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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완의 쿠바탐험 | 부에나비스타, 아바나(2)] 쿠바인 식탁에 깃든 혁명의 역설 

친환경 천국인데 영양 결핍에 시달린다 

김해완 작가
미국의 경제봉쇄에 자급자족 꿈꾸며 유기농업에 집중…식량 국산화 이뤘지만 세계 시장과 단절돼 불균형 심화돼

▎아바나의 말레꼰 풍경.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풍요로운 섬나라에서 해산물 가격이 가장 비싸다는 것은 참 슬픈 현실이다. 생선 요리 하나 가격이면 닭 요리 두 개를 살 수 있다.
허리케인 어마(Irma)가 휩쓸고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의 어느 밤, 자정. 나는 캐리어 세 개, 박스 두 개와 함께 아바나 대학 옆에 있는 하숙집에 도착했다. 하숙집 할아버지는 내 몰골을 보더니 늦은 시간인데도 군말 없이 저녁밥을 차려주셨다. 그 한 끼니는 아직도 잊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밥, 국, 막 구운 닭고기, 손수 만든 감자튀김, 한 접시 가득한 샐러드. 단순했지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정성이 녹아있었다. 할머니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쿠바 음식이 맛있는 이유는 ‘아모르(사랑)’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때는 몰랐다. 이 ‘사랑스러운 메뉴’가 앞으로 매일 똑같이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날짜가 바뀌어도 밥상에서 바뀌는 것은 고기의 종류뿐이었다. 그 고기가 조리될 방식, 사용될 소스, 곁들여질 사이드 메뉴까지 나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2주 만에 나는 길거리에서 식당을 찾아 헤매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시금치와 버섯은 대체 어디 있지? 왜 시장에는 고구마와 양파밖에 없을까? 어째서 중국 음식조차 찾기 어렵단 말인가!

다만 이런 불평을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양질의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하숙집 할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보았고, 실제로 내가 먹는 음식은 쿠바에서 훌륭한 축에 속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들은 모두 나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바로 마음의 허기다.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제대로 먹었다는 느낌이 안 든다. 그렇다. 쿠바의 소박한 밥상은 식욕을 탐욕으로 삼고 살아온 우리의 본래 면목을 거울처럼 비춘다.

그렇지만 분명 문제는 존재한다. ‘철없는 외국인의 불평’으로 치부하기엔 쿠바인들도 음식에 마냥 행복해하지는 않는다. 쿠바의 식탁은 쿠바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서 모순적이다. 건강하면서 건강하지 않고, 맛있으면서 맛있지 않고, 배부르면서 또 배가 고프다.

소박한 밥상이냐, 결핍의 식단이냐


▎학생들이 배고플 때 끼니를 때우는 학생 식당 혹은 간이 카페다. ‘빤꼰께소(빵과 치즈)’를 시키면 예의상 양상추 몇 장은 넣어줄 것 같지만, 말 그대로 맨 빵에 치즈 한 장만 얹어준다.
쿠바의 밥상은 기본적으로 신선하다. 가정식(食) 문화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요식업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쿠바에서 ‘끼니’는 아직 전문 비즈니스의 영역에 포획되지 못했다. 밖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은 집 없고 돈 많은 관광객이나 가족 없이 혼자 사는 불쌍한 자취생뿐이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뿐이다. 음식은 그저 그렇고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싼 식당에 가거나, 가격은 그저 그렇고 음식은 부실한 학생 식당에 가거나. 이런 상황에서는 집에서 밥을 먹는 게 너무 당연해진다. 가장 훌륭한 음식은 결국 가정식인 것이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처럼 특별한 날에 쿠바인들은 과일주스나 케이크, 크로켓까지 손수 만든다.

경제봉쇄라는 위기는 역설적으로 절제의 식단을 탄생시켰다. 1990년대에 소련이 무너지면서 쿠바는 그 동안 수입해왔던 필수품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는데, 그중 하나가 화학비료와 농약이었다. 그 후로 쿠바는 현실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유기농법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기농법이 식량 부족 문제를 모두 해결해준 것은 아니었으나, 현재 쿠바 정부는 화학비료를 많이 쓰지 않고도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서 쿠바의 토양에 잘 맞는 토종 식물을 재배하도록 장려한다. 유통 과정이 느려서 부패하는 경우는 있어도 채소 자체의 오염은 크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또 수입산 작물이나 비닐하우스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쿠바인들은 늘 제철음식만 먹는다. 저농약과 제철음식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웰빙의 기초 아닌가!

