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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11)] 이색(4) 청년 개혁가! 하지만 최후는 비참했다 

양심적이지만 정치·역사적 본질과 질문에는 침묵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25세에 불과한 나이에 관직도 없이 초야에 있던 이색은 상중임에도 공민왕에게 이른바 ‘복중상소’를 올렸다. 전제, 왜구, 무과, 학교-과거, 불교, 인사 등 6가지 분야에 대한 개혁을 주장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청년 이색의 이러한 당돌한 개혁 정신은 정치와 결합하지 못하고 점점 사라져갔다.

▎고려 말 대학자인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에 세운 문헌서원.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이 서원에는 두 사람의 삶을 기록해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 사진·중앙포토
지난호까지 이색의 아버지 이곡의 일생을 살펴보았다. 그는 평생 동서남북을 떠돈 노마드였다. 그러나 아들에게 몇 가지 정신적 유산을 남겼다. 첫째는 정치에 대한 열정, 둘째는 성리학, 셋째는 코스모폴리탄이다. 이곡이 고려와 중국을 떠도는 동안 이색은 고향 한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연경에 있었고 시골에는 좋은 선생이 없었지만, 이색은 총명했다. 14세 때 이색은 25세의 송씨라는 사람에게 시 짓는 법을 배웠는데, 그에게 성균시에 응시해보라고 권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 즉 이곡의 어머니는 “네가 분별없이 행동하는 것이 분명하다. 네가 공부한 실력이 응시할 정도는 되지 못할 터이니 경거망동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필시 누군가 너에게 허탄한 소리를 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 게다”라며 종이도 주지 않았다. 송씨가 종이를 사주며 강권해서 시험을 보았는데, 덜컥 합격해버렸다.(<牧隱文藁> ‘宋氏傳’; 이익주, <이색의 삶과 생각>, 47쪽)

그해 그는 부인 안동 권씨와 결혼했다. 권씨는 권한공의 손녀이자 권중달의 딸로, 당대의 명문거족 출신이었다. 고려의 고문망족(高門望族)들이 이색을 사위로 삼고자 혼롓날 저녁까지 다투었다고 한다. 청년 이색의 성가가 실로 높았던 것이다. 17세인 1344년, 이색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1348년 21세의 이색은 북경에 가서 원의 국자감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원의 조관(朝官)이었기 때문이다. 유학생으로 국자감에 입학한 것은 이색이 처음이었다. 이곡은 이색을 중국에서 교육받고, 그가 원조의 관리로 입신양명하길 바랐다. 이곡은 이공수에게 “국자감의 문물이 요순 때만큼 성대하니, 자식 둔 부모가 본국서만 교육하려 하리까”라고 말했고, 이색에게는 “남아는 제왕의 도읍에서 벼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51세의 이곡은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아들에게 기대했는지 모른다.

25세 이색, 임금에게 ‘비상시국론’을 상소하다


▎원·명·청 세 왕조대의 태학(太學) 또는 국자감(國子監)으로 중국 베이징 공묘(孔廟) 옆에 있다. 이색은 1348년 21세 때 이곳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1350년 봄에 고려로 돌아갔다. 고려인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사진·중앙포토
청년 이색은 아버지 덕을 톡톡히 보았다.

“동인(東人)으로 입학한 이는 매우 적었는지라/ 조관의 자제는 어찌 그리 존귀했던고/ 나는 선군이 봉훈(奉訓)의 반열에 오른 관계로/ 전례에 따라 태학에 유학할 수 있었는데/ 훌륭한 교화받은 지 한 해도 안 지나서/ 글 지으면 이따금 뛰어나단 칭찬 들었네.”(<牧隱詩藁> ‘讀書處歌’) 이색은 이곳에서도 곧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아버지 이곡은 만난 지 몇 달만에 고려로 귀국하여 은거했다. 대도에 남은 이색은 재원 고려인들은 물론 국자감 동료와 광범위한 교유를 했고, 아버지 동년들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며 유학자, 시인이었던 이색.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색은 중국어에 서툴러 고생이 많았다. 발음이 좋지 않아 국자감에서 공부할 때 추첨에 뽑혀 경전을 암송해야 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홀로 입을 닫고 마른나무 등걸처럼 앉아 있어야 했다. 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색의 심정을 잘 알 것이다. 말이 서툰 곳에 가면 어른도 아이가 된다. 1350년 봄 이색은 고려에 돌아왔다. 햇수는 3년이지만, 실제 기간은 2년이 넘지 않았다. 유학은 성공적이지 못했던 듯하다.(이익주, <이색의 삶과 생각>, 56~57쪽) “책을 지고 태학에 유학을 했으나/ 수년 동안 학문을 제대로 닦지 못하고/ 오늘 아침 빈 주머니로 고향을 향하여/ 말에 올라 유유히 봉성을 나가는구나.”(<牧隱詩藁> ‘出鳳城’)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공민왕 원년 올린 ‘복중상서(服中上書)’의 수준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국에서 성리학을 개화시킨 인물이다. 우물 안 개구리로부터는 그런 공력이 나오지 않는다.

