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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3)] 왕위 둘러싼 회군파의 권력투쟁 

이성계냐, 조민수냐 大학자 이색, 갈림길에 서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신돈 혈통이란 의심받은 우왕 아들 창을 왕위로 밀었던 조민수 선택… 정치적 생존 위해 섭정(攝政)이나 역성혁명 배제해

위화도회군 이후 우왕은 이성계 등 회군파 장군들을 제거하고자 급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우왕의 몰락 후 회군파는 새로운 왕을 누구로 정할지를 놓고 극심한 분열에 빠진다. 국사(國師)로서의 권위를 가진 이색은 이성계와 그의 경쟁자 조민수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 당시 역성혁명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우왕의 습격 사건 이후 왕위 계승 투쟁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혁명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성동구에서 재연된 태조 이성계의 사냥 행차 장면.
현실정치는 통상 지위, 부, 명예 등을 놓고 다양한 힘이 충돌하는 장이다. 이념이 설 자리는 거의 없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누가, 왜, 무엇을, 얼마나 가져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명분이다. 권력투쟁은 단순한 힘의 충돌이 아니라 사실은 이념투쟁 나아가 세계관의 투쟁이다. 대변화의 시기에는 그것이 더욱 격렬해진다. 위화도회군 뒤의 고려정치도 그랬다.

회군은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회군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훨씬 더 어려운 문제였다. 1388년 이후 조선건국까지 5년간, 그 의미를 둘러싸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진행됐다.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이인임의 정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둘째, 누구를 왕으로 세울 것인가? 셋째,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 하나하나가 모두 커다란 폭발성을 가진 문제였다. 왕의 생사 나아가 왕조의 운명이 여기에 달려 있었다.

1388년 6월 4일 밤, 우왕은 환관 80여 명을 데리고 회군파 장군 이성계와 조민수, 변안열의 집을 급습했다. 개성 전투가 끝나고 하루 뒤인 그날 회군파 장군들은 궁궐 앞 흥국사에 모여 회군 후의 정치적 문제를 논의했다. 타이밍 상 기습은 완벽했다. 왜냐하면 고된 회군과 정치적 논의를 마친 회군파 장군들이 비로소 마음 놓고 집에 돌아가 휴식을 취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군들은 놀랍게도 군 진에 머문 채 귀가하지 않았다. 우왕은 비록 기습에 실패했지만 왕으로서의 기개를 입증했다. 그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최영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또한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과감히 기습을 감행했다. 그런 점에서 우왕의 용기와 지략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의 일생은 그 반대였다. 그의 삶은 환락과 방탕 속에서 헛되이 낭비됐으며, 국가와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다. 또한 무뢰배 같은 치기, 아무나 죽이는 잔인성, 무진정변(1388) 후 암살의 공포에 떤 나약함은 그의 인간성에 대한 혐오감을 더해준다. 그래서 이 기습은 우왕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보다 처음으로 진정한 용기를 발휘했던 것이다. 왕은 지배하거나 죽어야 한다.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왕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왕에게는 식물적인 삶이나마 연명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마저 사라져버렸다. 회군파 장군들은 생존을 위해 우왕과 동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6월 7일, 장군들은 이성계의 집과 가까운 동쪽 숭인문에서 회합했다. 궁궐의 무기와 말이 모두 몰수됐다. 다음날 우왕은 폐위돼 강화로 보내졌다. 최영의 딸 영비도 축출됐다.


▎위화도회군 후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창왕 역시 훗날 이성계 세력에게 폐위된 후 살해됐다. KBS 드라마 [정도전]의 한 장면. / 사진:KBS
14년에 걸친 폭정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 그 주역인 이인임 등 권신들은 우왕에 의해 제거됐으며 또 다른 주역 우왕 역시 제거됐다. 우왕대의 희망이었던 최영 역시 제거됐다. 최영의 일생은 오직 국가를 위한 헌신뿐이었다. 치악산 아래 은거해 살던 원천석은 최영의 죽음을 듣고 애시를 지었다.

