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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9)] 이색(2) 어디에 있느냐가 사람의 높이를 결정한다 

“나라에 몸바치고자 하면 어디서나 노고는 같은 법”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원에서 벼슬하면서도 늘 고려 생각, 누구도 엄두 못 냈던 공녀 문제 거론하는 상소 올려… 애국심에 논리적 근거 더해 호소 또 호소, 마침내 황제 마음 움직인 뒤 악습 폐지 이끌어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혜종의 황후에까지 오른 고려 여인(몽골명은 올제이 후투그, 完者忽都)의 이야기를 극화한 MBC 드라마 <기황후>. 기황후 역을 맡은 하지원(왼쪽)과 황태후 김서형이 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사진·뉴시스
지난호에서는 이곡이 원의 과거시험 제과(制科)에 합격하고 금의환향하는 것을 살펴봤다. 이번 호는 이곡의 생애 후반부를 알아보려 한다.

1345년 연경(燕京)에서 48세의 이곡은 18세의 아들 이색에게 두 수의 시를 보냈다.(이연복 외, <목은 이색의 연보> 527쪽) 이 시에서 이곡은 제과에 합격하기만 하면 ‘연목어(緣木魚)’도 구할 수 있으니, 분음(分陰)을 아껴 공부에 매진하라고 훈도(訓導)했다.(<用家兄詩韻寄示兒子訥懷>) 나무에서도 고기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니 불가능도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는 원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였고 이곡 자신의 삶 자체가 그랬다. 제과에 합격한 이곡은 1334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이듬해 원나라 연경으로 돌아갔다. 그때 고려의 명사들은 송별연을 베풀고 송시를 헌사(獻詞)했다. 안축의 송시를 보면 때는 봄이었다.

“그대를 위해 봄을 아쉬워하나니 연못 둑에 지금 봄풀(春草)이 푸르니까.” 서문은 최해가 썼고 송시는 이제현을 필두로 정승 권한공(權漢功)·안진(安震)·안축(安軸)·민적(閔頔)·이달존(李達尊)·백문보(白文寶)·안보(安輔) 등이 썼다. 이제현과 권한공은 당시 고려 지식계와 정치계 최고의 거물들이라 할 수 있다. 수년 전만해도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금의환향은 정상에 오른 사람의 가장 큰 기쁨이다. 항우(項羽)는 그 기쁨을 즐기기 위해 천하도 버렸다. 함양을 차지한 항우는 중원을 버리고 고향 팽성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책사 한생(韓生)이 극력 반대했다. 그러자 항우는 “부귀해져서 고향에 가지 못하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라고 반박했다.

항우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래서 천하를 잃었다. 하지만 이곡은 고려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곡은 꿈이 컸다. “남아는 반드시 제왕의 도읍에서 벼슬해야지. 나라에 몸바치고자 하면 어디서나 노고는 같네. 너는 아는가, 공자가 천하를 작게 여긴 것을. 그는 단지 몸이 태산 위에 있었기 때문일세.”(<用家兄詩韻寄示兒子訥懷>) 언젠가 공자는 말하기를 “태산에 오르니 세상이 작구나”(登泰山而小天下)라고 했다 한다.[<맹자> 진심상(盡心上)] 사람이 커서 천하가 작은 게 아니라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절로 작아지는 것이다. 재능만이 사람의 높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디에 있느냐’가 사람의 높이를 결정한다. 이곡은 이것을 시로 지어 아들 이색에게 보냈다.

원망할 일 많았지만 남 탓하지 않았던 이곡


▎고려말 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 사진·중앙포토
중국 역사에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재상 이사(李斯)이다. 그는 원래 초나라 상채 사람으로, 소시에는 군의 하급관리였다. 어느날 관청의 변소에서 더러운 것을 주워먹으며 사는 쥐를 봤다. 그 쥐는 사람이나 개가 올 때마다 달아났다.

