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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 시인에게 사랑을 묻다] 이성복 : ‘불가능’을 마주하는 나약한 인간의 존엄 

“끔찍한 진실을 직시하자” 

글 한경심 자유기고가 icecreamhan@empal.com / 사진 공정식 기자
절망에 대한 위안은 더 큰 절망에서 비롯…절망은 한낮의 악몽처럼 오히려 위안이 되기도

기도도 사랑도 아름다움도 보관이 안 된다. 하는 그 순간에만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다만 진실해지려는 노력,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노력을 끊임없이 지어나가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다.


대구에 사는 이성복(65) 시인에게 처음 전화로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그는 인터뷰에 응하기를 꺼려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자신은 지금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혼돈과 절망에 대해 나서서 발언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미 할 말은 다했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가 문화계에서 ‘현실참여파’가 아니라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더욱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촛불을 드는 것만큼이나 기도도 세상을 도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홀로 기도하고 악몽을 꾸고 있는 이라면 기꺼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할 테니까.

두 번째 이유는 수긍할 수밖에 없겠다. 우리에겐 그의 직설(直說)이라 할 시가 있고, 시보다 더 메시지가 분명한 산문집도 있다. 또 직접 자신을 설명한 글과 사진, 작품, 평론가의 글까지 고루 담은 ‘문학앨범’까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많은 작가와 기자가 그를 만나고 쓴 글을 모은 대담집 <끝나지 않는 대화>도 있다. 그런데 그는 응해주었다. 그리고 만나서는 “부끄럽다”고 했다.

“만 명에 육박한다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아마 제 이름은 없을 겁니다. 예전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는 서명도 많이 했지만, 요즘엔 그럴 기회도 별로 없었습니다. 블랙리스트에 빠진 것도 부끄럽고, 이런 시국에 인터뷰하는 것도 부끄럽습니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는 것도 그렇고, 안 하는 것도 그렇고…….”

1981년 취직한 아내를 따라 내려온 이곳에서 이듬해부터 계명대 교수로 30년 넘게 일하다가 퇴직한 지금까지 죽 살아왔으니 중앙 문단과는 자연히 소원해졌으리라. 그러나 오래 몸담은 이곳에서도 네 사람 이상 만나는 것은 힘들어 사회적인 관계보다 개인적인 관계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야심’에 불타는 청년 아니었던가. 아니, 국민학교 5학년 때 고향 상주를 떠나 홀로 서울로 올라올 때 이미 야심 충만한 소년이었다고 고백한다.

“서울중학교에서 굳이 경기고등학교로 간 것도 야심 때문이었습니다. 유력한 집안 자제들과 교제하려고요. 요즘 회자되는 황교안, 윤병세, 정우택, 최양희가 동창이고, 동기 중에도 장관을 지낸 이가 네다섯 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야심 충만한 소년의 서울 진출


▎이성복은 시 ‘남해 금산’에서 인생과 사랑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고 받아들이기만 할 뿐 ‘손 놓아버리는 지점’에 점점 다가간다. 만년필로 노트에 초고를 작성하는 이 시인.
이 이루어지지 않은 야심이 다른 글에도 더러 등장하는 걸 보면, 그는 어린 시절의 야심에 대해 자주 농담처럼 얘기했던 것 같다.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으니 아주 오래전의 치기 어린 야심쯤이야 야유하듯 농담으로 치부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이런 식으로 내보임으로써 그 세속성을 털어내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할 때 그는 빙긋 웃으면서도 한편으론 진짜로 부끄러운 자신을 의식하듯 조롱하는 표정이 스치기 때문이다. 만약 진짜로 부끄러워한다면, 그래서 자주 얘기한 것이라면, 그는 자신을 쉬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리라.

그렇게 야심을 품고 들어간 고등학교에서 웅변반과 흥사단 활동을 한 것을 보면 그는 꽤나 정치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2학년 때 그의 ‘정치적 자아’는 ‘예술적 자아’로 바뀌었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민족개조론’을 읽고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나중에 생사(生死) 문제 해결이라는 일대사(一大事)로 관심이 옮겨가요. 그 과정에서 예술이 도구가 된 것이지요.”

