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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14)] 우왕(1) 시대와 운명의 희생양 

정통성의 한계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우왕의 비극은 그가 공민왕의 적통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에서부터 시작됐다. 후계자 교육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집권 내내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했다. 권신들의 권력을 인정하고 그들과 연합하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2014년 방영된 KBS 드라마 <정도전>의 한 장면. 우왕(아명 모니노)은 고려말 권신 이인임의 힘을 빌어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된 뒤 10세 때 왕위에 올라 명덕태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우왕대는 고려의 찌꺼기 같은 시대다. 공민왕이 죽으면서 고려가 재생할 희망이 꺾이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이 좌절되자, 우왕대에는 그 반대로 고려의 나쁜 요소들이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24년간 억압된 권문세족들의 욕망이 무절제하게 방출되었기 때문이다. 시대적 환경도 정말 좋지 않았다. 왕조가 바뀌고, 동아시아가 바뀌고, 사상이 바뀌는 시대였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 있다. 아울러 문명의 축이 동에서 서로 바뀌는 시대이기도 했다.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맞서자면 출중한 리더십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더구나 우왕은 그 반대로 고려가 낳은 최악의 왕 중 하나였다. 그는 왕이 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저질렀고, 왕이 해서는 안 될 모든 금기를 깨트렸다. 그가 최악이 된 것은 그의 잘못만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자신도 주어진 환경과 운명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악행은 방종보다 절망의 산물이었다.

우왕은 왕이 아닌 왕이었다. 그것이 우왕이 절망한 근본적 원인이었다. 그가 왕으로 생존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왕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 둘째, 향락과 방종에 빠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인임 등 권문세족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고 확실히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조건은 특히 권문세족들에 의해 권장되었다. 향락과 방종에 빠질수록 왕은 권력의지를 상실할 것이고, 권력의 상실감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가 처음에는 조금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이인임·지윤·임견미 등이 선비를 좋아하지 않아서, 다투어 진귀한 볼거리로 이끌었다.”(<고려사>) 창왕대 윤조종의 상소에 따르면, 이인임이 “서연(書筵)을 없애고 어리석은 아이들을 천거하여 주상의 총명을 가리고 노래와 여자로 인도하며, 사냥으로 즐겁게 하여, 우왕이 친히 정사할 겨를이 없게 하였다”고 한다.(<이인임전>) 이인임은 환관 정치의 고전적인 수법을 동원했던 것이다. 그는 왕을 모든 쾌락에 빠트려 부패시킴으로써 정치에 흥미를 잃게 했다. 그리고 실질적인 권력은 자신의 수중에 장악했다. 이것은 공식적 지위 없이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사람들이 언제나 사용하는 방법이다.

우왕은 살기 위해서도 쾌락에 빠져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거의 짐 같은 존재가 되었다. 우왕이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취약한 존재다. 법이나 관습 같은 통제가 없는 상태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짐승에 가깝게 된다. 하지만 우왕은 둔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권력의지가 강했고, 삶의 의미에도 민감했다. 그런 퍼스낼리티와 정치 현실의 간극이 그가 겪은 비극의 깊이였다. 그 간극에 직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광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미친 것은 아니다. 14년 뒤 그들에게 확실히 복수했기 때문이다. 우왕은 결과적으로 고려왕조와 권문세족을 파멸에 빠트렸다는 점에서 확실히 복수한 셈이다. 그가 만약 신돈의 소생이라면, 그것은 신돈의 복수일 수도 있다.