또 어느 날은 관청의 창고에 사는 쥐를 봤다. 그 쥐는 넓은 건물에 살며, 사람이나 개가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득 쌓인 곡식을 먹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의 잘나고 못난 것이 쥐와 같으니, 그것은 스스로 있는 곳에 달렸을 따름이다.”(人之賢不肖譬如鼠矣 在所自處耳) 그래서 그는 하급 관리를 그만두고 순자의 제자가 돼 제왕학을 배웠다. 공부를 마치자 천하의 형세를 봤다. 고국 초나라 왕은 섬길 만한 인물이 못됐다. 나머지 6국도 허약해서 공업을 세울 수 없다고 봤다. 그는 진나라로 가기로 결심했다.

스승 순자에게 하직인사를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때를 얻으면 놓치지 말라’(得時無怠)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천하가 쟁투하는 때라 저처럼 공부한 유세가(遊者)가 정치를 맡고 있습니다. 비천함보다 더 큰 치욕은 없으며, 빈궁함보다 더 심한 비애는 없습니다. 저는 진왕에게 가겠습니다.”

그는 처음에 진의 재상 여불위(呂不韋)의 가신이 됐다. 여불위는 그의 현명함을 보고 진왕을 시위하는 관직(郎中)에 추천했다. 그는 진왕에게 유세하는 기회를 얻어 천하를 경략할 계책을 진언했다. 그 요점은 천하통일의 꿈을 가지고, 6국의 합종책을 저지하면서 신속하게 정복전쟁을 수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하가 통일돼 550년 이상 지속된 춘추전국시대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 진왕은 스스로 시황제에 올랐고, 이사를 승상에 임명했다. 이사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제인 군현제를 시행하고,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문자와 수레(文軌)의 표준을 정했다. 공자가 사상으로 중국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창조했다면 이사는 정치로 하나의 중국을 축조했다.

하지만 그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장본인이자 진시황 사후 후계문제를 그르쳐 자신은 물론 진나라를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한 인물이다. 그런 과오만 없었다면 주공(周公)과 같은 성인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찬(史贊)이다. 이사는 평생 상채의 하급 관리로 일생을 마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재능을 천하에 펼 수 있었던 것은 “어디 있는지가 중요하다(在所自處)”는 깨침을 얻어 진왕의 옆에 갔기 때문이다.

사람이 득의(得意)하면 하는 또 하나의 일이 묵은 원한을 갚는 것이다. 이곡도 원망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과거에 합격한 뒤 그는 10여 년이나 지방 한직에 머물렀다. 시골뜨기 궁벽한사(窮僻寒士)였기 때문이다. 견디다 못한 그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지만 아무도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벗들을 원망하고 나라를 탓할 만하다. 홍다구(洪茶丘) 같은 사람이 그런 인물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1218년 몽골에 투항한 의주 부근 인주성 도령(都領) 홍대순이고, 아버지는 몽골군의 고려 침입에서 길잡이 역할을 한 홍복원이다. 홍다구는 몽고인보다 더 가혹하게 고려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위대한 인물이지만, 불우한 시절에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잊지 못했다. 그의 외증조모는 단양 우씨 가문의 노비 출신이었다. 그가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설 때 “우현보(禹玄寶)의 자제들이 모두 그를 경멸해 매번 관직을 옮기고 임명할 때마다 대성(臺省)에서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하지 않았다.”(<태조실록> 태조 1년 8월 23일)

“어린 여자 취하는 제도 혁파하소서”


▎옛 몽골 기병대의 재현 모습. 이들은 1인당 말을 3마리씩 몰고 다녔으며 몽골이 13세기 세계 최강국이 되는 데 기여했다. / 사진·중앙포토
공양왕이 즉위한 뒤 우현보의 손자 우성범을 부마로 삼자 정도전은 자신의 “근원을 발각시킬까 두려워해 우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誣陷)시킬 만한 일은 계획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이 개국하자 정도전은 우성범을 먼저 죽이고,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우홍명·우홍득을 장살(杖殺)했다. 그 원한이 참으로 깊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나라의 관리가 된 이곡은 어떻게든 고려에 좋은 일을 하려고 했다. 1335년(충숙왕 4), 이곡은 원나라 어사대에 고려의 공녀(貢女) 헌납을 폐지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사대 관계에서 속국은 조공을 바친다. 이때 공물로 바쳐진 여성이 공녀다. 강요된 성, 혹은 성에 대한 착취라는 점에서 정도가 덜했지만 본질은 고려판 정신대인 것이다.

