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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연재기획] 21세기 영웅소환 프로젝트① | 류성룡-이순신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콤비 

대담 =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류성룡 전문가) ·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이순신 전문가) / 사회·글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 사진 강정현 기자
류성룡은 조정 반대 무릅쓰고 이순신 발탁, 이순신은 23전 전승으로 위기의 나라 구해… 두 사람은 한날에 전사(戰死)하고 파직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후대에서는 살아 있는 역사가 되었다

▎이순신이라는 인재를 요직에 발탁한 류성룡의 영정.(좌) / 바다를 지켜 조선을 구한 이순신의 영정. / 사진·중앙포토
역사 속 위대한 영웅들이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 영웅들의 눈에 비친 현실과 문제점, 그리고 대안은 무엇인가? <월간중앙>은 위인들의 삶과 정신을 본받아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짚고 해법을 찾아보고자 ‘21세기 영웅소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들의 혜안과 지혜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통찰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살펴보자는 취지다. 단순 사료적인 접근을 넘어 영웅들의 정신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권위자가 참여해 대담 형식으로 그들의 삶과 철학을 펼쳐 보인다.


21세기 영웅소환의 첫 주인공은 류성룡과 이순신이다. 임진왜란을 헤쳐갔던 두 영웅의 이야기와 이들이 풀어 놓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살피고 대안을 모색한다. 대담에는 류성룡 연구의 권위자인 80세의 노학자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와 40년간 이순신 연구에 매진한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이 참여했다.

두 사람은 각자 개인의 시각이 아닌 류성룡과 이순신 두 영웅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담 일자는 8월 30일, 장소는 이들이 각각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를 출간한 출판사 ‘시루’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1591년 3월 1일. 통신사 일행이 일본 정탐을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정사 황윤길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군사를 키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함께 갔던 부사 김성일은 정반대로 보고했다. 왜적의 침입 따위는 없을 것이니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정은 김성일의 편을 들어줬고, 선조는 짓고 있던 성조차 축성을 그만두며 안일하게 대처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왜적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왜적은 개전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했다. 류성룡과 이순신의 대담은 임진왜란 초기 상황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시작됐다.

류성룡(이하 류)_ “처음 왜군이 조선을 쳐들어 왔을 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장군께서 바다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조선은 국운을 달리했을 것입니다.”

이순신(이하 이)_ “왜란 1년 전 저를 전라좌수사로 발탁해주신 분이 대감 아닙니까. 1년간 전쟁을 준비했고 왜군이 쳐들어오기 바로 전날 거북선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수군의 책임자로 써주신 대감의 혜안이 아니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업적을 쌓지 못했을 것입니다.”

류_그런데 후손들이 살고 있는 요즘의 시대를 살펴보면 우리가 겪었던 난세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군사강국화로 돌아선 일본은 다시 제국주의로 눈을 돌리는 형상이고 중국은 세계의 패권을 노리며 한반도를 긴장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임진왜란도 조선의 남쪽을 차지하려는 왜나라와 북쪽만큼은 지키자는 명나라의 싸움이었죠.”

이_임진왜란 때는 그나마 임금께서 피난가실 북녘 땅이라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라가 둘로 갈라져 온전히 힘을 쓸 수도 없는 형국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겪었던 16세기 조선보다 21세기 대한민국이 더 어려운 상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류_ “나라 안을 들여다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왜란 직전 조선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려 허구한 날 당파 싸움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왜나라가 국력을 키우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저 ‘왜놈’이라며 무시하고 국제정세를 살피지 않았죠. 당시 왜나라는 인구가 3200만 명에 달해 500만 명이 조금 못 되는 조선보다 이미 강국이었습니다.”

3200만 명의 왜 對 500만 명의 조선


▎하와이 인근 섬에서 실시한 미군의 사드 미사일 시험발사 장면. / 사진·중앙포토
이_ “급격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눈감고 있던 게 큰 잘못이었습니다. 스스로 강해질 생각은 않고 무조건 명나라에만 의존하려는 사대주의도 문제였죠.”

류_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되면 안 됩니다. 요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로 또다시 국론이 분열되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되기 때문에 사드를 배치해선 안 된다고 하는데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이는 또다시 중국에 의존하려는 사대주의 일 수 있습니다. 국가와 안보를 위한 일에선 주변 국가의 눈치만 봐선 안 됩니다.”