‘생사 문제’, ‘일대사’라는 말은 불교, 특히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한참 뒤 그는 불교 공부에 입문하지만, 누구나 안고 가는 삶과 죽음의 고민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나 보다. 그런데 ‘이 한 가지 큰 일’을 풀어가는 데 그는 종교가 아니라 예술을 택했다.

“종교가 몽둥이라면 예술은 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국 그에게 어울리는 무기는 칼이었던가 보다. 그렇다면 그 칼끝은 어느 곳을 향하고 있으며, 누구를 겨누고 있는가?

구원이나 치유 대신 드러내고 아프게 하기


이성복은 서울대 불문과 재학 시절 만난 스승 김현의 기대와 후원으로 1977년 <문학과 지성>에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1980년에 나온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대한 평을 살펴보면, 당시 문단은 파격적이고 과감하며 일견 현란하면서 신선하기까지 한 신인의 시를 당혹함과 경탄으로 맞아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地下의 잠, 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伐木
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臨終, 病을 돌보던
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日本인가, 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정든 유곽에서’ 중에서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갔다
소년들의 性器에는 까닭 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먹거나
이차 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 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 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 ‘1959년’ 중에서


때는 삼엄한 유신시절에서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던 억압과 절망의 시대였고, 그의 나이는 20대 중반이었다. 어둠과 젊음, 불안이 뒤섞여 울리는 그의 시는 직접적인 메시지 없이도 그 시대가 피부에 와 닿고, 참담하면서도 서정적인 내용과 끊어지듯 이어지는 리듬(아마 그는 의도적으로 파괴하려고 했겠지만)은 미감도 만족시켜준다. 그러니 독자는 열광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는가 보다. 물론 ‘난해하다’ ‘너무 참혹하다’는 독후감도 있다. 무엇보다 그의 시는 생채기를 그대로 드러낸 듯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제게 시는 구원도 아니고, 치유나 위로도 아닙니다. 오히려 아픈 곳을 더 아프게 드러내고 직시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술은 절망연습, 모의(模擬) 절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보면 한 절망에 대한 위안은 더 큰 절망에서 온다는 것을 알겠고, 모의절망은 한낮의 악몽처럼 오히려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그는 “중생이 병들었으니 나도 앓는다”고 했던 <유마경>의 유마힐처럼 예술가란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먼저 아픔을 느끼고 누구보다 처절하게, 오랫동안 아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그가 평생 떠받들어온 카프카가 그랬던 것처럼 ‘얼어붙은 영혼의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프로이트가 말한 ‘야경꾼’ 구실을 하는 악몽처럼 잠든 사람에게 위험을 알리는 불안한 꿈으로 우리의 잠을 깨우는 것도 같다. 그는 자주 “시체공시소에 누워 있는 시신의 모포를 들쳐 낸다”는 비유를 들곤 하는데, 그 말은 삶의 궁극 앞에 선 일개 존재가 자신의 한계에 맞닥뜨렸으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읽힌다.

1984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이국생활에 환멸을 느낀 듯 1년 만에 돌아오고 유교 경전과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하며 동양으로 눈길을 돌렸다.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은 불교 공부로 이어지는데, 1991년 떠난 두 번째 프랑스 체류에서는 불교를 닮은 후기구조주의를 재발견한다. ‘언어’와 ‘이름’은 현존(실체)을 떠나 있다는 불교와, 이름(기호)은 더 이상 확실하지 않으며 의미 역시 유동적일 뿐만 아니라 현존을 확보하는 데 끝내 실패한다는 후기구조주의 이론은 출발점이 비슷해 보인다.