공녀는 원 지배기에 고려인의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였다. 공녀는 원 지배기인 1274년(원종 14)에 시작돼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성공한 1356년 폐지됐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된 후 명에 의해 다시 시작됐다가 1521년까지 지속됐다. 거의 250여 년간 계속된 것이다.

그런데 이곡이 이런 악습을 폐지해줄 것을 과감히 요청한 것이다. 원 지배기에 어느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것은 아니다. 어사대의 언관을 대신해 짓는 형식을 취했다. 상소문의 제목이 ‘언관을 대신해 어린 여자를 취하는 것을 혁파할 것을 청하는 상소(<代言官請罷取童女書)>’이다.(<稼亭先生文集> 권8)

그러나 이 일 하나만으로도 이곡은 고려 역사에 남을 만한 가치가 있다. 조선의 세종도 공녀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지만, 항의도 제대로 못했다. 세종 9년(1427)에도 7명의 처녀를 진상해야 했다. 명나라 영락제가 원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한무제, 당태종에 비견되는 영걸인 영락제는 조선의 여인을 선호했다. 그가 고려 여인의 소생이라는 설도 있으나 정사에는 마황후의 소생으로 돼 있다. 어느 날 그는 음식 투정을 했다. “짐은 늙었다. 입맛이 없으니 소어(蘇魚)와 붉은 새우젓과 문어 같은 것을 가져다 올리게 하라. 권비(權妃)가 살았을 적에는 진상하는 식품이 모두 마음에 들더니 권비가 죽은 뒤로는 무릇 음식을 올린다든가 술을 양조한다든가 옷을 세탁하는 등의 일이 모두 마음에 맞지 않는다.”

그러자 내관(內官) 해수(海壽)가 황제 옆에 서 있다가 원민생에게 “좋은 처녀 2명을 진헌하라”고 말했다. 영락제는 기뻐 크게 웃으며, “20세 이상 30세 이하의 음식 만들고 술 빚는 데 능숙한 시비(侍婢) 5, 6인도 함께 뽑아 오라”고 지시했다.

해수는 조선 출신 내시다. 영락제로부터 절대적 신뢰를 받았다. 1410년 영락제가 몽고를 친정할 때 해수도 데려갔다. 1424년(영락 24) 5차 출정 때도 배행(陪行)했는데, 영락제는 유목천(榆木川)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해수는 유조(遺詔)를 받들어 황태자 주고치(朱高熾)에게 황위를 잇게 했다.(<明太宗實錄>)

나라가 약하면 먼저 수난 입는 것은 여인들


▎<기황후> 제작팀이 경기 연천군 연천읍 상리에 있는 기황후의 능에서 차를 올리는 헌다식(獻茶式)을 거행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해수는 태종대와 세종대에 걸쳐 총 7차례나 조선에 왔다. 양녕대군 이제가 중국에 갔을 때는 그를 호송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국을 괴롭힌 악인이다. 그는 명나라를 위해 조선의 말과 여인을 데려가면서 조선 관리들을 구타하고 정부를 모욕했으며 거액의 뇌물을 받기도 했다. 그는 “성품이 탐욕스럽고, 증여를 하면 조금도 사양하지 않았으며, 구하는 것이 끝이 없었다”고 한다.

세종은 그런 해수의 행패에 치를 떨며 황제에게 고발할 것까지 생각했다. 해수가 1408년 조선에 와 데리고 간 5명의 공녀 중 하나가 바로 영락제가 사랑한 권비였다. 황궁에 들어온지 1년 뒤 그녀는 영락제의 후궁 중 최고위에 올랐다. 피리를 잘 불었으며 영락제가 몽골군과 싸우기 위해 고비사막 넘어 막북 원정에 나섰을 때 영락제와 동행했다. 권비가 마음에 든 영락제는 1417년 두 명의 조선 여성을 뽑았고 1424년에는 28명을 뽑았다.

