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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 (22)] 폐비 윤씨, 성종에게 이혼당하다 

비극으로 막 내린 조선왕조 ‘신데렐라’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자녀 생산하지 못한 정비(正妃) 때문에 간택후궁으로 입궁해 국모 자리까지 꿰차… 왕자 낳고도 마음의 불안 다스리지 못해 후궁들 제거할 음모 꾸미다 폐위되는 비운 맞아

▎JTBC 사극 <인수대비>에서 폐비 윤씨 (전혜빈 분)가 사약(賜藥)을 마신 뒤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다. 폐비 윤씨는 간택후궁으로 입궁해 왕비에 오른 신데렐라였지만 행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 사진·중앙포토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에는 용문사(龍門寺)라는 절이 있다. 절의 산문(山門)에 도착하면 오른쪽에 주차장이 있는데, 그 주차장의 오른쪽 봉우리에 폐비 윤씨의 태실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의 지형은 폐허처럼 훼손된 상태로 가봉 태실비석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나마 비석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어서 앞면의 ‘왕비태실(王妃胎室)’이라는 글씨와 뒷면의 ‘성화 14년 11월 12일’이라는 글씨를 알아볼 수 있다. 성화 14년은 성종 9년(1478)이고 폐비 윤씨가 왕비에 책봉된 때로부터 2년 후다.

폐비 윤씨의 태실에 봉안됐던 태항아리·태지(胎誌) 등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서삼릉으로 옮겨졌다가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한 서삼릉 태실조사 때 발굴돼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이관돼 있다. 1999년 문화재연구소에서 폐비 윤씨의 태지를 조사한 결과 왕비의 생년월일은 ‘경태(景泰) 6년 윤6월 초1일’이었다. 경태 6년은 세조 1년에 해당하고, 서력(西曆)으로는 1455년이다.

폐비 윤씨의 부친은 윤기견이고 모친은 신씨다. 친오빠로는 윤구가 있고, 이복오빠로 윤우·윤해·윤희가 있다. 윤기견의 막내딸로 태어난 폐비 윤씨가 조선의 왕실역사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성종 4년(1473)의 후궁 간택이었다.

당시 성종은 왕이 된 지 4년이 지났지만 자녀가 없었다. 그때 성종의 나이는 17세, 왕비의 나이는 18세였다. 비록 왕과 왕비가 젊다고는 하나 왕실 어른들의 근심이 컸다. 특히 최고 어른인 정희대비(세조의 정비)의 근심이 컸다.

정희대비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둘 다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큰아들 의경세자는 20세에 죽었고, 둘째 아들 예종 역시 20세에 죽었다. 그뿐만 아니라 의경세자와 예종은 자녀를 많이 두지도 못했다. 의경세자는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 예종은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정희대비는 왕실을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성종이 자손을 많이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혼인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성종과 왕비 한씨 사이에는 아들은커녕 딸도 없었다. 그래서 정희대비가 생각한 것이 바로 간택후궁을 들이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간택후궁은 후궁 중에서 특별한 존재였다. 보통의 후궁은 왕의 승은(承恩)을 받음으로써 후궁이 됐다. 반면 간택 후궁은 왕비와 마찬가지로 간택을 거쳐 후궁이 됐다. 왕비가 젊지만 아이를 낳지 못할 때 또는 왕비 후보자로 몇 명의 후궁을 들일 때 간택후궁을 선발했다. 즉 조선시대 간택후궁은 왕의 후계자를 낳기 위해 또는 왕비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간택후궁은 신분도 좋고 인물이나 학식도 두루두루 좋아야 했고, 입궁하는 순간부터 숙의(淑儀)라고 하는 고위직 후궁이 됐다.

성종 4년(1473)의 간택후궁은 왕비 한씨가 젊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기에 필요했다. 즉 왕의 후계자를 낳기 위해 간택후궁을 들였던 것이다. 첫째는 폐비 윤씨였고 둘째는 정현왕후 윤씨였다. 폐비 윤씨는 성종 4년 3월에 입궁했고, 석 달 후인 6월에는 정현왕후 윤씨가 입궁했는데 둘 다 숙의로 입궁했다.

