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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2)] 갖옷, 조선시대 최고의 명품의류 

왕의 하사품, 입기엔 너무 ‘무거웠다’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삼국시대 이래 호랑이·여우·오소리 등의 가죽 옷 재료로… 임금에겐 마음의 표현 수단, 신하에겐 ‘가문의 영광’ 징표

▎조선 효종이 북벌의 상징으로 송시열에게 하사한 ‘초구(貂裘: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갖옷)’. / 사진·중앙포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아이들은 빔을 선물로 받는다. 설빔이나 추석빔이라는 말처럼 명절을 기념하기 위해 옷을 새로 해서 입는다.

이제는 우리 경제가 넉넉해지면서 옷을 사 입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됐기 때문에 ‘빔’이라는 말은 잊혀가는 우리말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30~40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 아이들은 명절빔을 입을 생각에 가슴 설레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우리 사회의 변화가 얼마나 가팔랐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요즘은 상대방의 옷을 보고 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슬며시 읽어낸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그 옷이 연출해내는 이미지는 어떤지, 패션에 마음을 썼는지 여부 등을 통해서 우리는 상대방의 정보를 알아챈다.

나아가 옷의 상표를 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의 경제적 사정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함부로 판단하면서 편견을 만들어낸다. 이른바 명품으로 꼽히는 옷을 입었다면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후한 평가를 하려는 심리가 작동한다.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자본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명품의 사회적 자장(磁場) 속에서 판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엔 무리가 있다. 영향을 덜 받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만큼 자본은 어느새 우리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됐다.

명절빔이든 명품이든 그 옷을 곱게 간직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는 명절빔이라는 이름으로 통 큰 결정을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명절 외에는 그 옷을 쉽게 꺼내 입으려고 하지 않았다. 요즘의 명품의류 역시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옷장 깊은 곳에 보관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말할 수도 있겠다.

어떻든 명절빔이 평상시 꺼내 입기엔 다소 무리가 있으므로 잘 보관했다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입으려고 꺼내보면, 어느새 작아져서 더 이상 입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옷 선물은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즐거운 사건이었다.

근대 이전 우리 옷은 늘 비슷한 모습으로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시대 나름의 유행이 있었다. 유행 따라 옷의 길이가 길어지거나 짧아졌고 장식의 유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특히 사치품으로서의 옷은 유행에 민감하기 마련이다. 평상복으로서의 옷과 사치품으로서의 옷은 지금처럼 일정한 구획이 있었지만, 같은 종류의 옷이라 하더라도 사회적 맥락에 따라 평상복이 되기도 하고 사치품이 되기도 했다. 어떤 물건이든 비슷하겠지만 자본이 발달하기 전에는 옷도 선물의 중요한 품목이었다. 평상복을 마름지어 주변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했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비싼 옷감으로 만든 화려하고 귀한 옷을 선물하기도 했다.

첩의 갖옷 때문에 일어난 반란


▎요즘에는 옷을 사 입는 행위가 일상이 됐지만 예전에는 명절·생일 등에나 가능한 특별 이벤트였다. 아빠가 딸아이의 몸에 티셔츠를 대보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금나라(1115∼1234) 멸망 이후 북방의 유목민은 여러 부족으로 분열돼 산개(散開)해 있었다. 그중 일부는 조선의 북방을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다. 반면 북방에 파견된 조선의 관리들이 북방 민족을 괴롭히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조선에 귀화한 북방 민족(흔히 ‘번호·藩胡’라고 부른다)들이 조선과 북방 민족 사이의 완충 역할을 했는데 번호를 괴롭히는 조선의 관리가 많았다. 니탕개(尼湯介)의 난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한다.

1583년 1월 니탕개는 함경도의 경원과 종성 일대의 번호와 여진족들을 규합해 난을 일으켜 아산보(阿山堡)를 공격했다. 이 사건은 1년 가까이 지속됐는데 그로 인해 조선은 국방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 결과 중앙에서 파견된 무신이 지역의 군사를 지휘하는 제승방략체제로 전환됐다. 하지만 이 제도는 역설적으로 임진란이 발발했을 때 초기 패전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니탕개의 난이 발발했을 때 그들이 최초로 공격한 곳은 아산보였다. 왜 이곳이었을까? 니탕개의 난이 발발하는 구체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최몽린(崔夢麟)이었기 때문이다. 최몽린은 아산만호(阿山萬戶)를 지낸 사람이었는데 우성전(禹性傳)의 <계갑일록(癸甲日錄)>의 기록에 의하면 최몽린이 자기 첩을 위해 두 벌의 갖옷을 준비하다가 번호들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어찌 보면 그가 북방 민족들을 겁박(劫迫)해서 두 벌의 갖옷을 준비한 일이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다. 고작 두 벌의 갖옷 준비 때문에 북방 민족들의 원망이 쌓여 반란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전부터 조선의 관료들이 북방으로 부임해가면 그곳의 특산물을 구하기 위해 번호들을 과도하게 몰아붙였고, 그러한 일이 쌓이고 쌓여 최몽린의 일에서 폭발했을 것이다. 역사란 늘 거대한 흐름 위로 수많은 잔물결이 부딪치면서 만들어가는 법이다. 최몽린의 갖옷 사건은 그 잔물결들 중의 하나였지만 큰 흐름의 변곡점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결국 외딴섬에 충군(充軍)하는 것으로 처리됐다.