세종 9년의 공녀 문제도 그런 연유로 생긴 일이다. 명나라 사신은 공녀가 탄 교자(轎子)에 자물쇠를 채우고 호송했다. 한가위도 얼마 남지 않은 음력 7월 20일, 공녀들은 고국을 뒤로 하고 건춘문에서 길을 떠났다. 부모와 친척들이 거리를 막아 울부짖었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 소식을 들은 세종도 침통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어제 처녀들이 갈 적에 어미와 자식이 서로 이별하게 되니 그 원통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국내의 이해(利害)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에 관계돼 조정 신하들의 비교가 아니므로 간할 수도 없고 다만 영(令)만 따를 뿐이다. 만약 일이 본국의 이해에 관계된다면 마지못해 주달(奏達)했을 것이다.”(<세종실록> 세종9년)

공녀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삼국통일 이전인 631년(진평왕 53년), 신라는 당나라에 두 명의 미녀를 바쳤다. 그러나 간언으로 유명한 위징(魏徵)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황제는 “저 임읍(林邑)에서 바친 앵무새도 오히려 추위의 괴로움을 말하면서 자기 나라에 돌아가기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친척과 멀리 이별하고 온 두 여자는 어떠하리오!”라고 말하고 사신에게 맡겨 돌려보냈다.(<삼국사기> 신라본기4) 임읍은 인도네시아계 참족이 베트남 중부 지방에 세운 참파왕국(占婆王國, The Kingdom of Champa, 192~1832년)이다. 송나라 때의 이름은 점성(占城)이다.

792년(원성왕 8년)에도 신라는 사신을 당에 보내 미녀 김정란(金井蘭)을 바쳤다. 그녀는 신라 제일의 미인으로 몸에서는 향기가 났다(國色身香)고 한다.(<삼국사기> 신라본기10) 고구려도 기록이 있다. 646년(보장왕 5년)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뒤 보장왕과 연개소문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두 명의 미녀를 바쳤다. 그러나 당태종은 “미녀는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그들이 친척과 떨어져 애태우는 것이 불쌍하므로 내가 이를 받지 않겠다”고 말하고 돌려보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9) 삼국시대의 공녀는 정기적이지 않고 수도 한두 명이었다. 공녀의 헌납이 정기화되고 수가 많아진 것은 고려가 원에 복속된 이후부터다.

나라가 약하면 여인들이 먼저 수난을 입는다. 병자호란 때도 여진족의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이 ‘환향녀’(還鄕女)가 됐다. 여진이나 몽골 같은 유목민의 전쟁 목적은 약탈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정복한 지역의 모든 것은 약탈의 대상이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1231년(고종 18), 고려 원정 대장 살리타이가 보낸 통첩을 보자. “금은과 의복은 많으면 말 2만 필에 실어 보내고 적으면 말 1만 필에 실어 보내야 한다. 백만 대군의 의복, 진품의 보라색 비단(眞紫羅) 1만 필, 좋은 수달피 2만 매, 큰 말 1만 필과 작은 말 1만 필을 보내고, 왕의 자손으로서 황제에게 보낼 공주, 대왕, 모든 군주(郡主) 등 남자 1000명 외에 대관집 부녀도 보내며 귀국의 태자·장령·대왕의 자제들과 아울러 대관의 아들 1000명과 딸 1000명도 황제에게 보내라. 이 일을 빨리 처리하라. 그러면 나라가 평온할 것이요, 그러지 아니하면 언제든 근심에 싸여 있을 것이다. 잘 알아서 하라.” 외교적 수사도 전혀 없고, 다만 요구 사항을 직설적으로 기술했을 뿐이다.