살기 위해 쾌락에 빠진 왕


▎보물 제 1234호 <향약제생집성방>. 고려시대 김희선 등이 모은 <삼화자향약방>과 조선시대 권중화가 펴낸 <향약간이방>을 중심으로 태조 7년(1398) 간행된 약학 서적이다. 권중화는 어린 우왕에게 <정관정요>를 가르치기도 했다.
역사에 대한 우왕의 기여는 역설적이다. 그는 퇴락하는 고려를 완전히 수렁에 빠트렸다. 이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르게 했다. 역사는 합리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단순하지도 않다. 역사는 혼합적이고, 의미는 결정된 게 없다.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고, 하나의 사실 속에 의미가 무한히 겹쳐져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역사는 혼란스럽고 알기 어렵다. 하지만 역사는 깊은 고통 속에서만 자신을 정화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생하는 듯하다. 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시대의 가장 밑바닥에서는 새로운 희망의 움이 트고 있었다. 우왕대는 성리학이 현실로부터 버려지고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이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자각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역사는 주변부의 내부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창조된다. 그 사회의 모든 짐을 지면서도 버려진 자들, 잃을 것은 쇠사슬 밖에 없는 자들이 그들이다. 우왕 9년(1383) 가을, 42세의 정도전은 함흥 막사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갔다. 그 만남에서 조선의 건국운동이 시작되었다. 우왕은 또한 1388년 최영, 이성계와 연합한 무진정변을 일으켜 이인임 등 고려의 권문세족들을 일시에 제거했다. 이로써 고려의 멸망을 확실히 앞당겼다. 사실 권문세족이야말로 퇴락하는 고려의 마지막 수호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왕조의 운명에서 볼 때, 그들의 역할은 이중적이다. 그들은 국가의 건전성을 파먹는 벌레 같은 존재였지만, 여전히 고려의 외피 속에서 그 일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려의 속을 모두 먹어치웠지만, 보호막으로 껍데기만은 남겨두었다. 이 때문에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와 정도전은 마지막까지 이들과 생사를 건 권력투쟁을 벌여야 했다.

우왕의 비극은 그의 태생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공민왕의 아들인지는 불분명하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우왕이 신돈의 소생이라고 주장했다(非王說). 그게 사실이라면 우왕, 창왕대는 신씨가 찬탈한 게 되는 셈이니 조선 건국을 합리화하는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의혹은 공민왕 자신의 행각 때문이기도 했다.

우왕은 공민왕 14년(1365)에 탄생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를 소생으로 공식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해부터 후계자를 얻기 위해 여러 방책을 모색했다. 우가 공개된 것은 신돈의 처형 직후였다. 왕은 어린 모니노(우왕의 아명)를 명덕태후전에 거처하게 했다. 공민왕 22년(1373)에는 강녕대군으로 삼고, 왕자 교육을 받게 했다. 후계자로 공식화시킨 것이다. 이 무렵 왕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모친 명덕태후가 왕의 조치를 반대하자, 공민왕은 “신이 이제 명수가 다 되어 죽게 되었으니, 지금 후사를 세우지 않으면 사직을 누구에게 부탁하리오”라고 강변했다. 후계자 없이 왕이 죽는다면 정치적 재난은 명약관화한 것이었으므로, 우의 선택은 부득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왕의 생모는 신돈의 비첩 반야다. 그러나 공민왕은 암살 직전 죽은 궁인 한씨를 우의 생모로 공식 발표했다. 신돈과의 연을 끊으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한씨는 원래 무덤조차 없었으며, 화장되어 산기슭에 묻힐 만큼 미천한 존재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더욱 결정적으로 명덕태후가 우의 태생을 불신했다.

왕이 죽었을 때, 우는 일단 상주 자격으로 장례를 주관했다. 후계자의 지위를 잠정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튿날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왕실을 대표하는 명덕태후·경복흥과 신료를 대표하는 이인임이 대립했다. 명덕태후는 종친의 옹립을 주장했으며, 이인임은 공민왕의 유명대로 우를 지지했다. 의견이 결정되지 않았다. “도당이 서로 쳐다만 보고 감히 발언하지 못했다”고 한다. 생명이 달린 일이었다.

