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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8)] 베두인의 전통, 그 심연으로! 

벌거벗은 몸과 돼지, 금기와 맞닥뜨리다 

김미루 사진작가
베두인은 평화로운 삶을 사는 생활인…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소탈함과 우정 보여줘

내가 그들에게 진실로 강렬한 충격을 전한 것은 내가 사막으로 가서 베두인들과 실제로 같이 살고자 한다는 강한 나의 의지였다. 레바논의 도시 엘리트는 여자의 나체와 돼지에 대해서는 관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베두인과 같이 산다는 것에 대해서는 닭살이 돋는 충격을 느끼는 듯했다. 이런 이중적 태도가 나에게는 하나의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요르단의 남부로 내려갈수록 황량한 평지는 놀랍게 매력적인 사암 바위군으로 장식되고, 5000만 년 동안 그 바위돌이 부서져 흘러내려 쌓인 부드러운 모래가 바닥을 형성하고 있다.
2012년 8월 12일, 나는 암만의 퀸 알리아 국제공항(The Queen Alia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했다. 사이드(Said)라 이름 하는 팔레스타인 계열의 요르단 사람의 영접을 받았다. 나는 2011년 여름, 한국 SBS텔레비전 다큐팀과 요르단에서 작업을 했을 때 사이드를 만났다. 암만에 살면서 중동 영화학에 관한 진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던 댄(Dan)이라는 이름의 젊은 미국인 풀브라이트 스칼라를 알게 됐는데, 그는 컴퓨터를 뒤지다가 나의 작품을 만나게 됐고, 내 작품에 관한 진지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런데 그 풀브라이트 스칼라 댄이 나에게 많은 재미있는 요르단 지역의 명사들을 소개해줬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바로 사이드였다. 내가 한 해가 지나고 다시 암만으로 왔을 때는 이미 댄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그러나 나는 사이드와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드는 규모는 작지만 매우 성공적인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도움은 나에게는 매우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본격적인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기 부모님 집에 있는 빈 방에서 며칠 유숙할 수 있다는 제안까지 해줬다. 나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이드가 말하는 바, 그는 나의 예술작업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그의 스트레스로 가득 찬, 반복되는 사업적 일로부터 좀 벗어나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나의 일을 돕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몇 주만이라도 아주 정통적인 베두인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집에서 유숙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나의 말을 듣자마자 요르단의 남부에 남아있는 베두인 마을을 접선할 것을 그의 운전사비서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사막으로 내려가는 여행을 조직해줬다.

사막에서의 홈스테이를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다운타운의 시장구역에 가서 나의 베두인 의상을 사는 것이었다. 암만의 다운타운은 알 발라드(al-Balad)라고 하는 곳인데 그 유적은 BC 7000년 정도로까지 소급될 수 있는, 보기 드물게 인구가 밀집된 고대도시의 잔해인데, 비잔틴시대의 역사적 건물도 많이 남아 있다.

그곳의 상업지구에는 음식과 잡화를 파는 아웃도어 시장 점포들이 즐비하게 가득 차있는데 야릇한 중동의 분위기가 감돈다. 상점에서는 옷부터 가구, 기계설비, 전기용품, 전자 상품 등등 모든 것을 다 판다. 중동 도시들의 인간미가 흐르는 특징은 항상 왁자지껄 떠든다는 것이다. 도시 밖의 마을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중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 인사하고 환호하고 소리 지른다.

암만은 중동의 도시 중에서는 매우 모던하고 서구화된 곳이라서 그렇게 이슬람 문화의 내음새를 풍기지 않고 자유로운 편이다. 그런데 오히려 다운타운에서는 거의 모든 여성이 히잡(hijab: ‘히잡’은 원래 ‘격절’의 뜻이다. 무슬림의 여성들이 집 밖을 나설 때 타인 남성 앞에서 얼굴과 가슴을 가린다는 뜻이다)을 쓰고 다녔고 많은 사람이 아주 전형적인 아랍복장을 입고 있었다. 나는 사이드의 도움을 얻어서, 몇 개의 ‘토오브(thaub)’라 불리는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가볍고 긴 튜닉을 샀다. 토오브는 보통 발목까지 내려오는 남성의 의상에 쓰이는 말이지만, 여성 의상에도 쓰인다. 여성 의상의 경우는 화려한 수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모든 사우디의 여자들이 입는 좀 헐렁한 무게감 있는 까만 드레스를 하나 샀는데, 이것은 ‘아바야(Abaya)’라 불리는 것이다. 이 옷들은 모두 발목까지 내려오고 또 소매도 손등까지 내려온다. 전통적으로 무슬림 여인들은 팔과 다리와 머리카락을 노출시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히잡의 편함과 아름다움


