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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세계의 섬 문명사(1)] 인도양 해양세계의 ‘꽃’ 킬와 

흑역사와 백역사의 무한반복 속에서 동부아프리카 스와힐리 해안 도시국가 중 가장 크게 번성한 ‘물류도시국가’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섬은 대체로 ‘오지’다. 그러나 섬은 또한 항해시대 한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섬의 독자적 문명이 생성되고 지속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다. 역사적 굴절과 변용, 다양한 뒤틀림과 융합을 거치며 형성됐다가 사라져간 섬의 문명사를 찾아 떠난다.

▎인도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거대 궁전인 후수니 쿠와 궁궐 유적. 14세기 이 도시가 상대하던 여러 문화권의 양식을 따라 상당히 융합적인 면모를 보인다.
섬은 격절(隔絶)이다. 섬은 소통(疏通)이기도 하다. 섬은 육지와 소통하고, 다른 섬과 소통한다. 그럼에도 섬은 여전히 격절이다. 문명사적 단절이기도 하고, 소외·망명·유리·금단 등으로 표징되기도 한다. 섬이라는 숙명적 조건, 가령 격절된 원해의 지정학적 원거리, 섬의 유일하게 외부로 열린 창구로서의 운명적 역할, 불현듯 찾아오고 느닷없이 새로운 통치자로 등장한 지난한 역사 등 숙명적 조건에서 섬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고립은 섬을 독립된 ‘우주’로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독자적 문명이 지속가능하게끔 만들었다. 물론 섬과 외부세계의 소통이라는 변수는 언제나 존재했으며, 소통이 없다면 그 어떤 섬의 문명사도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역사의 전변이 이뤄지면서 대체로 섬의 문명사적 근거지들은 그만 쇠락한 흔적만 남기게 되었다. 문명의 몰락으로 용도폐기당한 것이다. 때로는 그 몰락의 결과물들이 변신을 거듭해 고급 관광지로 변신하기도 했다. 문명사적 역할을 마감하고, 이제 관광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기꺼이 떠맡은 것이다. 그럼에도 섬은 전반적으로 불편하다. 그래서 섬은 대체로 오지가 많고, 사람들은 오지여행 버킷리스트에 과감히 섬을 올려두곤 한다.

막상 섬의 문명탐사를 시작하려 하니, 가능한 한 ‘오지’를 찾아가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이 생긴다. 그러나 더 이상 지구상에 ‘오지’는 없다. 철도·선박·차량이 접근 불가능한 곳은 경비행기라도 착륙하기에 노출되지 않은 오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지는 이제 TV 속 ‘오지탐험’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다만 모든 곳을 모든 사람이 경비행기 몰고 다닐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일단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곳, 그곳에 당도하자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곳, 정상적인 도로가 갖추어지지 않은 곳은 오지로 간주해도 무방하겠다.


▎뼈대만 남은 킬와의 대 모스크 유적. 11세기로 올라가는 킬와의 가장 뛰어난 유적이다.
섬과 도시의 문명탐사 첫 번째로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킬와 키시와니(Kilwa Kisiwani)와 송가 마라(Songa Mnara)라는 자그마한 섬을 찾아갔다. 아프리카는 여전히 한국인에게는 ‘머나먼 미지’의 세계고, 더구나 섬은 아프리카 본토에서 한 걸음 더 벗어나 ‘오지’ 반열에 들 만하기 때문이다. 다르에스살렘에서 킬와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탄자니아도 전통적 흙집과 초가지붕이 급격히 사라지고 시멘트 블록과 양철지붕이 뒤덮이는 나름의 ‘산업화’ 과정을 겪고 있다. 서서히 획일화해가는 국도변 풍경에서 그만그만한 크기와 무게의 가난이 오롯이 쌓인 풍경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모잠비크로 내려가는 해안 국도변에서 마침 마을잔치를 목격한다. 아기를 낳았단다. 족히 50여 명은 됨직한 여성이 화려무쌍한 원색의 옷으로 휘감고 마당에 촘촘히 들어서서 춤판을 벌인다. 여전히 공동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 공동체성으로 포장된 실체도 역사적으로는 굴절과 변용, 식민과 제국, 종족과 국가라는 다양한 뒤틀림과 융합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것들이다.