이색은 1350년 12월, 다시 대도로 돌아가 국자감에 복학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1351년 1월 1일, 이곡이 세상을 떠났다. 이색은 급거 귀국해 1353년까지 3년상을 치렀다. 그 사이 이색은 1352년(공민왕 1년) ‘복중상서’를 올려 당시 고려의 시무를 논했다. 당시 이색은 25세였고, 공민왕은 23세였다. 젊은 공민왕은 왕건시대의 고려를 재건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색은 왕이 “근세의 비루한 것을 배척하고 장차 태조의 옛 일을 회복시키려고 하였다.”(<牧隱文藁> ‘賜龜谷書畵讚’)고 평가했다. 66세의 이제현이 그를 도왔다. 하지만 공민왕은 측근 조일신에게 더 깊이 의존하고 있었다. 이제현이 ‘개혁’을 상징했다면, 조일신은 ‘권력’을 의미했다. 공민왕에게는 두 가지가 모두 필요했다. 문제는 균형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민왕은 균형을 잃었고, 고려정치를 파탄상태로 몰고 갔다가 끝내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공민왕 원년에 이미 그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즉위 후 첫 인사가 측근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불안을 느낀 이제현은 수차 강청하여 사퇴했다. 이색이 ‘복중상서’를 올린 것은 이 무렵이었다.

당시 이색은 상중으로, 국사를 논하기 적합한 때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아무런 관직도 없는 초야의 사인(士人)이었을 뿐이다. 나이도 25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천한 필부의 몸으로 외람되게 감히 아뢰오니 그 망령된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을 잘 안다”고 전제한 뒤, “지금은 비상시국이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국가가 평안할 때는 공경(公卿)의 말이라도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여기나 유사시는 필부의 말이라도 태산보다 무겁게 여깁니다.” 그가 건의한 사항은 전제, 왜구, 무과, 학교-과거, 불교, 인사 등 6개조이다.

전통 왕조의 존망은 기본적으로 전제에 좌우된다. 맹자가 “인정(仁政)은 경계에서 비롯된다(仁政必自經界始)”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색은 가장 먼저 전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 역시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고 정전(井田)을 고르게 하는 일이 정치의 급선무”(經界之正 井地之均 治人之先務也)라고 주장했다. 400년간 지속된 왕조의 폐단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전제였다. 폐단의 요점은 농민경제의 파탄이었다. 하나의 토지에 소유권 주장자가 7~8인이나 되는 경우도 있어, 농민의 부담이 한계를 넘어섰다. 권세가들이 억지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불법적으로 탈점하여, 토지 소유권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개혁의 요체는 토지 소유권을 명백히 가려내어, 농민의 부담을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끝내 이 개혁을 완수하지 못한 고려왕조는 멸망했다. 이성계 그룹이 1388년 위화도회군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추진한 것도 전제개혁이었다.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은 이색의 ‘안목’