왕위 계승과 이인임의 승부수


▎당나라 초기 공신이자 학자 위징(580~643). 수나라 말기에 당고조에게 귀순했다. 황태자 이건성이 위징의 이름을 듣고 태자세마(太子洗馬)에 발탁했다.
이인임의 도전은 예상 밖이다. 상대는 존경받는 명덕태후였고, 더욱이 그녀는 관습상 왕위 결정권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고착 상태를 풀기 위해 판삼사사 이수산은 왕족들에게 최종 결정을 넘기자고 제안했다. 명덕태후에게 유리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왕족 영녕군 왕유와 밀직 왕안덕 등이 이인임의 의견에 찬성했다. 명덕태후는 함정에 빠진 듯했다. 이야말로 이인임다운 책략이기 때문이다. 이인임이 가진 최상의 자질 중 하나는 인간 심리에 대한 정확한 파악, 그리고 그에 따라 자로 잰 듯 이루어지는 기략이었다. 왕유와 왕안덕 등은 이미 이인임에게 회유되었을 것이다. 이 정쟁에서 패한 결과 명덕태후는 권위에 치명적 손상을 입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최고 결정권자가 아니었다.

우왕의 생모 반야는 임진강에 수장되었다. 공민왕의 영전에서 노국공주의 위패가 치워지고 한씨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친아들은 왕이 되었는데 생모는 죽임을 당하는 것,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는 것, 죽은 자의 지위와 의미를 바꾸는 것, 이것은 모두 정치의 장치 중 하나다. 이것은 혈연에 의해 권력을 세습하는 군주제의 정치적 정통성과 직결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장치와 절차는 잔인하고 기만적이며, 상상적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인간은 질서를 만들고, 평화를 유지하며, 집단생활을 영위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런 방식으로 삶을 영위한다.

이 사건의 지닌 가장 큰 의미는 정치권력이 왕으로부터 권문세족으로 불리는 신료집단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공민왕대 이전의 정치형태로 복귀한 것이다. 이는 무신의 난 이후 고려에 확립되어 고려 후기를 지배했다. 이를 통해 소수의 권문세족들은 관직과 토지, 백성을 독점했다. 과거가 지속되긴 했으나 관직은 기본적으로 세습적 특권에 의해 분배되었다. 또한 공전제의 원칙이 무너지고 사전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대규모 농장으로 발전했다. 토지를 잃은 백성은 노비로 전락하거나 유민과 도적으로 변모했다. 백성들의 자유는 상실되고 가족은 해체되었으며, 사회는 소수의 거대한 농장체제로 재편되고 있었다. 그 결과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소수 가문의 수중에 장악되어, 국가는 껍데기만 남았다. 공민왕이 평생에 걸쳐 투쟁했던 것은 이런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중도에 좌절하였고, 정치로부터 도피하여 음행과 쾌락에 빠졌다. 하지만 공민왕 생전에는 권문세족들이 집단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 공민왕이 죽자 이인임을 필두로 한 권문세족들은 신속하면서도 확고하게 왕권을 제압했다. 다시 권문세족들이 활개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즉위 당시 우왕은 겨우 열 살에 불과한 어린 아이였다. 이 사건은 그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왕위 계승전에서 패했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우왕은 다행히 총명했다. 우왕 6년(1380), 좌사의대부 백군녕은 “어린 나이로 태후의 교훈을 받들어 삼가 법도를 지키며, 사부를 존경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매일 장상·대신과 더불어 경연을 열어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강론하며, 위의(威儀) 동작에 조금도 실수하지 않으므로(···) 총명하고 뛰어나서 뒤에 태평군주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우왕 원년(1374) 10월, 환관 김현이 휴일에는 공부를 쉬라고 권고하자, 우왕은 “글 읽는 것은 일 보는 것이 아닌데, 어찌 그만두겠는가”라며 경연에 나아갔다. 13세 때인 우왕 3년(1377), 정당문학 권중화는 당태종의 치세를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의했다. 위징이 당태종에게 “기뻐하고 화내는 것은 현자나 우자가 다 같지만, 현자는 절제하여 과도하게 하지 않고 우자는 방종하여 적당함을 잃습니다. 폐하도 항상 자제하여 처리를 잘하면, 만대가 힘을 입을 것입니다”하는 말을 듣고, 우왕은 “좋은 말이다. 경은 위징을 본받아서 나를 가르쳐 주시오”라고 하였다. 위징은 직언으로 유명한 정치가다.