▎빨간색의 튜브형 스카프가 속에 있고, 그 겉을 스카프로 자유롭게 둘렀다. 속 튜브형과 색깔을 맞춰 컬러풀한 문양을 선택한다. 요즈음 요르단의 젊은 여성이 멋을 마음껏 부린 형태로 내 모습을 만들어보았다.
나는 머리용 스카프로서는 몇 개의 다른 종류를 구입하였다. 꽃무늬로 장식된 길고 얇은 스카프 몇 개와, 단순한 튜브 모양으로 생긴 것도 샀다. 튜브 모양의 스카프는 그냥 뒤집어쓰면 되니까 매우 간편하다. 그러나 아름답지는 않다. 그래서 도시를 다니는 멋쟁이들은 튜브 모양의 스카프를 먼저 뒤집어쓰고 그 위에 다시 이중으로 스카프를 휘두른다. 튜브형 스카프는 나일론이나 혼합직물로 만든, 신축성 있는 튜브캡이라서 머리카락을 잘 고정시킨다. 이 튜브캡 위에 다시 화려한 스카프를 둘러서, 바깥쪽 스카프를 핀으로 안쪽 스카프에 고정시킨다. 그러면 스카프가 하루 종일 다녀도 벗겨지거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특별한 관심이 없어 의식 못했겠지만 아랍여성의 히잡을 자세히 보면, 속과 밖의 이중 라인과 색깔로 겹쳐 있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히잡은 여성해방론자들에게는 제거돼야 할 그 무엇이겠지만, 실제로 그들을 편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나는 내 스스로 히잡을 쓰게 되면서, 히잡을 쓰고 있는 중동의 여인들을 열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히잡의 다양한 스타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또 개성 있는 멋의 포인트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요즈음의 젊은 여성들은 히잡을 패셔너블하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즈음의 최신 트렌드 중의 하나는 겉 히잡 속 머리 뒤쪽에 커다란 꽃송이 형태의 리본을 달아 히잡이 머리 뒤에서 불쑥 나오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스필버그가 만든 이·티(ET, 외계인)의 형상처럼 보인다. 중동의 젊은 여성들에게는 그런 배리에이션이라도 어떤 변화가 그리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전통적인 남성 두루마기인 디쉬다샤(dishsasha: 앞서 말한 남성용 토오브를 디쉬다샤라고도 부른다)를 한 벌 샀다. 이것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 천의 통옷이다. 몸뻬형 바지도 같이 샀다. 그리고 머리에 쓰는 케피예(keffiyeh)도 같이 샀다. 케피예는 네모난 스카프인데 보통 순면으로 만들고 이글이글 타는 태양광과 먼지, 모래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뒤집어쓰는 것인데, 반드시 그물모양의 문양이 있다. 요르단사람들은 흰 바탕 위에 붉은 그물이 그려져 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흰 바탕 위에 검은 그물이 그려져 있는 것을 사용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영국군 대령 T. E. Lawrence, Lawrence of Arabia, 1888~1936)도 이 케피예를 쓰고 디쉬다샤를 입고 터키에 저항하는 아랍전쟁을 리드했다.

