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미루의 어드벤처(5)] 게르의 평화와 낙타의 눈물 

불타는 절벽, 사막의 주라기공원을 가다 

김미루 사진작가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한 지난한 여정…몽골인의 순결함과 장엄한 자연의 중심에서 소요(逍遙)

한 게르와 한 게르의 사이가 넓어야만 하나의 독자적 생활권이 확보되는 듯하다. 가축의 먹이나 모든 것이 그러한 독자적 영역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영역에는 진실로 문명이나 국가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이들은 아직도 고조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고독과 평화가 공존하는 것이다.


▎고비사막의 바얀작 풍경. 내가 찍은 위치와 기후조건이 ‘불타는 절벽’의 느낌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비사막에서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행선지는 바얀작(Bayanzag)이라는 곳인데 보통은 ‘불타는 절벽(Flaming Cliffs)’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석양이 뉘엿뉘엿할 때 칼날 같이 깎아지른 사암절벽이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1920년대 이 지역을 방문한 고생물학자 로이 차프만 앤드루(Roy Chapman Andrew)가 그렇게 명명한 데서 유래한다. 이 지역에서 공룡의 알이 처음 발견됐다. 백악기 후기 공룡인 벨로시랩터(Velociraptor: 재빨리 포획한다는 뜻. 스필버그 영화에 등장해 유명해졌다)의 화석과 유테리안 포유동물(eutherian mammals)의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곳은 영화 <쥬라기공원(Jurassic Park, 1993)>의 모든 상상력의 원천인 셈이다. 나의 운전수는 절벽의 끝자락에 있는 일몰관망대에서 정차해 내가 그 석양의 장관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해줬는데, 그 관망대에서는 내가 찍고자 하는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래 대신 회색 자갈이 깔려 있는 평평한 사막지대 한가운데 위치한 고립된 한 텐트로 갔다. 인구가 너무 적어 한 텐트와 한 텐트 사이는 서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군집을 하되 서로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며 평화를 유지한다고 룻소가 <에밀> 속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하여튼 독립적인 삶을 사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토록 황량한 사막에 게르 하나가 호젓이 서 있을 뿐이다. 독립이라고 한다면 이런 삶을 견딜 수 있어야 독립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게르(ger)’라고 알려진 몽골 유목민의 주거형태는 크고 둥근 포터블 텐트인데, 그것은 나무 널빤지와 다이아몬드형 격자식의 줄이고 늘일 수 있는 벽 구조물, 단열재 펠트, 타르를 칠한 방수범포, 그리고 양탄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가 게르 가까이 주차하자, 아주 튼실하게 생긴 중년의 여인이 나와서 우리를 반겨준다. 그 여인은 거기에 홀로 열네 살 먹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아들은 특이한 종류의 학습장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 아들은 엄마의 일들을 잘 도와주었다. 염소와 낙타를 지키는 따위의 일을 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남편이 있는지 없는지, 그 외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언어로 소통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도무지 구체적인 개념적 지식이 성립하기 어렵다. 난 단지 때때로 미소를 지어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 홀로 그들의 삶의 모습을 기록했다.

태양광 발전 패널이 설치된 게르


▎게르 내부의 모습. 장롱 앞, 낮은 책상이 놓여 있는 곳이 식사 장소다.
저녁은 아주 단순한 밀가루 국수탕이었는데, 마른 육포고기를 두드려 거의 가루 모양이 된 건더기가 들어갔고, 간은 소금으로만 했다. 후추 같은 양념이 없으니까 고기냄새를 상쇄시키는 그 무엇이 없었다. 나는 그냥 덤덤하게 먹고 있는데, 운전사는 그 음식이 너무도 맛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후룩후룩 아주 큰소리를 내며 입맛을 쩍쩍 다셨다.