이_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강을 해야 하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번 사드 결정은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생각입니다. 사드처럼 국가의 안위가 걸린 큰 문제는 소수집단이 결정내리기 전에 국민의 말을 들어봤으면 좋았겠다는 것이죠.”

류_ “사드는 안보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 다양한 이해득실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전략을 세우는 사람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인 것은 맞습니다. 다만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과정이 부족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1597년 7월 15일. 다시 쳐들어온 왜군은 칠천량(경남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이 이끄는 수군을 대파했다. 해전에 자신만만했던 원균도 전사했다. 간신들의 모함으로 옥에 갇혀 있던 이순신에게 선조가 명했다. 흩어진 판옥선을 모으고 수군을 수습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조는 수군을 육군에 통합시킬 것을 지시한다. 이때 이순신은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라는 장계를 올리고 조용히 수군을 재정비한다.

조정에서 유일하게 수군 통합을 반대했던 이는 류성룡이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로(一路)’ 전법을 간파했다. 히데요시는 나고야에서 교토까지 가는 길을 점령해 전국 통일의 기틀을 다진 오다 노부나가의 전법을 이어받았다. 이를 알고 있던 류성룡은 국토의 70~80%가 산간지역인 조선에서 왜군에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길만 내주고 명을 끌어들여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계책을 냈다. 길 주변의 민가에 불을 질러 식량 자급을 막았다. 이순신이 본토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왜군의 보급로를 끊도록 하는 것이었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당시의 결연한 의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백성을 곤경에서 해방시키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시급한 일입니다.”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류성룡 종가. 1999년 방한한 영국 여왕이 이곳을 찾았다.
류_ “바다에선 조선과 왜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실로 이순신과 왜군의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정의 모함에 옥살이를 하고, 임금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목숨을 걸고 전쟁에 임했던 장군을 보니 안타까운 반면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이_ “충(忠)은 백성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의 주인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태를 보면 민주 국가인 대한민국과 왕정국가인 조선이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주권자가 왕이었기에 우리는 임금에게 충성했습니다. 그것이 곧 백성을 향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주사회인 지금도 정치인과 공무원 등을 보면 국민이 아니라 권력자를 향해 충성을 합니다.”


류_ “요즘 정치를 보면 왕에게 모든 걸 품의하고 명을 기다리듯, 대통령의 의중을 따져 재가를 구하려 합니다. ‘십상시’다 뭐다 해서 전부 대통령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뿐입니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또 대통령에게 충언하는 사람도 찾기 힘듭니다.”

이_ “권력자부터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헌법 1조 2항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주권자가 왕이 아닌 국민이죠. 그렇다면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관료, 정치인이 갖고 있는 것은 권력이 아닙니다. 국가 권력의 유일한 주체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 있을 뿐입니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닙니다. 국민은 통치의 객체가 아닙니다. 그런데 주권자인 국민의 말을 왜 안 듣습니까?”

류_ “대통령과 정치인을 마치 군주와 신하의 관계처럼 생각하는 풍토부터 바꿔야 합니다. 그래도 조선에선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리고 간언하는 선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정치인이 몇이나 될까요? 왕이 1인 지배를 하듯 민주주의 국가가 돌아가선 안 됩니다.”

이_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5000년 역사에서 공직자는 갑이고 백성은 을이었습니다. 그러나 헌법에서 공무원은 국민의 봉사자입니다. 이제 모든 공무원은 국민에 대한 봉사의 의무를 소명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3만·5만·10만원이 핵심이 아닙니다. 이걸 통해 부패의 고리를 끊고 공직자가 오로지 국민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592년 5월 1일.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선조가 임진 나루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명나라에 내부(內附: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들어가 붙다)하는 것이 짐의 뜻이니라.” 그러자 류성룡이 선조 앞에 엎드리며 이야기했다. “전하,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임금께서 우리 땅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그때부터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선조가 재차 명나라로 가겠다는 뜻을 밝히자 류성룡이 읍소하며 말했다. “조선의 충의지사들이 며칠 안에 벌떼처럼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어찌 경솔히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넌다는 말을 하십니까.” 류성룡의 만류로 평양성에 머물기로 한 선조에게 일주일 후 첫 승첩이 들려왔다. 이순신이 옥포(경남 거제)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이었다. 1598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23전승 불패’라는 이순신의 신화를 연 첫 전투였다.