▎고려 우왕 3년(1377년) 10월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화통도감(火桶都監)’을 설치했다는 <고려사> 기록. 화통도감 설치 후 우왕 6년 진포해전, 우왕 8년 남해대첩에서 그 효과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둘째 문제는 왜구였다. 왜구의 본격적인 침입은 1350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그다지 심각하지도 않았고, 40여 년 지속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색은 이 문제를 둘째로 거론했을 뿐 아니라, 해전책이라는 정확한 대책을 제시했다. 그 식견이 놀랍다. 이색은 왜구 방어대책으로 육전책과 해전책을 함께 강구할 것을 주장했다. 그 이유는 “육지만 방어하고 바다에서 싸우지 않으면 우리가 겁먹은 것으로 알고 적이 마구 쳐들어올 것이고, 반대로 바다에서만 싸우고 육지에서 막지 않으면 적이 불의에 출몰해 그 피해가 작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육전은 굳건히 지키는 전략이며 해전은 적을 제압하는 전략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색의 건의는 채택되지 않았다. 고려군은 육전에만 몰두했다. 해전 반대론자들은 “적이 배에 능숙하기 때문에 수전(水戰)은 불가하며, 만약 선함을 건조하려면 재차 백성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왜구는 공격 지역을 자세히 정탐한 다음 밤에 습격했으며, 낮에는 배로 퇴각했다. 이 때문에 왜구는 공격 지역과 시간을 자유로이 택할 수 있었던 반면, 고려군은 언제나 수세적인 입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해전책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공민왕 22년부터였다. 이해 6도 도순찰사가 된 최영은 전함 2000척을 만들어 해전에 대비하고자 했다. 공민왕 23년 중랑장 정지는 이색과 동일한 취지의 전략을 제시했다. 그것은 최영과 달리 연안지역의 어민들을 주축으로 수군을 편성하려는 대책이었다. 위화도회군 뒤 개혁파 조준과 조훈흘의 해전책도 기본적으로 이 전략을 따랐다. 우왕 3년 고려정부는 대대적으로 전함을 건조하고, 해전을 시작했다. 또한 고려 화약의 발명자 최무선의 제안에 따라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설치했다. 그 효과는 우왕 6년 진포해전, 우왕 8년 정지의 남해대첩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지가 대마도 정벌론을 제기하고 박위가 실제 정벌에 나선 것도 이 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첫 제안자는 이색이었다.

셋째 문제는 무과를 설치, 무관을 선발해 전쟁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이색은 대규모 전쟁이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팍스 몽골리카 아래 “태평을 누린지 100년간에 백성이 전쟁의 화를 알지 못했다.” 한편 원이 세운 만호부는 간판뿐이고, 여러 군직은 무장이 아닌 세족들의 세습직이 되었으며 군사도 없었다. 그런데 고려의 “동쪽에 일본이 있고 북쪽에 여진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강소성과 절강성의 홍건적이 있다. 만약 전쟁이 나면 쟁기질하던 농민들이 어떻게 졸지에 성을 지키는 병졸이 될 수 있겠는가? 변란이 창졸간에 발생하면 그 군사들은 모두 도망치느라 바빠서 사직을 지키고 군왕을 모시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늘 염려가 여기에 미치면, 저도 몰래 한심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李穡傳’) 그러나 이런 절박하고 예언적인 인식은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다. 공민왕 8년과 10년, 제1, 2차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이색의 우려는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북방상황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다른 정치가들은 이색과 달리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초나라가 원숭이를 잃으면 재앙이 임목(林木)에 미치고, 성문이 화재를 당하면 재앙이 연못의 물고기에 미친다.” 이색은 이처럼 북방 대륙의 불안정이 고려에 반드시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일은 한반도 역사에서 반복되어온 것이었다. 청년 이색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이미 국제적 안목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도에서의 3년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역사와 군사문제에도 조예가 깊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안보는 세 곳의 동향에 의해 결정되었다. 첫째 중국, 둘째 만주, 셋째 일본이다. 통일신라 이후 고려까지 일본은 한반도의 안보와 무관했다. 고려말 왜구는 새로운 안보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색은 새로운 동향을 꿰뚫고 있었다.