서너 시간쯤 달리고부터는 민가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동부아프리카의 끝없이 긴 해안에는 사바나 잡목이 무성한데, 이따금 바오밥나무가 경관을 돋보이게 한다. 바오밥나무는 동아프리카 해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마다가스카르·모잠비크·탄자니아·케냐 등의 해안을 따라 퍼져 있다. 바오밥나무 열매가 동아프리카해류를 따라 북상하면서 퍼진 결과다. 인간이 인도양을 무역이라는 이름으로 경영하기 훨씬 이전부터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식물도 바다를 이용해 종족을 번식시키는 치열한 식민화 경영을 치렀다. 킬와를 돌아다니며 무너진 역사유적마다 바오밥나무가 서있는 풍경을 일상적으로 목격했다. 바오밥나무에서 비춰지는 장기지속적 연속성과 생명력은 우리네 오래된 동네에서 쉽게 발견되는 느티나무와 비슷한 이미지다.

아프리카 동해안은 광대한 지역이 오랫동안 거의 무인지대로 남아 있었다. 마르지 않는 지표수가 없기 때문이다. 1616년 한 포르투갈인 여행자는 탄자니아 해안의 킬와와 잠베지강의 테테(Tete) 사이를 11일 동안 걸으며 단 한 곳의 촌락만 지나쳤다고 했다. 스탠리는 1871년에 이렇게 기록했다. “기구를 타고 올라가보면 작은 마을에 의해 듬성듬성 구멍이 뚫린 거대한 산림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스와힐리의 땅


▎송가 마라 유적 인근의 바오밥나무. 바오밥나무의 장기지속적 연속성과 생명력은 우리네 오래된 동네에서 쉽게 발견되는 느티나무와 비슷한 이미지다.
고립된 촌락들이 띄엄띄엄 나타나는 해안의 사바나 지대. 그 지루하게 긴 사바나가 끝날 즈음 거친 인도양이 보이기 시작했다. 7시간 만에 도착한 킬와.

원주민 촌락과 숙박시설 몇 곳이 흩어져 있는 킬와 마소코(Kilwa Masoko)의 호텔 같지 않은 호텔에서 하룻밤 눈을 붙이고 선착장으로 나섰다. 섬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외국인에게는 무려 50달러의 입장료를 받았다. 선착장에서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선원과 가이드를 포함한 보트 대여비가 50달러. 도합 100달러를 썼다. 탄자니아 시골에서는 엄청난 금액. 전형적인 2t짜리 목선인데, 일제 모터를 달았다. 다우선이 이따금 흘러가고, 통나무배에 몸을 싣고 낚시에 여념이 없는 풍경이 들어온다. 그 작은 통나무배는 파도에 파묻혀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바다에 친숙한 정도가 아니라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

만 입구에 킬와 키시와니·송가 마라 등 여러 섬이 줄지어서 있다. 인도양에서 배가 들어오면 송가 마라를 거쳐 킬와 키시와니로 오게 돼 있다. 천혜의 항구다. 인도양 거친 파도를 등지고 섬이 방파제 역할을 해 다우선의 안전한 정박이 가능하다. 동부아프리카 최고의 항구다.


▎송가 마라의 아랍풍 건축물 유적.
배는 킬와 키시와니의 자갈해변에 닿는다. 거대한 방어벽으로 둘러싸인 7개의 건축물이 모여 있는 마쿠타니가 나타난다. 성은 대대적인 보수를 거쳤지만 비교적 온전하게 남았다. 15~19세기 술탄이 머무르던 궁성이다. 1840년대 킬와의 마지막 술탄이 오만에 물려줄 때까지 머무르던 궁성이다. 마쿠타니는 ‘거대한 벽의 궁전’이라는 뜻. 노예무역을 하던 프랑스의 흔적이 남아 있다. 프랑스제 대포가 불필요하게 놓여 있다. 킬와의 유적은 해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오랜 세월 도시국가가 누적돼 형성됐다. 모스크와 무너진 무덤, 성곽과 화려했던 궁궐, 목욕탕과 수영장까지 호사스런 건축물이 즐비하다. 아프리카 내륙의 상인과 인도양의 상인이 교역하던 광장, 상선이 떠나던 천연 선착장에 이르기까지 도시와 건축물은 킬와 키시와니의 해안을 따라가면서 시기를 달리하며 건설되었다. 좀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건설되고 파괴되고 다시 건설되고 다시 파괴되기에 이른다. 언제나 폐허는 언뜻 슬프면서도 무너진 공간이 주는 장엄한 메시지 같은 것이 있다. 흔히 ‘폐허의 미학’이라고 하는 것인데, 킬와 키시와니의 장엄한 유적은 어떤 화려한 문명도 성쇠를 면치 못한다는 절대 진리를 상징하는 바가 있다.