학문에 힘쓰고 현명했던 어린 왕


▎당태종의 정치를 모범으로 삼기 위해 기록한 오긍(670~749)의 저서인 <정관정요>. 동아시아의 대표적 제왕학 저술로 고려 정치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의 역대 왕도 이를 공부했다.
학문만이 아니다. 태조 왕건은 홍수와 가뭄의 재앙이 없기를 소원했는데, 신기하게 그의 기일인 5월 29일은 400년 동안 일기가 순조로웠다고 한다. 우왕 3년, 이날 비가 오지 않자 우왕은 기우제를 지내고, 자신의 부덕을 자책하며 죄수들을 사면했다. 우왕의 예리한 판단력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종실 왕향과 전민(田民) 소송을 벌이던 환관 김수만의 처가 왕향이 왕에게 좋지 못한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밀고하자, 우왕은 그녀를 국문하여 거짓을 밝혀냈다. 김수만은 명덕태후의 심복이었다.

그러나 우왕 5년까지 어린 왕의 행동과 정치에 큰 과오가 없었던 것은 명덕태후 덕분이었다. 우왕이 일단 왕위를 계승하자 그녀는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왔다. 왕실을 지키자면 그 방법밖에 없기도 했다. 우왕도 “내가 지금 나이가 어림에도 국가가 대체로 편안한 것은 오직 태후의 덕에 힘입은 것”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공민왕대에 그녀는 실정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였으며, 오랜 경험을 통해 정치적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선 지나치게 연로했다. 우왕 6년 세상을 떠났을 때 83세였다. 또한 이인임에게 패배함으로써, 정치적 권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이런 한계에도 명덕태후가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우왕이 현명하게 장성해가는 것은 권문세족들에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이인임은 명덕태후를 확실히 제거하고자 했다.

첫 위협은 신진 유신들과 명덕태후의 결합이었다. 공민왕 사후 대외정책의 변동을 둘러싼 정쟁에서 박상충과 정도전은 명덕태후에게 호소함으로써 그녀의 지지를 얻어내고, 이인임의 친원 정책을 대리한 안사기를 자살케 했다. 이는 이인임에게 매우 현실적이고 커다란 위협이었다. 그러나 원의 사신을 영접하는 문제가 닥쳤을 때, 그녀의 지지를 받고자 했던 정도전의 시도는 실패했다. 이인임은 명덕태후에게 사임하겠다는 압력을 가했다. 경복흥도 이에 동조했다. 명덕태후는 압력에 굴복했다. 정도전은 유배되고, 박상충과 전녹생이 살해되었다.

다음으로 이인임은 명덕태후의 인척이자 중망을 받던 김속명과 경복흥을 제거했다. “김속명이 태후의 외척으로 궁중의 일을 전담하여, 강직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꺼렸으며, 집정하자 죽이고자 하는 자까지 있었다. 이때 이인임·지윤·임견미 등은 권력을 독점하고 일을 담당하자 거리낌없이 탐욕스러워졌는데, 오직 김속명을 꺼려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다.”(<김속명전>) 그가 우왕 2년 3월 유배되자, “태후가 좌우의 손을 잃은 것과 같으니,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우왕과 태후의 신임을 받아서 기무를 맡아, 궁중에서 일”하던 환관 김현도 제거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경복흥은 좌절하여 술만 마셨다. “그때 지윤과 이인임이 권세를 전횡하여 온 나라가 따라붙었는데, 경복흥은 스스로 청렴함을 지켰다. 그러나 그 탐욕스러움을 미워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날마다 술에 취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경복흥전>) 그것은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자책이자 시대상황에 대한 냉소였던 것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처럼 이인임은 우왕 전반기 내내, 명덕태후와 그녀를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세력을 무력화시켰다. 우왕 6년 1월 명덕태후가 죽었을 때,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왕 5년까지 이인임은 차례차례 정적들을 제거해나갔으며, 왕으로 하여금 자신 외의 어떠한 대안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시켰다.