학교와 과거제의 정치적인 효용성 주창


▎왜구를 격퇴하는 데 쓰인 고려시대의 화포. / 사진·중앙포토
넷째 문제는 학교와 과거다. 학교와 국가시험을 연결시켜 비인격적이고 실적주의적인 정치-관료제도를 만든 것은 세계 역사상 중국이 처음이다. 그 시스템에 의해 중국은 지중해 유럽보다 많은 인구와 넓은 영토를 통치할 수 있었다. 후쿠야마(F.Hukuyama)는 이 시스템이 로마의 행정제도보다 우월했다고 평가했다. 공적 제도의 우수성은 얼마나 객관적이고 효율적인가에 달려 있다. 그것은 제도를 얼마나 비인격화시키고 경쟁적으로 만드는가에 달렸다. 과거제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는 광종 이래 과거제를 채택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정치체제의 혁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신분’과 함께 ‘능력’을 지배층의 조건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부와 신분을 보유한 사회적 지배계급이 자동적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과거는 엘리트의 경쟁과 순환을 촉발시키고, 정치집단의 능력을 제고하여 체제의 능력을 제고시킨다. 둘째는 능력 중에서도 ‘지식’이 중시되었다는 점이다. 전근대 정치 엘리트는 대체로 신분과 군사적 능력에 의해 충원되었다. 일본과 유럽의 봉건제는 전형적인 예이다. 학문이나 지식은 부차적이다. 그러므로 과거제는 지배계급의 성격과 정치사회 전체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다. 한 정치공동체에서 ‘지식’을 본질이자 핵심요소로 생각한 것은 공자와 플라톤이었다. 정치와 인간의 정신적, 정치적 질병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도(道) 또는 진리(truth)를 아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색은 “공자의 도는 너무나 원대해 제가 감히 찬양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색은 학교와 과거제의 정치적 효용에 대해 “대개 국학(國學)은 풍화(風化)의 근본이며, 여기서 배출된 인재는 정교(政敎)의 근본”이라고 말했다. 학교는 정치공동체 전체의 문명화를 위한 초석이고, 교육받은 사람은 정치와 문화의 기둥이라고 본 것이다. 이색은 당시 고려 사회에서 이 근본과 기초가 무너졌다고 인식했다. 이유는 정치충원 제도인 과거제가 비정상화되었기 때문이다. “벼슬에 오른 자가 반드시 급제가 아니고, 급제한 자가 반드시 국학을 거친 것이 아니니, 누가 즐거이 지름길을 버리고 험한 길을 가겠는가?”

즉 문제의 근본원인은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하여 실력을 쌓은 사람들이 관리로 선발되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이곡의 지적대로 뇌물(有財)이나 세력(有勢) 같은 비정상적인 경로가 더 유력한 수단이었다. 유력한 집안의 아들들은 손쉽게 과거에 선발되었다. 귀족가문의 자손들은 관직에 나가기 위해 반드시 과거를 볼 필요는 없었다. 특별전형인 문음(門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명예를 위해 과거를 선호했다. 그러므로 과거를 둘러싼 유력자들의 압력은 매우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곡조차도 충목왕 3년(1347) 10월 자신이 시험관이 되자 그 압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이러한 부정은 일종의 관행으로 굳어졌다.

이 때문에 이색은 국가 교육기관의 과정을 이수한 사람에게만 과거 응시자격을 부여하자고 건의했다. 애석하게도 공민왕은 이색의 건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이색의 구상은 학문과 정치, 사회의 성격을 바꾸기 위한 혁신적 제안이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계관과 정치관을 가진 인간 양성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공민왕은 이 제안에 내포된 정치적이고 문명적인 의미에 둔감했다. 공민왕 19년(1370) 명나라의 건국과 더불어 제시된 방책도 이색의 구상과 동일한 맥락에 서있었다.

다섯째는 불교다. 여말선초는 사상 교체의 시대였다. 당시 불교는 372년 고구려에 처음 들어온 이래 1000년 동안 한국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우리나라가 신라 말엽부터 불교를 믿게 되어 심지어는 촌락에 이르기까지 탑과 절이 즐비하게 일어섰으며, 불교의 설이 넘실거리는 물결처럼 사방에 퍼져서 사람들의 귀에 익고 골수에까지 스며들어서 의리로써 깨닫게 할 수 없었으며 말로써 밝혀 줄 수 없었다.”(‘金子粹傳’)

불교는 처음부터 왕실과 굳게 결합되어 있었다. 고려는 왕이 불교 수장을 맡지는 않았지만 승과제, 국사-왕사제를 통해 국가 체계 안에 불교를 흡수했다. 그 목적은 종교의 인심수습과 신성화 기능을 활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말 불교의 폐단은 심각했다.

