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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1)] 400년 전 태평양 건넌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모험 

사무라이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최치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7년 동안 4만1100㎞ 대장정 거쳐 쿠바에 도착…250년 뒤 조국의 개화 위한 ‘근대의 씨앗’ 역할

일본이 되살아난다. 잃어버린 20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고 있다. 부활하는 일본이 화제다. 소니를 비롯한 일본 전통 대기업의 재기도 눈에 띈다. 그 바탕은 사무라이 정신이다. 집요하고 거칠 것 없는 승부사로서의 사무라이. 아직 세계 제조업의 부품과 소재·장비 등에서 타의 추종을 절대 불허하는 일본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400년 전, 조선이 아직 몽매에 젖어 있을 때 그들은 바다로 나아갔다. 태평양을 건넜고, 로마의 교황을 알현했으며, 유학생을 보냈다. 바다에 실려온 바람으로부터 그들은 세상 변화를 읽었고, 세상의 광대함을 깨달았다. 일본은 그로부터 힘을 얻어 개화의 꽃을 피웠다.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넓음과 개방의 효용을 깨달아 혁신으로 무장할 때 그는 살아남는다. 그렇지 못하고 좁은 내부로 시선을 돌릴 때 자기부정과 암울한 내투(內鬪)에 봉착한다. 일본이 가로질러 세계로 나아가려 했던 일본의 개방적인 근대사를 가로질러 가보자.


▎세계적 휴양지로 꼽히는 카리브해에 위치한 쿠바의 아바나 항구의 스페인 시대 당시 해안진지 엘 모로.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명물 말레콘(‘제방’의 스페인어)이 있다. 엔트라다 운하(Canal de Entrada) 건너편의 이런 말레콘 덕에 만들어진 공원에 새벽 햇살을 향한 채로 한 남자가 서 있다. 그는 청동으로 만들어져 먼 바다의 항로를 주시하고 있다. 바닥에는 ‘로마까지 8700㎞’라고 쓰여 있다.

인생은 기억이고 역사는 기록이다. 필멸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때로 불멸을 꿈꾸며 시간의 틈을 만들어 기억과 역사를 적는다. 혁명으로 박제화해 영락하는 이 도회의 버려진 담벼락에도 어김없이 혁명 구호를 적어대는 쿠바인들은 공원에 세계적 명사들의 동상이나 흉상을 세웠다.

공원 쪽 해 뜨는 방향으로 걷다 보면 인도의 시인 타고르,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20세기 초 페루의 사상가 호세 마리아테기의 흉상이 차례로 이어진다. 주변의 이런 흉상들과는 다른 동상이 이어 눈에 띈다. 우뚝한 높이에 울타리로 둘러져 있다.

커피색 현지인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무라이의 동상이다. 하카마(袴)에 진바오리(陣羽織)를 걸쳐 여느 초상화에 등장하는 영락없는 사무라이 복장이다. 허리띠에 쑤셔 넣은 일본도를 왼손으로 잡고 부채를 쥔 오른손은 동트는 쪽 로마를 가리키고 있다. 새벽 하늘을 배경으로 부채와 칼이 대각선의 긴 선으로 이어져 있다. 동상의 이면 바닥에는 또 ‘센다이(仙台)까지 1만1850㎞’ 표시가 새겨져 있다. 대체 누구일까?

이 사무라이는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 쿠바까지 왔을까? 청동 설명판을 읽으니 호기심이 동한다.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가신으로 주군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 1614년에 아바나까지 온 사무라이가 있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뜻밖의 장소에서 충격적인 조우를 했다.

마사무네의 가신이라면 조선에도 왔을 개연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우리의 적장으로 현해탄도 넘었으리라. 이리저리 걸으며 일본의 무장(武將)이 쿠바까지 오는 동안 당시 조선은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흥분을 달래본다. 세상에는 이야기가 널려 있다. 조선에 왔던 사무라이가 아바나까지 오다니 그 시절 멀리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한 만남이 여행이고 인생이다.