이 모든 옷이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한 벌에 미국 돈 30~40 달러는 소요됐다. 그런데 내가 산 옷들의 대부분이 고급 면이나 실크가 아니라 중국산 싸구려 합섬재료라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합리적 가격이 아니었지만, 나는 공격적인 상인들과 협상하는 데는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내가 관광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체험한 이 알 발라드라는 구역은 아마도 중동을 제대로 체험하기 전에 내가 전형적인 중동도시라고 상정했던 그러한 광경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2011년 이전에 내가 미국의 언론매체를 통하여 인식했던 중동의 모습은 극보수적이고 분쟁으로 치닫는, 길거리에는 쌈박질을 하거나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인간들로만 가득 차 있는, 그러한 모습일 뿐이었다. 나는 사실 SBS 다큐를 찍기 위해 갑자기 그곳으로 불려가기 전에는 중동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없었고, 또 요르단이나 그 수도인 암만에 관해 아무런 리서치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긴 천을 휘감고 검은 베일로 가려진 채 걸어가는 여인들, 모스크의 미나레트(minaret: 쑥 올라온 등대 같은 건축양식)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계속 울려 퍼지는 므와찐(muezzin: 기도하라고 미나레트에서 외치는 특별한 목소리의 사람. 새벽, 정오, 오후 중반, 해질 때, 밤, 하루에 다섯 번 외친다)의 구성진 목소리들, 금요일 길거리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군중의 기도, 쓰레기가 여기저기 흐트러진 가운데 어지럽게 서있는 시장판매대, 사암으로 덮인 낮은 건물들이 계단식으로 층층이 자리 잡고 있는 비좁은 골목광경, 이 모든 내 음새는 암만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들을 구체화시켜 주는 듯싶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알 발라드는 실상 암만의 매우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암만에 오래 머물게 됨에 따라, 나는 암만이 매우 진보적이고 모던한 문화를 소지한 도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공적 장소에서 만난 여인들의 최소한 절반은 히잡을 쓰지 않았다. 인구의 90% 이상이 무슬림이었지만 종교적 구속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국제적 감각의 카페나, 레스토랑, 클럽, 바, 그리고 세계의 유명 브랜드가 다 모인 거대한 몰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암만의 많은 장소가 맨해튼이나 서구도시의 거리 모습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풀브라이트 스칼라 댄의 도움으로 나는 암만의 탑 엘리트 클래스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 수상의 자녀들, 대사들, 매우 부유한 비즈니스맨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모두 서양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베두인들과 3주를 같이 살 계획을 세우다


▎암만 시내 모스크 앞 광장에도 시장이 선다. 암만은 전통적인 모습과 함께 매우 진보적이고 모던한 문화를 가진 도시다.
호기심에 가득 찬 나는 극도로 사치스러운 암만의 최상층부의 삶의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도 많았다. 아름다운 대저택, 시골의 별장, 공식적인 대사관저 파티, 그리고 박물관의 은밀한 미팅에 초대되는 영광을 엔조이할 수 있었다. 그런 곳에 가면 꼭 지중해 섬 안이나 연안에 있는 사치스러운 별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느꼈는데, 암만이 완벽히 내륙지역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것이다. 아마도 그 저택들의 팬시한 바들이 다양한 꽃나무로 덮인 아름다운 수영장 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민들은 수돗물을 하루에 몇 시간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사막기후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사치는 가히 충격적인 것이다.