식탁의 ‘아모르’를 위한 투쟁


▎꼬뻴리아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아이스크림 가게다. 값이 싸고 맛도 좋아서 쿠바의 국민 간식이다. 특히 아바나에 있는 꼬뻴리아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런 강점을 인정하더라도, 쿠바의 밥상이 정말로 건강하지는 않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영양 불균형이다. 재료의 다양성이 부족한 탓이다. 채소는 비싼 데다 공급이 들쭉날쭉한 탓에 풍성하지 않고, 식단은 육류와 유제품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 쿠바의 소박한 밥상이란 한국인이 상상하는 것처럼 ‘밥, 김치, 나물반찬’이 아니라 ‘밥, 바나나튀김, 닭다리’의 조합이다!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찾는 간식은 아이스크림, 탄산음료, 피자다. 쿠바가 아무리 의료강국이라고 해도 이런 식생활은 건강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조미료도 과하게 사용된다. 이것이 식욕의 욕구불만을 해결하는 방편인지, 아니면 수백 년 전부터 설탕대국이었던 쿠바의 식문화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설탕은 모든 곳에 투입된다. 차에 한 숟갈, 요구르트에 두 숟갈, 커피에 세 숟갈, 레모네이드에 네 숟갈…. 소금과 기름도 마찬가지다. 고기는 대부분 튀겨지고, 간은 지나치게 짜다. 이쯤 되면 쿠바 음식의 소박한 외양은 절제의 결과가 아니라 결핍의 반작용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 다른 문제는 한 끼를 준비하는 데 좌절할 정도로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정부가 나눠주는 배급 수첩으로 필요한 모든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어야 하지만, 최근에는 그 절반도 구매할 수 없어서 농산물 직거래 시장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모든 시장을 수입산 없이 자족적으로 굴리기에는 현재 쿠바 농업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시스템의 결함은 고스란히 각 가정의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다. 어떻게든 매일 밤 식탁 위 ‘아모르’를 지켜내야 하는 어머니, 아버지, 자식들에게 말이다.

첫 번째 부담은 시장의 가격이다. 채소값은 쿠바인의 평균 월급과 비교하면 몹시 비싼 편이다. 2009년에 [몰락선진국, 쿠바가 옳았다]의 저자 요시다 타로는 쿠바의 채소가격을 일본 물가로 환산하면 마늘 한 묶음이 2000엔(약 2만원)의 값어치라고 계산했는데, 최근 3~4년간 쿠바의 농산물 가격은 심지어 두 배 가까이 올랐다고 한다. 국내산 작물에 거의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허리케인이 한 해 농사를 망치기라도 하면 농산물 가격은 곧바로 수직상승한다.

두 번째 부담은 공급의 불안정성이다. 오늘, 어느 시장에, 무엇이 있을지는 실제로 가보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다. 어제는 ‘가’ 시장에 싱싱한 아보카도가 있었는데, 오늘은 ‘나’ 시장에만 좋은 과일이 몰려 있는 식이다. 아침 일찍 시장에 들르지 않으면 오후에는 모든 채소가 다 팔려나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매일 아침마다 모든 시장을 돌아볼 만큼 시간이 많단 말인가? 대부분의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마당에 말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목격한 아바나의 일부 사정이다. 하지만 아바나는 쿠바에서도 가장 ‘쿠바스럽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는 드물긴 해도 번듯한 식당이 존재하며, 비싸긴 해도 다양한 채소를 확보한 시장도 몇 개 있다. 그러나 아바나를 벗어나면 이런 대안마저 희박해진다. 외곽 지역들은 아직도 1990년대에 벌어졌던 전쟁 같은 식량난과, 그나마 있던 식재료가 모두 아바나로만 집중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서러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철없는 아바네로(Habanero)의 불평’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때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말레꼰에서 맥주와 닭다리를 뜯을 수 있게 된 것도 기적인 것이다.

쿠바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금세 깨닫게 된다. 가정식이냐 요식업이냐, 유기농업이냐 화학농업이냐, 소박한 공산주의냐 풍요로운 자본주의냐…. 이것은 별 의미 없는 피상적인 이분법일 뿐이란 것을 말이다. 쿠바의 밥상이 제기하는 진정한 질문은 바로 ‘자급자족’이다.