지금은 본토에서 격리된 오지의 섬이지만 한때는 동아프리카 술탄이 지배하던 독립왕국이었다. 전성기는 14~15세기다. 아프리카 원주민에 페르시아·아랍이 가미되고, 인도양을 건너온 인도, 나중에 들어온 포르투갈까지 융합돼 만들어진 스와힐리 문명. 스와힐리어는 스와힐리 해안으로 이주해온 반투족의 언어에 북방에서 내려온 아랍어가 결합된 결과물이다. 많은 단어를 아랍어에서 차용했으며, ‘스와힐리’라는 말 자체도 아랍어의 ‘사와힐리(‘해안’을 뜻함)’에서 유래했다.

독일어·포르투갈어·영어·힌두어·프랑스어까지 가세해 거대한 해안을 포괄하는 스와힐리 문명을 만들어냈다. 스와힐리어 사용자는 북쪽으로는 케냐의 라무 섬에서 남쪽으로는 탄자니아의 남쪽 국경선까지 퍼져 있다. 모잠비크에서 탄자니아를 거쳐 케냐·소말리아 남쪽까지 스와힐리어가 통한다. 국가와 국경은 유럽제국의 편리와 의도에 의해 그어진 경계선일 뿐, 스와힐리 공동어와 공동문화의 유산은 지금도 통합적이다. 유럽제국의 식민지배는 자로 잰 듯 대륙 영토를 재 배치해 종족을 갈라놓았다. 동아프리카는 두 지역으로 나뉘었다. 독일이 지배한 탕가니카, 소말리아 일부와 나중에 케냐가 된 지역을 점령한 영국의 땅이었다. 식민지 행정당국은 강력한 이슬람 사회의 힘을 알고 있었고, 그들은 토착 지도층과 공조하며 지배했다. 그러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스와힐리 문명의 그림자는 길게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살아남았다.

그 광대한 스와힐리 해안에서 킬와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우리는 아프리카를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부아프리카의 유럽 식민지 이전의 독립왕국이 역사와 문화의 주체성을 가지고 인도양을 무대로 중국까지 교역했다는 사실에 이르면, 전근대 글로벌적 해양세계의 파장이 그 심도와 넓이에서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다. 킬와는 말하자면 동부아프리카 인도양 해양세계의 ‘꽃’이다.

킬와는 동부아프리카의 광대한 해안을 따라 상당한 범위의 해상무역을 관장하면서, 스와힐리 도시국가 중에서도 가장 크게 번성했다. 인도양 해양세계에 킬와의 존재는 널리 알려져 중동·인도·유럽에서 상인·학자·여행가 등이 이 번성하는 섬을 보고자 찾아 들었다. ‘물류도시국가’인 킬와는 상품 수요의 오르내림에 따라 경제적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동아프리카를 지배한 무역의 메카


▎스와힐리 해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아프리카 인도양 다우선. 바다로 뛰어든 이 지역 사람들의 지난한 삶을 닮았다.
킬와의 부는 무역으로부터 왔다. 섬으로 구성된 이 도시국가는 동부아프리카에서 뛰어난 항구였다. 동부아프리카는 그 발전의 핵심 역할을 인도양의 강력한 상업적 네트워크에 두었다. 머나먼 내륙에서 수개월에 걸쳐 바닷가로 나온 카라반은 가치 있는 물건을 싣고 킬와에 도착했다. 서쪽으로부터 아프리카 내륙의 길고도 위험스러운 길을 걸어온 짐꾼들은 상아·수지(樹脂)·용연향·왁스, 그리고 코뿔소 뿔과 가죽이나 육지거북 등껍질 등을 부려놓았다. 노예들도 체인에 묶인 채 끌려와 섬에서 팔려나갔다. 노예무역은 18세기 무렵 끝났다. 인도양에서 아프리카 내륙으로 연결되는 카라반루트는 실로 1000년의 역사를 뛰어넘으며 대륙과 대양을 연결했다. 빅토리아 호수에 닿은 카라반은 물길을 이용해 서부아프리카로 건너갔고, 서부아프리카는 대서양으로 이어졌다.