▎<고려사> ‘경복흥전’(왼쪽)과 ‘김속명전’. 경복흥은 기철 숙청의 공으로 공민왕 때 일등공신이 되었다.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돼 유배되었다가 신돈 주살 후 다시 좌시중이 되었다. 명덕태후의 외척으로 성품이 강직했던 김속명은 우왕 때 벌어진 반야(般若)사건 당시 이를 변론하는 자리에서 왕에 대해 불경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한 후 귀양지에서 죽었다.
그러나 어린 우왕도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명덕태후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하고 신진 유신들과 김속명이 제거되자, 우왕은 다른 권신들과 연합하여 이인임을 견제하고자 했다. 공민왕처럼 측근이나 외척세력, 개혁적 문신관리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던 그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친왕파와 이인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친 권력투쟁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인임은 최영과 연합하여, 친왕파로 변모한 지윤과 양백연, 유모 장씨를 제거하고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하였다. 지윤과 양백연은 신분이 미천한 신흥 무장 출신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이인임과 연합하였다. 그들을 자신의 권력 서클 안에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인임의 유연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권력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경쟁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인임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고자 했다. 그때 왕이 그들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했고, 자신은 물론이고 일족과 추종자들 모두 죽임을 당했다.

왕의 유모를 둘러싼 치열한 정쟁


▎1992년 북한 당국이 왕건릉 확장 공사 중 발견한 태조 왕건의 동상. 951년에 제작되어 개성 봉은사에 봉안된 유물이다. 발견 당시에는 단순한 청동불상으로 간주됐으나 서울대 노명호 교수의 연구에 의해 왕건 동상임이 밝혀졌다. 원래는 채색하고 옷을 입힌 상태였다.
우왕 5년 9월, 우왕대 전반기의 권력투쟁을 마무리짓는 극적인 정쟁이 발생했다. 이 정쟁의 특징은 왕이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또한 이 정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우왕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퇴장하고, 모든 권력이 이인임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이 사건은 우왕대의 정치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사실상 우왕과 이인임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이인임과 우왕의 유모 장씨와의 대결로 나타났다. 장씨의 본명은 김장(金莊)이고 노비 출신이다. 공민왕대의 고관 김횡이 신돈에게 바쳤다. 그녀는 어린 모니노를 키웠다. 왕위에 오르자 우왕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많은 재산을 하사하였으며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책봉하였다. 그녀의 도장은 공민왕의 후비(定妃)의 도장과 함께 은으로 주조케 했다. 이는 우왕이 장 씨를 공민왕비 정비와 동격으로 예우했다는 의미였다. 우왕 3년 11월, 우왕은 그녀의 은혜를 치하했다. “옛날 어머니가 불행히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내가 어리고 약했다. 오직 네가 조심해서 보호하여 부지런히 했기 때문에 진실로 금일의 경사에 이르렀으니, 잊지 못할 은혜를 두텁게 하고자 한다. 밭 100결과 노비 10구를 하사하고, 비록 허물이 있더라도 열 번까지 범하지 않으면 다 용서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왕은 불우했다.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처형당했을 때 그는 7세였다. 그때 생모의 손을 떠나 명덕태후 거처로 옮겨졌다. 9세가 되어서야 겨우 후계자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명덕태후의 반대로 그의 처지는 위태로웠다. 왕위 계승전에서 패했다면 아마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 시절 장씨는 유일한 보호자였을 것이다. 그녀는 거의 친어머니처럼 우왕을 대했다. 우왕이 비빈의 처소에 빈번히 출입하자, 장씨는 “예(禮)를 보면 군주는 반드시 택일하여 비빈을 찾는 것인데, 어찌 들개같이 찾아다니느냐?”라고 꾸짖을 정도였다. 친어머니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우왕 역시 그녀를 어머니같이 생각했다. 우왕 5년 이인임과의 정쟁에서 패한 뒤 대간이 그녀의 처벌을 요청하자, 우왕은 “이 여자가 나를 길렀으니 곧 나의 어미다. 아들이 그 어머니를 어찌 살리고자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사건의 발단은 장씨가 정당문학 허완, 동지밀직 윤방안과 힘을 합쳐 내재추 임견미와 도길부를 제거하려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내재추는 내상(內相)으로도 불렸다. ‘궁궐 안 재상’이란 뜻으로, 그들은 궁궐에 상주하면서 왕명으로 국정 전반을 처리했다. 그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내재추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신돈 집권을 전후한 시기다. 공민왕은 최고 정무기구인 도당(都堂)을 무력화시키고, 궁궐에 내재추를 두어 국정을 운영했다. 그 이유는 도당이 권문세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돈 집권기에, 신돈은 이를 국정과 왕실사무를 이원화하는 기제로 사용했다. 우왕대에도 이인임은 내재추를 통해 실질적으로 왕권을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내재추가 공민왕의 의도와 달리 권문세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제도로 변모된 것이다. 이인임 등은 내재추를 통해 왕을 감시하고 왕권을 통제함으로써, 왕정의 외피를 유지하면서 사익을 추구했다.

