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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정세] 박근혜 스캔들과 아베 정권 

한·미發 두 개의 ‘혁명’에 혼비백산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특별편집위원
박 대통령 방일(訪日) 통한 한·미·일 3각 안보협력 강화 구상에 차질 불가피… 반기문 비롯한 여야 주요 대선 주자들의 친중 성향에도 우려감

▎일본 중의원 본회의장에 참석한 아베 총리가 생각에 잠겨 있다.
2002년은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을 공동 개최한 해로 양국 관계는 대단히 양호했다.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한국붐이 일었으며, 일본의 시사잡지 기자인 필자는 거의 매월 한국을 방문해 대통령선거에서부터 월드컵에 이르기까지 각종 뉴스를 취재하면서 한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그런 와중에 미래의 대통령후보로 여겨지고 있던 박근혜 의원에게도 인터뷰를 신청했는데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서울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원 회관을 방문, 차분히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얻었다. 질문은 연말에 있을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한·일 관계, 거기에 박근혜 의원의 반생에 관한 것까지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박 의원이 “아무거나 질문하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했기에 나는 과감하게 “왜 결혼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결혼은 쭉 하고 싶었습니다. 젊을 때는, 남성에게 연애 감정을 품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결혼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4년 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1533년~1603년)의 전기를 읽고 무척 감명을 받았습니다. ‘처녀왕’이라고 불린 엘리자베스 1세는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을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이젠 50세나 되었으니 결혼을 포기하고 앞으로의 인생을 한국 국민들을 위해 바칠 결심을 했습니다.”

박 의원과의 인터뷰에서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 순진무구한 성격이다. 마치 나이를 먹지 않은 15살짜리 천진난만한 소녀가 그 마음 그대로 어른이 되고 정치가가 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일본도 왕실에는 비슷한 타입의 인물들이 있지만 정치가 중에서 이런 타입은 만나본 적이 없다. 일본 정치가는 일반적으로 사리사욕과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몰에 물든 여의도 의원회관을 나오면서 나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권모술수와 음모가 넘쳐나는 한국 정계에서 박 의원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의 불안감은 뜻밖에도 그로부터 14년 지난 지금에 와서 현실이 돼버렸다. 지금 박근혜 정권을 뒤흔들고 있는 스캔들에 대해서는 이미 한국 언론이 연일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다루지 않겠다. 대신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이 이 이웃나라에서 갑자기 일어난 허리케인과 같은 소동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일본 4개 대중(對中) 전략의 균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일본 입장에서는 아주 낯선 지도자에 속한다.
10월 하순으로부터 11월 상순에 걸쳐서 아베 신조 총리의 집무실이 있는 도쿄 나가타초의 총리 관저에는 해외에서 4개의 ‘흉보(bad news)’가 연달아 날아들었다.

아베 정권의 모든 외교정책은 ‘21세기 일본의 최대 라이벌인 중국에 대항한다’라는 전략 아래 입안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바로 그 ‘대중(對中) 전략’에 4개의 큰 균열이 생긴 것이다.

첫째 흉보는 필리핀에 관한 것이었다. 아베 총리는 필리핀을 ‘남중국해를 중국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미·일의 요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필리핀의 두테르테 신임 대통령이 10월 20일 방문지인 베이징에서 “앞으로는 미국과 결별하고 중국을 의지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둘째 흉보는 북방 영토 문제에 관한 것으로 러시아에서 전해졌다. 9월 3일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 대통령과 14번째 일·러 정상회담을 가진 아베 총리는 푸틴에게 “연말에 제 고향 야마구치현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제안해, 12월 15일에 열릴 ‘야마구치 회담’을 성사시켰다. 아베 총리는 자신의 홈그라운드에서 북방 영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려고 계획한 것이다.