몽골의 잔인한 침략에 고려는 일방적으로 당할 뿐이었다. “오직 조빙(朝聘)을 부지런히 하고 말을 낮춰 신(臣)이라 칭하며 예를 두터이 하여 인질을 보내고, 자제를 선택해 입시하게 했다. (…) 죽은 자는 해골을 묻지 못하고, 산 자는 노예가 돼 부자가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처자가 서로 보존하지 못했다.” (<고려사> 고종 41년)

한 해 몽골에 끌려간 사람만 전체 인구 3% 이상


▎원나라 법전 <지정조격(至正條格)>에서 군역과 세금부과 기준을 설정한 ‘호혼(互婚)’편. ‘형이 사망하면 형수를 동생의 배우자로 삼는다’고 하는 ‘형망배제(兄亡配弟)’법이 담겨 있다. / 사진·중앙포토
1254년(고종 41)에는 한 해 동안 몽골군에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간 남녀가 무려 20만6800여 명에 달했다. 당시 고려의 인구가 600만 명을 넘지 못했으니 인구의 3%를 넘는 수다. 그중에 여인들도 많았을 것이다. 지금의 강릉인 명주(溟洲) 아전 김천의 어머니도 작은 아들 김덕린과 함께 포로로 잡혀갔다. 그때 15세였던 김천은 밤낮으로 울다가 많은 사람이 도중에서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모친상을 치르고 제사를 지냈다.

14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원나라 백호(百戶) 습성(習成)이란 사람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와서 장마당에서 사흘 동안이나 “명주 사람 있소!”라고 외쳤다. 마침 정선(旌善) 사람 김순(金純)이 대답하니 습성은 “김씨라는 여자가 원나라 동경(東京)에 있는데 ‘나는 본래 명주 사람인데 김천이란 아들이 있소’라고 하면서 이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당신은 김천을 아는가?”라고 했다. 김순이 “내 친구요”라고 말하고 편지를 김천에게 전해줬다. 원나라 동경이란 요동지방의 요양(遼陽)이다. 원나라 때 고려인이 많이 모여 살았다.

김천의 어머니는 편지에서 “나는 살아서 어느 주(州) 어느 마을 누구 집에 와서 노비가 됐다. 배고파도 먹지 못하고 추워도 입지 못하고 낮이면 밭 매고 밤이면 절구질한다. 그동안 갖은 고생을 다 겪었다. 누가 나의 생사를 알겠는가?”라고 했다. 김천은 편지를 읽고 통곡했고 슬픔으로 목이 메어 밥을 먹지 못했다. 김천은 요양에 가서 돈을 주고 모친을 데려오려고 속신(贖身)하려 했으나 집이 가난해 재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은을 꿔서 개경에 가서 고려 조정에 모친을 찾으러 가겠다고 요청했다. 조정은 허가하지 않았다. 그 후 충렬왕이 원나라에 입조(入朝)할 무렵 또 개경에 와서 요청했으나 조정의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개경에 묵는 동안 김천의 옷은 해어지고 식량도 떨어졌다. 어느 날 우울한 기분으로 길을 지나던 중 길가에서 같은 고을 중 효연(孝緣)을 만나서 눈물을 흘리며 슬픈 사정을 하소연했다. 그러자 효연은 “내 형 천호(千戶) 효지(孝至)가 지금 동경으로 가니 당신이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곧 주선해줬다. 그러나 누군가가 김천에게 “당신이 모친의 편지를 받은 지 벌써 6년이 지났는데 그간 모친의 생사를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도중에 불행히 강도나 만나면 목숨과 돈을 빼앗길 따름”이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김천은 “가서 보지 못해도 어찌 신명(身命)을 아끼겠는가?”라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마침내 효지를 따라 동경에 도착한 김천은 고려인 통역관인 역어별장(譯語別將) 홍명(弘命)과 함께 모친이 있다는 북주(北州) 천로채(天老寨)를 찾아갔다. 원나라 군졸 요좌(要左) 집에 도착했을 때 한 노파가 나와서 절을 하는데 누더기 옷에 머리는 쑥대머리요, 얼굴에는 때가 더덕더덕 묻었다. 김천은 그 노파를 보고도 자기 모친인 줄 모르고 “너는 어떤 사람이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노파는 “나는 본시 고려 명주호장(戶長) 김자릉(金子陵)의 딸입니다. 동생 김용문(金龍聞)은 진사에 급제했고 나는 호장 김종연(金宗衍)에게 출가해 김천과 김덕린 두 아들을 뒀습니다. 덕린은 나를 따라 이곳에 온 지 이미 19년이 됐소. 지금 서쪽 이웃에 사는 백호(百戶) 천로(天老)의 집에서 종 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뜻밖에 다시 우리 사람을 보게 됐구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김천은 꿇어앉아 절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울었다. 어머니도 김천의 손을 쥐고 울면서 “네가 진정 내 아들이냐?! 나는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구나!”라고 했다. 김천은 요좌에게 속신을 간청했으나 듣지 않았다. 간신히 애걸복걸해 은 55냥(兩)으로 겨우 속신했다. 어머니를 말에 태우고 김천은 걸어서 따라갔다. 김덕린은 동경까지 따라와 울며 작별인사를 했다. “편안히 돌아가십시오. 지금은 따라가지 못하나 하늘의 복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모자는 서로 껴안고 흐느껴 울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원나라로부터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동경에 이르렀다. 김방경은 대몽항쟁기와 원 지배 초기의 명신이자 명장이다. 그는 우연히 김천의 모자를 만났다. 사연을 들은 그는 김천의 효성에 찬탄했다. 그는 원나라 총관부(摠管府)에 부탁해 증명서를 발급받아 주고, 식사와 숙사를 제공받으면서 귀국하도록 했다.