불교의 형이상학적 문제보다 실무적인 문제를 지적


▎고려 화약의 아버지 최무선. 그는 화약뿐만 아니라 다양한 총포와 이에 적합한 전함도 개발했다. 1380년 우왕 6년 화기를 이용해 500척의 왜선을 격파(진포대첩)하는 성과를 거뒀다. 최무선은 1389년 박위와 함께 대마도 정벌에도 참여했다. / 사진·중앙포토
“중엽 이후 불자들이 늘어나자 오교 양종(五敎兩宗)은 이권을 다투는 소굴이 되었고 냇가와 산굽이에는 모조리 절이 들어차게 되었다. 불자들이 더럽고 추악한 것에 물들었을 뿐 아니라, 나라의 백성들 가운데 놀고먹는 자가 많아져서 식자들이 늘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다. 부처는 큰 성인이지만 호오(好惡)가 보통사람들과 꼭 같으니 이미 죽은 그인들 자기의 추종자들이 이처럼 추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어찌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이색전’)

이는 기본적으로 소비집단인 종교가 걷는 보편적 길이다. 고려의 사찰은 막대한 토지를 보유했고, 고리대금업과 숙박업에 종사했으며, 술을 팔기도 했다. 12세기말~13세기초 지눌(知訥)의 수선사(修禪社) 운동과 요세(了世)의 백련사(白蓮社) 운동은 이런 불교를 혁신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고려말 불교는 사회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부담이 되었다.

나아가 성리학자들은 세속의 의무를 방기한 불교가 인륜을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성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는 ‘참다움’만 말할 뿐 ‘옳음’(義理)에 대한 사유가 결여되어 있다. 정몽주는 국사 혼수(混修)를 비판하며, “불교는 유교와 달라 공허하게 묘지(妙旨)만 희롱하네. 일체를 환망(幻妄)으로 돌리니, 군신부자의 의리가 머물 곳이 없다네.”(<圃隱集> ‘玄庵卷子’)라고 말했다. 성리학자들은 인간에게는 참다움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불교는 ‘진리(truth)’만 추구할 뿐 ‘윤리(ethics)’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 부처라는 자는 어떠한 사람인가. 장자(長子)로서 자기의 아버지를 배반하여 부자의 육친 관계를 끊었으며 일개 필부로서 천자에게 반항하여 군신의 의리를 짓밟았고, 남녀의 부부생활을 옳은 길이 아니라 하며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베 짜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면서 자자손손 이어 내려가는 길을 끊고 의식의 원천을 막으려 하였으며, 그 도(道)로써 천하를 대치하려 하였다. 과연 이렇게 한다면 100년 후에는 인류가 멸종되어 위로 천체가 운행하고 아래에서 땅이 떠받쳐주는 그 사이에서 번식하는 것은 초목과 금수뿐일 것입니다. 삼강오륜의 길이 어찌 그 사이에 있을 수 있겠는가?”(‘金子粹傳’) 그리하여 정도전은 “불씨의 말에 폐해가 많으나, 인륜을 끊어버리고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것이 이 병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佛氏雜辨>, ‘佛氏眞假之辨’)

그러나 유불 논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색은 이런 형이상학적 문제보다 실무적인 문제, 즉 사찰과 승려의 과도한 수를 우려했다. 그는 승려의 자격을 철저히 가려 자격증(度牒)을 부여하고, 도첩이 없는 자는 군졸로 삼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새로 창건한 절은 모두 철거시키고, 양민이 모두 승려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색의 또 다른 우려는 왕의 불교 신앙문제다. “전하께서 부처를 받들어 섬기는 정성이 역대의 선조보다 더욱 돈독하시다고 하는데, 국가의 복을 영원하도록 해달라고 비는 것은 매우 훌륭하고 매우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왕들의 불교 신앙은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었다.

이색은 성리학만이 정치와 수양 모두를 완성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보다 타협적인 길을 제안했다. “정사를 돌보시고 쉬시는 여가에 불경을 읽으시고 돈법(頓法:선종)에 마음을 두시는 것은 옳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윗분의 행동을 본받기 때문에, 윗분이 재물을 낭비하면 사람들도 낭비하게 되는 법이니, 미리 삼가서 방비해야 할 것입니다. 공자께서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고 했으니 부처에 대해서도 이처럼 대하시기를 바라옵니다.”(‘이색전’) 하지만 공민왕은 말년에 노국공주를 추모하고 아들을 얻기 위해 국력을 기울여 토목공사와 불교행사를 강행했다. 그 역시 모든 어리석은 왕의 전철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색은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천명하고 있지만, 인사를 보면 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하께서는 총명, 관의(寬毅)하시고, 가히 유능한 자질로써, 어지러움이 극하면 치평을 생각하는 중요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현사의 기용에 목마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현사를 우대하는 재물(束帛)이 쌓인 것을 보지 못하였고, 마땅히 정치적 자문이 급할 것인데 아직 저녁에 입시하는 신하를 위해 켜는 횃불(庭燎)이 밝혀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현사가 어찌 모두 등용될 수 있으며 간사한 자가 어찌 모두 물러가겠습니까. 아직 한 가지 정사가 행하여졌다는 것도 듣지 못하였고, 공연히 백성의 소망만 서운케 하오니, 이렇게 하고서 그 다스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오리까.”