천길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사람


▎이성복은 살기 위해 남의 살과 피를 먹을 수 밖에 없고, 결국 자신도 죽어 사라져야 하는 운명 앞에 무기력한, 그 ‘어쩔 수 없음’에 아주 예민하게 아파한다. 광장에서 먼 곳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슬프도록 맑다.
불교는 그러나 현존에 직입(直入)할 것을 촉구하지만, 그는 닿을 수 없는 현존의 자리를 끝없이 가리키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이다. ‘말로는 닿을 수 없는 그 자리’를 그도 바라보며 바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지만,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을 뿐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딛기, 즉 진일보의 직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예술가의 자리는 그 벼랑 끝자리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불가능에 맞닥뜨렸으나 또한 입을 다물 수 없는 자리 말이다.

“저는 선(禪)이 예술의 한 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예술은 선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머님이 아흔아홉에 돌아가셨는데, 60대 때부터 죽고 싶다고 하셨으면서 돌아가시기 보름 전 목이 쉬도록 우시더군요. 예술이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얘기하겠습니까?”

그가 동양에 기울던 무렵 나온 시집이 <남해 금산>이다. “한 여자가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 그 여자 돌 속에서 떠나갔네”로 시작하는 시 ‘남해 금산’에서 그는 인생에, 사랑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하고 받아들이기만 할 뿐 ‘손 놓아버리는 지점’에 점점 다가간다. 그로서는 자연스럽게 다다른 지점이지만 그의 시를 읽은 사람들은 “벌써 신선이 되어가는가?”라고 의심했으며, 어떤 이는 불교에 가까워지는 대신 문학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서양에서 시작한 그의 정신은 동양을 거쳐 다시 서양으로 돌아오면서 자신만의 철학을 체득한 듯하다. 그는 이런 궤적을 “예방주사를 일찍 맞았다”고 표현한다. 친구들은 50대 들어서며 서양의 한계에 부딪혀 방황하는데 비해 그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방황에서는 자유로울지 몰라도 고통에서도 자유롭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나미비아 사막에 사는 사막거저리(딱정벌레의 일종)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저리는 모래산 위로 올라가 물구나무를 섭니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받기 위해서죠. 그 바람에 실려 온 습기가 몸에 닿아 입으로 흘러내려오도록 오랜 시간 물구나무를 서며 겨우 물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면 도마뱀이 그 거저리를 잡아먹습니다. 도마뱀 역시 그렇게 물을 섭취하는 것이죠. 그런 거저리의 안간힘 앞에서 나는 도통했다고, 나는 고통이 없다는 소리를 어떻게 합니까!”

자신의 고통을 문제삼지 않겠다는 것은 몰라도 그 작은 거저리의 눈물겨운 분투 앞에서 자신은 고통이 없다고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그는 앞으로 태어날 존재를 포함하여 모든 몸 받은 자의 덧없음, 살기 위해 남의 살과 피를 먹을 수밖에 없고 결국 자신도 죽어 사라져야 하는 운명 앞에 무기력한, 그 ‘어쩔 수 없음’에 아주 예민하게 아파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동물도 미물도 애틋하게 여기고 오래 전 니스 해변에서 조약돌을 주어온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는 사람이다. 다섯 번째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은 말 못하고 울지 못하는 모든 ‘입 없는 것들’의 말과 울음처럼 들린다.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면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슬퍼할 수 없는 것’ 전문)

‘내가 어떻게 살았기에 최순실이 그랬을까’

<금강경>의 마지막 부분에 ‘모든 모양 있는 존재는 꿈이나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와 같다-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환(幻)으로 펼쳐진 세상과 존재의 덧없음을 빗댄 ‘여몽환포영’을 이성복은 ‘바다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적인 말로 표현했다.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 녹아버리는 그 자리만이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서로 돌보고 위로하는 자리, 내가 너와 함께하는 자리니까요.”

한순간 허망하게 녹아버려 손 쓸 수 없는 그 자리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치유나 구원의 자리가 아니라, 단지 너의 얘기를 듣고 함께 느끼는 자리, 순교자가 맹수들 속으로 들어갈 때 남은 사람들이 서로 손잡고 노래 불러주는 자리다.