조선을 통틀어 기록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옷으로 갖옷만 한 것이 없다. ‘구(裘)’로 표현되는 갖옷은 말 그대로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통칭한다. 갖옷은 지역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사용됐지만 특히 북방에서 의복 재료로 널리 애용됐다. 날씨가 춥고 겨울이 길기 때문에 갖옷은 주민들에게 필수품이었다.


▎백두산 천지 인근에서 발견된 호랑이 가죽. 호랑이 가죽은 갖옷의 여러 재료 가운데서도 가장 귀한 것이었다. / 사진·중앙포토
우리나라 기록에서도 삼국시대 이래 꾸준히 갖옷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널리 사용됐던 건 분명하다. 정복남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국내에서 생산된 갖옷의 재료로는 호랑이·표범·여우·오소리·이리·쥐·수달·영양·양·가지(可之, 바닷사자)·물개·너구리·고양이·승냥이·곰·노루·말·강아지 등을 들 수 있고, 조선 후기가 되면 중국과 일본에서 들어온 짐승 가죽도 널리 사용됐다.

가죽의 희귀성과 품질은 자연스럽게 경제적 가치를 높였고 그것은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면서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됐다. 어떤 가죽이냐에 따라 가치는 달랐지만 면포 위주의 옷감을 사용하던 동아시아 문화에서 가죽옷은 그 품질이나 가치 면에서 월등히 높았다.

이런 분위기는 이미 <논어>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공자가 자신의 제자 자로(子路)를 평가하면서, ‘해진 솜옷을 입고서 여우나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衣敝縕袍, 與衣狐貉者立而不恥者, 其由也與: 의폐온포, 여의호학자립이불치자, 기유야여)이라고 했다.

요즘으로 치면 허름한 옷을 입고 명품 옷으로 치장한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당당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공자의 시대에도 이미 여우 가죽과 담비 가죽은 상당히 고급 의류의 재료였고 그것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상징처럼 여겨졌다는 뜻이다.

게다가 함경도 지역은 대대로 담비 가죽의 산지로 중요한 곳이었다.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섬용지(贍用志)’에 의하면 이곳에서 산출되는 담비 가죽은 암황색(暗黃色)을 띠는 것이라고 했다. 담비 가죽은 한 장이 사방 1척(尺) 정도였기 때문에 60여 마리의 가죽을 모아야 비로소 옷을 한 벌 지을 수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조정 진상품을 친구에게 선물로 준 김징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설 명절을 맞아 각계각층에 전달한 농수산물 선물세트. / 사진·뉴시스
그러니 최몽린이 자신의 첩을 위해 준비하던 두 벌의 갖옷은 120여 마리 이상의 담비 가죽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최몽린 입장에서야 첩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이었겠지만 그 가죽을 준비해야 하는 번호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조선의 여성들에게 갖옷은 폼 나는 명품이었지만 그런 사정은 남성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척박하고 추운 지역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권력 주변에서 선물(때로는 뇌물)로 주고받는 갖옷은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하기 위해 준비한 귀한 옷을 말하는 것이다.

가죽은 짐승을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말려서 무두질을 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정성과 솜씨도 있어야 한다. 거기에 더해 가죽만으로는 옷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가죽에 덧대서 비단이나 좋은 옷감을 사용하며, 모양새도 좋아야 비로소 제값을 받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9년 추석 시민 단체·종교계·노동계 등에 선물한 4색 떡국과 표고버섯 세트.
조선 조정에서는 지역의 공물로 짐승 가죽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수거된 가죽은 옷으로 만들어져 왕이 신하들에게 내리는 선물로 사용됐다. 왕은 귀한 갖옷을 신하들에게 선물을 함으로써 신하들의 감동과 함께 충성스러운 마음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임금이 신하에게 보내는 정성이었고 그를 격려하고 총애한다는 마음의 우회적 표현이었다. 그 정도로 갖옷은 귀한 물건이었고 사치품처럼 인식됐다.

숙종이 먼 지방에서 공물로 들어온 가죽을 귀하게 여기지 말고 덕을 닦는 것에 노력해야 한다는 권해(權瑎)의 진언에 따라 즉시 갖옷을 불태우라고 지시한 것도 갖옷이 가지는 문화적 상징 때문이었다.