나는 쿠바 혁명이란 본질적으로 자족의 실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혁명의 유일한 목표도 자족이었고, 혁명의 유일한 문제도 끝내 자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19세기 내내 스페인과 대대적인 독립전쟁을 치렀고, 20세기에는 이곳을 경제적·정치적·군사적 뒷마당으로 만들려는 미국에 저항해야 했다. 미국의 턱 아래에 있었던 데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도 늦었던 쿠바는 특히 미국의 영향력이 컸다. 친미주의자였던 독재자 바티스타를 혁명을 통해 쫓아냈을 때, 쿠바인들은 사실상 이렇게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는 쿠바인의 땅이다. 미국 회사가 국가 산업을 하나씩 접수하는 꼴을 더 이상 보고만 있지 않겠다. 이제부터 우리 힘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가겠다!’

떠나간 사과, 잡혀간 고양이, 실종된 생선


▎샐러드, 밥, 고기, 튀김, 국. 이것이 쿠바의 가정식이 갖춘 기본 구성이다. 조리는 단순하지만 이는 정성 들여서 차려진 경우이고, 실제로는 야채의 양이 훨씬 적거나 샐러드가 아예 생략될 때가 많다.
자족의 첫걸음은 밥상부터 스스로 채우는 것, 즉 식량 주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게 가능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쿠바 사람들이 ‘자족적인 밥상’을 위해 걸어온 길은 참으로 기상천외해서, ‘매직 리얼리즘(Magic Realism)’ 사조로 유명한 남미문학의 소재로 써도 좋을 정도다.

혁명 직후에 쿠바가 가진 식량 자원은 설탕뿐이었다. 지난 500년 동안 쿠바는 오로지 설탕을 재배하기 위한 땅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불균형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설탕을 수출해서 그 돈으로 필요한 식량을 수입하는 것이었지만, 세계 시장은 미국 때문에 꽉 막혀 있었다.

혁명 정부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설탕을 버리는 것이었다. 설탕 재배를 멈추는 대신, 그 빈자리에 다른 작물들을 키우는 것이었다.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모든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쿠바 농업이 준비돼 있지 않다는 사실만 명백해졌다. 1970년대에 쿠바 정부는 정책을 180도 돌렸다. 가용한 모든 노동력을 동원해서 오로지 설탕만을 생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설탕 재배를 제외한 모든 경제 부문은 전문성이 격감됐다. 그렇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소련이 주도하는 동구권 시장이 열렸다. 소련은 시장 가격이 아니라 ‘공정 가격’으로 설탕을 훨씬 비싸게 구매해 줬고, 그렇게 쿠바의 허울뿐인 ‘자급자족’을 도왔다.

이처럼 쿠바 정부가 10년마다 개혁을 감행할 때마다, 사람들의 식생활도 바다 위의 돛단배처럼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가령, 하숙집 할아버지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1980년대를 ‘사과’로 기억한다. 쿠바에서 사과는 꿈의 과일이다. 열대 섬나라인 쿠바에서는 사과가 나지 않아서 외국에 나가지 않으면 평생 사과를 맛볼 수 없다. 그러나 소련의 원조를 받던 시절만큼은 예외였다. 동구권 시장의 멤버였던 불가리아에서 사과가 헐값에 많이 수입됐던 것이다. ‘사과’가 상징하듯이 당시에는 풍족하지 않았어도 사회적으로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건 대부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사과도 떠나갔다.

그 후 영화와 같은 1990년대가 시작된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일자리가 없었고, 음식이 부족했으며, 전기가 끊겼다. 버스가 운행되지 않아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했는데, 하루 종일 먹는 건 없고 운동만 하니 모두들 삐쩍 말라갔다. 카페테리아에서는 여전히 피자를 팔았지만, 치즈를 구할 수 없어서 하얀 플라스틱 조각을 얹어 피자를 구웠다. 이 ‘플라스틱 피자’를 사먹고 병원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나중에는 고양이와 개가 거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먹을 게 완전히 바닥나자, 사람들이 이 친근한 동물들에게까지 조용히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1세기다. 쿠바는 힘겹게 다시 일어서고 있다. 캐나다 자본, 중국 자본, 의료인력 수출, 그리고 관광업을 통해 어떻게든 수입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쿠바인의 상실감까지 채워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쿠바 사람들의 식탁에서 생선이 실종됐다. 현재 쿠바에서 잡히는 해산물의 95%가 외국인이 투숙하는 호텔에 공급되거나, 수출용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산물은 섬나라에서 가장 찾기 힘든 음식이 된 것이다. 게다가 쌀은 대부분 중국산이다. 중국은 점점 쿠바 내에서 구소련과 같은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쿠바인들은 소리 없이 묻는다. 이게 자족인가, 우리는 정말로 자족하고 있는가?

