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김환영의 종교 이야기(11)] 모든 종교의 공통 현상 ‘근본주의’ 

세속적 민주주의 사회의 희생자이자 수혜자 

김환영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자유주의 신학 도전에 반발한 19세기 말 美 개신교에서 최초 정립… 근대 요소와 함께 들어온 한국 그리스도교에선 미국과 달리 다수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 시내에서 느깝으로 몸을 감싼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카메라를 보자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어감이 좋은 말과 나쁜 말이 있다. 민주주의는 거의 항상 좋은 말이다. 자신의 소속에 따라 어감이 좋기도 하고 나쁜 단어도 있다. 근본주의(fundamentalism)가 그렇다.

공자는 “근본이 바로 서면 길이 열린다(本立而道生)”고 했다. 펀더멘털즈(fundamentals), 즉 근본은 “그 나라의 경제 상태를 표현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실업률·경상수지 등의 지표”다. 우리 속담은 “사돈을 하려면 근본을 보라”고 한다. 이처럼 근본은 보통 좋은 뜻으로 쓰인다.

그렇다면 종교적 근본주의도 좋은 뜻일까? 근본주의란 무엇일까?

종교적 근본주의는 세계적 현상이다. 소위 아브라함의 종교라 불리는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뿐만 아니라 힌두교·불교·유교 등 모든 종교에서 근본주의가 생겨났다.

왜일까? 종교가 없는 곳은 없다. 종교가 있는 곳에 근본주의가 있다. 근본주의의 반대말은 근대주의(modernism)다. 왼손·오른손이 있듯이 사람의 입장은 크게 둘로 나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근본주의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기반으로 한다. 정치에 여당·야당, 진보·보수, 좌파·우파가 있듯이 종교에는 근본주의와 근대주의가 있다.

종교와 정치는 만난다. 근본주의는 크게 보면 정치적 현상으로 이해된다. 근본주의는 정치화(politicization)된 종교다.(근대주의 또한 미묘한 형태로 정치화돼 있다)

근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


▎2013년 9월 요르단 살라피스트(이슬람 근본주의 집단) 수십 명이 암만 인근 마르카 군사법원 앞에서 투옥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근본주의는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근대화 이전에 전 세계 사람은 전통사회에서 살았다. 전통사회를 이끄는 것은 종교였다. 전통사회에서 종교와 국가, 종교와 정치는 밀착됐었다. 오로지 서구만이 르네상스, 계몽주의 시대, 정치혁명, 과학혁명 등을 거치며 세속화(secularization)의 길로 나아갔다.

세속화로 국가와 종교의 연결고리가 분리됐다. 오늘날 세계를 이끄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종교와 무관하다. 종교의 자유를 원칙으로 삼다 보니 국교라는 것은 아예 없어지거나 유명무실해졌다.

전통사회의 근간이었던 종교는 근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근본주의를 낳았다. 서구가 비(非)서구를 압도하면서 시작된 서구화·근대화로 비서구는 땅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근대화는 서구 사회에도 여진을 남겼다. 서구와 비서구의 보수 성향 신앙인들은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세속화의 결과로 사회가 물질만능주의·쾌락주의·부정의·부도덕성에 휩쓸리게 됐다고 인식한다. 인생의 좌표를 확고하게 제시했던 전통 종교가 흔들리자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없게 됐다.

근본주의가 최초로 정립된 곳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미국 개신교계에서다.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에 대한 반발로 출범했다.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한 근대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이 보기엔 ‘황당한’ 주장을 폈다. 이런 주장들이다. ‘아담은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쓰지 않았다.’ ‘역사적 예수가 한 말은 요한복음에 한마디도 없다.’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은 신화다.’

근대주의자들은 성경에도 모순이 있다는 입장이다. 예컨대 골리앗을 죽인 것은 다윗 혹은 엘하난이라는 장수다. 두 버전으로 구약성경에 나온다. 근대주의자들은 성경 구절을 글자 그대로만 읽을 게 아니라 과학이나 신이 인간에게 준 이성과 모순되면 은유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는 게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이래 그리스도교의 전통이라는 것이다. 근대주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을 글자 그대로 단어의 기본적·일반적 뜻에 따라 읽어야 한다는 ‘문자주의(文字主義, literalism)’는 전통을 파괴했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문자주의를 표방하며 믿음에도 지켜야 할 근본(fundamentals)이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중요한 신앙적 근거는 성경에는 잘못이 없다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inerrancy)’이었다.

미국 학계와 언론은 근본주의를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종교를 바라보는 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모든 근본주의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다. 근본주의자들은 ‘황금시대’로 돌아가기를 꿈꾼다. ‘황금시대’는 순수한 신앙의 시대다. 굳건한 신앙 덕분에 나라나 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이 대표적인 예다.

