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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김명수 코트’ 사법개혁 향방은? 

“행정보다 재판이 핵심 권력기관 법원행정처 손본다” 

고성표 월간중앙 기자 muzes@joongang.co.kr
재판이 행정을 지원하는 현실은 잘못된 것, 이용훈 대법원장 때도 행정처 문제 알고도 개혁 못해 지법-고법 이원화 인사에 원칙적으로 찬성…판사 블랙리스트 의혹도 재조사 검토할 것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전경.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를 계기로 권력기관화 된 법원행정처에 대한 개혁작업이 시작될 것으로 전망된다. / 사진:연합뉴스
대법원 수뇌부가 일선 판사들의 사법개혁 논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했다는 의혹이 지난 3월 6일 한 언론 보도로 터져 나왔다. 법원행정처 고위간부가 법원 내 학술 연구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마련한 외부 학술행사를 축소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국제인권법연구회는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과 함께 법관 독립성과 관료적 법원체제 개혁 관련 내용을 주제로 한 행사를 앞둔 시점이었다. 국제인권법연구회는 500여 명의 판사가 가입해 사실상 법원 내 최대 연구모임이다. 학술행사를 위해 연구회는 전국의 판사 3000여 명에게 설문을 보내 500명가량으로부터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설문 내용은 대법원장 정책에 반대하는 법관의 불이익 우려 여부, 대법관 제청 절차 수정 필요성 여부 등 기존 대법원장 인사권의 핵심을 건드리는 민감한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가뜩이나 보수적이란 평을 받아온 ‘양승태 대법원’이 민감하게 받아들였다는 게 법원 안팎의 얘기다. 의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법관들을 포함해 판사들의 성향 등을 파악해 정리한 문건을 비밀 파일로 관리하고 있었다는 의혹으로까지 번졌다. 소위 판사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파장은 컸다. 그렇지 않아도 개혁적 성향의 판사들 사이에서는 인원과 권한 등이 비대해진 법원행정처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지자 법원행정처는 개혁을 넘어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터져 나왔다. 기존에 법원행정처가 갖던 사법정책 결정에 대한 권한은 법관 대표 회의체를 만들어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차성안 전주지법 군산지원 판사는 “3~5년의 과도기를 거쳐 상근 판사 중심의 법원행정처를 해체하고 법관이 아닌 직원으로 채우도록 법원조직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 판사는 이어 “법원장이 주도하는 사무분담은 판사회의 운영위원회에서 논의하도록 바꿔야 한다”고도 했다. 차 판사는 현직 판사로는 이례적으로 지난 7월 6일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에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관심을 청원합니다”란 제목으로 청원 글을 올렸다. 차 판사의 청원 글이 올라온 지 3주 만에 10만 명의 네티즌이 서명에 동참하는 등 큰 화제가 됐다.

법원행정처에 대한 비판과 개혁 논의는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8월 대법관 후보자 제청을 둘러싼 ‘4차 사법파동’ 당시 사표를 던진 문흥수 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법원행정처를 정점으로 한 관료주의의 타파가 법원 개혁의 시발점”이라고 주장했다.

판사가 행정업무만 하는 이상한 나라?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이후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한 2005년에도 법원행정처의 재편 방향을 내부적으로 검토한 적이 있다. 당시 대법원이 작성한 대외비 문건 ‘사법행정 담당기관의 재편성’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법무부 등의 역할 미흡으로 인해 그 담당 업무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사법행정 비대화라는 문제에 당면했다”며 “소위 엘리트 법관 위주의 사법행정 운영을 통해 사법부 관료화를 초래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점은 인식했지만 이후 법원행정처의 인력과 권한은 더욱 비대해지고 강화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는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던 문제를 재점화한 것이다.

국제인권법연구회 관련 의혹이 불거져 6차 사법파동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던 3월 14일 법원 내부 인사들 사이에서도 법원행정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이날 법원 내부 게시판인 ‘코트넷’에는 흥미로운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제 매형은 현직 독일 판사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글을 쓴 이는 지방법원에 근무하는 한 일반직 공무원이었다.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 견제와 대법관 구성 다양화를 통한 대법원 개혁 등 사법개혁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특히 글의 맨 앞부분에 나오는 법원행정처 관련 내용이 눈에 띄었다. 내용은 이랬다.