그는 1614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떠나 멕시코만의 해류를 타고 아바나로 들어와 한 달여를 머물다 대서양으로 떠났다고 적혀 있다. 이 사무라이의 이름은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다. 2005년 동상을 세운 센다이육영학원 히데미쓰(秀光)중·고등학교의 설명에 따르면 학원창립 100년을 맞아 국제화가 이슈인 21세기 일본과 세계의 장래를 책임질 젊은이의 육성, 나아가 국제사회 이해교육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동판 설명서를 좀 더 읽어보자. “쓰네나가는 센다이의 개부자(開府者), 번주 다테 마사무네의 명령으로 대항해시대에 일본이 유럽에 파견한 외교사절단 대사로 대서양을 건너는 도상에 1614년 일본인으로 처음 쿠바의 땅을 밟았다.” 해외를 향한 마사무네의 야심찬 기개와 미지의 세계에 도전한 쓰네나가의 용기를 영원한 귀감이라고 치켜세우고 그 꿈과 로망을 현창(顯彰)하는 것은 개부 400주년을 맞는 센다이 인의 자랑이라고 적고 있다.

바다를 벗하거나 싸우며 살았던 그들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는 1492년 콜럼버스의 지리상 발견이 촉발한 시대적 흐름이다. 그가 ‘인도’라고 믿고 도착한 땅이 바하마제도이며 그의 네 번에 걸친 항해는 쿠바 섬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중국은 그에 앞서 15세기 초 명나라의 정화함대를 7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반도·아프리카까지 보냈다. 이런 노력에도 신대륙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뒤 해금정책을 펴면서 해양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유럽의 해양민족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교역을 하다가 강력하게 등장한 오스만 제국을 피해 해로로 대서양을 건너고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로의 대항해 시대를 연다.

황금의 땅 ‘엘 도라도’를 찾아 정복, 살인의 살벌한 전쟁을 벌인다. 원주민들이 노예로 전락하거나 독한 병균으로 죽어나가자 아프리카에서 ‘검은 다이아몬드’로 불리던 흑인 노예들이 대거 유입된다. 한바탕 인종 청소를 겪은 쿠바는 에스파니아 식민지 중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변한다. 지리상 발견으로 유럽인들의 지리상 발견으로 세계의 바다를 휘젓고 다닌 지 한 세기가 다 돼 이 사무라이는 일본의 동북지방 센다이를 출항해 석 달 만에 쿠바의 아바나에 도착했다. 센다이 해안에 밀려오던 거센 태평양의 파도와는 다르게 하루에도 12번씩 변하는 카리브의 물빛과 태양빛 아래 이국에서 이들은 분명 새로운 꿈을 꿨으리라.

이미 대서양과 카리브해를 휘젓고 다니며 세계를 일주한 유럽의 해양민족에 비하면 1세기나 늦게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에스파니아와 로마까지 간 사실이 부각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떨까? 대항해시대는 강국들의 각축전이 전 지구적으로 펼쳐지던 시대였다. 따라서 당시의 항해는 일본도 자체적으로 선박을 건조하고 자국인을 승선시켜 당당히 대항해시대의 일원이 됐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낭만적 시선을 거두고 우리의 내부로 가보자. 이 사무라이가 태평양을 건너던 1613년은 조선으로 치면 광해군 치세다. 1611년은 전쟁으로 불탄 경복궁 대신 창덕궁이 지어져 정궁으로 자리 잡는 시기다. 국란의 상처를 추스르던 때다.

