아가 있을 겁니다.”

김 회장의 조언은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생(生)을 떠올리게 한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인생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그 시간이 바로 자기 자신을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프루스트는 20년이라는 시간을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쓰는데 다 바쳤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이후로 가장 위대한 작가가 됐다. 이 책은 바로 그 유명한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어렵게 말하는 건 쉽지. 그런데 쉽게 설명하긴 참 어려워.” 30여 년간 인문학을 가르친 한 노(老)교수가 최근 교단을 내려오며 이같이 말했다. 이를테면 대학생보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게 더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일까? “인간의 내면을 다룬 형이상학적 지도’, ‘세계를 반영한 거울’ 예술을 둘러싸고 내려진 정의야 셀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게 물어봤다. 예술이 뭐냐고. 김 회장은 왜 이제서야 그 질문을 하느냐며 반갑게 답해왔다. “예술은 삶에 대한 모든 것이죠. 당신과 나. 우리 모두가 예술입니다.”

- 글 김포그니 기자 pognee@joongang.co.kr / 사진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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