편모슬하의 딸… 간택후궁 ‘최적의 조건’


▎<인수대비>에서 연산군으로 분한 진태현과 그의 할머니인 채시라(인수대비).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죽음에 인수대비의 책임이 크다고 믿고 할머니와 대립했다. / 사진·중앙포토
폐비 윤씨가 숙의로 입궁했을 때 남편 성종은 17세였다. 자신보다 두 살 연하였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입궁한 동기 후궁 즉 정현왕후는 일곱 살 아래인 12세였다. 그런데 폐비 윤씨가 입궁할 당시 부친 윤기견은 이미 죽은 상황이었다. 조선시대 왕실혼인에서 편모슬하의 자녀는 원래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런 관행으로 본다면 폐비 윤씨는 아예 간택후궁이 될 자격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택후궁이 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성종의 왕비 한씨는 한명회의 딸이었다. 비록 성종의 자녀를 낳지는 못했지만 왕비 한 씨는 18세로 젊디젊었다. 당연히 왕비 한씨는 오래 살 것으로 예상됐다.

따라서 왕비 한씨와 간택후궁 사이에 혹시라도 있을 갈등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간택 후궁이 감히 왕비자리를 넘보지 않아야 했다. 편모슬하의 딸인 폐비 윤씨는 그런 조건에 딱 맞았기에 간택후궁이 될 수 있었다.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폐비 윤씨는 입궁 초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아마도 폐비 윤씨의 어머니 신씨는 입궁하는 딸에게 아비 없이 자라서 그렇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타일렀을 듯하다.

당연히 입궁 초기에 폐비 윤씨는 감히 왕비와 경쟁할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겸손하게 처신했다. 게다가 입궁 초기에 폐비 윤씨의 동기 후궁인 정현왕후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이 때문이었다. 아직 12세에 불과한 정현왕후는 성종과 합방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여자의 나이 15세가 돼야 합방이 가능했다. 전후 사정으로 볼 때 성종 4년에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두 사람을 간택후궁으로 들였지만 사실상 간택후궁은 폐비 윤씨 단독이었고, 정현왕후는 예비 후보였다.

이런 면에서 입궁 초기의 궁중 상황은 페비 윤씨에게 아주 우호적이었다. 입궁 목적 자체가 왕의 후계자 출산이었기에 성종과 왕실 어른들이 각별한 기대를 했다. 더구나 경쟁자도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왕비 한씨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투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병이 심해서 친정에 나가 있곤 했다.

경쟁자 없이 왕과 왕실 어른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을 때 폐비 윤씨의 궁중 생활은 너무나 순조로웠다. 이럴 때는 폐비 윤씨의 성장환경과 가정환경도 오히려 도움이 됐다. 막내딸로 자라난 폐비 윤씨는 독점욕이 강했다. 입궁 초기 폐비 윤씨는 남편 성종과 왕실 어른들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라난 것도 도움이 됐다. 정희대비·인수대비 같은 왕실 어른들은 가난한 가정환경으로 말미암아 검소한 생활이 습관화된 폐비 윤씨를 보며 흡족해 했다.

숙의에서 일약 왕비로, 하늘도 도왔건만


▎<인수대비>에서 폐비 윤씨 역을 맡은 전혜빈이 눈물이 그득한 눈으로 남편 성종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하늘도 폐비 윤씨 편이었다. 입궁한 지 1년 만에 왕비 한씨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까지 했다. 성종 7년(1476) 봄의 일이었다. 입궁한 지 3년 만이고, 그때 나이 22세였다. 왕비가 없는 상황에서 폐비 윤씨가 임신까지 하자 성종이나 왕실 어른들은 왕비를 굳이 새로 들이려 하지 않았고, 결국 성종 7년 7월에 폐비 윤씨는 숙의에서 일약 왕비가 됐다. 그때 정희대비는 이런 뜻을 밝혔다.