우리 해양 역사 기록을 찾아보자. 조선통신사를 제외하면 조선의 어부가 중국·일본·베트남·필리핀에 표류하고 돌아온 이야기는 있어도 조직적으로 대외 협력 차원에서 바다를 건넜다는 이야기는 없다. 바다는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 조선은 표류했지만 일본은 태평양을 건넜다. 조선의 배 어느 한 척도 태평양 바다로 나갔다는 기록을 찾을 길이 없다. 조선은 내부의 문제 해결에만 모든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일본의 중앙권력이 아닌 일개 번의 영주가 서양식 범선을 건조하고 일본인 포함 180여 명을 승선시켜 태평양에 진출했다. 시선과 호기심·모험심, 더 나아가 가슴에 품은 의지의 차이가 아니고 무엇이랴. 한 일본 사무라이를 조명하면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의 틀에 갇혀 한 발짝도 넓게 보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의 사고방식 말이다. 적어도 제대로 된 국제적 소통을 하고 않았느냐를 진지하게 반성해 볼 시점이다. 성찰하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중국은 담을 쌓고 음흉한 모략을 키워왔지만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섬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바다를 무대로 풍파와 벗하거나 싸우며 살았다. 노회한 모략가와 칼 든 사무라이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존해야 할까.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이 충돌하는 한반도의 선택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일본은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왜구(倭寇)라는 이름의 총본산지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넘나들었다. 선박의 보유량으로 따지는 현재의 해운력에서 일본은 그리스·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해운국가다.

노부나가가 되고 싶었던 애꾸눈 장수


▎1. 세비아 근처의 코리아 델 리오에는 ‘하폰(Japon)’ 등을 성(姓)으로 하는 사람 약 7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사진은 유럽에서 셋째로 큰 세비아 성당 야경. / 2. 쿠바의 아바나 공원에 있는 하세쿠라 쓰네나가 동상.
한국도 한때 세계 5위까지 올랐다가 2017년 현재 미국 다음의 7위에 자리 잡았다. 해운 분야에서 일본은 소리 없이 강하다. 그리스라는 거품과 중국이라는 거대 공장 국가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세계 1위나 마찬가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는 해군력의 우위에서 비롯했다. 굳이 분류하자면 일본인은 해양민족이다.

지중해 해양민족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보면 일본의 왜구를 떠올리게 한다. 해양민족은 노를 저어 세상 끝에 다다르려 했다. 섬이라는 지정학적 특성에 중국과 조선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동아시아에서는 특이한 문명권에 속한다. 사무엘 헌팅턴이 지적했듯이 일본은 독자 문명, 어쩌면 유럽문명에 가까울 수 있다.

한국이 처음으로 태평양을 건넌 때는 1952년 한국 화물선 고려호가 처음이다. 박옥규 제독이 선장이었다. 그는 1949년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전함 백두산 호를 미국 뉴욕에서 인수해 진해항까지 몰고 왔다. 일본은 1613년 자체 제작한 범선 갈레온을 몰고 태평양을 건넜다. 메이지 유신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스승으로 알려진 가쓰 가이슈(勝海舟)는 1860년 증기선 칸닌마루(咸臨丸)호를 타고 150여 일에 걸쳐 태평양을 왕복했다. 증기선으로는 일본 최초다. 일본의 근대는 바다를 넘어간 사내들의 꿈으로 열렸다.

일본의 근대 개화는 운 좋게 이뤄지지 않았다. 자신보다 뛰어났던 문명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 스스로를 낮추는 학습으로 개화를 이뤄갔다. 우리에게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틈만 나면 바다를 건너왔다. 격렬한 전쟁을 치른 두 나라의 운명은 서서히 바뀐다. 우리는 안으로 움츠러들었고 그들은 먼바다로 눈을 돌렸다.

다테 마사무네는 천하제패의 야망을 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버금가는 실력의 전국시대 무장이다. 이에야스 사후에는 최대 실세로 꼽혔지만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의 신하가 된다. 영지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해외 무역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막부가 스페인, 멕시코와의 협상에서 부진하자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의 권고를 받아 움직인다. 마사무네는 곧 오슈왕(奧州王)의 자격으로 사절을 파견한다. 센다이를 멕시코와 무역 거점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조선이 일본에 왜 뒤졌을까. 이유는 한둘이 아니지만 먼저 꼽으라면 유럽문화를 누가 먼저 수용했느냐는 점이다. 일본은 유럽과의 교류로 인해 생긴 시대를 ‘남만문화(南蠻文化)의 시대’라고 한다. 유럽과의 접촉 시대는 철포의 전래(1543년)와 에스파니아 선교사 사비에르의 도래(1549)에서부터 쇄국(포루투갈인 도래금지 1639)까지 이어진다.