저녁을 먹고 난 후 모두가 작은 텔레비전 주변으로 둥그렇게 앉았다. 아주 전형적인 몽골 게르에는 중국에서 만든 태양광 발전 패널이 다 부속돼 있는데, 그 판넬로 하나의 미니 텔레비전과 하나의 에너지 절약형 형광등과 하나의 휴대폰 충전기의 전기가 공급된다. 텔레비전은 보통 입구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는데, 정가운데에는 아주 컬러풀한 나무장이 있게 마련이고, 그 곁으로 텔레비전이 놓인다. 장롱 위에는 거울과 함께 가족사진들이 정겨운 모습으로 진열돼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타 중요한 기념품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정경은 한국의 시골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게르 정중앙의 천장 모습. 기하학적인 모습이 마치 실내의 기운이 한 곳으로 집중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진열된 곳 앞에는 낮은 상이 놓여 있다. 그 상은 그곳이 밥 먹는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전체 둥근 방의 한가운데는 난로가 놓여 있는데, 그것은 조리를 위해 사용되며 또 난방용으로도 쓰인다. 연기는 천정의 한가운데 나 있는 구멍을 관통하는 쇠파이프를 통해 곧바로 대기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천장의 채광창은 낮에는 빛을 방 내부로 들이기 위하여 열려 있고, 비가 올 때는 그 창은 닫히고 방수커버로 잘 덮인다. 중앙의 양쪽 가에는 침대가 하나씩 놓여 있는데 나무로 만든 것도 있고, 철물로 만든 것도 있다. 그 위에는 두꺼운 펠트가 겹겹이 놓여있고 또 매트리스로 쓰이는 담요가 여러 장 깔려 있다.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몽골의 게르는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안에 들어와보면 놀랍게도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구조적 디자인이 내가 다른 사막에서 보았던 어떠한 종류의 주거형태보다도 정교하고 순결했다. 이 진화된 형태의 게르는 고비사막 기후의 악조건에는 매우 적합한 것 같다. 고비사막은 겨울에는 보통 섭씨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며 여름에는 40도 이상의 고열을 뿜어댄다.

내가 유숙한 이 특정한 게르 안에서 내 눈길을 가장 끈 것은 이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였다. 아주 연약하게 보이는 작은 고양이가 매우 짧은 목줄에 묶여 있는데, 어린 아들이 고양이를 가구의 여러 곳에 쉬지 않고 묶었다 풀었다 하면서 전전하는 것이다. 고양이를 옮길 때마다 그 아이는 고양이를 거칠고 무관심하게 다룬다. 그런데 고양이는 뼈가 없는 인형처럼 흐느적거렸다.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고양이는 그 아들이 자기를 그렇게 거칠게 다루는 그러한 존재양식에 익숙한 듯했다. 최소한 그 고양이는 먹이를 공급받고 있으며 또 겨울에는 따스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다. 나는 날씨만 조금 따뜻해지면 그 고양이가 석방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나는 고양이에 관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녁식사로 부른 배를 소화시키기 위해 빈둥거린 후에, 바닥 위에 담요를 깔아 잠자리를 만들었다. 운전사가 그의 잠자리를 내 옆에 만들겠다는 시늉을 하면서 조크를 걸어왔다. 나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내 얼굴표정이 무뚝뚝한 성낸 모습을 하는 동안에도 그 운전사는 계속 웃어댔다. 그러더니 방의 저쪽으로 가버렸다. 아마도 조크의 수준이 무엇인가 엇갈리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일어난 아침, 그 주인여자는 이미 밖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내 옆에 뜨거운 물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나는 얼른 한 컵의 인스턴트 커피를 만들어 마셨다. 그리고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뛰어나갔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맹렬하게 불어대는데 겨우 실눈만 뜰 수 있었다. 휘몰아치는 모래가 얼굴표면을 불쾌하게 따끔따끔 때린다. 나는 카메라를 잘 싸서 몸에 간직하고 낙타 떼가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 여인은 머리와 입을 천으로 휘감은 상태에서도, 암낙타의 젖을 놀라운 솜씨로 짜내고 있었다. 그토록 열악한 기후조건에서 말이다. 아마도 그 비결의 하나는 그녀의 강력한 목소리에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손으로 낙타의 젖을 살살 달래면서 짜내는 동안 그녀의 낙타에게 아주 특별한 발성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낙타의 젖은 그냥 무턱대고 짠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낙타들이 인간의 음악에 특별히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짜 쌍봉의 박트리안 낙타가 나팔 모양의 축음기 앞에서 인간의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옛 흑백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사진은 <뉴욕타임스> 신문기사를 위해 1909년에 찍힌 것이다. 그 기사는 ‘동물원의 동물에게 미치는 음악의 효과에 관하여(Effects of Music Upon Animals of the Zoo)’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는데, 브롱크스 동물원의 낙타들은 어김없이 음악에 반응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의 코를 그래모폰의 나팔에 파묻으며 음악을 감상한다는 것을 아주 유머러스하게 기술하고 있다. 뱀은 음악에 무감각하며, 늑대는 놀란다는 것이다.