“숙의 윤씨는 주상께서 중히 여기는 바요, 내 생각 또한 그가 왕비에 적당하다고 여긴다. 윤씨가 평소에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으니, 큰일을 부탁할 만하다. 윤씨가 내 생각을 알고 사양하기를 ‘저는 본디 덕이 없으며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사전(四殿: 정희대비, 인수대비, 안순대비, 성종)께서 선택하신 뜻을 저버리고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英明)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 하니, 내가 이러한 말을 듣고 더욱더 그를 현명하고 정숙하다고 여겼다.”[<성종실록> 권69, 7년(1476) 7월 11일]

이때가 폐비 윤씨의 인생에서 절정기였다. 하지만 바로 그 절정기에서 폐비 윤씨는 일생일대의 도전에 직면했다. 후궁 때문이었다. 폐비 윤씨가 왕비에 책봉됐을 때 성종에게는 형식상 왕비와 후궁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폐비 윤씨는 왕비로 확정됐고, 폐비 윤씨와 같은 간택후궁이던 정현왕후는 후궁으로 확정됐기 때문이다.

아마도 폐비 윤씨는 이런 상황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기대했던 듯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폐비 윤씨는 남편 성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임신까지 함으로써 왕실 어른들의 기대에도 충분히 부응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종과 왕실 어른들이 이런 자신을 인정한다면 새로 후궁을 들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대왕인 세조 역시 왕이 된 후 더 이상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그런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대비 역시 자신의 경험을 들어 더 이상 후궁을 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나 자신이 임신 중인데 그 사이에 굳이 후궁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폐비 윤씨 혼자만의 생각이자 기대였다. 왕실 어른들, 특히 시어머니인 인수대비는 바로 지금이 후궁을 들일 때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튼튼하려면 왕실이 번성해야 하고, 왕실이 번성하려면 후궁이 많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수대비에게 성종의 후궁 1명은 너무나 적었다. 게다가 성종 7년에 그 후궁은 겨우 15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의 임신 중에 후궁을 들이게 했다. 그것도 두 명이나 들이게 했다. 엄 숙의와 정 소용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들이 정확히 언제 입궁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후 상황으로 미뤄보건대 성종 7년 8월이나 9월쯤에 입궁했을 것으로 보인다. 폐비 윤씨가 왕비에 책봉된 지 한두 달만이었다.

조선시대 성(性) 의학에서는 부인이 임신한 후에는 부부가 관계를 맺는 것을 금기시했다. 혹시라도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서다. 당연히 성종은 폐비 윤씨의 임신이 확실해진 후로는 부부관계를 멀리했다. 대신 새로 들어온 후궁 정씨와 엄씨를 가까이했다.

엄 숙의와 정 소용이라는 명칭으로 볼 때 엄씨가 먼저 입궁하고 뒤이어 정씨가 입궁했을 듯하다. 나이는 1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왕의 후계자를 낳기 위한 간택후궁이 아니라 단지 왕실을 번성시키기 위한 일반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 숙의와 정 소용은 입궁과 동시에 성종과 합방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둘 중에서 정 소용이 더 총애를 받은 듯하다. 그 결과 10월을 전후해 정 소용이 임신하게 됐다.

불안 또 불안, 산후우울증까지 생겨


▎연산군의 아버지인 조선 제9대 왕 성종(成宗)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宣陵).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 사진·중앙포토
그런데 정 소용은 임신 후에 엄 숙의와 마치 한 몸처럼 친밀하게 지냈다. 이는 분명 폐비 윤씨를 견제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 소용과 엄 숙의는 일반 후궁이었다. 그래서 같은 처지였다. 이들은 좋으나 싫으나 성종을 놓고 폐비 윤씨와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둘이 협력하는 길밖에 없었다. 폐비 윤씨 역시 간택후궁이었다가 왕비가 됐기에 정 소용과 엄 숙의는 자신들도 왕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왕비자리를 쟁취하려면 우선 폐비 윤씨를 밀어내야 했다.