“제 매형은 현직 독일 판사입니다. 함부르크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 중입니다. (…) 한국 판사들과 교분이 있어 한국에 오시면 한국 판사들과 만나는데 (…) 법원행정처에 재판을 하지 않고 사법행정을 전담하는 판사들이 몇 십 명 있다는 말에 깜작 놀라면서 ‘판사가 재판을 해야지. 행정업무를 하다니요? 이상한 나라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독일처럼 법관은 사법행정에서 배제하고 재판업무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현직 판사의 글이 아니어서였을까? 이 글은 당시 법원 내 일반직 직원들 사이에서 상당한 호응을 받았지만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판사가 재판을 해야지…”라며 독일 현직 판사가 한국 법원의 실정을 꼬집었다는 대목은 적지 않은 일선 판사들의 생각과 맥이 닿아 있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구한 인천지방법원의 한 소장판사는 법원 내부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지난 4월 진상조사위원회가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 축소 외압 의혹 문제로 인해 불거진 판사 블랙리스트에 대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내렸다. 하지만 철저한 조사가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수 판사는 이를 그대로 믿지 않는 분위기다. 설사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법원행정처 수뇌부가 자신들의 입맛대로 판사들의 자유로운 연구·토론 활동을 불온하게 여기고 어떻게든 무마하려고 시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사법 파동 과정에서 법원행정처 개혁 논의가 있어왔지만 다 실패했다. 오히려 진보적인 색깔의 노무현 정부 이후 법원행정처의 권한과 영향력은 더 커진 느낌이다. 이번만큼은 법원행정처를 확실히 개혁해 법관 관료화를 막고 법관의 독립을 이뤄내야 한다. 대법원장 내정자도 일선 판사들의 이런 목소리를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취재진이 만난 또 다른 판사들도 법원행정처 개혁 문제에서만큼은 한 목소리를 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중앙지법 한민사 단독판사는 “판사야 당연히 재판 업무를 잘해야 한다”면서도 “소위 조직에서 잘나가려면 행정처를 거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의 다른 판사 역시 “법원행정처 출신이 인사에서 좋은 보직을 받는다는 건 통계적으로도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라며 “행정 업무를 전담하는 판사가 있으면 안 된다는 데 100%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법원행정처 출신이 인사에서 특별 대우를 받는 관행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대법관 출신 다수가 행정처 출신


▎1. 7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와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판사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원 기자회견’을 했다. / 2. 차성안 전주지법 군사지원 판사는 현직 판사로는 이례적으로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관심을 청원합니다”란 제목으로 청원 글을 올렸다. 차 판사의 청원 글이 올라온 지 3주 만에 10만 명의 네티즌이 서명에 동참하는 등 큰 화제가 됐다.
일선 판사들의 말처럼 법원행정처를 거친 판사들이 요직에 기용된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김영훈 서울고법 판사의 분석에 따르면 1970년 이후 임명된 현직 판사 출신 대법관 81명 가운데 법원행정처 차장 출신이 21명(25.9%), 국장급 이상이 34명(42%), 행정처 경력이 5년 이상인 법관은 10명으로 대다수(80.2%)를 차지하고 있다. 뇌물·부패 등 중요 사건을 다루는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부나 형사합의부 역시 법원행정처 출신 판사들로 채워졌다. 지난 2월 법원 정기인사 결과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는 3명 중 2명이, 형사합의부는 13명 중 10명이 법원행정처 혹은 대법원 재판연구관 경력자로 임명됐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단독판사는 “행정처는 일이 많고 상명하복 구조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많지만 ‘법관의 꽃’으로 불리는 고법 부장(차관급) 승진의 필수코스로 인식돼 대법원 재판연구관 자리와 마찬가지로 진입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원래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장이 총괄하는 사법행정 사무를 관장하기 설치됐다. 법원행정처가 일선 판사들에게 ‘권력 기구’로 인식되는 것은 사법 행정의 핵심인 인사 기능을 총괄하기 때문이다. 법원행정처는 일선 판사들의 임용·전보·승진 등에 관한 인사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 또 예산·회계도 관장한다. 전국 법원에서 근무평정이 우수한 법관들이 행정처의 심의관으로 발탁되고 행정처 근무를 마치면 다시 다음 보직 배정에서 행정처의 배려를 받는 관행이 있다. 실제로 법원행정처는 일선 판사들의 생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판사들이 가장 크게 신경 쓰는 것 중 하나가 승진과 더불어 근무지 문제다. 현재 전국 3000여 명의 판사는 2년마다 근무지를 옮긴다. 근무지를 결정하는 건 법원행정처다. 판사들은 인사 때마다 법원행정처의 강력한 인사권을 몸으로 느낀다.