남쪽 내륙의 짐바브웨 고원에서는 풍부한 금이 흘러왔다. 금은 오늘날 모잠비크에 속하는 인도양의 소팔라에 당도했으며, 바닷길로 킬와와 북쪽 항구로 흘러갔다. 짐바브웨의 금은 킬와나 스와힐리 해변의 여타 항구도시를 거쳐 페르시아·아랍·인도·유럽 등지로 흘러나갔다.

킬와는 동부아프리카의 ‘상품저장소’이자 ‘교역소’로 기능했다. 아프리카 내륙의 물건이 인도양을 통해 외국으로 나갔고, 반대로 내륙에서 필요한 물건이 들어가는 창구였다. 인도양 자패(紫貝)는 동부아프리카에서 의복·그릇·악기 등 각종 도구의 장식이었지만, 서부아프리카에 도착하면 화폐로 쓰였다. 킬와는 인도에서 온 목화·섬유·구슬 등을 내륙으로 전달했다. 인도양 북쪽과 북동쪽, 남부 아라비아와 홍해, 페르시아만과 인디아에서 다우선이 남서쪽 킬와로 향해 나아갔다. 이들 상인은 무엇보다 킬와의 금과 상아를 구했다. 그 대가로 킬와는 인도의 섬유와 중국·페르시아의 진귀한 도자기를 받았다.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하던 번성과 쇠락은 이들 바다무역을 장악하는 능력과 결부되었다.

킬와에서도 후기석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 유적과 4세기의 원주민촌이 발굴됐다. 현존 촌락과 유사한 규모의 역사는 9세기 초반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결론이다. 그러나 술탄 무역 훨씬 이전에 이 섬은 유럽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미 서기 70년께 이집트 상인이 쓴 <에르트라 해 안내기(Periplus Maris Erythrai)>에 킬와가 등장하며, 킬와에서는 로마시대의 유리 목걸이가 발굴되곤 한다. 킬와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 인도양과의 접촉이 부각된 것은 9세기다. 이슬람문명이 쇄도하면서 섬은 비로소 외부세계와 연결됐다. 특히 아랍의 상인과 이민자가 섬 공동체로 들어와 정착했다. 그러다 1050년경 페르시아 시라즈의 이슬람 정치적 망명자 그룹에 의해 술탄 왕조가 시작되었다.

구전에 따르면, 11세기에 킬와 키시와니 섬은 페르시아 시라즈 왕의 아들인 알리 빈 하산에게 판매됐다. 하산은 섬에 도시를 세우고 현지 왕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도시를 강화하고 무역을 늘리는 데 공헌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수 세기 동안 스와힐리 해안의 남부 반쪽(현재 탄자니아-케냐 국경에서 남쪽으로 잠베지강 입구까지)에서 킬와는 실질적인 도시이자 상업기관으로 성장한다. 짐바브웨까지 동남아프리카 배후지역과 광범위하게 거래했다. 무역은 주로 금·철·상아와 기타 아시아의 구슬·섬유·보석·도자기·향신료·동물 제품이 거래되었다.

파르시의 중심인 시라즈에서 불과 50㎞ 지점에 페르세폴리스가 있다.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남부 파르시 지역에서 비롯됐다. 시라즈 상인은 일찍이 아프리카 동부로 진출했다. 한때 잔지바르 북쪽의 펨바 섬을 다스리던 페르시아 왕, 다르에스 살렘 북쪽 해안의 바가모요 고대항구의 페르시아 후예가 모여 사는 카올레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킬와에서 나온 동전은 펨바·마휘아·잔지바르의 통치자들을 하나의 페르시아적 동질성으로 연결한다. 11세기로 소급되는 킬와의 가장 뛰어난 유적이기도 한 대모스크(the Great Mosque)의 초창기 기도실도 초창기 시라즈 정착민 사회와 연결된다. 여행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이슬람이 전파되던 13세기까지는 해안가는 전통적 신앙에 머물렀다. 코스모폴리탄적이지만 근원적으로는 무슬림인 스와힐리 문명이 이때 본격적으로 출현했다.