“가련타! 동주(東周) 만들려던 이 마음 누가 알아주리”


▎고려 최고의 학교인 개경 소재 성균관. 1367년 공민왕 16년에 이색은 성균관을 재건하고 성리학 강의를 시작해 여말선초 개혁운동의 주역들을 배출했다. 이색이 한국 역사에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 사진·중앙포토
매우 강경한 비판으로 초야의 신진다운 패기와 결기가 느껴진다. 측근 중심의 정치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당대의 명승 보허(普虛, 1301~1382)도 공민왕에게 “군왕이 삿된 사람을 버리고 바른 사람을 등용한다면, 나라를 다스림이 어렵지 않다”고 답했다. 이에 공민왕은 “내가 삿됨과 바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만, 다만 그들이 나를 원에 따라가 모두 근로하였기 때문에 가볍게 버리지 아니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 역시 측근들의 부족한 자질을 인정했으나 사정이 불가피했음을 고백한 것이다.

청년 이색의 상소는 그의 정치적 열정과 놀라운 식견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25세의 젊은 신진이 아니라 학문과 경험이 완숙한 국가원로라 해도 이보다 높은 수준의 국책을 제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고려말의 국가적 과제는 이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색은 학문의 연마와 대도에서의 짧은 국제적 경험, 그리고 정치에 대한 열정을 통해 청년 시절에 이미 최고의 자질을 갖춘 국사(國士)가 되었던 것이다. 인재에 대한 감식안이 뛰어났던 공민왕은 이색을 진심으로 인정했다.

“공민왕이 매번 이색과 이인복을 불러 만날 때, 좌우로 하여금 반드시 청소하고 분향하게 하였다. 총애를 받는 승신조(僧神照)가 왕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는 데 반드시 공경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하나이까’했다. 왕이 이르기를 ‘네가 어찌 알리오. 이 두 분은 도덕이 용렬한 유학자가 아니며, 또한 이색은 학문이 껍질을 버리고 알맹이를 얻었으니 비록 중국에서라도 또한 비길 만한 유가 드물다. 어찌 감히 업신여기랴’하였다.”(‘이색전’)

이 시대에 거칠게나마 제도와 인간에 대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인물은 이제현과 이색이었다. 충목왕 원년 이제현의 상소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대표하고 있었고, 공민왕 원년 이색의 상소는 여러 가지 점에서 예언적이고 새로운 구상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이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공민왕의 개혁의지는 열렬했으나, 개혁에 대한 성찰은 그만큼 깊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그의 개혁정책들은 유기적 연관을 가지지 못했고, 근본적 목표를 결여하고 있었다.

일생에 걸친 이색의 정치적 희망은 유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가련타, 당시에 동주(東周) 만들려던 마음, 지금의 이 마음 그 누가 알아주리.(可憐當日欲東周 祗今心跡誰能辨)”(<牧隱集>, ‘夜雨’)

동주는 주나라가 낙읍으로 수도를 옮긴 후 이름이다. 공자는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으면 동주를 이룩하리라”라고 말한 바 있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철환천하했던 공자의 이상 국가 모델이 바로 동주였다. 성리학자들의 구세의식은 강렬하다. 불교의 ‘독선(獨善)’을 비판한 고려말 신진유신들은 “선비는 마땅히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뒤에 즐긴다”는 범중엄(范仲淹)의 말을 흉중에 담고 있었다.(<三峰集> 卷4) 송의 성리학자 장재(張載, 1020~1077)의 말은 그들의 이상을 잘 보여준다. “천지를 위하여 뜻을 세우고 생민을 위하여 도를 세우며,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연다(爲天地立心 爲生民立道 爲去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라고 말한 바 있다.(<近思錄>)