대법원장의 권한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이를 보좌하는 행정 조직 역시 크고 막강할 수밖에 없다. 인력 규모도 만만치 않다. 법원행정처에는 고법부장급 실장 3명, 지방법원 부장급 8명, 중견법관 23명 등 34명(차장 제외)의 법관이 겸임 발령의 형식으로 근무하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가 근무하던 춘천지방법원에 24명의 법관(법원장, 수석부장판사 제외)이 재직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법원행정처 개혁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가 과연 어떤 입장에 있는지가 주목된다. 일단 김 후보자는 법원행정처 개혁을 사법개혁의 최우선 사안 중 하나로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후보자가 내정 직후 밝힌 소회를 통해 이런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김 후보자는 대법원장 내정 직후인 8월 22일 양승태 대법원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를 방문했다. 이날 오전 춘천을 출발한 김 후보자는 ‘B·M·W’(Bus·Metro·Walk)를 이용해 청사에 도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진짜 화젯거리는 대법원장 내정 소회를 묻는 출입기자들에게 한 답변에서 나왔다. 김 후보자는 “저는 재판만 했습니다. 31년 5개월 동안 법정에서 당사자와 호흡하면서 재판만 한 사람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이번에 보여드리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고위공직자 후보로 임명된 인사들은 일반적으로 말을 아끼거나 형식적이고 원론적인 수준의 언급을 하는 정도다. 하지만 김 후보자는 “재판만 했다”는 표현으로 우회적이지만 자신만의 언어로 분명한 소신을 밝혔다. 재판을 하지 않는 행정이나 기획부서, 다시 말해 대법원장의 수족과 같은 조직인 법원행정처에서 한 번도 근무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자신의 이력이 시대의 화두가 된 사법개혁을 잘 이끌고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분석이다.

“난 재판만 한 사람”이라는 소회의 의미


▎8월 22일 대법원장 후보로 내정된 김명수 당시 춘천지방법원장이 양승태 대법원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를 방문했다. 이날 김 후보자는 “31년 동안 재판만 했다”는 소회를 남겼다. / 사진:연합뉴스
이와 관련 부장판사 출신으로 지난해 변호사 개업을 한 A 변호사는 “실제 특정한 의도를 갖고 한 말인지는 본인만 알 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김 후보자가 ‘재판만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향후 사법행정 개혁의 큰 방향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언급이라는 게 A변호사의 시각이다. 김 후보자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재경법원의 한 판사도 “평소 대법원과 행정처에 대한 김 후보자의 개혁 소신은 확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다만 인사청문회 절차가 있고 국회 표결을 거쳐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평상시 가진 소신보다는 수위를 낮추는 쪽으로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자의 소회를 현장에서 들은 한 법원 출입기자는 이렇게 평했다.

“‘제가 취임하면 법원행정처를 개혁하겠습니다’라는 직접적인 워딩보다 훨씬 울림이 큰 멘트였다. 앞으로 사법행정을 총괄할 대법원장으로서 어느 부분에 방점을 두고 사법부를 운영할지 한마디로 요약한 답변이었다. 나아가 사법부의 울타리 너머까지 메시지를 던지는 답변처럼 느껴졌다.”