12세기까지 이어진 아부 마하 히브 왕조의 통치기에 킬와는 스와힐리 해안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가 되었다. 15세기에 권력의 정점에 올랐던 킬와 술탄은 말린디·몸바사·펨바섬·잔지바르섬·마휘아섬·코모로섬·소팔라, 그리고 마다가스카르 교역소를 통제했다. 이들 항구는 오늘날 동부아프리카의 대표적 인도양 해양 실크로드의 유적지다. 12세기 초반, 킬와는 인도양 황금무역의 주도권을 쥐었고 해안의 강자로 부상했다. 르네상스 해상도시의 번성과 더불어 금 수요가 급증했다. 아시아와 중동에서 여행하는 인도양 상인들은 금을 탐욕했고, 킬와는 번성했다. 킬와는 이들 스와힐리 도시를 장악한 ‘무역의 메카’로 등극했다.

“무역에만 의존하다 보면 무역으로 무너진다”


▎노예무역의 거점으로 독일사령부가 자리 잡았던 키빈지의 해안풍경. 이곳의 어민들은 오늘도 통나무배에 몸을 싣고 거친 인도양을 고래처럼 누빈다.
영원한 지배력은 보장될 수 없는 법이다. 예멘의 하드라마우트(Hadramaut)에서 온 마달리(Mahdali) 왕조가 1277년 시라즈인을 추방했다. 킬와의 주도권이 페르시아에서 아라비아로 바뀌는 순간이다. 홍해 길목의 아덴을 배경으로 한 ‘천년의 장사꾼’ 예멘 사람들 덕분에 킬와는 더욱 번성했다. 1300~1330년 킬와의 번성기는 유별났으며 예외적이었다. 킬와 엘리트의 라이프스타일은 화려했다. 그들은 페르시아와 중국의 도자기, 비싼 인도의 천, 수입 보석과 목걸이를 사들였다. 근동의 이슬람 학자가 섬을 방문했고, 킬와의 로열패밀리는 메카와 예멘을 여행했다. 현지에서는 14세기의 통치자들이 각인된 금화가 발견되곤 하는데, 이는 스와힐리 해안의 유일권력이 형성돼 있었음을 뜻한다.

킬와의 경쟁자 없는 번성은 이들의 야망적이고 기념비적인 건축에 투사됐다. 킬와에는 돔 모양을 한 대모스크가 남아 있다. 킬와의 번성기인 14세기에 술탄 알 하산(1310~35년 통치)이 만들었으며, 거대 궁전인 후수니 쿠아(Husuni Kubwa)도 해안에 세웠다. 이들 건축물은 상당히 융합적이다. 이 도시가 상대하던 페르시아·인더스델타·구자라트·데칸·말라바르·오만과 예멘의 양식을 따랐다. 14세기 모로코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는 킬와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잘 건축된 도시”라고 기록했다. 1331년경 이 도시를 방문한 바투타는 통치자 알 하산의 겸손과 종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했다. 그는 특히 도시계획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해안을 따라 킬와가 성공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당대에 지어진 후수니 쿠아는 후대의 나 같은 방문객에도 깊은 감명을 던져준 건축군이다. 1315~30년에 세워진 이 거대한 건축물에는 내륙에서 온 카라반이 짐을 풀던 마당이 있다. 엄청나게 깊게 판 돌우물은 크기가 상당해 몇 백 명을 먹일 만한 수량을 보장한다. 무려 20m를 파고들어가 물을 끌어올렸다. 당시 킬와가 얼마나 번성했는지는 절벽 위에 세워진 견고한 건물에서 알 수 있다. 건물 꼭대기에서는 12각형의 고급스러운 수영장이 바다를 굽어본다. 층계를 통해 해안으로 내려가면 선착장에 다우선이 즐비하다. 오늘날에는 맹그로브 숲이 우거져 있는데, 수로가 인도양 외해와 통한다. 번성을 구가하던 도시국가의 놀라운 해양건축물이다. 궁궐터에서는 원나라의 도자기가 다량으로 발견됐다. 팍스몽골리카의 대항해가 아프리카 동부까지 미쳤다는 결정적 증거다.