정 소용은 자신이 임신한 후 가능하면 성종을 엄 숙의에게 보내려고 했던 듯하다.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엄 숙의에게 가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둘은 성종과 왕실 어른들에게 폐비 윤씨를 은근히 헐뜯었을 듯하며, 한 발 더 나아가 왕실 어른들에게 밀착함으로써 폐비 윤씨를 따돌리려 했을 듯하다.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 경내에 있는 폐비 윤씨의 무덤. 연산군이 회릉으로 추숭(追崇)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회묘로 강등됐다. / 사진·중앙포토
만약 폐비 윤씨에게 넉넉한 마음이 있었거나 정치력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을 수월하게 극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폐비 윤씨는 그렇지 못했다. 막내딸로 자란 폐비 윤씨는 친정에서 귀여움만 받아봤지 이런 일은 겪지 못했다. 입궁해서도 경쟁상대 없이 성종과 왕실 어른들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임신하고 왕비가 된 마당에 이런 일들을 당하게 되니 폐비 윤씨는 어쩔 줄을 몰랐다. 성종의 발걸음은 점점 멀어지고, 왕실 어른들의 관심도 점점 멀어짐을 느끼면서 폐비 윤씨는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폐비 윤씨는 만에 하나라도 자신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대신 정 소용이나 엄 숙의가 아들을 낳는다면 왕비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지레짐작했을 것이다. 이런 불안감은 정 소용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더욱 커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종 7년 11월에 폐비 윤씨는 결국 아들을 낳았다. 훗날의 연산군이다. 아들을 낳은 후, 폐비 윤씨는 모든 일이 제 뜻대로 될 것으로 기대했을 듯하다. 즉 남편 성종은 자신만을 사랑할 것이고, 왕실 어른들도 자신만을 귀히 여길 것이며, 엄 숙의와 정 소용은 감히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흘러갔다. 폐비 윤씨가 아들을 낳은 후, 남편 성종은 더 열심히 정 소용과 엄 숙의를 찾았다. 왕실 어른들은 자신보다는 손자를 더 귀히 여겼다. 엄 숙의와 정 소용은 여전히 왕실 어른들의 환심을 사며 왕비 자리를 넘봤다.

그래서 출산 후 폐비 윤씨는 더더욱 억울하고 분했을 것이다. 나아가 성종이나 왕실 어른들에게는 오직 왕의 후계자만 필요한데, 이미 왕의 후계자가 생겼으니, 자신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을 듯하다. 그런 억울함과 피해의식은 산후우울증으로 더욱 커지고, 그것이 극단적인 분노로 이어졌다.

친정 통해서 비상까지 손에 넣었는데


▎<인수대비>에서 연산군 역을 맡은 진태현이 폐비 윤씨가 숨질 때 피를 닦았던 금삼(錦杉)을 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폐비 윤씨에게는 삼월이라고 하는 시비(侍婢)가 있었다. 시비란 또래의 여자 몸종을 의미한다. 왕실 여성들은 입궁할 때 몸종과 유모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런 사실로 보면 삼월이는 폐비 윤씨가 친정에서 데리고 온 몸종이 분명하다. 이처럼 입궁할 때 데려온 몸종을 궁녀 중에서 본방내인이라고 했다. 당연히 왕실 여성들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이일 것이다.

폐비 윤씨는 자신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삼월이에게 털어놓았다. 보통의 경우, 속에 품은 이야기를 하면 분노가 풀리기 마련이지만 폐비 윤씨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되려면 삼월이가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줘야 하는데, 삼월이는 그럴 수 없었다. 자기 주인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들으면서 삼월이 역시 똑같이 억울하고 분했던 것이다.

폐비 윤씨와 삼월이는 복수를 생각했다. 그 대상은 엄 숙의와 정 소용이었다. 현재의 비극적인 상황은 모두 이 두 명 때문에 생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한 복수는 중상모략과 저주 그리고 독살이었다.

마침 성종 8년(1477) 3월 14일에 왕비의 친잠례(親蠶禮)가 예정돼 있었다. 친잠례 때는 내명부와 외명부의 부인들이 모두 참여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당연히 왕비의 친정 엄마인 신씨도 참여할 예정이었다. 폐비 윤씨와 삼월이는 이 기회를 이용하고자 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폐비 윤씨와 삼월이는 성종 8년 1월이나 2월쯤에 이미 복수를 생각하고 음모를 꾸몄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주나 독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저주를 하기 위해서는 저주하는 방법을 알아야 했고, 독살하기 위해서는 독약이 필요했다. 이런 것들을 궁중 안에서 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폐비 윤씨는 삼월이를 친정으로 내보내 이런 것들을 구해 오게 했다. 삼월이를 보낼 때는 친잠례와 관련해서 친정에 볼일이 있다고 하면서 의심을 피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인 신씨 역시 딸의 사정을 듣고 같이 분노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폐비 윤씨는 3월 14일 전후로 저주서와 독약을 손에 넣었다. 저주서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거나 혹 낳는다면 불구자를 낳게 하는 방법 등이 적혀 있었다. 독약은 조선시대에 흔하게 쓰이던 비상(砒霜)이었다. 폐비 윤씨는 비상을 바른 곶감과 저주서를 작은 상자에 담아 은밀하게 보관했으며 중상모략도 개시했다.