따라서 왕권을 회복하자면 먼저 내재추를 제거해야 했다. 우왕 5년 9월, 왕은 임견미와 도길부를 사제로 돌려보내고 대궐 출입을 금했다. 임견미는 염흥방과 함께 이인임의 심복이었고, 도길부는 이인임의 인척이었다. 장씨는 두 사람을 내보낸 다음, 최영을 불러 왕명으로 군사적 지원을 얻으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들은 밤에 임금의 뜻이라 꾸며 최영을 재삼 불러들였다. 그러나 임견미 등은 재빨리 최영과 이인임·경복흥에게 달려가 “허완 등이 우리 두 사람을 죽이고 제공에까지 미치려 하여 화가 장차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했다.

왕명 거부한 최영의 속내


▎고려 말 명장 최영 장군의 영신을 모신 부산 수영구의 무민사 사당. 지난 2005년 건물 붕괴 위험으로 재건축하기 이전의 사당 내부 모습이다. 충신의 상징으로 불리는 최영은 우왕 때 현실적 판단에 따라 왕의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최영은 입궐하라는 왕명을 거부하고, 오히려 군사를 대동하여 이인임·경복흥 등과 함께 흥국사에 모였다. 조정의 관리들이 모두 모이자, 그들은 장씨의 국문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허완, 윤방안이 아니라 곧바로 장씨를 지목했다. 이들은 대궐로부터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뒤에 우왕은 “궁중 일은 양부(兩府, 문하부와 밀직사)와 대간이 알 수 없는 일이므로, 반드시 환관이 누설했다”라고 하여, 환관 정난봉을 하옥하고 이득분과 김실을 귀가 조치했다.