정치가 양극화된 사회에서 위력


▎중국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이자 철학자인 공자는 “근본이 바로 서면 길이 열린다(本立而道生)”며 근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세상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사탄과 같은 악의 세력의 존재를 의식한다. 따라서 상당한 정도의 불관용·편협성이 그들에게서 발견된다. 근본주의자들은 신앙의 해이로 사람들이 도덕적인 타락에 빠졌다고 본다.

그들은 무신론이나 비근본주의 교파·교단·종파는 악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공격한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 낙태 허용이나 LGBT(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 운동 옹호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은 줄기세포 연구 같은 생명의 조작에 반대한다. 전통사회는 가부장적이었기 때문에 전통사회에 뿌리를 둔 근본주의 또한 가부장적인 성향이 있다.

근대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이 ‘피포위(被包圍) 의식(siege mentality)’에 사로잡혔다고 주장한다. ‘피포위 의식’은 적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다고 믿는 강박관념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한다. 아예 학교에도 다니지 않고 홈스쿨링을 거쳐 근본주의적인 대학에 진학해 성경 중심의 교육을 받는 사례도 있다.

근본주의가 사회적 논란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화(politicization)됐기 때문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도 있지만 우선 비슷한 것들끼리 통한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대체로 보수 정당을 지지한다. 근본주의 그룹은 구성원이 수십, 수천에 불과한 경우부터 수백만 명에 이르기까지 세력화의 정도가 다양하다. 근본주의 표가 뭉쳐 있으면 힘이 생긴다. 단 1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게 선거다. 특히 정치가 양극화돼 있는 경우 근본주의 유권자는 막강한 파괴력을 발휘한다.

미국에서 수적으로나 문화적·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종교는 그리스도교다.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그리스도교인들은 신(神)이 미국에 특별한 사명을 부여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것은 허구에 가깝다. 국가와 종교의 분리 때문이다. 이 사실을 어쩌면 근본주의자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정교분리가 국가와 그리스도교 모두에 좋은 시절도 있었지만 사회의 세속화를 가속화시켰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뒤늦게 이를 깨닫고 자신들이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정치화했다.

민주주의 환경에서는 근본주의도 선거정치의 규칙을 지킨다. 문제는 수적 열세로 선거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거나 정치환경이 권위주의나 독재인 경우다. 그런 경우 근본주의는 과격화·급진화·폭력화의 길을 갈 가능성이 크다. 테러와 결합되는 것이다.

개신교 근본주의나 이슬람 근본주의의 공통점은 신앙인들이 ‘신(神)의 전사’로 나선다는 점이다. 그들은 세상과 십자군 전쟁 중이다. 이런 호전성에도 근본주의는 테러주의와 동의어 사이가 아니다. 근본주의자들 중 일부가 테러와 결탁했을 뿐이다. 대다수 무슬림은 테러와 무관한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2001년 9·11테러 이래 상당수 비이슬람권 사람들은 이슬람을 테러와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주의(Islamism)로도 불리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영양분을 제공하는 것은 서구화 거부, 이민 문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같은 복잡한 정치적·국제정치적 문제들이다. 이슬람 자체에 폭력성이 내재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구약의 신은 민족주의적인 신이다.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안 믿는다’는 사람이 무신론자라면 ‘그럼에도 믿는다’는 사람이 근대주의자다.

근대주의자에게는 성경에 일부 오류나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일부 학자는 사도 바울이 게이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근대주의자는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예수는 육신으로 부활한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부활한 것이다’라는 식의 합리적인 설명의 가능성도 열어둔다.

이분법적 사고, 편협성의 한계


▎1. 지난해 3월 16일 성균관대 내 대성전에서 열린 춘기 석전대제(釋奠大祭). 석전대제는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비롯한 선성선현(先聖先賢)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 2.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근본주의는 미국과 달리 소수가 아니라 다수다. 지난해 3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연합예배에 참석한 신자들이 설교를 경청하고 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여 명을 먹이고도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에 대해서도 근대주의자들은 합리적인 설명을 모색한다. 신은 풍성하게 주지만, 인간이 자신만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가난은 신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일부 근대주의자는 이런 설명이 ‘전통적’ 해석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근본주의자들은 납득할 수 없다. 그들에게 근대주의자와 무신론자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통속이다.

남을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공감 능력을 확보하려면 상당한 독서·사색·훈련이 필요하다. 근본주의자가 근대주의자를, 근대주의자가 근본주의자를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 상대방에 대한 오해도 있고 ‘신화’도 있다. ‘근본주의자는 무식하다’ ‘그들은 신정(神政) 경찰국가를 꿈꾼다’는 식의 인식은 근본주의자들이 보기에 허무맹랑하다. 신화다. 근본주의자들은, 학계와 언론 매체를 장악한 근대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근본주의의 눈으로 근본주의를 볼 필요가 있다. 근본주의에 대한 일반의 인식에도 문제가 있다. 근본주의는 지극히 다양하다. 단일한 틀로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들을 재단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폭력을 사용하는 근본주의와 그렇지 않은 근본주의, 이슬람국가(IS)와 개신교 근본주의를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는 걸까?