국가발전의 동력, 노블레스 오블리주


▎2015년 방영된 KBS 드라마 <징비록>은 류성룡의 생애를 다뤘다. / 사진·중앙포토
이_ “조선을 떠나겠다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설사 불행한 처지에 이르더라도 임금과 신하들이 조선 땅에서 함께 죽어야 마땅한 것이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지도층의 의무입니다.”

류_ “맞습니다. 그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역사 발전의 동력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당시 백제는 계백 혼자 싸웠습니다. 다른 귀족들은 자기 안위에만 신경 썼고 백성들은 그런 귀족들을 증오했습니다. 고구려도 마찬가집니다. 연개소문이 죽고 집권층의 내부 분열로 멸망합니다. 그러나 신라는 달랐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인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_ “삼국사기에 이런 장면도 나옵니다. 소정방이 원래 목표와 달리 신라를 공격하지 않고 당나라로 돌아갑니다. 황제가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하지요. 첫째는 왕이 어질고, 둘째는 신하들의 충성심이 강하며, 셋째는 백성들이 질서가 있어 가볍게 볼 나라가 아니라고 말이죠.”

이순신에 ‘빙의’된 김종대 전 재판관의 말을 곰곰이 듣던 송복 교수가 류성룡의 생각에서 벗어나 잠시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조선과 한국의 가장 다른 점은 현대는 권력이 분산된 다원화 사회라는 겁니다. 즉, 대통령 1인의 리더십에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 ‘정치적 판타지’를 극복해야 하는 거죠.” 송 교수는 1960년대 이후 국가 발전의 동력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에서 찾았다. “조선 500년 동안 우리는 강력한 군대와 같은 물리력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근대국가가 될 수 없었던 이유죠. 1960년대서야 ‘적나라한 물리력’을 바탕으로 강한 리더십이 나왔고 이것이 역사의 동력이 돼 산업화를 성공시켰습니다.”

송 교수는 그러나 “더 이상 강력한 리더십은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다원주의 사회에선 사회 각 분야의 지도층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걸 못해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한 나라들이 많습니다.” 김 전 재판관도 덧붙였다. “체격은 제법 커져서 어른이 됐지만 아직 생각은 미숙한 겁니다. 물리적으로 성장한 만큼 정신적인 성숙을 못했다는 이야기죠.” 김 전 재판관은 “사회 지도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필히 망할 수밖에 없다”며 “임진왜란에서 류성룡과 이순신이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 조선도 운명을 달리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 왜란의 상세한 기록을 남겨 후대에 교훈을 전하고자 했다.
1591년 2월 16일. 류성룡은 정읍현감(종 6품)이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정 3품)로 발탁했다. 일본에 갔던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기 며칠 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로 치면 육군 중위가 갑자기 해군 장성이 된 파격적인 인사였기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사간원은 “현령을 수사에 임용하는 것은 정사에 어긋난다. 두고두고 폐단이 될 것이다”며 극렬히 반대했다. 조정의 신료들도 똘똘 뭉쳐 류성룡의 이순신 발탁을 비판했다. 그러나 류성룡은 선조를 일주일 내내 설득했다. 이순신의 곧은 성품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다. 결국 선조는 류성룡의 손을 들어줬고 이순신은 실질적인 조선 수군의 책임자가 됐다.

류_ “당시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순신은 물론, 조선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_ “하급 관리이던 저를 믿고 써주신 대감의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아니었다면 어찌 나라에 충성할 기회를 가져보기나 했겠습니까.”

‘헬조선’의 이유는 지도층의 타락


▎임진왜란 당시 13척의 배로 왜군 133척을 격퇴한 명량대첩을 기념하는 재현행사가 2014년 전남 해남군 일대에서 열렸다. / 사진·뉴시스
류_ “장군을 발탁하고 보름 뒤 통신사의 정사 황윤길이 보고한 것처럼 이미 일본은 전쟁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동서인으로 나뉘어 분란만 일삼던 조정에선 전쟁에 눈을 감았지요. 그 전에라도 미리 장군을 수군 책임자로 앉혀 전쟁 준비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_ “왜란 당시 대감께서 보내주신 병법서와 각종 문헌, 정보들이 거북선을 만들고 전쟁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저는 바다를 지켰고 대감께선 조선의 미래를 내다봤습니다.”