한 미숙한 남성의 여성 누드에 대한 반응


▎몽골 여인이 세 마리 낙타로부터 짜낸 젖을 통에 담아 들고 있다.
우리가 같이 게르 안으로 돌아왔을 때, 그 여인은 큰 솥에 차를 달이기 시작했다. 차는 본시 유목민의 삶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여타 모든 사막에서도 차는 공통주제였다. 중국 역사에서 보면 차의 수출금지로 북방민족을 다스렸다고 하니, 차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몽골리안 티는 다른 사막의 차와는 좀 달이는 방식이 독특했다. 지금도 여전히 중국에서 수입하는 저급한 찻잎으로 달이는데 그 차를 우려낸 물에 밀크를 더 한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 맛의 성분이 설탕 대신 소금을 쓴다는 것이다. 첨가하는 밀크는 다양한 종류가 사용될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의 경우는 아까 방금 짜낸 낙타의 젖이 사용됐다. 낙타밀크를 화로 위에 끓고 있는 찻물 위에 첨가한 후 계속 큰 국자로 휘저으며 거품을 낸다. 섞여진 찻물을 국자로 높게 들어올리며 다시 쏟아 붓곤 하는데, 이러한 반복적 과정을 거치면서 밀크티는 거품과 함께 비단결의 미끈미끈한 질감의 액체가 된다.

이 액체는 다시 큰 보온병 속으로 저장되면서 하루 종일 유목민의 목을 적신다. 사막의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영양소와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첫 한입을 마셨을 때, 그 소금기의 감각이 좀 오묘했다. 그러나 조금 지나니까 그 맛은 매우 부드러워졌고 또 풍요로운 오미(五味)가 다 함축돼 있었다. 나는 곧 이 소금계열의 차 맛에 익숙해졌다. 그 후로 나는 남은 8일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종일 차를 마셨다.

이날 내가 성취하고자 했던 것은 아직도 풍성하고 긴 아름다운 겨울털을 간직하고 있는 훌륭한 박트리안 낙타들과 내 나체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정말 큰 행운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 겨울털이 벗겨지기 시작하면 낙타는 듬성듬성 털이 빠지고 아주 꼴불견으로 돼버린다. 풍요로운 털과 신체 모양을 간직한 쌍봉낙타의 모습을 잡기 위해서는, 먼저 여인에게 설명을 해야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티제이가 몽골말로 써준 쪽지를 보여주고, 그리고 내 작품이 실린 카탈로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여인은 다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항상 웃는 얼굴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잘 협조해주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옆에 있던 운전사도 덩달아 웃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웃음은 질이 달랐다. 생각 없는, 한 미숙한 남성의 여성 누드에 대한 반응, 어처구니없어 경멸의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그런 불순한 반응은 항상 기분이 나쁘다. 나는 운전사의 어리석은 미소와 평어를 무시해야만 했다. 분명 내 몸매가 아름답다니 뭐니 떠드는 것 같다. 구역질이 날 뿐이었지만 그가 악의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느 선까지는 관용할 수밖에 없었다.

낙타들은 하루에 해야 할 일들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인이 젖짜기를 끝낸 낙타들은 아침에 목초를 뜯어먹기 위해 푸른 관목지대로 간다. 그리고 오후에는 물을 먹기 위해 샘으로 간다. 지역사람들이 샘을 보호하기 위해 작은 콘크리트 방을 지어놓았다. 우리가 차를 몰고 샘으로 갔을 때 이미 낙타들은 그곳에서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인은 빌딩 안으로 들어가서 자동차 타이어를 펴서 만든 줄이 묶인 버켓을 샘물 바닥까지 내려 물을 길어 올린다. 그리고 벽에 나 있는 구멍으로 그 샘물을 쏟는다. 그 구멍은 밖으로 길다랗게 생긴 물구유로 연결되어 있다. 낙타들이 물을 충분히 먹을 때까지 이 작업은 계속된다.