그중 일본인이 유럽에 적극 진출한 덴쇼사절단[(天正遣使節), 1582]부터 이에야스의 금교령까지를 일컫는다. 비록 구체적인 성과는 적었으나 견구사절단(遣歐使節團)은 남만 문화 시기의 적극적 문화접촉에 방점을 찍는 사건의 하나이다. 유럽의 중심을 다녀온 자신감은 쇄국정책을 펴는 와중에도 불씨로 남아 있었다. 이 사절단의 기획 역할을 맡은 사람이 마사무네다.

그가 사절단을 파견하던 시점인 1613년은 아직 전국이 완전 통일되기 전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에야스의 동군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마사무네는 현실적인 정치적 감각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당대 최고의 실력자와는 늘 같은 편이었다. 시대가 바뀌자 그는 이에야스의 동군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를 거치며 비중 있는 전국 무장이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이와데야마(岩出山)성을 출발해 나고야(那古野)에서 출병 준비를 하다가 1593년 조선에 출병한다. 1593년 4월 부산에 상륙, 이어서 6월에 진주성을 공략한 뒤 9월에 나고야로 돌아왔다. 조선 출병 시 여타 군대와는 다른 화려한 군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들은 심지어 ‘멋쟁이’를 의미하는 일본어 다테모노(伊達者)라는 말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

“마음속 달을 앞세우고, 속세의 어둠을 밝혀가리라”

다테 마사무네의 군이 출병할 때 화려한 행군을 보려고 인파가 운집했다. 마사무네는 애꾸눈 이었다. 따라서 그런 콤플렉스 때문에 화려함을 즐겼다는 설도 있다. 그의 캐릭터는 한자로 ‘독안룡(獨眼龍) 장수’로 불린다.

아울러 센다이번(仙台蕃)의 개창자로서 이곳을 대표하는 동북의 왕으로 현재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짧은 조선 출병 중에 진주성 2차 전투에 참여했고 남해안 왜성 축조를 적극적으로 하다가 본국으로 돌아왔다. 다테의 군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부터 네 그루의 와룡매(臥龍梅)를 가지고와 자신의 영지에 식재한다. 와룡매의 자목 한 그루는 한일우호의 상징으로 1999년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심겼다.

다테 마사무네의 중요한 치적은 센다이번의 개부(開府)와 게이초견구사절단(慶長遣歐使節團)의 파견이다. 스스로 운영하는 지역에서 집요하게 구축한 세력, 개인적으로 품은 자질로부터 우러나오는 리더십과 용기 등에서 그가 일찍이 군왕, 나아가 황제로 성장할 만한 인물로 부상했다는 점을 지적했던 세간의 평가도 제법 있다.

게이초 6년(1601년) 그는 센다이 성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어 다테 마사무네를 센다이라는 번의 번조(藩祖)로 탄생했다. 미곡 수확량(石高) 62만석은 카가(加賀) 마에다(前田), 사쓰마(薩摩) 시마즈(島津)에 이어 전국 제3위였다. 센다이 성은 산성으로 천연의 지형을 이용한 방어요새이며, 센다이의 건설은 연인원 100만 명이 동원된 대공사였다. 번 안에 48곳의 저택을 두고 신하들을 배치했다.

히데요시가 요시노(吉野)에서 시회(詩會)를 열고 무장들이 각각 시가를 읊을 때 마사무네가 단연 돋보였다고 한다. 와카(和歌)에 정통하며 문재(文才)가 아주 빼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재주를 두고 일본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단편 소설 [마상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다]를 통해 이런 평을 남겼다. “역사에 나오는 무장(武將)의 문학작품으로는 고대 중국의 조조(曹操)에 필적할 수준”이라고 말이다. 마사무네가 만년에 남긴 [醉餘口]이다. 음주 후의 호기로운 외침이다.

“馬上少年過 世平白多 殘軀天所赦 不樂是如何(말 위에서 젊음을 보내며 세상을 평정하니 백발만 남았다. 하늘이 준 여생이 남아 있다면 즐기지 않으면 이를 어쩌리.)”

다테 마사무네는 또 세상을 등지는 말, 즉 사세구(辭世句)를 이처럼 남긴다.