주적(主敵)은 근대농업이었다


▎아바나 베다도 지역의 농산물 시장. 길거리 주소를 따서 ‘K y 17 (K와 17)’ 이라고 불린다. 지금은 토마토 수확 시즌이어서 토마토가 많다. 농산물을 다 팔아 텅 빈 매대도 보인다.
여기서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다. 이 자족의 어려움은 공산주의 시스템이라는 쿠바의 내부적 요인 때문일까? 혹은 미국의 경제봉쇄라는 외부적 요인 때문일까? 둘 다 온전한 대답이 될 수는 없다. 쿠바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모두가 발 딛고 서 있는 근대라는 물질적 토대를 되돌아봐야 한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근대화’ 혹은 ‘산업화’라는 동일한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60년대의 쿠바 혁명은 구소련의 모델을 따라가면서 자본주의의 고질병인 노동 착취를 제어하면서도 사회 발전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 소련 원조가 끊기자, 역설적이게도 농업의 근대화는 쿠바의 자급자족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어째서일까? 근대 농업은 인위적인 대량 생산을 기초로 한다. 이 대량 생산에 필요한 것은 종자 개량, 농업의 기계화, 화학비료, 그리고 수익을 낼 수 있는 세계 시장이다. 한마디로 자본이 필요하다. 농업은 늘 자본과 기술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본과 기술을 아직 충분히 축적하지 못한 쿠바는, 외부의 원조가 끊기자마자 근대농업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기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상황을 타파할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혁명 이전에 근근이 이어오던 전통 농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과학 기술을 접목시켜서 생산량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이런 협력은 현장에 있는 농민들의 주도로 조심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핵심은 정치·경제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사람의 손으로 사람의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도록 노하우를 쌓는 것이다. 현재 쿠바는 농업 개혁에 온 힘을 쏟고 있다.

혁명의 근원지인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에서 태어나, 청춘 시절을 혁명 정부에 충성했던 70대 쿠바 할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농장주였어. 부르주아 계급이었지만 혁명의 대의에 동의했고, 자발적으로 농장을 반납했어. 그 후 아버지는 바로 알아채셨어. 이 정부는 농업의 ‘농’자도 몰랐던 거야. 혁명 정부라면 농민들에게 직접 배우려고 했어야 했는데, 귀를 막았던 거지.”

‘밥심’을 존중하는 세상

쿠바 정부는 지난 60년 동안 산업화를 급급히 쫓아가다가 이제야 농부들에게 귀를 열고 있다. 이 실수는 공산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벌어지고 있다. 첨단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쿠바의 텅 빈 시장을 비판하기란 참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과연 쿠바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한국의 역량은 얼마나 될까? 세계 시장이 무너졌을 때, 얼마만큼의 농작물을 생산해서 밥상을 채울 수 있을까? 에너지 위기와 식량 부족의 위기는 나날이 코앞에 닥쳐오고 있는 반면, 한국의 시장은 수입산 작물로 넘쳐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쿠바의 ‘자급자족 드라마’가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해야 한다. 이들의 식탁이 사랑과 채소와 생선으로 싱싱하게 채워지기를 기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노하우를 배워야 한다.

하루는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서 오늘 시장에서 고구마밖에 못 샀다고 불평을 했다. 그런데 한 쿠바 청년이 영어로 쏘아붙였다. “그렇게 쿠바가 싫으면 처음부터 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속상한 마음이 이해됐다. 그의 눈에는 외국인들이 쿠바가 자족을 위해 거쳐 온 과정은 전혀 모른 채, 불평만 늘어놓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불평불만은 우리 모두가 국적과 인종과 이념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한다고 믿는다. 오늘 저녁 내 식탁에 든든한 밥 한 끼가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밥줄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도저히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은 과거에나 지금에나, 아바나에서나 서울에서나, 자본주의에서나 공산주의에서나 마찬가지다. 60년 전에 늙은 농장주가 자발적으로 토지를 정부에게 반납하면서 꾸었던 꿈은, 모두의 한 끼를 소중하게 여기는 ‘밥심’을 존중하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 김해완 - 1993년 생. 10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4년 초부터 미국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과 함께 생활한 후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201802호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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