일선의 많은 판사도 김 후보자를 바라보는 외부의 이런 시각들에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김 후보자가 대법원장이 되면 사법개혁의 가장 중요한 테마로 법원행정처 개혁을 어떤 방식으로든 추진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9월 12~13일 이틀간 진행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김 후보자는 법원 행정처 개혁의 일단을 밝혔다. 김 후보자는 국회 대법원장 인사청문특별위원회(위원장 주호영)에 제출한 서면 답변자료를 통해 ‘재판 중심의 사법행정’을 사법부 개혁 방향의 맨 앞에 제시했다. ‘재판 중심의 사법행정’은 사법행정이 ‘재판 지원’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사법행정의 민주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5대 개혁 방향 중 하나로 ‘법원행정처 개혁’이라는 표현은 직접적으로 언급돼 있지 않다. 하지만 사법행정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법원행정처를 바꾸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인사청문 위원들의 사전질의에 대한 김 후보자의 서면 답변내용에는 법원행정처에 대한 문제점이나 개혁 방향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국민의당 손금주 의원은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 축소 사건으로 법원행정처 조직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고 지적한 뒤 법원행정처 기능과 규모의 적정성에 대한 김 후보자의 생각과 개선 방안을 물었다. 이에 대해 김 후보자는 우선 “사법행정이 재판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재판이 사법행정을 지원하는 셈이 돼버렸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사법정책의 결정 과정에서도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의 의사와 참여가 제대로 보장되지 못했으며 법관들은 법원행정처에서 결정한 사법정책을 현실화하기에 급급했다”고 언급하며 비판적 시각을 보였다. 김 후보자는 다소 민감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답변을 피하지 않았다. 법원행정처 출신인지 여부를 놓고 법원 전반에 걸쳐 있는 법관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언급한 것이다.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법관은 법원 내에서도 엘리트라는 평가를 받고, 그렇지 않은 법관은 평범한 판사라는 취급을 받아왔다. 그런 것들이 쌓이다 보니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의 자존감이 훼손되고 피로감이 누적되어 왔다. 법원행정처의 비대화와 권력기관화는 그에 따른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엘리트 판사-평범한 판사 나누는 건 병폐”


▎6월19일 경기도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각급 법원의 대표 판사 100명이 모여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했다. 판사들은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 평가와 함께 연루자의 책임 규명, 사법행정권 남용 재발방지 개선책 등을 논의했다. / 사진:연합뉴스
김 후보자는 “사법행정에 대한 인식부터 달라져야 한다”며 개혁방향의 일단을 제시했다. 제대로 된 지원을 하기 위해선 법원행정처에 있는 소수의 몇몇 판사가 아닌,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이 직접 사법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후보자는 이를 ‘재판 중심의 사법행정’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결국 사법행정의 제자리 찾기”라고도 했다. 김 후보자의 답변서에 대해 고법 부장판사 출신의 C 변호사는 “법원행정처의 비대화, 권력기관화를 정면으로 거론할 정도면 후보자 신분임을 감안할 때 다소 강한 논조로 현 실태를 지적하고 비판한 것”이라며 “평소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이자 멤버로 활동한 김 후보자가 법원행정처에 비판적인 일선 법관들과 인식을 같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C 변호사는 또 “엘리트 판사, 평범한 판사로 나뉘는 법원 내 병폐 역시 법원행정처가 그동안 본연의 역할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인정한 것으로 향후 인사 개혁에서도 변화를 예고하는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김 후보자의 이런 인식은 국제인권법연구회 사태를 거치며 더 확고해졌다고 한다. 김 후보자는 대법원장 후보로 내정되기 다섯 달 전인 지난 3월 9일 전국법원장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날 간담회는 사흘 전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행사 개최를 둘러싼 법원행정처 수뇌부의 행사 축소 시도 등이 언론에 보도돼 파문이 커지자 ‘사법 행정권 남용사태’ 해결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렸다. 당시 춘천지법원장 신분이던 김 후보자는 언론보도를 접한 후 다소 격앙되고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김 후보자는 진상조사를 강하게 요구하는 내용의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국 법원장 간담회 결과 보고’ 문건에 따르면 김 후보자는 18차례나 발언한 것으로 나와 있다. 김 후보자는 “최근 2~3일 사이의 일에 경악하고 있다”면서 진상조사위원회의 구성과 위원장 선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고 한다. 문건에는 당시 김 후보자가 “양승태 대법원장과 큰 인연이 없는 전직 대법관 중 신뢰를 얻고 행정처와 연관이 없는 분이 적절하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특정 대법관 두 사람을 빼야 한다는 구체적 제안도 했다. 또 조사 범위에 대해 김 후보자는 “이번 사태로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법관 독립을 해하는 사례가 있는지, 사법행정권 남용 사례는 없는지 조사해야 한다”며 “법원행정처장이 대법원장에게 건의해 차장 보직을 사법행정권을 행사하지 않는 곳으로 변경해주기를 희망한다”고도 했다.