갖옷이 사치품의 의미를 갖는 것은 1496년 4월 6일 사간원에서 연산군에게 올린 간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임금에게 여러 조항의 간언을 하면서 여덟째로 임금이 사치를 억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는다. 그 글에 의하면 “근자에 왕자의 저택들이 궁궐에 비견할 정도이며 왕실과 인척이 된 자들은 다퉈 화려함을 숭상하매 아랫사람들까지도 서로 본받아서 부인이 돼지가죽으로 된 갖옷이 없으면 모임에 참여하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그만큼 갖옷은 조선을 통틀어 의류 중에서 사치품으로 꼽히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갖옷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 중에 민정중(閔鼎重, 1628~1692)과 얽힌 것도 있다. 민정중은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7세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다.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학문적 입장을 잘 지킨 인물로 당대 사림들의 중망(衆望)을 받았다. 그는 1669년 10월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됐는데 송별연에서 전라감사 김징(金澄, 1623~1676)으로부터 표범 가죽으로 된 갖옷을 선물로 받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추석 때 각계각층에 보냈던 전통한과와 민속주 선물세트.
예로부터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주변 지인들이 잔치를 열면서 선물을 주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민정중은 기쁜 마음으로 그 갖옷을 받았다. 두 사람은 젊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였기에 김징은 민정중에게 갖옷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추운 북쪽 지방을 다녀와야 하는 민정중은 친구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하면서 고맙게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1670년 김징이 뇌물을 받았다는 탄핵을 당했는데 그 소장(訴狀)에 민정중에게 준 갖옷이 거론된 것이다. 사정을 알고 보니 김징이 먼 길을 가는 친구에게 준 갖옷은 관청의 물건이었다. 임금에게 공물로 올릴 물건으로 관아에 보관하고 있던 표범 가죽을 줬는데 이것이 드러난 것은 김징의 후임으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된 오시수(吳始壽, 1632~1680) 때문이었다.

오시수가 공물로 보낼 표범 가죽을 확인하다가 다섯 장의 가죽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아 있는 가죽은 너무 얇은데다 털이 빠져서 공물로 바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한양으로 사람을 보내서 다섯 장의 표범 가죽 좋은 것을 구입해 공물로 바쳤던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김징은 ‘오표대부(五豹大夫)’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명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민정중 입장에서는 김징에게 받은 선물이 공공의 물건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터라 김징의 뇌물죄에 자신이 받은 가죽이 오르내리는 일 자체가 아주 난감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임금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모든 벼슬을 거절한다. 호의로 받은 갖옷 선물은 도리어 민정중의 명예를 더럽히는 꼴이 된 셈이다. 이처럼 하나의 물건은 주고받는 맥락에 따라 선물이 되기도 하고 뇌물이 되기도 한다.

임진란이 끝나고 나자 한양은 중국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 오기 시작한다. 윤국형(尹國馨, 1543~1611)의 <갑진만록(甲辰漫錄)>에 의하면 임진란이 끝나는 1598년 이래 중국의 상인들이 조선으로 물건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종로 거리에 가게를 열고 물건을 늘어놓는 사람도 많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귀천과 노소를 막론하고 비단과 양(羊) 갖옷으로 자신을 꾸미면서 사치를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면서 당시 사치가 유행하는 것을 탄식한 바 있다.

백성들의 의류문화 향상에 기여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임금이 신하에게 주는 의복 선물로 갖옷 만한 것이 없었다. 임금은 갖옷 선물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고 신하는 하사받은 갖옷 선물을 집에 대대로 보관함으로써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기 위한 자료로 사용했다. 임금에 대한 무한한 충성과 함께 부귀를 함께 누리면서 왕조를 함께 이끌어가도록 도와달라는 격려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옷을 받은 신하는 과연 평상복으로 입었을까? 왕조 시대의 분위기로 보아 선물이자 하사품으로서의 갖옷은 보관용(官用)이었을 것이다. 솜씨도 솜씨지만 그것이 주는 정치적·사회적 무게는 그저 평상복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왕실로부터 일반 사대부 가문으로 선물이 오면 정치적 의미로도 의미를 뒀겠지만 문화적 차원에서도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옷만 하더라도 그렇다. 조선 최고의 침선(針線)이 만든 옷이니 바느질 솜씨로 보나 패션 감각으로 보나 당대 최고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이 옷을 본 가문의 여인들이 자연스럽게 옷 만드는 솜씨나 모양새를 따라 배웠을 것이며, 이런 과정을 거쳐서 수준 높은 의류문화가 일반 백성들의 집으로까지 흘렀다.

물건은 늘 선물과 뇌물의 경계선에서 오갔지만 그 사이에서 흐르는 문화는 계층과 계층, 가문과 가문을 넘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계기로 작동했다. 사치품의 대명사로 꼽혔던 갖옷이 비록 판매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 사이를 떠돌아다니면서 당대 명품 중의 하나로 인식됐다. 그것은 일상복으로서 소비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상징으로 소비됐던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702호 (2017.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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