“한 점 흐림 없는 마음속 달을 앞세우고, 속세의 어둠을 밝혀가리라.”

다시 태평양 건너 쿠바에 갔던 일본 사무라이 이야기다. 하세쿠라 쓰네나가(1571~1622)는 에도시대 초기 무사, 센다이번(仙台藩)의 다이묘(大名) 다테 마사무네의 가신이었다. 임진왜란에 종군해 조선으로 건너가 아시가루(足輕), 철포조장(鐵砲組頭)으로 활약했다.

다테가(家)가 조선에 출병한 사실은 확실하지만 마사무네의 참전 여부는 불확실하다. 1500~3000명의 병력이 다녀간 것으로 확인된다. 대신 하세쿠라는 진주성 2차 전투에 최 하급 무사 이시가루 철포조장으로 참전했다. 전투에서의 상세한 역할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부대는 전쟁의 수습 차원에서 남해안 일대에 막부의 재정적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왜성을 축성했다는 사실만이 전해진다.

이들은 왜 큰 바다를 건너려고 했던 것일까. 2011년과 1611년이면 딱 400년 차이다.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이 닥쳤고, 그 400년 전인 1611년 12월에는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규모의 게이초 쓰나미(慶長大津波)가 센다이번를 강타했다. 이때의 재난이 유럽으로 사절단을 보내려고 했던 당시 일본의 움직임과 관계가 있으리라는 추정이 나온다. 지진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대외통상과 외교문제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말이다.

문화·기술·정보·인적 교류도 불러일으켜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견구사절단의 태평양 왕복(1613~1620년) 항로
마사무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올렸다는 보고서인 [슨뿌끼(駿府記)]에는 이 지진으로 센다이 지방에서만 500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울러 당시 일본의 해안을 탐색 중이던 외국인의 기록에도 당시의 재난 참상이 규모와 정도에서 아주 대단했음을 묘사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 같은 대형의 재난, 1611년의 게이초 쓰나미가 발생한지 불과 2주 후에 마사무네는 선박 건조와 게이초 사절 파견의 구상을 밝히면서 그 2년 후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로 승선해 쓰끼노우라 항구에서 태평양을 향해 닻을 올렸다. 따라서 마사무네가 주도한 사절 파견은 당시에 일본을 참혹하게 덮쳤던 대형 재난과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사절단에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선택한 이유도 궁금해진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침략군의 일원으로 출항을 한 경험, 게다가 이국인 조선에 체류했다는 사실, 또 최하급 무사 총포조장으로서 일정한 병력을 통솔하는 능력이 있다고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패했을 때의 후유증을 감안해 상급 가신이 아닌 하급 무사 하세쿠라가 뽑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모두 사료의 부족으로 진상을 알기는 어렵다.

번주 마사무네와 하급 무사 하세쿠라가 추구한 대외 무역과 외교는 물자의 유통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문화·기술·정보·인적 교류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가 부흥하는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어쨌든 400년 전 센다이의 무사들은 대형 재난의 아픔을 뒤로 하고 사절단을 구성한 뒤 화려하기 짝이 없던 ‘다테모노’ 패션으로 세계의 무대에 나섰다.

16세기 전국시대 내전을 겪은 일본은 드디어 통일을 이룬다. 센다이의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막부 성립 후 3대 유력 영주로 떠오른다. 그는 이에야스로부터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 스페인 그리고 로마에 있는 바티칸으로 사절단을 보내는 프로젝트를 명 받는다. 하세쿠라는 스페인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와 함께 특별 사절단으로 임명된다. 이 사절단의 목적은 스페인과 무역 협정을 맺고 로마의 교황 바오로 5세와 스페인 국왕 펠레레 3세를 접견하는 것이다. 후에 산 후안 바우스티스타호로 불리게 되는 ‘다테마루’란 대형 갈레온 선이 센다이의 조선소에서 만들어진다.

이 배는 당시 일본 최대의 갈레온선으로 배수량 기준 500t에 전장이 55m다. 1613년 멕시코를 향해 출항한다. 약 180명이 승선한다. 구성인원은 10명의 막부 사무라이, 12명의 센다이 사무라이, 그리고 120명의 상인과 선원이다. 40여 명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인이 동승한다.