최영의 거부에도, 우왕은 거듭 최영의 입궐을 재촉했다. 우왕과 장씨로서는 그것은 최후의 방법이자 유일한 방법이었다. 왕명을 거역하는 것은 형식상 반역에 해당했다. 그러나 최영은 “온 나라의 바람과 어긋난 일이 있으니, 임금이 만약 뭇 사람의 뜻을 좇으려 하시면 신이 장차 들어가 뵙겠다”라고 재차 거부했다. 우왕이 다시 한 번 입궐을 명령하자, 그는 왕명에 복종하고자 했다. 최영에게 ‘충성’은 전 생애에 걸쳐 부동의 가치를 지닌 근본적 요소였다. 그는 이 가치의 훼손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입궐은 곧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고, 또는 원치 않는 왕의 입장에 동조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 왕명의 거부는 그의 ‘충성’이 절대적이라기보다 선택적이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최영이 입궐할 경우 이인임 등의 정치적 안전은 보장될 수 없었다. 그들은 최영을 적극 만류했다. 최영은 마침내 입궐을 포기했다. 그러자 우왕은 최영의 충성이 상대적임을 비난했다. 최영에게 군사를 해산하게 하고 “그대가 어떤 적을 막고자 하여 군사를 옹위하고, 오지 않느냐. 그대가 일찍이 스스로 누대의 충신이라 하더니 충성한 마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힐난했다. 그러자 최영은 “신이 만약 부르는 데 나아가면 군사가 반드시 좇을 것이니, 군사를 끌고 대궐에 나아가면 신의 죄가 마땅히 죽음에 처할 것입니다. 또 신이 어찌 나아가 대궐 아래서 죽고자 하지 않으리오. 다만 임금의 뜻이 아닐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감히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몸이 비록 보잘것없사오나, 관계된 일이 심히 크니 만약 간악한 사람의 손에 죽으면 국가가 위태할 것입니다.”(<최영전>)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우왕은 정치현실보다 최영의 가치관에 너무 큰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판이었다. 최영은 현실을 따랐다. 우왕의 비난에 대해 최영은 왕의 진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입궐할 경우 오히려 불충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사건의 진실은 왕과 이인임의 권력투쟁이었다. 최영은 그것을 알았으며, 왕이 아니라 이인임을 지지했다. 그러나 최영은 이 점을 전혀 거론하지 않고 자신이 진실로 왕을 지지했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못내 마음이 걸린 최영은 사건 종결 뒤 우왕에게 “홀로 신만을 불충이라 꾸짖으시니, 신이 실로 실망스럽다”라고 말했다. 우왕은 “일이 급하여 말이 잘못된 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깊이 후회한다”라고 말했다. 최영은 어떤 의미에서 이빨 빠진 왕을 겁박해 사과를 받아낸 셈이다. 이에 분개한 문하평리 김유는 최영에게 “신하로서 임금에게 항거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고 비판했다. 그는 유배되었다.

그러나 최영에 대한 우왕의 판단이 반드시 틀렸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0여 년 뒤 최영은 우왕의 뜻에 따라 무진정변을 일으켜 이인임 등 권신집단을 모조리 숙청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영이 단순히 현실만을 따랐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권신정치의 부패상에 괴로워하면서, 이를 시정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결여된 것은 시대의 요청에 대한 통찰력이었다. 그로 인해 자신이 누구를 지지하고 누구를 반대해야 하는지를 잘 판단하지 못했다. 또한 그의 자각은 너무 늦었다. 우왕 14년 무진정변을 일으켰을 때, 고려는 이미 너무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처럼 부패한 권력을 지탱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최영 자신이었다.

사건이 종결되자 양부와 대간은 입궐하여 장씨의 처벌을 요청했다. 왕은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그러자 최영 등은 장 씨의 인척들을 하옥하여 국문했다. 최영이 입궐하지 않음으로써 팽팽했던 균형은 이인임에게로 기울었다. 그러자 우왕은 유모 장씨를 살리기 위해 공민왕의 측신 경복흥과 목인길을 불러들였다. 왕은 울면서 “그대들이 이미 나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내가 한 사람의 유모를 구하지 못하겠느냐. 그녀를 놓아 보내고 다스리지 말라”고 애원했다. 경복흥 또한 눈물을 흘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이인임이었다.