우물에 몸을 던져 죽거나 스스로 목을 매기도


▎넷플릭스가 2014년 12월 공개한 드라마 <마르코 폴로>. 왼쪽부터 쿠빌라이 칸(베네딕트 웡), 비암바(울리 라투케푸), 마르코 폴로(로렌조 리첼미). / 사진제공·넷플릭스
고향에 가까이 왔을 때 소식을 들은 김천의 아버지 김종연(金宗衍)은 진부역(珍富驛)까지 마중 나왔다. 진부역은 지금의 평창으로, 평창 동계올림픽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사연을 담은 기념물이나 동상을 세우면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것이다. 김천의 어머니와 김종연, 두 부부는 서로를 보고 기쁨에 차 얼싸안았다. 김천은 어머니, 아버지에게 술잔을 바치며 다시 통곡했다. 가슴에 켜켜이 쌓인 그간의 온갖 설움이 눈물이 돼 흘렀을 것이다.

좌중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김천의 외할아버지 김자릉은 그때 79세였다. 딸을 보고 기쁜 나머지 땅에 엎어졌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 그 후 6년이 지나 아우 김덕린의 주인인 천로의 아들이 그를 데리고 고려에 왔다. 김천은 은 86냥을 주고 아우의 굴레를 풀었다. 그 뒤 김천은 빚도 다 갚고, 아우 김덕린과 함께 종신토록 효성을 다했다.

극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약소국 백성의 아픔과 통한에 가슴이 저린다. 끌려간 20만 명 중 두 사람이 돌아왔으나, 나머지 고려 백성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그런 일을 겪었으니 역사에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는데 사람은 역사에서 그다지 배우지 못하는 모양이다. 공녀로 끌려가는 여인들의 슬픔은 컸다. 한 번 문을 나서면 4000리 밖으로 가서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었다.

하루아침에 딸을 빼앗긴 부모들 또한 피눈물을 흘렸다. 공녀로 선발되면 “부모와 친척들이 함께 모여서 밤낮으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도성의 문에서 보낼 때는 옷자락을 붙잡고 쓰러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울부짖으며 슬프고 원통해서 괴로워했다.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아 눈이 멀어버리는 자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이루 다기록할 수 없다.”(<李穀傳>) 더욱이 고려의 풍속은 딸을 사랑해 “차라리 남자를 데려와 살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았다.” 데릴사위 풍속(췌서, 贅婿)은 그 때문이었다.