상당수 학자는 근본주의들 간에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 있다고 주장한다. 근본주의라는 같은 식구끼리는 서로 닮았다는 것이다. 억지로 끼워 맞춘 것 같은 경우도 있다. 예컨대 어떤 학자들은 일본의 불교계 신흥종교를 개신교 근본주의에 상응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근대주의는 근본주의를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의 아성처럼 여긴다. 예컨대 근본주의자들은 ‘무식해서’ 진화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근본주의자들도 진화론을 이해한다. 그들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시각에 찬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 또한 비합리적인 게 나이라 이성적·논리적이다.

또한 근본주의가 근대성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선별적으로 수용한다. 그들의 신앙에 어긋나는 현대문화의 일부 측면에 반대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 또한 목적을 위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정보기술(IT)을 활용한다.

가부장적인 근본주의 종교를 지지하는 여성을 근대주의자는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다 이유가 있다. 근본주의는 남성들에게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가부장적 사고가 여성에게 유리할 수도 있다.

근대주의적인 종교도 전혀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근대주의적 신앙은 근본주의자들이 보기에 미지근하다. 근대주의는 열정과 확실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종교의 역사를 보면 근본주의와 근대주의를 두부 자르듯 나누기 힘들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교회가 타락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성인들이 등장했고 새로운 수도원운동이 부흥했다. 성(聖) 프란치스코나 마르틴 루터도 어떤 의미에서는 근본주의자들이었다.

관용이나 다원주의를 강조하는 근대주의 또한 또 다른 형태의 근본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 아(我)가 비아(非我)보다 우월하고 비아는 편협하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이나 세속주의 또한 근본주의의 일종이다. 관용의 나라인 프랑스가 여성 복장 등 이슬람의 상징물을 통제하려고 한다. ‘세속적 근본주의’의 민낯이 드러난 것은 아닐까?

폭력화하지 않으면 탄압받을 일도 없어


▎조선시대에 탄압받던 불교는 종교의 자유라는 근대성 덕분에 급성장했다. 함박눈이 내린 1월 20일 전남 영암군 도갑사를 찾은 신도들이 경내(境內)를 둘러보고 있다.
한국의 근본주의 상황은 어떤가. 우리나라는 근본주의가 눈에 잘 안 보이는 나라다. 왜일까? 조선은 유교 근본주의의 나라였다. ‘머리는 잘라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저항하는 유교인들이 있었다.


▎근대주의자 에게는 성경에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병이어 (五餠二魚)의 기적에 대해서도 근대주의자들은 합리적인 설명을 모색한다.
하지만 국가와 교회라는 이중구조로 돼 있는 서구와 달리 조선에서 국가와 유교의 관계는 일체형에 가까웠다. 따라서 유교적 국가의 붕괴는 곧 유교의 붕괴였다. ‘유교 근본주의’가 싹틀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 그리스도교 근본주의는 근대성에 대한 반격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그리스도교는 교육·의료 등 근대의 요소와 함께 들어왔다. 미국과 달리 근본주의는 우리나라에서 소수가 아니라 다수다. 근본주의는 좋은 뜻이다. 한편 조선시대에 탄압받던 불교는 종교의 자유라는 근대성 덕분에 급성장했다. 한국에서 근대성과 종교는 마찰하지 않았다.

근본주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세기 초 미국 근본주의자들은 근대주의자자들에게 졌다. 근본주의는 사라질 것으로 예상됐다. 1970년대부터 다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예상이 잘 맞지 않는 게 종교의 미래다.

얄궂게도 근본주의는 세속적인 민주주의 사회의 희생자이자 수혜자다. 종교의 자유, 종교적 다원주의를 후원하는 민주주의는 근본주의를 보호한다. 국가는 폭력화되지 않고 민주주의적 법적 질서의 테두리 안에 머무는 근본주의는 탄압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의 미래와 근본주의의 미래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무신론 같은 ‘근본주의적 세속주의’는 근본주의와 근대주의를 분리해 고려하지 않는다. 둘 다 사라질 것으로 본다. 근본주의를 포함해 종교를 치료가 필요한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는 학자들도 있다. 근본주의와 근대주의는 한 배를 탔다.

주위에서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근대화는 익숙하고 편한 것들을 사라지게 했다. 인공지능(AI) 시대, 산업혁명 4.0 시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아마도 새로운 근본주의와 새로운 근대주의가 나올 것이다.

‘진리는 하나’라는 말은 ‘내가 믿는 것만 진리’라는 뜻도, ‘우리 모두 진리를 공유한다’는 뜻도 될 수 있다. 미래의 근본주의·근대주의는 ‘진리는 하나’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외교부 명예 정책자문위원. 단국대 인재 아카데미(초빙교수), 한경대 영어과(겸임교수), 서강대 국제대학원(연구교수)에서 강의했음.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201703호 (2017.0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