▎키빈지 마을의 ‘노예창고’. 돌집의 자그마한 방마다 절망과 한숨과 죽음의 그림자가 덮쳤으리라.
그러나 킬와의 1300년대 초반은 언뜻 지나가고 만다. 킬와는 세계시장에 조응하면서 발전했지만 그 번성은 의외로 짧았다. 1340년대 섬 경제는 1346~49년 유럽을 덮친 흑사병의 파국으로 금값이 하락하면서 추락한다. 이 가공할 전염병이 킬와 동쪽으로부터 섬으로도 번졌다. 무역 루트를 따라 배에 실려온 쥐떼가 인도양의 항·포구에 영향을 주었고, 술탄은 죽음을 막고자 항·포구를 폐쇄했다. 대모스크의 돔은 무너져내렸고, 그대로 방치됐다. 현재의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들 모스크는 당시부터 보수하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다. 섬이 급격히 쇄락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역에만 의존하는 도시국가는 역시 그 무역에 의해 몰락할 수 있음을 잘 말해 준다. 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대한민국 역시 그 무역의 쇠락에 의해 몰락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15세기가 시작되면서 킬와는 다소 회복된다. 1400년대 초반 킬와는 다시 해안무역의 주도권을 잡는다. 킬와는 북쪽의 경쟁 항구인 몸바사나 말린디로부터 계속 도전받지만 수세기 동안 다시 번성한다. 건축물은 이 시절의 증거물이다. 술탄은 메인타운 서쪽에 새 건축군을 만든다. 대모스크의 무너진 돔을 보수하고, 옆에는 그레이트 하우스라는 건물도 만들었다. 이 시기에 더 작은 모스크도 많이 만들었다. 이웃 송가 마라 섬에는 새로운 정착촌이 생겼다. 이 정착촌의 주민들은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돌건축을 축조한다.

킬와에서 다시 배를 탔다. 송가 마라까지 20여 분을 달렸을까, 모래와 펄이 섞인 해안에 도착했다. 맹그로브 숲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어 들고 한참을 걸었다. 맹그로브가 끝나고 야자나무가 나타났다. 산호초가 으깨진 너무도 섬세한 모래여서 발바닥에 부드러운 감촉이 전달됐다.

드디어 송가 마라 유적이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아랍식 건축이 무리지어 서 있다. 무너진 궁궐과 집단 주거지, 아치가 그대로 남아 있는 출입구, 돔식 천장과 아랍식 기둥이 이어진다. 예외 없이 여기에도 바오밥나무가 무너진 폐허 속에서 묘한 풍경을 연출한다. 바오밥나무는 언제나 폐허와 함께 존재하므로, 사라져간 역사의 지문을 식물 특유의 생명력으로 이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가 마라는 킬와에 비하면 아주 작은 섬이다. 섬 뒤편에 20여 호에 불과한 어촌이 하나 있을 뿐이다. 어민들은 인도양에서 고기를 낚으며 살아간다. 수백여 년 전 어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도 이들은 통나무배에 몸을 싣고 거친 인도양을 고래처럼 누빈다. 이들의 조상은 무역선단의 선원으로 활약하며 인도양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유사무서(有史無書)의 해양사인지라 송가 마라의 더 깊은 역사를 고구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15세기 초반 이만한 크기의 도시국가가 이 머나먼 오지의 섬에 형성됐다는 것은 그만큼 해상왕국의 힘으로 확인된다.