내가 광야로 떠나기 바로 전날 밤, 나는 요르단의 가장 강력한 기독교 문벌의 아름다운 대저택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됐다. 나를 초대한 사람은 요르단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예술가, 건축가, 예술교육가인 알리 마헤르(Ali Mahe)r였다. 그는 요르단의 왕실영화제작소의 소장이었고, 아뜰리에 바바 예술학교(Atelier Baba Art School)의 창시자였고 요르단-소비에트 우호회의 리더였다. 그의 아버지 파와즈 마헤르(Fawaz Maher)는 요르단 국군의 장성이었는데 요르단의 서카시안 소수민족(Circassians: 북서 코카서스 인종그룹으로 각지에 퍼져 있는데 800만 명에 이른다. 요르단에는 18만 명 정도 현존)의 리더였다. 알리 마헤르는 대머리에다가 거대한 몸집의 멋쟁이였는데, 말굽모양의 콧수염이 일품이었다. 그는 암만의 문화적 자산이자 대부로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사진15)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면서 애칭으로 알리 바바(Ali Baba)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그만 2013년 6월 10일, 그의 어머니하고 같이 아침 먹다가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나로서도 참 아쉬운 인연이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의 명복을 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나를 좋아했다. 나의 과감한 작품에 필이 꽂혔던 것이다. 그는 나를 그의 친구들에게 멋있게 소개해줬다. 그 덕분에 그들은 모두 나의 사진작품을 열광적으로 흠상했다. 중동의 엘리트 써클에 속한 그 어느 누구도 나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의 나신(裸身)과 돼지를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편하게 감상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알리 바바만이 예외였다. 정말 그는 문화 아이콘이라 할 만큼 해탈한 견식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의 노출된 몸과 돼지는 이슬람에서는 아주 고도로 금기시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내가 그들에게 진실로 강렬한 충격을 전한 것은 내가 사막으로 가서 베두인들과 실제로 같이 살고자 한다는 강한 나의 의지였다. 여자의 나체와 돼지에 대해서는 관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내가 베두인과 같이 산다는 것에 대해서는 닭살 돋는 충격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하나의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그만큼 자기존재의 뿌리로부터 멀어졌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그만큼 서구화가 깊게 진행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요르단 엘리트층의 많은 사람이 그들 존재전승의 뿌리를 사막의 베두인족에 두고 있을 터이지만, 그들은 이미 예전에 사막의 삶으로부터 격리됐다. 물론 그들은 전통적 삶의 방식에 대한 존경심을 표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말하는 베두인이란 기껏해야 이상화된 ‘고상한 야만족(noble savages)’ 수준이다. 그리고 현실감 있게 말하자면, 이미 고도로 세련화된 도시 거주자들은 때와 그을림으로 덮인 베두인 텐트 안에서 침대 시트나 수도나 전기도 없이 단 하룻밤이라도 그곳에서 잔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그들의 더러는 사막을 방문하여 하룻밤 정도 자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근의 호화스러운 관광용 캠프시설에서 자거나, 서구식 하이테크 캠핑 도구를 가지고 와서 잔 것이다. 그들로서는 베두인 집에서 하루라도 생활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나처럼 그들의 삶이 객관화되기에는 베두인이 너무 가깝게 있는 것이다. 베두인들은 단지 자기들의 선조가 몇백 년 전에 살았을 그러한 삶의 방식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는 가난한 깡촌 사람들일 뿐이다.

알리 바바의 친구들은 포도주를 들이키면서, 요르단 최남단의 와디 럼(Wadi Rum)이라 부르는 사막 한가운데서 베두인들과 3주를 같이 살 계획이라는 나의 플랜을 듣고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너 자신에게 바보짓을 하니? 위험한데. 여기서 지내. 훨씬 안전하잖아. 우리가 다 어레인지해줄게. 우리도 아주 멋있는 시골별장들이 다 있어.” 요르단의 친구들이 내 안전을 걱정한다는 사실이 앞으로 내가 감행해야 할 여행에 대해 모종의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사실 요르단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막 거주인과 도시 거주인의 분별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수준의 것인지 잘 알지를 못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컨대, 암만에 사는 고위층 부자사람들에게 사막에 사는 베두인에 관해 물어본다는 것은, 팬시한 뉴요커들에게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의 깊은 산림 속에 사는 ‘힐빌리(Hillbilly)’(애팔래치아산맥, 오자르크스the Ozarks산맥에 사는 시골 백인들. 약간 비하해서 말하는 함의가 들어 있다)에 관해 물어보는 것과 비슷한 얘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날 밤 내 숙소에 왔을 때,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다음날 5시간을 달려야 하는 여행을 위하여 눈을 붙이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부닥쳐보지 않고서 어떻게 베두인을 알 수 있겠는가?


