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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복거일 소설 ‘이승만’ | 물로 씌여진 이름 (제1부 광복) 

제3장 - [9] 선전포고 

복거일(卜鉅一) / 조이스 진
‘이제 몇 해냐?’ 이승만은 자연스럽게 처음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던 때를 떠올렸다. 을사년 겨울이었다. 이미 기운 대한제국을 추슬러보겠다는 염원에서 한규설과 민영환 두 대신이 쓴 밀서를 품고 미국 가는 배를 탔다. 그 뒤 잠시 조선에 돌아간 적을 빼놓곤 내내 해외에서 떠돌았다. 그 긴 세월에 이룬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내놓을 것이 있었다. 이승만의 제네바에서의 외교 활동은 이승만의 자랑스러운 성취였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서도 첫 성취였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이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공작을 저격해서 죽이고 일본 요인들에 중상을 입힌 사건이 일어났다. 이토는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가였고 1902년에 맺어진 영일동맹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세력의 중심 인물이었다. 하얼빈을 찾은 이유도 러시아 재무장관과의 회담을 위해서였다. 자연히,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이 더럼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저격한 사건이 아직 기억에 생생한 터라, 안중근의 이토 암살로 미국 사회의 조선인들에 대한 인식은 크게 나빠졌다. 원래 테러에 대해 부정적인 미국 인심을 일본 정부의 능란한 선전이 격동시킨 것이었다.

뒷날 자서전 초록에서 이승만은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적었다.

“샌프란시스코와 하얼빈에서 있은 이 두 살해사건은 일본의 선전 기관들이 한국사람들을 흉도(兇徒)들이고 최악의 악당들이라고 묘사하는 데 대대적으로 이용되었다. 나는 그때에 캘리포니아주에 갈 일이 있었는데, 일본의 선전에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은 학교나 교회에서 한국사람 대하기를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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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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