“틱낫한 스님이 뉴욕 거리에서 미친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어떻게 살았기에 그가 저리 됐을까?’라고 했답니다. 박근혜-최순실 스캔들이 일어났을 때 왜 우리 모두 창피하고 안타깝고 숨이 막혔을까요? 저는 박근혜 대통령과 동갑이고, 제 아내는 최순실과 동갑입니다. 저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를 찍지 않았지만 찍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동시대에 사는 우리는 모두 같은 자아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회의 석상에서 누군가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면 자신이 창피해서 귀를 막는다는 그는 박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서 더듬거리며 자신을 변명하는 모습을 볼 때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최근 문제가 됐던 문단 성폭력 사태에 대해서도 그는 결코 결백을 주장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자기 위주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본래 악입니다. 문학하는 공간 역시 자기 위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기 악을 그나마 순치하는 방식은 ‘나는 결백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톨스토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부끄러운 것까지 고백한다’가 될 것입니다.”

‘너는 악하지만 나는 선하다’는 이분법이나 정의나 민주, 도덕주의, 선(善) 등을 부르짖는 것은 자칫 자신을 속이거나 위선으로 갈 가능성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제게 선이란 ‘너의 악을 나의 악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학은 위선보다 차라리 위악(僞惡)에 가까워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은 본래 악이고, 거짓투성이이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것이겠지요. 예쁘다는 실체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만약 실체가 있어서 아름다움을 지향한다면 추할 것입니다.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인간은 신도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름다움은 자세와 결부될 뿐인 것 같습니다.”

그 자세는 노력하는 순간, 잠시 기도하는 그 순간을 말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구원의 양식인 만나(manna)처럼 기도도 보관이 안 된다고 한다. 기도도 사랑도 아름다움도 하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라고. 그러나 틱낫한이 말한 ‘평화로 가는 길이 평화’이듯이 기도도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임을 그는 안다.

“아름다움이 뭘까요? 진실할 수 없어도 진실해지려는 노력,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노력, 그게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의 다가 아닐까요? 모든 게 허무하고 망가질 뿐 가망이라곤 없지만 우리는 다만 한없이 자신을 그렇게 지어나갈 수밖에 없겠지요. 완성이란 없을 테니까요.”

끊임없이 흔들리는 이성복이 다다른 자리

유감스럽게도 그는 시를 발표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됐다. 시집 <래여애반다라>를 마지막으로 낸 2013년 이후 띄엄띄엄 발표한 시는 스무 편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대신 옛 원고와 강의록을 정리하여 시론 강의 세 권, 묵직한 산문집과 대담집 등을 펴냈다. 그는 이전에도 사진에 글을 붙인 사진에세이도 두 권 냈고, ‘잘 나가는’ 래퍼 ‘지코’도 읽는다는 아포리즘을 모은 책은 꾸준히 쇄를 거듭하고 있다.

“원고를 정리하면서 대학 졸업 무렵 끼적여 놓은 아포리즘을 보니 그동안 공부한다고 했는데, 하나도 는 게 없더군요. 평생 한 우물만 파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처럼 늘 새로운 걸 시도하지만 결국 한 자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한곳에 무섭도록 집중하다가도 유독 싫증을 잘 내고 옮겨가는 자신을 노마드로 자처했으나 결국 ‘행행본처 지지발처(行行本處 至至發處, 다니고 다녀도 본래 자리, 이르고 이른 곳이 떠나온 그 자리)’라며 웃음을 짓는다. 그렇다면 어릴 적의 그 야심도 그대로인가?

“프로이트가 사상계의 한니발이 되고 싶어 했던 것처럼 나도 예술로 이름을 내겠다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내가 온 지점은 더도 덜도 아닌 딱 그 지점인 것 같네요.”