북방 영토 문제란 1945년 일본이 패전하면서 구소련이 점령하게 된 홋카이도의 북쪽 4섬을 일본으로 반환시키는 문제다. 그러나 백전노장인 푸틴 대통령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일·러 양국 정부의 수면 아래 협상에서 러시아가 전한 뜻은 ‘영토 문제는 앞으로도 협의를 계속한다’는 것이다. 10월 28일 방일해 11월 1일에 아베 총리와 면담을 가진 러시아의 마트옌코 상원의장도 “섬 하나도 주권을 양보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11월 3일부터 5일까지 세코우 히로시게 경제산업대신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또다시 타진을 시도했지만 결정된 것은 일본의 러시아 경제협력에 관한 사항뿐이었다.

셋째 흉보는 미국에서 전해졌다. 미국 대통령선거는 종반까지 엎치락뒤치락했다. 일본 외무성은 클린턴 정권을 일방적으로 후원하고 있기 때문에 트럼프 후보에 대해서는 일본 외무성의 직원 6500명 중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인맥이 부재했다. “만일, 트럼프 후보가 승리하게 된다면 일·미 동맹은 붕괴되고 오히려 미·중 동맹이 탄생할지도 모른다.”그런 악몽의 시나리오가 아베 총리의 머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넷째 흉보가 한국에서 날아온 것이다. ‘박근혜 스캔들’이었다. 10월 24일 저녁, 한국의 [JTBC]가 충격적인 박근혜 스캔들을 보도했다. 그 다음 날의 아베 총리 관저는 대단히 분주했다. 아침부터 국가안전보장회의인 ‘9각료모임’이 열렸다. 그 후, 아키바 다케오 외무심의관, 야치 쇼타로 국가안전보장 국장, 기타무라 시게루 내각정보관, 스기야마 신스케 외무사무차관 등 수많은 정부 고관이 줄줄이 아베 총리의 집무실로 불려와 향후 한국 정세 분석에 여념이 없었다.

한·일 관계에 관해서 아베 총리나 총리 관저의 간부들, 그리고 일본 외무성은 “단순한 한·일 관계는 21세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모두 “라이벌 중국에의 대항”이라는 시점에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따라 대한 정책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2013년 2월 출범한 박근혜 정권은 5년 임기 전반에 중국의 시진핑 정권과 ‘밀월’을 쌓았다. 그동안 한국이 중국에 접근하면 할수록 이를 갈고 있었던 것이 아베 총리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불과 4개월 만에 베이징을 방문했지만 도쿄에는 최근까지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이것은 역대 한국 정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사드 도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올 10월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그러던 것이 지난해 가을쯤부터 드디어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1일에 ‘한·중·일 3국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아베 총리가 그토록 고대하던 방한이 드디어 실현됐다. 다음 날인 2일 최초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단독 한·일 정상회담이 청와대에서 열린 것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한 2015년 안에 양국 간의 현안사항인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한·일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같은 생각을 말했다. 그러나 양국 수뇌의 속마음은 완전히 달랐다. 박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위안부 출신의 연로한 할머니들이 고령이 됐고 조금도 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박근혜 정권을 중국에서 떼어놓고 일본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중국에서 떼어놓고 일본 쪽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박 대통령이 입에서 신물이 날 정도로 여러 번 강조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실현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의 한·일 양국은 마치 각각 반대편에 서서 후지산에 오르는 것 같았다. 정상을 목표로 삼고 있는 점에서는 같지만 보고 있는 ‘풍경’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한·일 수뇌는 정상까지 겨우 도착했다. 그것이 지난해 12월 28일. 기시다 후미오 외무장관이 방한하여 윤병세 외교장관과 함께 발표한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 합의’이었다. 올해 들어와서 도쿄의 아베 총리 관저에 또 하나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2월 7일에 한국군과 주한미군이 합동으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도입을 위한 교섭을 시작한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아베 정권에 한국의 사드 도입은 박근혜 정권이 중국과 결별하고 20세기 후반의 냉전 시대처럼 일본과 미국 진영에 들어와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 소식은 더할 나위 없는 낭보임에 틀림이 없었다.