이와 관련 인사청문 위원인 자유한국당 주광덕 의원은 “당시 회의에 참석한 40여 명의 법원장 가운데 그날 상황을 ‘춘천지법원장이 처장 이상의 권한을 행사한다’, ‘대법원장 위에 있는 사람이다’, ‘사법부를 탈취하려는 사람 같았다’고 말하는 법원장들이 있다”며 “그날 후보자의 행위는 사법행정권을 농락한 것이고 사법부를 유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 의원은 또 “(김 후보자가) 행정처 차장을 마치 범죄자 다루듯이 몰아붙이는 발언을 했다”며 “결국 그날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정하지 못했고 행정처 차장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며 김 후보자의 해명을 요구했다. 이에 김 후보자는 “그날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로) 너무 놀란 상황이라 격앙됐을 수 있지만 (그런) 의도나 취지는 갖고 있지 않았다”며 “철저히 진상을 조사해야 하는 데 (법원행정처) 현 차장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되니까 사법행정권과 관련 없는 곳으로 피해를 주면 어떻겠느냐는 취지였다”고 답했다.

법원 안팎에서는 법원행정처의 권한 남용 등 행태에 평소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던 김 후보자의 입장이 당시 간담회 자리에서 그대로 표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한 김 후보자는 법원행정처를 향한 일선 판사들의 불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특히 법원행정처의 권력기관화로 인해 법관이 관료화되고 결과적으로 법관 독립을 해쳐왔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법원 내 학술모임도 대법원장 비판 가능하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1주일 후인 6월 26일 ‘법원 고위간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열렸다. 이날 오전 양승태 대법원장이 굳은 표정으로 대법원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준비가 한창이던 9월 3일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을 만나 이들과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이들과의 만남에 의혹이 제기되자 김 후보자는 “저와 인연이 있고 국제인권법이라고 하니 못 만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난 3월 국제인권법연구회가 발표한 법관 500여 명의 설문조사 결과 내용은 김 후보자가 향후 사법행정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당시 설문에 응한 법관 가운데 88%가 ‘대법원장과 법원장 등 사법행정권자의 정책에 반대하면 보직이나 근무평정, 사무분담 등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답했다.

이런 우려를 의식한 듯 김 후보자는 인사청문 서면 답변서를 통해 “대법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는 학술모임이나 연구단체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대법원장 혹은 대법원 구조에 비판적인 내용을 다룰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일선 법관들의 불만과 우려를 새겨듣겠다는 얘기다. 특히 판사 블랙리스트와 관련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9월 12일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사법부 블랙리스트 사건을 철저히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하자 김 후보자는 “현재까지 증거가 없다고 돼 있는데 제대로 조사가 안 됐다는 주장도 있다”면서 “양승태 대법원장이 추가 조사를 거부하며 사정을 말씀하신 것까지 전부 검토하겠다”고 말해 블랙리스트 추가 조사를 사실상 약속했다.