▎금요일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의 모습.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여성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로 기도한다.
다음날 기나긴 드라이브는 스무드하게 진행됐다. 자동차에 에어콘이 없었기에 괴롭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나는 뜨겁고 먼지 이는 바람풍토에 익숙해져 갔다. 우리의 자동차 길은 요르단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루우트15, 데저트 하이웨이(Desert Highway)라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모세시절부터 언급되어온 킹스 하이웨이(King’s Highway)라는 것도 있지만, 그 길은 꼬불꼬불하며 볼 것도 많다. 데저트 하이웨이는 남단의 와디 럼(Wadi Rum)을 가는 데는 더 직통길이지만, 문자 그대로 하이웨이 주변은 살벌한 사막평지뿐이다. 사막이라지만 거무틱틱한 짙은 색깔의 땅 위에 지저분하게 느껴지는 모래와 조약돌뿐이라서 그냥 황량한,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만 전개된다.

그토록 살풍경한 광경에 그나마 눈에 걸리는 것이라고는 전봇대와 고압선 철탑뿐이다. 그러나 남부로 내려갈수록 그러한 황량한 평지는 불쑥불쑥 튀어 올라온 놀랍게 매력적인 사암 바위군으로 장식되고, 5000만 년 동안 그 바위돌이 부서져 흘러내려 쌓인 부드러운 모래가 바닥을 형성하고 있다. 바닥색깔이 점점 빨갛게 변해감에 따라 내 가슴도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이 지역이 바로 그 유명한 페트라(Petra)와 지질학적으로 같은 벨트의 동네라는 것을 생각하면 빨간 모래의 매력이 쉽게 연상이 될 것이다.

1년 전에 나는 이 남부 요르단의 사막지역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중동에 처음 왔었고 또 이 지역을 하룻밤 여행으로 잠깐 피상적으로 훑고 지나갔다. 그때 내가 기억한 것은 내가 본 광경이 이 세상의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 장밋빛의 빠알간 모래의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통돌의 기괴한 형상들이 나바테안 왕국(Nabataean Kingdom: 신약성서에도 등장하는 이 지역의 왕국. BC 6세기경 성립. 아람어를 썼다)의 환상적 심볼리즘을 연출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그때 지리에 대한 정확한 감각이 없었다. 그때 내가 본 것은 사실 와디 럼 보호구역(국립공원과 비슷한 개념: 생태보존을 위해 건축이 허락되지 않는다. 2㎞ 폭에 남북으로 130㎞가량 뻗어 있다) 내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와디 럼 보호구역 내로 들어와 봐야 진정으로 장엄하고 숭고한 아름다운 광경을 목도할 수 있다.

데저트 하이웨이를 벗어나 동쪽으로 아무런 길 표시도 없는 사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갑자기 긴장감에서 오는 공포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기가 저질러놓은 일이지만 베두인 토착민들과 혼자서 살러 간다는 것이 좀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뚜아렉 사람들과 또 몽골의 유목민들과 별 문제 없이 지낸 경험을 지니고 있지만 이번에는 좀 상황이 달랐다. 뚜아렉 사람들도 그 근본 뿌리가 이슬람이 아니었고, 몽골사람들은 제도화된 종교와 무관하게 사는, 우리와 같은 토착문화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이드나 그 친구들이 경고한 바대로 베두인은 매우 종교적이고 극보수적인 전통을 지녔으며 특히 이 와디럼 지역의 사람들은 자기들을 선지자 모하메드의 정통 핏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미국의 언론매체들에 의하여 내 머릿속에 주입된 스테레오타입화된 관념들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실상 베두인들은, 내가 단순히 외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혹은 나체로 사진을 찍거나 돼지 수천 마리와 함께 산다든가 하는 등등의 반종교적인, 신성모독의 행위를 한다고 나를 붙잡아 목을 베는 그러한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평화로운 삶을 사는 생활인이라는 사실을 나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들의 의상 하나 마련하는 것 외로는 그들의 문화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그들과 무턱대고 같이 살아보겠다고 한 발상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 한숨만 나온다. 그러나 내가 한 인간으로서, 한 몸으로서 그들의 삶에 부닥쳐보지 않고서 어떻게 베두인을 알 수 있겠는가? 방법이 어떠했든지 간에 나의 모험은 정당한 것이었다. 바로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도 그들에 대한 피상적 견해밖에는 갖고 있질 못했다.