▎2004년 인기리에 방영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 사진·중앙포토
류_ “지도자의 통찰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16세기 왜란, 20세기 식민지 경험과 6·25 전쟁 등 한반도는 늘 강대국의 분할 대상이었습니다. 21세기 한국도 마찬가집니다. 지도자가 통찰력을 보이지 못한다면 우린 또다시 열강의 희생양이 될 겁니다.”

이_ “인사도 중요합니다. <난중일기>에도 썼지만 우수사 김억수는 좌의정과의 친분으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자신의 그릇이 안 되면 설령 높은 자리가 와도 받아선 안 됩니다. 지도자는 오로지 인품과 능력만으로 인사를 해야 합니다. 요즘처럼 정부, 공기업에 ‘낙하산’ 인사를 하는 것은 나라를 좀먹는 길입니다.”

류성룡의 탁월한 업적 중 하나는 하급 관리였던 이순신을 실질적인 수군 책임자로 발탁했다는 것이다. 대체 류성룡은 어떻게 그런 혜안을 가질 수 있었을까. 송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청소년기를 한 동네서 보냈습니다. 류성룡과 그보다 세 살 아래인 이순신은 문·무과의 서로 다른 길을 갔지만 어릴 적부터 서로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알아본 것이죠. 무인이면서도 선비 같은 인격을 지녔고 권세에 아첨하지 않는 기개를 보며 일찌감치 이순신을 점찍어 둔 것이었습니다.” 김 전 재판관도 “이순신도 류성룡이라면 극진히 예우하고 존경했다. 두 사람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콤비였다”고 말했다.

율곡 이이는 타계 2년 전인 1582년 임금에게 ‘진시폐소(陳時弊疏)’라는 상소를 올렸다. 죽음을 무릅쓰고 조정을 신랄히 비판하며 대책을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상소에서 그는 “200년 역사의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이 없다. 이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니다”고 말했다. 1년 후 마지막으로 올린 상소 ‘육조계(六條啓)’에선 조선을 썩어가는 집으로 비유했다. “지금 나라의 형세는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방치해둔 집과 같다. 대들보에서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썩지 않은 것이 없어 근근이 날만 넘기며 지탱하고 있다. 날로 더 썩어 붕괴할 날만 기다리는 집과 지금의 나라 꼴이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율곡이 그토록 개혁하고 싶었던 것은 지도층의 탐욕과 무능이었다. 율곡이 죽고 8년 뒤 조선은 그의 예측대로 임진왜란이라는 최악의 국난을 맞이했다.

류_ “요즘 젊은이들이 ‘흙수저’, ‘헬조선’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이는 과거이건, 현재이건 탐욕적인 지도층이 문제입니다. 주식을 뇌물로 받은 혐의로 재판받는 검사장이나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관료를 보면 청년들이 이 나라를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이_ “우리 사회가 너무 재물과 권력만을 추구해 왔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사는 가치와 배려, 공감 같은 바른 인성의 덕목들이 지나치게 폄하되고 있습니다. 지도층도 오직 물신적 가치만을 맹신하기 때문에 율곡이 봤던 400여 년 전 조선과 지금이 똑같이 닮아 있는 것입니다.”

류_ “전쟁이 끝나고 불모지였던 한국 사회에서 지금의 지도층은 모두 당대에, 또는 길어야 두 세대에 걸쳐 부와 권력, 명예를 거머쥐었습니다. 누대에 걸친 가문의 전통과 역사가 없기 때문에 부모와 할아버지·할머니, 그 윗세대로부터 쌓아온 체화된 상식과 교양·문화·윤리가 없는 것이죠.”

이_ “사실 지도층이 된다는 것은 해당 분야의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모범이 되는 인품을 갖추는 것이 우선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수양을 통해 인품을 닦은 사람만이 지도층이 돼야 합니다. 공자 말씀에 ‘德勝才(덕승재) 謂之君子(위지군자), 才勝德(재승덕) 謂之小人(위지소인)’이라 했습니다. 재주보다 덕이 높은 사람은 군자요, 재주에 덕이 못 미치는 사람은 소인이란 뜻이죠.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소인만을 키워왔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난중일기>를 남긴 이순신은 전장에서 생의 마지막을 바쳤다.
류_ “하지만 우리 청년들이 희망을 잃진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국민 중 하나입니다. 반 세기 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뤘고 우리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나라도 없습니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을 존경하고 뒤따르고 싶어합니다. 현실을 직시하되 자부심은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_ “우리에겐 국난이 닥칠 때마다 슬기롭게 이겨낸 DNA가 내재돼 있습니다. 좋은 나라의 기준이 꼭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만은 아닙니다. 비록 일제강점과 한국전쟁 등의 시련을 겪으며 지독히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에겐 이미 미국 같은 나라도 갖지 못한 5000년이라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 문화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문제점을 바로 잡고 개혁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 비하에 빠져선 안 됩니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군이 퇴각 길에 올랐다.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500여 척의 왜선이 노량 앞바다에 집결했다. 이미 고니시의 뇌물로 마음이 돌아선 명나라의 도독 진린은 왜군의 퇴로를 열어주려고 했다.