법원행정처의 인력구조 조정과 비대화한 권한 분산 등에 나설 가능성이 점쳐진다. 특히 김 후보자는 재판하지 않는 법관이 장악하고 있는 법원행정처의 인력 구성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공감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속도조절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김 후보자는 “미국 연방법원행정처와 같이 변호사 자격을 가진 직원들이 장기간 사법 행정을 담당하는 체제가 갖춰진다면 해당 업무를 반드시 법관이 담당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사법행정 개혁 중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역시 법관 인사 문제다. 지방법원 합의부 배석판사→지방법원 단독판사/고등법원 합의부 배석판사→지방법원 부장판사→고등법원 (합의부) 부장판사→법원장. 법적으로 판사는 대법관이 되기 전까지는 승진이 없다. 하지만 이 순서는 승진을 의미하고, 공무원에 비유하면 직급의 위계서열을 뜻한다. 특히 고법 부장 판사는 자리 수가 적고 법원장직은 더 적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법원장이 ‘발탁’하는 고법 부장판사는 대부분의 판사가 오르고 싶어하는 자리다.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만 차관급 대우를 받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 그래야 사실상 법원장과 대법관이 될 자격을 얻는다. 고법 부장이 아닌데 법원장이 되거나 대법관이 되는 경우는 없다. 이런 현실적 구조 때문에 일선 판사들은 근무평정권과 인사권을 가진 대법원장의 의중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법행정 개혁은 이념 아닌 법관 독립문제”

관료화된 수직적 인사 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고법 부장판사 제도를 없애고, 지법과 고법 판사 인사를 구분하자는 방안이 여러 차례 제시된 바 있다. 법관 인사를 법원 심급별로 이원화하는 것이다. 지법 판사들은 지법에서만, 고법 판사는 고법에서만 근무하게끔 하여 관료화된 승진 구조를 끊어내자는 주장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하기 전인 2010년 법관 인사규칙 제10조 제정을 통해 이원화 방안이 도입됐다. 이후 6년 넘게 이원화 방안은 아직 정착되지 못했다. 여전히 고법 판사가 지법 부장판사로 발령되고, 지법 단독판사가 고법 배석판사로 보임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부터 고법 부장판사 제도를 폐지하고 순환보직으로 바꾸기로 했지만 양승태 대법원장 부임 이후 중단된 상태다.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의 이원화 주장에 대해 김 후보자는 원칙적으로 지지하고 찬성하는 입장이다. 김 후보자는 “이원화가 정착되면 자연스럽게 고법 부장판사로의 전보인사가 축소되거나 폐지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다만 갑작스럽게 제도적 변화를 도모하면 인사 안정성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실행시기나 방법에 대해서는 일선 법관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겠다”고 말했다.

보수 성향의 정치권과 법조계 인사들은 김 후보자가 진보적 성향의 판사들의 학술모임이었던 과거 우리법연구회 출신이자 이번 사법파동의 중심에 서 있는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직을 역임한 이력을 문제삼고 있다. 급진적으로 사법 개혁이 추진될 경우 우리 사회가 또 다른 이념 갈등에 휘말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대법원장 인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김형연 청와대 법무비서관과 김 후보자와의 관계를 심상찮게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김 법무비서관은 이번 사법파동을 거치는 과정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 간사였다. 사법개혁 과정에서 청와대의 의중이 일정부분 반영될 가능성이 있고 그 연결고리가 김 법무비서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주호영 인사청문특위 위원장이 김형연 전 부장판사가 지난 5월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발탁된 것에 대한 입장을 묻자 김 후보자는 “아무리 개인적 사정이 있어도 사직하고 바로 정치권으로 가거나 청와대로 가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비판하며 일단 선을 그은 상태다. 이와 관련 김 후보자를 잘 아는 전직 고법부장판사 출신 C 변호사는 “국제인권법연구회는 진보성향을 가진 판사들의 모임이 아닌데도 이번 사태를 겪으며 대단히 잘못 알려져 있다”며 “김 후보자가 이 연구회 회장을 맡은 이력 때문에 이념편향 논란이 불거지는 건 정치공세”라고 말했다. C 변호사는 이어 “진보냐 아니냐는 이념과 상관없이 김 후보자는 평소 부조리한 사법행정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고민해왔기 때문에 대법원장에 임명되면 비정상적인 법원행정처의 정상화 작업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법조인들은 현 정부의 가장 큰 국정과제인 검찰개혁 이상으로 사법개혁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법관이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 곧 국민의 헌법적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때 ‘이용훈 코트’가 실패한 사법행정 개혁을 ‘김명수 코트’가 과연 제대로 실현해 낼지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다.

- 고성표 월간중앙 기자 muzes@joongang.co.kr

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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