배는 순풍과 환류를 타고 90여 일 만에 북태평양을 횡단하며 순항한다. 이어 멕시코의 아카풀코에 성공적으로 도착한다. 그곳에서 육로로 멕시코시티를 경유해 베라크루즈항까지 간다. 1614년 베라크루즈에서 하세쿠라와 그의 사절은 스페인 함대로 갈아타고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에 도착한다.

도해(渡海)의 꿈, 일본의 무장

하세쿠라는 사무라이 검과 활로 무장한 사절단을 거느리고 스페인의 세비아에 입성해 세비아의 왕궁 알카사르에 머문다. 그곳에는 지금도 그가 세비아 주지사를 만난 방이 남아있다. 마사무네가 보낸 서한도 아직까지 안전하게 보관 중이다. 1614년 12월 하세쿠라는 마드리드의 국왕 펠레페 3세에게 향한다. 그는 마드리드의 왕궁에서 펠레페 3세를 알현한다.

복장은 비단의 품격 넘치는 ‘다테모노’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날 끝에 놓고 스치기만 해도 부드러운 종이가 잘린다는 사무라이 검에 대한 기록도 남긴다. 사절단은 스페인 전체의 환영을 받고 현지인들의 큰 화제로 떠오른다. 하세쿠라는 국왕의 개인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펠레페 프란시스코 하세쿠라’라는 세례명도 받는다.

사절단은 8개월을 스페인에 머물다가 교황 바오로 5세를 만날 수 있는 이탈리아로 향한다. 하세쿠라는 라틴어로 된 금박까지 입힌 서한을 교황에게 전한다. 멕시코와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일본에 기독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고 귀족의 작위를 받는다.

세비아 근처에 있는 코리아 델 리오(Coria del Rio)에는 ‘하폰(Japon)’ 또는 ‘자폰(Xapon)’을 성(姓)으로 하는 사람 약 700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400년 전에 스페인에 정착한 사무라이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한다. 하세쿠라는 해외 순방을 마치고 멕시코와 필리핀을 거쳐 7년 만에 귀국한다. 유럽으로의 사절단은 그 후 1862년까지는 없었다. 200년 이상 이어진 쇄국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250년 뒤의 개화를 위해 아주 중요한 ‘근대의 씨앗’을 심어둔 셈이었다.

90여 년 전 쇼와(昭和) 초기 오타니(大谷)초등학교 아사노 스에지(淺野末治) 선생이 이 지방 땅에 묻힌 하세쿠라 쓰네나가에 착안해 아이들이 그의 위업을 배우도록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노래]를 만든다. 일본의 어린이들은 학예회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드넓은 세상을 꿈꾼다. 400여년 전 아주 먼 바다로 나갔던 제 조상들을 생각하면서다.

노래를 부르는 일본 어린이들의 뇌리에는 자연스레 하세쿠라가 건넜던 태평양의 바람과 파도가 펼쳐질 것이다. 가사는 어려운 한자를 썼지만 그의 위업을 찬양한다. 당시 사절단을 ‘붕익도남(鵬翼圖南, 큰 새가 남쪽을 향해 웅비한다는 뜻)’이라 칭하고, 그의 항해를 ‘팔중(八重)의 조로(潮路)’라 지칭했다. 거대한 뜻이 담긴 아주 어려운 항해라는 뜻이다.

당시의 그는 달뜨는 포구, 쓰키노우라(月浦)를 떠났을 것이다. 돛을 달고 노를 저어가는 뱃전에는 그저 구름과 물뿐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서럽고 그리워 400년 전의 그들은 망망하기 짝이 없는 구름과 물을 넘어 7년의 세월을 견디며 머나먼 4만1100㎞의 여정을 펼쳤던 것일까.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독서회 [고전만독]을 이끌고 있으며,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주요 관심 사항은 대항해시대 문명의 소통 양상이다. 독서와 여행으로 문명과 바다가 펼쳐진 세계를 일주할 기획하고 있다.

201801호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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