고려말 성리학자들의 호에는 유난히 ‘은(隱)’자가 많다. 이색도 그렇다. 그것은 하나의 시대적 풍조였다. 그런데 이색은 당대 유학자들의 ‘은일(隱逸)’의식을 비판한다. 그는 이숭인의 호 ‘도은(陶隱)’에 대해 “나는 늙었으니 오히려 괜찮다. 하지만 자안씨(子安氏, 이숭인)는 탁연히 앞으로 전진할 때다. 그런데 은(隱)으로 이름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비판했다.(<牧隱集>, ‘陶隱齋記’) 정몽주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이제 달가(達可, 정몽주)는 채소밭에 숨어 있다. 그러나 조정에 서서 유도(儒道)의 부흥을 자임하고, 엄한 얼굴로 학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니 그는 진정으로 숨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牧隱集>, ‘圃隱齋記’)

이색은 왜 공민왕의 실정에 입다물었을까


▎국가가 과거 합격자에게 발급한 증서인 홍패. 동아시아 사회의 과거제는 비인격적이고 업적주의적 정치 충원제도로서 사회의 문명화와 국가 능력의 고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명한 자연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저 시상(柴桑)의 도연명이나 죽림칠현은 유교의 죄인이다.”(<牧隱集>, ‘元巖讌集 唱和詩序’) 이색은 “성인의 뜻은 천하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 관직에 있으면 그 직책을 다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은 유독 성인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군자된 자들이 함께할 일”이다.(<牧隱集>, ‘圃隱齋記’) 이색은 “밭두둑에서 임금을 잊는 것은 나의 뜻 아니니, 다시 여력을 가져 나라의 안위를 생각했다.”(<牧隱集>, ‘東山’)

하지만 개혁가로서의 이색은 청년 시대로 마감되었다. 정치 개혁에 대한 이색의 열정은 곧 사라졌다. 이색은 신돈 집권기에 계속 현직에 있었다. 그러나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신진 유신들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색은 이 시대를 관망하면서 보냈다. 정치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했다. 존경하는 스승 이제현이나 좌주(座主: 고려시대 과거시험관) 이인복은 신돈의 적극적 반대자였다. 그러나 그는 공개적 반대를 표명하지 않았다.

이색의 정치적 행위가 지닌 특징은 양심적이지만 역사적 질문이나 본질에 대한 ‘회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공민왕 11년 제 2차 홍건적의 난 직후에 발생한 삼원수(三元帥) 피살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 자체로 정치적 비극이었지만, 정몽주의 절규처럼 성리학자들에게는 천도와 역사의 정의에 중대한 의문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은 하나의 이념적 지표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삼원수의 처형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표된 공민왕의 교서(‘罪三元帥敎書’)는 이색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 핵심은 장군들이 왕을 무시했다는 점이었다.

“돌이켜 생각건대, 안우 등은 나라의 간성이 되어 피흘려 싸운 지 수년에 상당한 공로를 나타냈다. (…) 비록 그러하나 적을 격파한 공은 한때 혹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임금을 무시한 죄는 만세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다.”(<고려사>)

이색은 당시 국가의 중요 문서를 작성해야 하는 직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 교서가 이색의 진정한 의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색은 이 사건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정몽주가 감지했던 이 사건의 비극성, 그리고 이 사건이 성리학자들의 형이상학에 제기했던 날카로운 질문에 이색이 침묵하고 있었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것은 성리학의 실천 도덕이 답해야 할 진정한 문제였다. 이색은 단순한 사인이 아니라 당대의 유종(儒宗)이었다. 유종은 공식적인 어떠한 지위도 아니지만 유학자 집단의 정신적 지표였다. 따라서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정치체가 표출하는 모든 이념은 그를 통해서만 정당화된다. 그는 이념의 최종적인 판단자이자 살아있는 이념의 표준인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이색의 정치적 역할은 단지 선량함에 국한될 수 없었다. 삼원수 사건은 왕조의 멸망으로도 직결될 수 있는 위험한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이색은 정치적 불가피성에 굴복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도적인 침묵을 고수했다면 그것은 역사의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고려말 이색과 정몽주의 성리학은 구체적인 역사의 장에서 이미 균열의 시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색이 역사와 정치의 본질적인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적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이색이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기에 정몽주나 정도전이 될 수 없었던 진정한 이유였다.