끝나지 않은 일본과의 역사 청산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충남 아산 현충사를 찾아 참배하는 방문객들. / 사진·중앙포토
이순신은 적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7년간 조선을 피바다로 물들였던 왜적을 응징해야 했다. 그것이 후세를 위해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믿었다. 1만여 명의 수군과 함께 나선 이순신은 왜적을 파죽지세로 몰아갔다. 몇 시간의 전투 끝에 불에 타 깨어진 적선이 200척이 넘었다.

붉은 태양이 노량 바다 동녘으로 떠오르던 그때 적군이 쏜 탄환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을 관통했다. 마치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듯 이순신은 왜란이 끝나던 날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만든 운명처럼 류성룡도 같은 날 조정에서 파직을 당했다. 류성룡의 개혁을 반대하던 수구세력의 반격에 모든 관직을 삭탈당했다. 임진왜란을 극복했던 두 영웅은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류성룡은 시골에 내려가 전란의 과정을 상세히 담은 <징비록>을 남긴다. 이순신이 전장에 생의 마지막을 바쳤던 것처럼 류성룡은 상세한 기록을 남겨 역사를 바로 잡으려 했다. 그는 첫 장에서 “참혹했던 전쟁을 회고하면서 다시는 전란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난날의 실책을 반성하고 앞날을 반성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말했다. 눈물과 회한으로 쓴 7년의 기록이었다.

이_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와 같은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일본과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적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만 탓하고 감정적인 공격을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된 점을 반성하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먼저 해야 합니다.”

류_ “대표적인 게 위안부 문제지요. 일본의 만행은 분명 잘못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 국민을 지키지 못했던 국가가 먼저 나서서 사죄하고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줬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지도층은 어땠습니까? 지켜주지 못한 자신의 잘못은 얘기하지 않고 오직 일본만 비난해왔습니다. 자강하지 못해 제 국민조차 지킬 수 없던 우리의 무능을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이_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우립니다. 일본이 몇 푼 안 되는 돈을 쥐어주며 역사를 청산하겠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나라라면 그 돈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배상을 한다면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일본에서 받을 것은 진심 어린 사과이지 돈이 아닙니다.”

류_ “독도 문제도 마찬가지지요.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시한 일본의 교과서 등에 대해 우리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응합니다. 일본이 노리는 것도 계속 논란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동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_ “맞습니다. 독도에 대해선 우리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현실 주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 땅을 침략하거나 함부로 영해를 넘을 때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개와 힘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임진왜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말이죠.”

공동체 역량 강화와 의식수준 고양


▎2012년 한국의 세 번째 이지스구축함 서애류성룡함 (7600t급)의 취역식이 해군작전사령부 부산기지에서 열렸다. / 사진·중앙포토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이야기 소재로 오르자 송 교수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검정 교과서가 지나친 자학의 역사관을 갖고 역사 왜곡을 해온 현실을 바로 잡아야 하는 건 맞습니다. 임시적으로 국정교과서를 만들어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국정교과서 자체는 비정상이죠. 근본만 바로잡아놓고 다시 검정으로 돌아가는 게 옳습니다.” 이에 대해 김 전 재판관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인 ‘자유민주국가’라는 철학에 맞게 다양하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일부 왜곡 교과서에서처럼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끝으로 두 영웅은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해법으로 ‘공동체 역량을 키울 것’을 제안했다. “공동체의 이익보다 내 이익만 앞세우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양극화가 심화됩니다. 개인의 발전과 공동선이 조화로울 수 있는 접점을 넓혀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이들에겐 인성교육으로, 성인들에겐 시민교육으로 우리의 의식수준을 높여야 하는 것이죠. 이를 위해선 사회지도층이 앞장서 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합니다.”

- 대담 =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류성룡 전문가) ·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이순신 전문가) / 사회·글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 사진 강정현 기자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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