이 말을 믿어야 할까? 물론 믿을 수 있다. 그는 또 불쑥 “나는 남의 것을 잘 훔쳐다 써요”라고 했다. “내가 찾아낸 것보다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와 리바이벌한다는 느낌, 베끼고 짜깁기하는 아류, 이류”라고. 이 말도 수긍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작가로선 5퍼센트 부족하다는 말도 했다. 바닥까지 내려가지 못했노라고,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데 못 맡긴다고. 그는 자신에게 도사린 명예욕을 비롯하여 온갖 것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드러내고 심지어 분석까지 가하는 사람이다. 공부 일기를 포함하여 그의 산문에는 자신을 참 지독히도 발라낸 글이 많다. 자신의 무기인 칼날 끝은 결국 자신을 향한 모양이다. 피투성이 참회 같고 당당한 자아비판 같기도 하고, 에누리 없는 자기성찰로도 보이는 그의 고백을 읽다보면 그 단점이 어쩌면 그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저는 매순간 묻습니다. ‘아담아,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듯, 언제나 죽음을 기억하며(memento mori)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반추하듯 지금 다다른 자리를 봅니다.”

그러니 그의 말은 다 믿을 수 있다. 명예욕도 피투성이 참회도. 다만 그가 있는 자리는 고정된 자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동적인 자리이니 무엇으로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는 모진 듯 부드럽고, 초월한 듯하다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 못해 애를 끓는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은 낯선 것은 아니다. 예부터 시인들은 언제나 기로에서 탄식하는 노래를 불러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우리는 시인이 어느 순간 샘을 만나 시로 흘러나올 때를 기다릴 뿐이다.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숨겨둔 외발 가마에 내 혼 태워 오너라// 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 치고 있으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깻묵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 오너라’ ‘(정선’ 전문)

자신을 잊고, 쓴다는 생각도 끊어진 순간에야 흘러나오는 시는 새, 가마, 물고기, 깻묵으로 말이 말을 낳고 스스로 이어질 뿐이다.

“시는 쓰려할수록 못 쓰게 됩니다. 운동을 할 때도 밥을 먹으면서도 이게 시다, 이게 문학이다, 이게 인생이다 여기며 하고 있지만 시가 동행해주지를 않는군요.”

그는 시보다 차라리 자신의 산문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가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하려면 그의 정직한 산문이 도움이 되겠지만, 그와 함께하고 싶은 독자라면 역시 그만큼이나 시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만년필에 잉크를 넣고 시험 삼아 글씨를 써보다 완성된, 아직 발표도 되지 않은 최신작 ‘모란이 질 무렵’을 들을 수 있었다.

“어디 가보아야 하는데 거기가 어딘지/ 몰랐다 해거름녘에 붉게 핀 것들을 보고/ 한 사람은 작약이라 했고, 또 한 사람은/ 모란이라 했는데, 나도 같이 거기 왜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날 모란이라 했던 사람의 아이는 몹시 아팠고, 우리는 모두 같이 걱정했는데,/ 그 후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해거름녘에 붉게 핀 것들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우리는 어디/ 기대어 좀 울고 싶었던 기억밖에/ 없었다”

이성복(李晟馥) 시인: 19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 때 만난 김현 교수의 격려로 1977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80년에 나온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문단과 독자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으며 그에게 김수영문학상을 안겨주었다. 시집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아, 입이 없는 것들> <래여애반다라> 등과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고백의 형식들: 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 외에도 사진에세이와 아포리즘을 모은 책 등을 내었다. 1982년부터 대구 계명대에서 불문과 교수로 18년, 그리고 문창과 교수로 12년 재직하고 2012년 명예퇴직했다.

한경심 -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기자로 15년간 일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월간중앙> <이코노미스트>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 문화와 관련한 글을 썼다. 저서로 전통공예 장인들을 소개한 <우리는 어떻게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가>, 한식의 철학을 담은 우< 리는 왜 쌈 싸먹고 비벼먹고 말아 먹는가>등이 있고 번역서로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 김병연의 한시를 소개한 [Selected Poems of KIMSAAKAT](공역)이 있다.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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