작품사진을 만들기에 최적의 기회를 만나다


▎1. 차를 만드는 몽골 여인. 중국에서 수입하는 저급한 찻잎으로 달이는데 그 차를 우려낸 물에 낙타에서 짜낸 밀크를 더한다. / 2. 우물에서 물을 긷는 여인. 샘의 깊이는 10m는 족히 된다. 앞에 뚫린 구멍에 물을 부으면 물구유로 흘러 든다.
낙타들은 물을 충분히 들이킨 후에, 근처의 아주 평평하고 잿빛의 무미건조한 광경의 한가운데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식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마치 우주인이 달 표면을 걷고 있는 것처럼 매우 특이한 느낌을 주었다. 그 순간 나는 이때다! 나의 작품사진을 만들기에 최적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개처럼 삼발이를 펴고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리고 완벽한 구도를 잡아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어떻게 셔터버튼을 누르는지를 알려줬다. 그것은 누구에게든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말리의 뚜아렉 사람들도 나를 위해 셔터를 곧잘 눌러주곤 했다. 평범한 지역사람들, 전혀 사진기를 모르는 사람조차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정말 환상적인 좋은 작품사진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나는 재빨리 옷을 벗고 낙타들에게 접근했다.

나는 여러 포즈를 취하고 사진이 찍히는 것을 기대했다. 낙타들은 곧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들은 옷을 입지 않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인간동물’이 자기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편치 않게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카메라로 가서 사진 찍힌 상황을 점검했다. 아뿔사! 헐떡거리며 뒤져보니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 그 여인은 다른 버튼만 계속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정교하게, 민활하게 낙타의 젖꼭지를 주무르는 그녀의 손길이었건만, 카메라 셔터는 그녀의 포르테(forte, 장점)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상황은 사라지고 없었다. 예술은 반복되지 않는다.

낙타는 왜 눈물을 흘리나?


▎1. 나는 여러 포즈를 취하고 사진이 찍히는 것을 기대했으나 낙타들은 금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 2. 눈물을 흘리는 낙타. 낙타의 눈물은 슬픔 때문이 아니라 모래 바람 때문이었다.
낙타들을 주시하고 있는 동안 내가 발견한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들은 강한 바람이 휘몰아칠 때 잘 운다는 것이다. 눈물은 모래로 찬 눈을 씻어내는 효과가 있다. 이 사실은 나에게 <우는 낙타 이야기(The Story of the Weeping Camel)>라는 다큐드라마를 연상시켰다. 나는 사실 이 다큐 때문에 몽골리아를 오게 됐던 것이다.

이 영화는 낙타 떼를 기르는 한 몽골 유목민 가족의 애틋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봄철에 한 낙타가 새끼를 낳았는데, 이틀 동안이나 너무 고생스럽게 진통을 겪은 터라 산모낙타가 신생아 낙타를 보기도 싫어하는 것이다. 젖을 주는 것도 거부하고 어미의 보호본능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신생아는 아주 고품격으로 평가되는 희귀한 흰 낙타였다. 산모 낙타는 첫 출산이었기 때문에 전혀 어미로서의 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이 유목민 가족은 어미와 새끼의 결합을 위해 안간힘을 쓴다. 우선 이 가족은 전통적인 굿을 한다. 이 영화는 몽골의 굿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복잡한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컬러풀하고 복잡한 천지신명께 드리는 제사에도 불구하고 낙타 모자의 정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가족이 생각해낸 것이 몽골 민속음악을 켜는 토속적 바이올리니스트를 초빙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두 아들이 어렵게 사막을 지나서 시장 한복판에 오게 된다. 거기서 바이올리니스트를 발견하고 그 사정을 호소한다. 실제로 초빙한 사람은 몽골 특유의 악기 모린쿠우르(morin khuur: 우리나라 해금이나 중국의 얼후와 같은 계열의 악기. 말총으로 만든 두 줄의 스트링이 있다. 울림통이 해금보다 크다)의 달인이었다. 초빙되어 온 모린쿠우르의 달인은 낙타의 육봉에 악기를 놓고 제식을 하고 엄마낙타와 아기낙타의 상징적 정감의 연결을 선포하고 난 후, 모린쿠우르를 들고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후스(hoos)’라는 몽골 특유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울려퍼질 때, 엄마낙타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한다. 곧 모자의 정이 회복되고 어미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기 시작한다. 어미의 눈에서 실제로 눈물이 흐르는 장면은 실로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영화관에서 눈물을 안 흘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낙타를 본 후에 나는 그 엄마낙타의 눈물은 음악 때문이 아니라 바람 때문이었음을 알게 됐다.