우왕은 마지막으로 명덕태후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명덕태후조차 “어떻게 한 여자 때문에 온 나라의 바람을 저버리겠는가”라고 말하고, 장씨를 재촉하여 나가게 했다. 그러나 장 씨가 우왕 앞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우왕 역시 차마 결단을 못 내렸다. 그러자 명덕태후는 “내가 별궁으로 옮겨가서 이 일을 듣지 않고자 한다”라며 떠나려고 했다. 이는 최후 통첩을 의미했다. 우왕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누구도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폐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우왕은 마침내 장씨를 포기했다. 그는 장씨를 이인임의 집에 보내어, 죽이지 말고 진한국대부인 직위만 박탈하도록 요청했다. 사실 이 사건에서 이인임은 한 번도 공식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왕은 이 사건의 최종 처리를 그에게 일임했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이 정쟁이 왕과 이인임 사이의 권력투쟁이었음을 의미했다. 장씨는 유배되었고, 이듬해 처형되었다.

정쟁에서 패하고 정치에서 손떼다


▎북한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공민왕릉. 부인인 노국공주와 함께 쌍분을 이루고 있다. 공민왕은 우왕이 태어났을 당시에는 자신의 친자로 발표하지 않았다. 이후 공민왕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모친인 명덕태후의 반대에도 어린 모니노를 후계자로 공식화하고 왕자교육을 받도록 했다.
이 정쟁이 끝났을 때, 우왕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신들은 당연히 우왕의 교체를 심각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이해 10월, 우왕은 명덕태후전 곁으로 거소를 옮기고, 태후전에 나가 술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빌었다. 그는 명덕태후에게 “내 나이가 어리나 국가가 대체로 편안한 것은 오직 태후의 덕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추동(楸洞)의 대궐이 태후의 거처와 멀리 있으므로, 이를 버리고 여기에 옮겨 거주한 것입니다. 만일 가르침을 받자오면 감히 경청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것은 장씨 사건으로 훼손된 명덕태후와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당면한 대명 외교문서에 자신이 진정한 후계자임을 보증하는 그녀의 진정서를 포함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명덕태후는 우왕의 정통성을 의심하고 있었던 명에 진정서를 보내어, 우왕이 공민왕의 적법한 후계자임을 주장했다. 이는 고려 내정의 측면에서 볼 때, 명덕태후가 여전히 우왕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권문세족들에게 공표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장씨를 대리인으로 삼아 이인임을 제거하려는 우왕의 계획이었다. 지윤과 양백연 사건 역시 그러했다. 결과적으로 우왕은 철저히 패배했다. 어떤 신하도 그를 지지하지 않았고, 일치단결하여 이인임을 지지했다. 이인임과 잠재적인 경쟁자인 명덕태후조차 우왕을 반대했다. 그는 왕으로서의 체통까지 버리고 울면서 장씨의 목숨을 애걸했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왕의 권력은 그 자신의 어머니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했다. 왕의 존엄성과 자존심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우왕은 한 가지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아무런 후원자도 없으며, 만약 그가 계속 왕권을 고집하려 한다면 그의 목숨조차 위험해지리라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의 정통성은 출발부터 매우 취약했다. 생존을 위해 그는 정치에 지나친 관심을 보여서는 안됐다. 권신들의 권력을 보장하고 그들과 연합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책이었다. 자신들의 권력이 훼손되지 않는 한 권신들도 영원히 그를 왕으로 섬길 것이기 때문이다.

장씨 사건은 우왕대 전반기의 막을 내리는 사건이었다. 이로써 이인임과 소수 권신집단에 대한 모든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다. 고려정치는 외형상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렸다. 우왕 6년(1380) 1월, 명덕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고려정치는 공민왕 이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복귀되었다. 분출되는 ‘사욕’을 억제할 모든 견제장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정치는 소수 특권집단을 위해 국가의 모든 공권력이 악용되는 과두정(oligarchy)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에는 우왕의 난행과 악행, 그리고 우왕 14년(1388)의 무진정변을 통한 반격, 위화도회군과 우왕의 처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703호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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