남의 불행 이용해 욕심 채운 환관과 사신들


▎여행길의 무사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기능을 가진 오보에 돌을 올려놓는 몽골인. / 사진·중앙포토
그런 귀한 딸들이 공녀로 끌려가 대부분 궁녀가 돼 황궁의 잡일을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나이가 들면 궁 밖으로 내보내기도 하는데 환관에게 시집을 보냈다. 운이 좋은 경우는 황제의 “후비(后妃)의 지위에 올라 있는 경우도 있고 왕이나 제후와 같은 귀인의 배필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원나라 공경 대신 중에는 고려 여인의 후손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공녀 제도를 악용해 중간에서 사익을 취하는 무리도 많았다. 자신의 부귀영달을 위해서라면 남의 불행을 촌척(寸尺)도 불고(不顧)하는 사람들이다. 공녀와 함께 원나라에 바쳐진 고려인 환관 중에도 그런 부류가 많았다. 그들의 방법은 황제의 명을 사칭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다투어 사자를 보내 해마다 처녀들을 데려가니 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이 고려 여인들을 데려가는 이유는 조정의 권세가들에게 뇌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작간을 뻔히 알면서도 고려 정부는 사실 여부를 원 조정에 문의할 수도 없었다.

공녀를 뽑으러 고려에 오는 원나라 사신들 역시 악행을 불사했다. 그들에게는 축재와 축첩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사신이 한 번 오기만 하면 나라가 온통 소란에 싸여 개나 닭이라도 편안할 수 없었다. 사신이 올 때마다 대경실색해 서로 돌아보며 ‘무엇 하러 왔는가? 처녀를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처첩을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바로 숨겨 놓고서 비밀이 샐까 봐 걱정한 나머지 비록 이웃이라도 볼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일단 공녀를 뽑는 명령이 내려지면 “군대의 서리들이 사방으로 나가 집집마다 뒤졌다. 만약 숨기기라도 하면 그 이웃을 잡아 가두고 그 친척을 구속해 채찍으로 때리고 괴롭혔다.” 처녀가 나타날 때까지 고통은 계속됐다. 그런 난리를 거쳐 이제 후보자가 뽑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처녀들을 모아놓고 그중에서 데려갈 사람을 뽑는데 얼굴이 예쁘든 못났든 간에 사신에게 뇌물을 줘 그 욕심만 채워주면 비록 예쁘더라도 되돌려 준다. 그 대신 다른 데서 여자를 벌충하느라 또 수백 집을 뒤진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사신의 뜻에 의해 이뤄지고 누구도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황제의 뜻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1년에 한두 번씩 있었고, 때로는 격년으로 있었다. 수는 한 번에 많게는 40~50명이나 됐다. 이 모든 이야기는 이곡의 기록이다.

이곡이 공녀 제도를 폐지해야 하는 명분으로 든 것은 4가지다.