다음날 아침, 난 짐을 정리하고 그 여인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만 했다. 그 여인과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고, 그녀에게 몽골화폐 투그리크(Tugrik) 2만원 권 한 장을 건네줬다. 그것은 당시 환율로 미화 15달러 정도에 해당된다. 나는 순간 그녀가 아주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보았다. 그 순박한 모습을 보았을 때, 상업적 교환가치를 뛰어넘는 인간의 순결한 모습이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사하라의 인간들과는 달랐다. 동방인의 정서는 역시 깊이가 있었다. 차로 들어간 후, 나는 비행기에서 취한 비행기잡지를 펼쳐 운전사에게 보여줬다. 금빛의 아름다운 모래언덕이 중첩되어 깔리는 대 사막 뒤로 짙은 색깔의 바위산이 병풍을 치고 있는 그 장엄한 사진 컷을 가리키며 바로 이곳을 가자고 했다. 그곳은 콩고린 엘스(Khongoryn Els:Hongorin Els라고도 표기한다)라는 곳인데 자그마치 모래언덕이 965㎢에 걸쳐 펼쳐져 있다.

몽골사람들의 민간신앙과 융합된 티베트불교


▎오부 성황당의 모습. 몽골과 우리 민족의 성황당 문화가 오버랩돼 기묘한 감동을 준다.
모래언덕은 바람 때문에 매우 날카로운 에지(edge)로 끝나는 물결패턴을 과시하고 있다. 강한 바람이 언덕 위로 스치게 되면, 그 에지가 끊임없이 무너지면서 모래입자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낸다. 귀신이 강림하는 듯 오싹하는 오묘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이 지역은 ‘노래하는 모래언덕(Singing Sands)’이라고 명명돼 있다. 한 프랑스 탐색팀이 이 아발란치(avalanche, 사태) 현상을 정밀하게 분석해 보고했다. 에지가 무너질 때 모래가 판을 형성하면서 그 안에 있는 모래들이 공명하는 것이다. 이 공명은 사막의 열기와도 관련된다. 그 열기가 모래입자들의 부딪침을 조화롭고 리드믹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모래사막 언덕들의 높이는 보통 80m 정도이고 제일 높은 곳은 300m에까지 이른다. 나는 몽골에 여행하기로 결심하면서 이 장쾌한 자연의 경관을 담고 싶었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일주일을 온전히 보내고자 한 곳이었으며 나는 나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이런 곳으로의 여행이 사진 한 장을 보여줌으로써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운전사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을 4시간 동안이나 묵묵히 달렸다. 나는 보이는 진기한 광경에 점점 흥분도 됐지만, 도무지 방향감각도 없고 표지도 일체 없고 언어의 소통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시공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은 공포스럽기도 했다.

콩고린 엘스로 가는 길에, 나는 매우 인상적인 돌무더기를 하나 발견했다. 그리고 그 돌무더기는 산악지대의 뿔이 큰 염소 아이벡스(ibex)의 해골과 뿔들로 장식이 돼 있었다. 그 꼭대기 한가운데 나무 솟대가 하나 꼽혀 있는데 그것은 보통 푸른 천으로 감싸져 있다. 나는 나중에야 이것이 오부(Ovoo: 중국인들은 ‘아오빠오敖包’라고 부른다)라고 부르는 몽골 고유의 샤머니즘적 사당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행운을 빈다. 가운데 솟대를 감싼 푸른 천은 하늘의 신인 텡게르(Tengger: 텡그리Tengri라고도 한다)를 상징하는데, 몽골의 민간신앙에서 최고의 신이다. 텡그리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단군(Tangun)과 같은 말인 것 같다. 그러니까 단군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뜻이 될 것이다. 이 오부의 제식 때 쓰는 푸른 실크 스카프는 카다그(Khadag)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티베트불교에서도 똑같이 사용된다.

오부는 불교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고, 몽골의 토착적 고래신앙에서 유래된 독창적인 것이라고 본다. 사실 그러한 신앙에 반드시 ‘샤머니즘’이라는 서구식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다. 모든 고등종교의 디프스트럭처인 것이다. 오부야말로 우리의 고래신앙인 성황당(서낭당)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고조선 시대로부터 공존한 문화의 동질적 맥을 연상케 한다. 오부와 서낭당은 선후를 논할 수 없다. 같은 돌무더기고 주변을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돈다든가, 돌을 던진다든가, 음식을 바친다든가 술을 붓는다든가 하는 모든 습속이 동일하다.