올해 2월 이후 한국의 사드 도입 문제에 관해서 중국은 수차례에 걸쳐 도입을 철회하도록 한국에게 거듭 촉구했다. “사드 도입의 명분은 대(對)북한용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사드를 도입하면 중국군도 대항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가장 위험하게 되는 것이 한국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7월 8일 박 대통령 임기 중에 사드를 도입할 것임을 정식 발표하고, 9월 30일에는 구체적인 배치장소를 제시했다. 이 발표는 즉각 아베 총리 관저에 보고되어 관저 주인의 얼굴을 환하게 미소 짓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위가 있었기에 한국에서 이번 ‘박근혜 스캔들’이 발생한 이후, 아베 총리는 외무성 고관과 방위성 고관들을 총리 관저에 불러모아 “사드 도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힐문했다. “사드 도입은 한국과 미국이 국가 간의 약속으로 결정한 사항이므로, 한국의 내정 혼란과는 관계없이, 엄중히 진행되어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아베 총리 앞에서 브리핑하는 정부 고관들은 일단 그렇게 설명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말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나라에서도 관료라고 하는 입장은 정치지도자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만약 “사드 도입은 철회될 것”이라고 보고하면, 아베 총리는 격노하든지 낙담하든지 어느 한쪽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들은 입을 모아 아베 총리에게 희망을 갖도록 하는 보고를 하려고 마음을 쓴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에게 있어서 비관적인 방향으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명백했다.

잠수함 탐지기술과 탈북자 정보의 교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월 라오스 비엔티안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사드 도입 문제 이외에도, 이 난데없는 ‘스캔들’에 의해 아베 정권을 괴롭게 만든 문제가 두 개나 더 불거졌다.

하나는 한·일 간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문제다. 이것은 ‘우호국끼리 군사정보를 서로 공유한다’고 하는 협정이다. 한국은 미국·프랑스·러시아 등 총 32개국 및 지역과 맺고 있다. 일본은 미국·영국·프랑스·오스트레일리아·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맺고 있다. 11월 1일 양국 간 GSOMIA를 체결하기 위한 협의가 4년 만에 도쿄에서 재개됐다. 양국 과장급의 외무·방위 담당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일본 방위성의 관계자는 한국과 일본이 GSOMIA를 체결하는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최근 북한이 잠수함에서부터 발사되는 미사일 기술력을 빠른 속도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군은 잠수함을 탐지하는 기술이 일본의 자위대에 비해서 뒤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미국으로부터 일본 자위대가 가지고 있는 잠수함 탐지기술을 한국군에 전수해주면 좋겠다는 강력한 요청이 온 것이다. 그러나 양국에서 군사기밀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GSOMIA의 체결이 필수적이다. 일본으로서도 북한과의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서 한국에 해마다 1500명이나 들어오는 탈북자의 휴민트 정보를 원하고 있다. 그 때문에 한국과의 GSOMIA체결은 말하자면 잠수함 탐지기술과 탈북자 정보의 교환이다.”  

그러나 4년 만에 열린 협의에도 박근혜 스캔들이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한다. 한 외무성 관계자는 “50분 전 취소사건이 다시 벌어지지 않으면 좋으련만…”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2012년 6월 29일, 일본 외무성에서 GSOMIA 체결 서명식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측은 식이 시작되기 50분 전 ‘국내의 여러 현안을 고려해서 연기한다’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해 온 것이다. 한국 국내에서는 일본과 GSOMIA를 체결하면 자위대가 한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저주받은 GSOMIA협상이 재현되고 있다.”

이번의 한국 스캔들로 아베 정권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연말 한·중·일 3국정상회의이다. 한·중·일 3국정상회의는 지난해 11월에 서울에서 개최됐기 때문에 올해는 일본이 개최국이다. 일본으로서는 아베 총리의 일정상, 12월 3일과 4일에 개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에게 이 일정으로 제안을 했지만 개최까지 1개월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도 일정이 확정되지 못했다.