3월 20일, 정희대비는 감찰상궁의 은밀한 방문을 받았다. 감찰상궁은 누군가 자기 친정에 보낸 것이라면서 편지 두통과 상자를 바쳤다. 편지에는 엄 숙의와 정 소용이 폐비 윤씨와 원자를 없애려 음모를 꾸민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상자에는 저주서와 비상이 들어 있었다. 엄 숙의와 정 소용이 이 저주서와 비상을 이용해 왕비와 원자를 없애려 한다는 의미였다.

사랑은 미움으로, 미움은 이별로

저주서와 비상을 보면서 정희대비와 인수대비는 공포에 전율했다. 누가 이런 일을 꾸민단 말인가? 편지 내용대로 엄 숙의와 정 소용이 꾸몄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희대비와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를 의심했다. 후궁 둘이 들어온 뒤부터 폐비 윤씨가 많이 달라졌기에 나온 의심이었다. 정희대비와 인수대비는 은밀히 폐비 윤씨를 조사했다.

먼저 성종의 유모인 백씨를 불러 그간의 상황을 물었다. 왕의 유모는 왕의 침실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백씨는 폐비 윤씨가 수상하다고 했다. 언젠가 자신이 왕의 침실에 갔을 때 누군가가 나무 몽둥이로 책을 제본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또한 왕의 침실에 난 쥐구멍에서 찾은 것이라며 종이쪽지를 바쳤는데 그 종이는 감찰상궁이 바친 저주서와 같은 재질이었다.

설상가상 폐비 윤씨는 비상을 바른 곶감과 저주서를 담았던 작은 상자를 남편 성종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다.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된 폐비 윤씨는 모든 일을 삼월이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 이것이 정희대비와 인수대비를 더욱 분노케 했다.

과거에 세종은 자신의 큰며느리 즉 세자빈을 두 명이나 쫓아낸 일이 있었다. 죄명은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한 압승술(壓勝術)을 쓰거나 동성애를 했다는 것이었다. 폐비 윤씨의 저주와 독살 음모 그리고 중상모략은 압승술이나 동성애에 비하면 훨씬 무서운 범죄였다. 게다가 만에 하나 폐비 윤씨가 미움에 복받쳐 성종을 독살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성종 8년(1477) 3월 29일, 정희대비는 조정중신들을 불러 왕비의 폐위 문제를 논의하게 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원자를 이유로 반대했다. 게다가 성종도 아직까지 왕비를 사랑해 폐위를 주저했다. 그래서 윤씨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기로 했다가 그것도 취소하고 그냥 없던 일로 하고 말았다. 모든 죄는 삼월이가 뒤집어쓰고 죽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폐비 윤씨는 성종과 왕실 어른들에게 더욱 실망하고 분노했다. 특히 남편 성종에게 실망하고 분노했다. 자기 줏대도 없이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바보 같은 남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종 역시 그런 폐비 윤씨에게 정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종 10년(1479) 6월 1일, 이날은 폐비 윤씨의 생일이었다. 정상적인 부부 사이였다면 성종은 폐비 윤씨의 생일을 챙겨줬을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그러지 않았다. 바로 그날 밤 성종은 폐비 윤씨 대신 다른 후궁의 처소를 찾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폐비 윤씨는 한밤중에 후궁(後宮)으로 찾아와 남편 성종의 얼굴을 할퀴었다. 그리고 다음날 윤씨는 폐위됐다.

돌아보면 성종과 폐비 윤씨는 처음에는 사랑했고 자식을 낳았다. 하지만 그 사랑이 미움이 됐고, 그 미움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에는 이혼에 이르렀다. 그들의 미움은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연산군에게 이어져 나라 전체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와 관련해 <대학연의>에는 ‘극명준덕(克明峻德)’이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자기 마음의 덕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이고 자기 마음의 덕을 먼저 밝히지 못하면 그것이 자신의 비극은 물론 가정의 비극 나아가 나라의 비극이 된다는 교훈이 ‘극명준덕’이라고 하겠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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