몇 개의 작은 계곡을 통과한 후에 우리는 산악지대 언덕배기 끝자락에 포근하게 둥지를 튼 하나의 외딴 게르에 도착했다. 우아~! 그곳에 도착해보니, 광대한 광야를 가로지르는 콩고린 엘스의 장쾌한 전체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게는 운전사의 행동양식이 하나의 불가사의의 신비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길도 없고 표지판도 없는 광막한 모래벌판을 4시간을 질주하여 내가 지시한 사진경관이 정확히 펼쳐지고 있는 특정한 하나의 게르 앞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는 것 자체가 어떠한 육감을 활용한 것인지 나는 헤아릴 길이 없었다. 하여튼 그 운전사는 이 캠프의 소유자를 알고 있는 듯했다.

오후 늦게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자그마한 한 노인이 조용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차를 대접했고 또 마른 육포 조각을 집어넣은 항시 먹는 누들수프도 대접해줬다. 그는 60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도무지 사막사람들의 나이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고철상 선생의 말대로 대머리가 없었고 또 흰머리가 없었다. 사막의 기후가 거친 피부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의 진짜 나이보다도 더 늙은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머리는 새까맣기 때문에 또 진짜 노인 티도 나지 않는다.

그가 아버지처럼 나를 잘 대해줄 수 있을까?


▎콩고린 엘스의 주인과 낙타. 몽골 평원의 대자연과 인간, 동물이 어우러진 감동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나는 한국말을 몽골말로 번역하는 작은 회화집 하나를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가지고 회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 지역사람들은 한글로 표기된 몽골어 발음을 내가 아무리 발성해내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시도하다가 좌절 끝에 포기하고 만다. 더구나 질문과 대답이 모두 복잡해지면 무엇을 구성해낸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제일 좋은 방식은 그냥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빈둥거렸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나는 내가 무엇을 기다려야만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처음에 우리를 맞이해준 노인은 이 집의 주인이 아니었다. 내가 모래언덕의 장엄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동안, 양과 염소의 큰 떼 한가운데서 낙타와 함께 걷고 있는 매우 우락부락하게 생긴 건장한 한 중년남자를 목도할 수 있었다.

그가 집 가까이 오자 그의 우리에다가 양·염소 떼를 가두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다가올 때 나는 비로소 태양에 그슬린 얼굴에 푹 파인 주름들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의 얼룩진 손은 소가죽보다 더 두꺼웠고, 그의 상용복인 데일은 매우 두꺼운 군용텐트와 같은 기지로 만들어졌는데 이제는 거의 퇴색돼 색깔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원래 붉은 기가 도는 브라운 컬러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컬러가 사라지고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모든 것이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그슬리게 되면 대지의 색깔로 다 변해간다.

그가 게르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그 노인은 근처에 사는 사람 같은데 근처라는 곳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한 게르와 한 게르의 사이가 넓어야만 하나의 독자적 생활권이 확보되는 것 같다. 가축의 먹이나 모든 것이 그러한 독자적 영역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영역에는 진실로 문명이나 국가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이들은 아직도 고조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고독과 평화가 공존하는 것이다.

자아~, 이제 결국 3명만 남게 됐다. 중년남자 주인과 나와 운전사! 그런데 운전사는 일어나더니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나를 이 외딴 황야에 팽개쳐놓고 도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외딴 벌판에, 아무런 외침의 외마디도 들리지 않는 이 게르에 홀로 중년남자와 지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본시 패밀리 스테이를 요구했었다. 게르에 혼자 살고 있는 남성과 스테이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이 사람은 정말 이 게르에 혼자 살고 있는가? 나중에 다른 식구가 올까? 안 오면 어쩌지! 부정적인 생각들이 날 공포감에 휩싸이게 했다. 진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내 불안감을 감지했는지 운전사가 해준 한마디, 크게 웃으며 한 말 중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단 한마디의 몽골말은 ‘아-우(aav)’라는 단어였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뜻이었다.

추측컨대 그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은 그 유목민이 나를 아버지처럼 잘 대해줄 것이라는 위안의 말이었던 듯하다. 더 이상의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 운전사는 그곳에 나를 남겨둔 채 차를 몰고 떠나갔다. 그 순간 내가 바랄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은 운전사가 약속한 대로 일주일 후에 돌아와서 내가 안전하게 건강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그 묵시록적인 대망의 스토리였다.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710호 (2017.09.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