이번은 특히 한·중·일 3국정상회의를 핑계 삼아 박 대통령이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또한 그것은 한·일 양국의 관계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보자면 박 대통령은 임기 전반에는 중국에 바싹 다가섰지만, 올해 들어서는 미국과 일본의 ‘서방진영’쪽으로 되돌아와주었다. 그것이 북한의 위협이 증가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아베 정권으로서는 방약무인인 행동을 계속하는 김정은 정권에 오히려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일본의 본질적인 ‘가상 적국’은 중국이며 북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베 정권으로서는 어떻게든지 궁지에 몰린 박근혜 정권을 ‘지원사격’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 박 대통령이 탄핵된다면 출국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은 11월 19일, 20일 페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참석을 취소했다.

11월 4일 서울에서 한국의 한·일의원연맹과 일본의 일한 의원연맹이 합동총회를 열었다. 일본 측은 지난해 말에 양국 정부에서 합의한 위안부 문제를 박근혜 정권의 성과라고 평가하는 등, 어떻게든지 박근혜 정권을 추켜세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방한했던 일본의 한 국회의원은 귀국 후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한국 국회의원들의 관심사는 온통 박근혜 대통령의 스캔들 일색으로, 일본과의 관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들은 마치 엄청난 반정부 데모를 보러 서울까지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총리 관저에도 “오래가지 못하겠구나” 비관론


▎지난해 말 아베 총리 관저 앞에서 열린 위안부 협상 타결 반대시위. 피켓에는 일본어로 ‘선조의 명예와 긍지를 훼손한 한·일 합의 결사반대’라고 쓰여 있다.
실제로 박근혜 정권의 지지율이 25%→10%대→5%로 곤두박질침에 따라 아베 총리 관저에서도 “이 정권은 이제 오래가지 못하겠구나”라는 비관론이 많은 사람 사이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일본의 전후 역대정권 중에서 지지율이 가장 낮았던 것은 1989년 4월의 다케시타 노보루 정권과 2001년 4월의 모리 요시로 정권으로, 각각 7%이었다. 다케시타 전 총리는 일본에 3%의 소비세를 처음으로 도입해 국민적인 비난을 받았다. 모리 전 총리는 2001년 2월 일어난 ‘에히메마루 사고’에 대한 부적절한 대처로 국민의 불신이 극에 달했었다. 이 사고는 ‘일본판 세월호 사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하와이 앞바다에서 수학여행 중이던 에히메현 고교생을 태운 배 위로 미군 잠수함이 떠오르면서 충돌해 9명의 고교생이 숨졌다. 당시 휴가를 받고 골프를 즐기고 있던 모리 총리는 사건 보고를 받고도 골프를 계속하고 있었다고 해서 일본 국민의 분노를 산 것이다.

다케시타 총리도, 모리 총리도 지지율이 7%까지 떨어진 시점에서 “이제 끝났다”고 체념하고 내각 총사퇴를 했다. 대통령제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이 일본과 정치제도가 다르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일본인의 감각에서 보면 정권 지지율이 한자리까지 떨어진 시점에서 톱(Top)은 즉각 사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한국 국내에서 박근혜 스캔들이 나날이 커져감에 따라 아베 총리 관저의 관심사도 변화되어갔다. 즉 “박근혜 정권은 어떻게 유지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일본이 응원할 것인가”에서 “다음 한국 대통령은 누가 될 것인가”로 옮겨 간 것이다. 이 질문은 곧 “한국의 차기 정권은 미국과 일본의 편에 설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중국 편에 설 것인가”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의 정권이 일본 편에 설지 중국 편에 설지 하는 문제는 조선왕조가 쇄국을 푼 19세기 후반 이후, 항상 일본에게 있어서 한반도에 대한 최대 관심사로 자리해왔다.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되게 한 것은 1894년의 청일전쟁 이후지만, 청일전쟁은 고종이 동학당의 난을 다스리기 위해서 청국 군대에 의지한 게 방아쇠가 됐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조선이 일본 아닌 중국을 선택한 것에 불만을 품고 전쟁을 통해 중국을 배제하고 조선을 지배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21세기 일본은 과거와 같은 무모한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의 군사동맹국이며 일본도 마찬가지로 미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미국-일본-한국이라고 하는 3개국의 협조에 의해 군사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중국에 대항하고 싶은 것이다. 그 때문에 한국이 일본의 ‘가상 적국’인 중국에 바싹 다가서는 것이 무엇보다도 불쾌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한다면, 한국 헌법 규정에 의해 하야로부터 60일 이내에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됩니다. 지금 후보로서 이름이 오르고 있는 인물은 반기문, 문재인, 박원순….”