향료의 원산지는 머나먼 동녘 땅


▎킬와의 해변 풍경.
킬와 본섬으로 되돌아왔다. 바닷가 언덕 위에 세워진 말린디 모스크와 무덤을 찾았다. 이 모스크는 아마도 15세기에 건축되었고, 나중 3세기 동안 다시 개축되었다. 지금은 지붕이 무너졌으나 기둥과 벽은 여전하다. 무덤은 18~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케냐의 말린디 항구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는 가족무덤이 있다. 킬와와 북쪽 해안 항구의 상호 연관성이 확인된다. 무역을 통한 항구 간 거래는 충분히 예상된다. 현재 당시를 알려주는 묘비석은 베를린의 민족 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말린디 모스크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낭애 아래로 조선소 유적이 나온다. 오늘날에는 원주민이 어선을 보수하는 데 사용하는, 본디 킬와 번성기에 사용하던 도크다. 부단 없이 선박을 만들어 인도양으로 내보내던 번성기의 해양력을 추측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게레즈 성채는 킬와를 점령한 오만과 포르투갈 세력이 원주민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려고 세운 성이다. 해안에 인접해 성 아래에 배를 들이밀 수 있는 전략적 위치다. 14~15세기 킬와의 평화로운 삶은 1498년 해안에 등장한 포르투갈에 의해 극심한 영향을 받는다. 당시 포르투갈의 기록을 보면, 5000~1만 명의 원주민이 킬와에 살고 있었다. 소수지만 압도적 화력을 지닌 포르투갈인이 들어온다. 포르투갈이 이곳에 이를 무렵 킬와는 왕위 계승 문제로 분란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한 몸바사·말린디 등과의 인도양 무역패권 경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게다가 킬와 사람들은 전형적인 장사꾼이지 군인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에 대적할 정도가 되지 못했다. 포르투갈은 황금무역로인 소활라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포르투갈인들은 게레자라고 부르는 유럽식 성을 만들어 전진기지를 확보했다. 게레즈는 1505년 킬와를 점령한 프란시스코 알메이다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나 이 성채의 최종 완결자이자 점거자는 오만 술탄의 군대다. 아주 짧은 기간을 점령했다. 1512년 이곳을 떠날 때 포르투갈은 성채의 많은 부분을 파괴했다.

우리는 종종 바스코 다 가마(Va s c o da Gama, 1459~1524) 등의 개인적 영웅행위로 희망봉 따위가 느닷없이 ‘발견’된 것으로 여긴다. 기원전 400년부터 1443년까지 아프리카 서안의 보자드로곶(串)은 연평균 1.4㎞ 진출하는 평균율로 발견되었다. 즉 유럽인이 아프리카 서안을 인식하는 정도가 매우 천천히 굼벵이 항로일망정 축적되었음을 간과한다.1000여 년 넘게 보자드로곶은 세계의 변방으로 간주되었다. 주앙1세의 아들인 엔리케(Enrique, 1394~1460)왕자는 보자도르 곶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는 아프리카 북단의 이슬람권 무역중심지인 세우타 요새를 점령하면서 이른바 ‘침묵의 교역’을 알게 되었다. 무슬림 상인과 아프리카 원주민들 간에 말이 통하지 않자 침묵으로 장사하던 그 현장에서 후추·정향 같은 귀한 동양 상품이 거래되면서 높은 이득을 얻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엔리케는 세우타 요새를 점령하면서 동쪽에서 온 카라반을 통해 향로 원산지 대부분이 서아프리카가 아니라 동쪽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시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배를 타고 아프리카를 일주해야 했다. 엔리케 왕자는 해양학적 재능을 가진 여러 부류의 사람을 불러들였다. 그는 포르투갈 세계탐험의 매니저였다. 엔리케는 원정대를 여러 차례 파견했다. 엔리케에 의해 아프리카 서부가 개척됐으며, 훗날 더 남쪽 희망봉으로 돌아갈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드디어 1488년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다. 1500년에 디아스는 인도양으로 갔고, 인도로 가는 도중 배와 함께 침몰했다. 바스코 다 가마는 1497년 리스본을 출항해 디아스가 발견한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안인 모잠비크를 거슬러 오른다. 가마는 케냐에서 이븐 마지드라는 이슬람교도를 소개받았다. 그는 인도양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 수로 전문가였다. 그의 안내로 24일간 인도양을 횡단한 끝에 인도 서해안인 카푸아(Capua)에 닿는다.

킬와를 덮친 콜레라의 악몽


▎킬와의 게레자 포르투갈 성채. 소수의 포르투갈인이 원주민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다.
유럽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길, 이 단순한 길을 뚫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런데 이 길은 생각처럼 단순한 길이 아니었다. 유럽이 인도양으로 진출하자마자 포르투갈의 험악한 무력함대가 평화롭던 항구들을 접수해 식민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문명교류의 해양세계는 끝나고, 식민과 제국의 바다로 둔갑하게 된다. 아마도 킬와의 수로 안내인들이 이들 포르투갈인 안내를 도맡았을 것이다. 당시 킬와 사람들은 인도로 가는 길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17세기 오만의 새로운 왕조가 포르투갈에 강력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엽 오만은 이미 포르투갈을 남부아라비아에서 격파했으며, 1689년에는 지저스성을 되찾는다. 유럽 침략자들의 가장 주요한 기지인 지저스성이 함락되면서 포르투갈은 킬와의 성채에서도 쫓겨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킬와의 성채는 유럽풍이면서도 아랍풍이 융합된 건축물로 남게 됐다.