허세를 피우면서 정이 통해야 대화가 이뤄진다


▎수영장이 있는 호화스러운 암만의 부잣집. 남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다는 것이 인간 과시욕의 본질인 것 같다.
내가 처음 들른 곳은 베두인 대가족이 함께, 전통적 방식으로 살고 있는 한 캠프였다. 전통적 방식이란 우선 천막 속에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염소나 당나귀, 개, 닭, 낙타 등의 다양한 가축과 함께 산다는 뜻이다. 트레이닝 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그 가족의 가장이 먼저 나와 우리를 영접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차를 준비했다. 차는 모든 사막문화에 공통된 주요문화였다. 사이드가 그곳 가정에 머물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설명을 하자, 그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엄마가 흥분 속에 동방인이라는 색다른 요소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을 불렀다. 이 여성들은 우선 낯선 이방인 남자가 왔는데도 숨거나 얼굴을 가리거나 하질 않았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막 떠들어댔다. 추측컨대 그 내용인즉, 자기들이 나를 베두인 여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자기들 하는 것을 다 가르쳐줄 수 있다고 호감을 보이는 것이었다. 아이들도 수줍음을 탔고 호기심에 충만하여 내 주변을 빙빙 돌면서 웃고 쳐다보곤 했다. 참 명랑한 분위기였다. 나는 곧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처해졌다.

그들은 우호적이었고, 삶의 방식도 전통적이었고, 중요한 것은 낙타들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사막여행 그 자체가 낙타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낙타와 더불어 살아보지는 못했다. 이 집에 살면 낙타를 직접 만지고 느껴볼 수 있는 리얼한 체험의 기회가 주어질 것 같았다. 정말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 앉아 작은 컵에 담긴 차를 마시고 있는 동안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자동차가 하이웨이를 쌩쌩 지나가는 모습이 포착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한 악기주자가 전혀 다른 음을 내는 것과도 같았다. 그 삑사리 하나가 나의 체험의 전체 교향곡을 망쳐놓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한동안 신중히 고려하다가 어렵게 사이드와 그의 운전수에게 말했다.“베두인하고 살러 왔는데 하이웨이 옆에 살 순 없잖아! 나는 명상하러 왔어. 소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싶다구.”

다음으로 우리는 드라이버가 아는 다른 동네의 사람에게 갔다. 차를 몰고 가서 한 집의 문 앞에 파킹을 했다. 그 집은 아주 단순한 단층의 사각형 집이었는데, 시멘트 벽돌과 시멘트로 지은 집이었다. 전통적 의상을 입은 남자가 우리를 영접하고 방 안으로 안내했다. 모든 사람은 신발을 벗어 문밖에 두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전형적인 베두인집 구조는 정문을 열면 네모난 큰 거실이 나타난다. 거실에는 기다란 바닥 쿠션들이 깔려 있고 그 옆에 기댈 수 있는 큰 딱딱한 베개가 놓여있다. 우리나라의 보료 같은 것을 연상하면 족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정문의 거실은 그 뒷켠에 있는 살림채와 문 하나만 있는 벽으로 격절돼 있다. 손님이 당도하면 그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에는 부엌과 침실들이 여러 개 있는데, 이 구역에는 아주 가까운 친인척과 여성 손님만이 들어갈 수 있다. 변소는 내실 사람들을 위한 것이 하나 안에 있고, 집밖에 손님들을 위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이러한 디자인은 조선왕조의 가옥구조에 남자구역과 여자구역이 나누어져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하여튼 이러한 디자인에서는 여성들이 바깥손님들 눈에 띄지 않게 편안히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실상 나는 바깥쪽 거실에 있었지만 그곳에 있었던 유일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실상 내실에 있는 안사람들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존재감이 없었다.

사이드가 말하기를, 모든 비즈니스는 남자들끼리 먼저 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두인을 다루는 방식은 또 그들의 허세에 좀 맞춰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전 시간 동안 한 코너에 앉아 세 남자가 시시콜콜 떠들도록 내버려뒀다. 사이드의 운전수는 이름을 아부 칼리드(Abu Khalid)라고 했는데, 그것은 ‘칼리드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의 첫째 아들이 칼리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성선호의 혈통주의문화를 살펴볼 수도 있다. 아부 칼리드는 연락책이었고, 실제로 거사를 도모하는 것은 사이드였다. 그 베두인 남자는 그들을 만나 즐거운 듯했다. 그리고 크게 떠들었다.