공민왕 6년 이후 이색은 자신에게 직접 닥친 문제에 대해서는 원칙을 고수했으나, 여타의 심각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지 않았으나, 좀 더 고원한 것을 위해 삶을 던지지도 않았다. 이제현도 그러했다. 피할 수 없는 경우 이색은 구체적인 대립을 은폐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예컨대 토목공사의 중단을 요청했던 유탁의 상소사건에서, 이색은 유탁을 처형하려는 공민왕의 태도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저항은 유탁의 처벌 문제에만 한정되었다. 즉 유탁이 원래 제기했던 공민왕의 실정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저항이 왕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역사의 비판으로부터 왕을 구하기 위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태도는 대립의 의미를 극도로 한정시키고 분열된 두 요소를 양립시키려는 힘겨운 노력이었다.

공민왕대는 이것이 가능했다. 자신의 신념과 생명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이색은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위기가 가중되면 그는 대체로 신념의 일부분을 철회했고, 공민왕은 더 이상 굴복을 요구하지 않았다. 공민왕은 이색을 존중했고, 그의 이상주의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추고 있었다.(<陽村集>, ‘牧隱行狀’) 공민왕 7년(1358), 이색이 간관들과 함께 좌천되자 공민왕은 이색만을 다시 요직에 등용하면서, “이색의 재주와 도덕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색을 버리고 끝내 등용하지 않는다면 인심을 따르게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려사>) 이색 또한 대부분의 경우 사태의 본질을 밝히지 않고 대립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공민왕은 이색의 이상주의가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치적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공민왕, 끝내 이색의 정치적 비전을 외면하다

공민왕 5년 이후 이색의 정치적 삶은 현상유지적인 것이었다. 그는 변혁을 위해 더 이상 헌신하지 않았다. 그가 취한 전형적 입장은 이른바 ‘회통(會通)’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공민왕 원년의 ‘복중상소’와 달리 그는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을 공존시키고자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고려의 위대한 전통과 새롭게 자라는 요소들을 융합시켜 보다 높은 차원의 종합을 이룰 가능성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회통성은 종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질에 대한 질문을 회피함으로써 대립적인 것들이 가장 낮은 차원에서나마 공존할 여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색의 정신적·정치적 삶은 낯선 것들의 혼합으로 분열된 것이었으나, 그 분열은 격렬하게 충돌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관리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삶은 위대성을 결여한, 매우 평범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도 인정받았던 그의 박식함과 폭넓은 경험, 젊은 시절의 짧은 급진적 이상주의, 천부적 문장력, 양심적 태도는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었으나 그는 창조자의 임무를 감당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가 방기한 또 하나의 역사적 책임은 최영과 관련된 것이었다. 우왕 14년의 정변을 생각할 때, 최영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려의 ‘변혁’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원칙’이 있었으나 ‘비전’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변혁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이색과 정몽주, 정도전이 아니라 이인임과 결합했다. 그로 인한 분열과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그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이성계는 달랐다. 변방의 일개 무장이었던 그는 일찍부터 이색과 친교를 나누었으며, 정몽주와 정도전, 조준을 발굴함으로써 역사적 변혁을 성취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한편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갔던 것과는 달리, 이색 역시 최영과 적극적인 제휴를 시도하지 않았다. 양자가 결합되었다면 고려는 내부로부터의 변혁에 성공했을 것이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고려사회의 아웃사이더였던 반면, 최영과 이색은 고려의 기존 질서에 너무 깊이 연루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최영에게는 정신적이고 지적인 이니셔티브를 취한 비전이 결여되어 있었고, 이색에게는 정치적인 이니셔티브를 취할 열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요컨대 양자는 ‘매개’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 적임자는 공민왕이었다. 그러나 신돈 집권기에 공민왕은 최영과 이색 모두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신하들에 대한 불신과 개인의 불행에 사로잡힌 공민왕은 누구도 믿지 않았다. 또한 “공민왕은 목은을 한갓 공경만 할 줄 알았을 뿐, 공의 말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였다”(<陽村集>, ‘牧隱行狀’)고 권근이 말했던 것처럼, 공민왕은 이색이 당초 지니고 있었던 문명적·정치적 비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고려 내부로부터 가능했던 가장 유력한 대안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결과 공민왕과 최영, 이색은 자신들의 삶을 헛되이 소모시켰으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대 법학부 객원 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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