먼저, 황제의 진정한 책무는 무엇인가? 황제의 조서는 덕음(德音)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제왕이 한 번 명령을 내리시면 온 천하가 공경하며 은덕이 내릴 것을 소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자주 특별명령을 내리어 남의 집 딸을 빼앗아가는 것”을 과연 덕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원나라 “조정의 덕화(德化)가 미치는 곳은 만물이 모두 성대를 누리는데 고려 사람만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인가? 옛날 동쪽 바다에 사는 한 아낙네가 한을 품자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다는데 지금 고려에는 한을 품은 아낙네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몇 년 사이 고려에 홍수와 가뭄이 계속 이어져 백성들 가운데 굶어 죽은 자가 매우 많으니, 이야말로 그 원망과 탄식이 조화로운 기운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이유는 세조 쿠빌라이 황제의 유풍을 지키고 유훈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 쿠빌라이 황제가 천하를 다스리실 때 백성의 인심을 얻으려 노력했으며, 특히 특별한 풍속을 가진 먼 지방의 경우 원래의 전통에 따라 원만히 다스렸기 때문에 온 천하 사람 모두가 기뻐서 춤췄으며 아득히 먼 나라에서도 앞다투어 귀부(歸附)했으니 요순의 다스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었다.” 또한 “쿠빌라이 황제가 공주를 시집 보내고 조서를 하사해 ‘복식과 의례는 조상의 풍습을 잃어버리지 말라’(不改土風)고 유시(遺示)했기에 그 풍속이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그 덕분에 “지금 천하에 군왕과 신하와 백성과 사직이 있는 것은 오로지 고려뿐이다.” 그 이유는 고려가 원나라에 “가장 먼저 신하로서 복속해 왕실에 공훈을 세웠기 때문이다.” 고려가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역사를 보면, 당태종같이 위엄과 덕망이 뛰어난 황제도 두 번이나 한반도 정벌에 나섰지만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갔다. 고려가 원나라에 복종한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것이다. 이렇게 고려는 원나라에도 특별한 나라이다. 이런 고려로부터 공녀를 뽑는 것이 옳은 일인가? 세조 쿠빌라이 황제의 유지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황제 마음을 움직인 이곡의 혈성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서천군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고려 말의 대학자인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문헌서원을 전통 역사마을로 조성했다. / 사진·중앙포토
셋째 이유는 고려의 충성을 유지시키려면 적절한 대우가 이뤄져야 하고 고려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고려는 원의 특별대우를 알기 때문에 그동안 충성을 다해왔다. 고려로서도 “무엇보다 황제의 조칙을 공경히 받들어 조종들께서 행하신 바를 그대로 따르고, 정치와 교화를 성실히 수행해 밝히며 때에 맞춰 조빙(朝聘)을 함으로써 원나라와 함께 태평을 누리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고려는 원래 수양제와 당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다. 그런데도 고려는 이렇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공녀를 계속 뽑는 것이 정당한가? 제국을 통치하고 평화를 유지하려면 인심에 따라야 한다. 그래서 옛날 현명한 황제들은 “가능한 한 모든 제도를 통일시켰지만 지역과 인정에 따라 각기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은 구태여 바꾸지 않았다. 생각건대 사방의 먼 나라들은 풍속이 각각 다른데도 굳이 중국과 같이 만들려 한다면 인정이 좇지 않을 것이며 형편에도 맞지 않을 것이다. 인정이 따르지 않고 형편에 맞지 않는다면 비록 요순(堯舜)같은 성군이라도 능히 잘 다스릴 수 없음이 분명하다.”

넷째 이유는 민심이 천명이라는 사실이다. “<서경(書經)>에서는 ‘일반 백성이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힘을 다하지 않으면 군주는 아무 공적도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군주가 배라면 백성은 물이다. 물이 없으면 배가 뜨지 못하듯이 백성이 있어야 군주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이제 당당한 천자의 조정이 후비나 궁녀(後庭)가 부족하지도 않은데 어찌 반드시 외국에서 데려오려 하는가? 나라에 아무 이익이 없고 먼 곳의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아 그 폐단이 적지 않은 일은 어떠하겠는가?”

이런 사실을 고려해 “엎드려 바라옵건대 고귀한 말씀을 조서로 내리시어 감히 황제의 뜻을 어겨 위로는 성스러운 귀를 더럽히고 아래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처녀를 데려가는 자 및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처첩을 취한 자가 있거든 금지하는 조목을 명시하셔서 차후로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황제의 조정이 만민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교화를 드러내고 외국 사람들이 옳은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위안함으로써 원망을 없애고 조화로운 기운을 가져와 만물이 육성된다면 더 이상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

이곡의 혈성(血聲)이 통했다. 황제가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기쁨에 찬 고려는 그를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했다. 판전교시사는 전교시의 장으로, 정3품관직이다. 경서나 제사 때 읽는 축문, 상소에 관한 관장하는 기관이니, 조선의 홍문관이다. 이른바 문한(文翰)의 우두머리로, 문관이라면 모두 꿈꾸는 직이다. 그러나 그 뒤로도 공녀에 대한 요구는 그치지 않았다. 황제의 명령도 형식적인 것에 그쳤고, 공녀에 대한 요구 또한 그만큼 집요했던 것이다.

다음호에서는 과거제의 폐단과 관련한 이곡의 상소를 살펴보고 청년 이색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대 법학부 객원 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 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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