이러한 보고는 아베 총리를 결코 기쁘게 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차기 대통령의 유력후보의 한 사람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일본 외무성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외교관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반기문은 친중·반일?


▎1. 노무현 정부 당시의 문재인 민정수석과 반기문 외교보좌관. 아베 총리는 두 사람 다 친중 인사로 여긴다. / 2. 올 3월 북한 탄도미사일 발사 후 열린 일본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아베 총리(왼쪽)가 각료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11월 4일, 지구 온난화 대책을 위한 새로운 국제 기후협약인 ‘파리협정’이 발효됐다.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이렇게 퍼부었다.

“지구온난화 대책을 위한 최초의 국제적인 협약은 1997년에 일본이 중심이 돼서 정리한 ‘교토의정서’였다. 그런데 교토의정서를 대체하는 파리협정을 주도한 것은 온실가스 배출량이 세계 최고인 중국과, 친중파인 반기문 사무총장이었다. 파리협정은 원래 내년에 발효될 예정이었지만, 중국 정부가 올해 연말로 임기가 끝나는 반 총장에게 명예를 선물하기 위해서 배출량이 많은 각국을 재촉해서 발효를 서두른 것이다. 일본은 내년 발효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임시국회에서의 비준을 대비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11월 7일부터 모로코에서 열린 ‘COP22’와 ‘파리 협정’의 제1회 당사국회의에 정식 참가할 수 없게 돼버렸다. 이것은 매우 굴욕적인 처사로 모두 중국과 반기문 총장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이런 평가들로 인해 한국에서 만약 반기문 대통령이 탄생하게 된다면 ‘친중·반일 정권’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일본에 존재한다. 게다가 야당 측 대통령 후보인 문재인, 박원순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의 한국 야당 정치가 대부분은 역대 한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반일적이었던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훈도(薰陶)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 당시의 일본 정부 고관들은 노무현 정부를 ‘청와대 탈레반’이라고 험담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맹위를 휘두르고 있던 급진 좌파의 탈레반 정권을 닮았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 관저의 관계자가 들려준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최초의 핵 실험을 강행했다. 당시 막 총리가 된 아베 총리는 마침 서울을 방문 중이었고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약 1시간 전에 이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졌다. 아베 총리는 한·일 정상회담의 모두에서 북한을 비난하는 긴급 공동성명을 내자고 제안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동시에 그 며칠 후에는 북한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베이징으로 날아간 것이다. 당시 아베 총리는 북한의 핵실험에도 충격을 받았지만 노무현 정권의 ‘친중·반일’적인 행동에도 상당히 어이없어 했다. 그 때문에 아베 총리는 아직도 ‘노무현계 정치가’라는 말만 들어도 거부 반응을 내보인다.”

이렇게 10월 24일 이후 한국에서 들어오는 일련의 뉴스는 모조리 아베 총리 관저를 슬프게 하는 것뿐이었다. 아니, 단 하나 쾌재를 보낸 통쾌한 뉴스가 있었다. 11월 2일에 보고된 다음과 같은 뉴스다.

“한국 해양경찰은 1일 황해에서 위법 조업 중인 중국 어선을 감독하던 중, 처음으로 경비함에서 약 700발의 기관총을 중국 어선단을 향해서 퍼부으며 경고를 줬다. 중국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11월 9일에는 미국으로부터 트럼프 후보의 당선이 전해졌다. 지금까지 미국은 한국과 동맹을 맺으며 북한의 도발을 억제했고 일본과의 동맹으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해왔다. 그러나 이제 삼각동맹의 구심점이 돼온 미국과 최전선의 한국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이 두 개의 혁명으로 동아시아는 혼란에 빠져버렸다. 일본의 고민은 더욱 깊어가고 있다….

-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특별편집위원

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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