장사꾼에게, 세상에 노예만큼 값진 상품이 또 있을까? 노예무역의 비극은 킬와에서도 싹텄다. 인도양에서 포르투갈 인이 축출되자 다시 상업활동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동부아프리카 항구도시 간의 무역경쟁은 킬와의 독점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독점의 시대는 이미 물 건너갔던 것. 태생이 바다사람인 킬와 사람들은 인도양을 무대로 근근이 먹고 살았다. 18세기까지 그 어떤 결정적 회복의 기운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노예무역이 시작되면서 전혀 새로운 계기가 찾아왔다. 오만과 프랑스의 무역상인이 내륙에서 노예를 끌고 와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 프랑스는 인도양 코모도제도에서 설탕 플랜테이션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술탄은 노예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으로 킬와 서쪽에 새로운 타운을 조성했다. 마쿠타니 담장의 거대 궁전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새로운 건축물이 새로운 성벽 안에 지어졌다. 궁전 디자인은 후수니 수바의 복사판이었다. 주거지역과 마당이 하나의 단지에 들어섰다. 술탄은 아마도 킬와의 옛 영광을 되찾고 싶었기에 번영기인 14세기의 건축을 본떴을 것이다.

새로운 황금시대의 약속에도 킬와의 복원은 짧았다. 프랑스와 협약은 우두머리 선동가 모리스(Morice)의 죽음으로 끝났다. 곧바로 1784년에 오만은 옮겨가고 섬을 포기한다. 1800년 오만은 포르투갈의 성을 개축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한다. 킬와의 경제는 매우 빨리 통합되는 것으로 보였으나 더 이상 예전의 강력한 도시국가는 아니었다. 1810년 킬와를 방문한 선장 제임스 프리오(Prior)가 보기에 섬은 이미 기력을 잃고 있었다. 1840년, 마지막 술탄은 오만으로 퇴각한다.

킬와는 마침내 텅 빈 섬이 된다. 1850년대에 킬와를 방문한 탐험가 리처드 더븐은 섬이 콜레라에 오염된 것을 목격한다. 그는 극도의 가난과 황폐를 본다. 도시는 폐허로 무너지고 주변에는 죽은 노예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다시 독일이 등장한다. 섬은 독일의 식민지가 된다. 이 마지막 식민지화 시도에 원주민들은 격렬하게 마지마지(Maji MAji) 반란의 형태로 저항한다. 당연히 저항은 실패한다. 1890년대 킬와의 섬이 아닌 본토의 해변마을 키빈지에 독일군 사령부가 들어선다.

섬에서 나와 키빈지로 들어갔다. 대단히 큰 마을이다. 해안에는 어선이 즐비하다. 어촌 인력이 과잉이라 배마다 어부들이 그득 타고 떠난다. 키빈지는 노예마을이었다. 곳곳에 노예를 가두었던 아랍식 건축물이 빼곡하다. 노예로 인해 건설되고 노예로 영위되던 마을. 독일의 제국 지배 책략과 현지의 지배층인 노예상인의 노예장사 이윤이 잘 맞물려 호황을 누렸음직하다. 노예들이 갇혔던 돌집의 자그마한 방마다 절망과 한숨과 죽음의 그림자가 덮쳤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킬와의 유적은 번성하던 역사와 흑역사를 모두 말해준다. 1981년, 킬와 키시와니와 송고 마라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이로써 역사는 일단락 정리되었다. 그러나 찾는 이가 거의 없다. 이 곳을 찾을 만한 비용이라면 대체로 한국인은 유럽을 택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인도양의 파도는 지금도 여지없이 킬와의 해안으로 들이친다. 저 인도양 너머로 다우선이 오가던 시절, 백역사와 흑역사 역시 교차하며 오갔을 것이다.


주강현 - 제주대학교 석좌교수, 민속학자. 한국민속문화연구소장. 해양사·문화사·생활사·생태학·민속학·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는 해양문명사가. 아시아 바다는 물론 대양의 섬으로 시야를 넓혀가며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적도의 침묵>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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