그들이 뭘 말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확신할 수가 있었다. 처음 20분 정도는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에 관한 본론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이러쿵저러쿵 오가는 허세의 이야기들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폼 잡음 속에는 테스토스테론의 호르몬 내음새가 흘렀다. 마초가 좀 과시돼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얘기하는 것은 실상 아주 사소한 일상적 소재일 것이다. 그들의 가족상황이 어떠하다든가, 연줄이 어떻게 된다든가, 무슨 뉴스가 있다든가, 자동차에 무슨 고장이 났다든가 하는 등등의 이야기! 사이드는 이 남자를 생전 처음 만났기 때문에, 비즈니스나 구체적 이슈로 곧바로 진입하는 것은 이들 문화에 있어서는 결례에 속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세를 피우면서 정이 통해야만 본론에 기름이 흐르는 것이다.

한밤중에 길 없는 사막을 자동차로 달리다


▎히잡을 쓰고 토오브를 입고 있는 베두인 여인의 소박한 모습. 당당하게 생활을 영위하는 나름의 품격이 배어 있다.
한 시간 넘도록 달콤한 차를 마시면서 그들의 담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다 같이 일어섰다. 그 남자의 매제의 집으로 간다는 것이다. 자기 여동생의 남편이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매제가 살고 있는 다른 동네까지 가는데 자동차로 20분이 소요됐다. 우리는 마치 고속도로 휴게소같이 보이는 어느 구역을 통과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곳은 방문객정보센터였고, 720㎢에 이르는 와디 럼의 광야를 포섭하는 보호구역의 입장개찰구이기도 했다(이때는 밤이라서 사람이 없었지만 관광객들은 입장료를 내야만 한다. 정부가 이들 베두인들을 컨트롤하기 위해 땅을 주고 집을 주고 전기를 공짜로 공급해준다).

우리가 이 지역에 있는 단 하나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어두웠고, 길거리에는 가로등도 없었다. 그 매제는 젊은 남성인데 내 나이쯤 돼 보였다. 이름을 아우데(Aude)라고 했다. 매제는 우리를 낡은 사륜구동 지프차로 갈아 태웠다. 내가 사이드에게 여기서 또다시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는 거냐고 물어보았을 때, “예스, 나의 엄마가 사막 깊은 곳에 살아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매제 아우데였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아우데는 영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매우 유쾌하고 친절했다.

그것은 5분도 채 안 걸리는 짧은 드라이브였지만, 잊기 어려운 추억이었다. 그것은 한밤중에 길 없는 사막을 자동차로 달리는 첫 경험이었기에. 별이 쏟아졌다. 앞으로 수없이 경험해야 할 드라이브의 첫 경험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나는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덜컥덜컥 흔들리는 차 속에서 헤드라이트가 모래바닥 위에 난 타이어트랙을 밝힐 때 나는 그 불빛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 엄마 캠프에 도착했을 때 검은 천으로 휘감은 어떤 여성이 휙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여성은 텐트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엄마는 전통적인 텐트생활을 고집하고 있었다. 아우데는 우리를 불 곁에 둘러앉아 있는 그의 가족에게 데려갔다. 거기에는 늙은 엄마와 중년의 남성과 어린아이가 있었다. 늙은 엄마는 우리가 그곳에 앉자 차를 대접했다. 사이드는 그 옆의 중년남성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이름은 아흐마드(Ahmad)였다. 그는 아우데의 형이었다. 그러나 상냥한 아우데와는 달리, 형은 매우 근엄하고 위협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이드가 이야기하고 있을 동안, 나는 검은 긴 소매 셔츠와 요가팬츠를 입고 편안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흐마드는 매우 강렬하게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푹 파인 찡그린 주름 속에 꽉 잠겨 있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801호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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