“부고 듣고 애시(哀詩) 지으니/ 공이 아니라 나라 위한 슬픔이네/ 천운(天運)의 태평과 비색을 뉘 알리오/ 나라의 안위를 미처 정하지 못했네/ 날랜 칼날 꺾이니 슬퍼한들 어쩌랴/ 충심은 언제나 외로우나 나라를 지탱치 못함이 한이로다/ 산하를 홀로 보며 이 노래 부르니/ 흰 구름 흐르는 물, 모두가 슬프구나.”([연려실기술] ‘都統使崔瑩被刑’)

최영의 정적조차 최영을 찬양했다. 이 절세의 충신이 어떻게 비참한 죽임을 당해야만 했는가? 이런 역설은 인간에게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1362년(공민왕 11년) 홍건적의 난에서 고려를 구한 장군 안우, 김득배, 이방실이 모두 처형됐을 때 청년 정몽주는 그 통렬한 분열 때문에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김득배제문]) 정치의 세계는 행복하지 않다. 애국적인 것이 반드시 보상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회군 직후 역성혁명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위화도회군 후 이성계를 왕위에 추대하고자 했던 조인옥의 묘. 그는 이성계의 매형 조인벽의 동생으로 이성계와 동향인 영흥인이었다.
숭인문 회의 후 초미의 문제는 누구를 왕으로 세울 것인가였다. 왕 옹립 문제를 둘러싸고, 회군파 내에 분열이 발생했다. “조민수는 이인임이 자신을 천거해준 은혜를 생각해 이인임의 외형제 이림(李琳)의 딸인 근비(謹妃)의 아들 창(昌)을 세우려고 마음먹었다”([조민수전])고 한다. 이림과 이인임은 고종사촌 사이다. 이림의 어머니 이씨는 이조년의 딸이니 이인임의 고모다. 이림의 딸 근비가 우왕의 제1비가 된 것도 이인임 덕분일 것이다. 조민수는 무공으로 공민왕대에 입신했다. 하지만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간 것은 우왕대다. 그는 우왕대 초기 임견미, 홍영통와 함께 내재추(內宰樞)였다. 내재추는 궁중에 상주하는 재추라는 뜻이다. 왕명의 보고와 전달을 장악해 국가사가 모두 이곳을 거친 후 시행됐다. 명목상 도평의사사가 국정 최고 의결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 명의 내재추 선에서 결정됐던 것이다. 임견미와 함께 이인임의 심복이 아니면 그러한 직위를 맡지 못했을 것이다.([林堅美傳]) 조민수는 1383년(우왕 9년) 최고위직인 판문하부사에 올랐다. 근비가 제1왕비가 된 것도, 그의 아들 창이 왕이 된 것도 결국 이인임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므로 창왕의 즉위는 이인임 세력의 재결집을 의미했다.

한편 이성계는 왕족 중 한 사람을 옹립하고자 했다. 아마 이성계는 훗날 공양왕이 된 정창군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후일 이성계파의 공식 견해는 회군 시 이성계가 “조민수와 더불어 다시 왕씨의 후손을 세울 것을 의논했는데 조민수도 역시 그렇게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왕을 폐위시키고, 우왕의 아들이 아닌 종친 중 한 사람을 옹립할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왕을 신돈의 아들로 보았기 때문이다.(非王說)

그런데 이성계는 회군을 전후해 여러 가지 대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이성계 자신이 직접 왕이 되는 것이었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남은이 조인옥 등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할 것을 은밀히 의논하고 태종에게 알리니, 태종이 말하기를 “이 큰일을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때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태조에게 돌아가 어떤 이는 많은 사람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천명과 인심이 이미 귀속한 데가 있는데 어찌 속히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지 않는가” 라 하였다.([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 35세의 남은, 22세의 이방원, 42세의 조인옥이 논의의 중심인물이었다. 조인옥은 이성계 자형의 동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조돈, 형은 조인벽이다. 조인벽이 이성계의 누이(정화공주)와 결혼했다. 몽고 지배기에 조돈 가문은 영흥 지방의 대표적 친원파였다. 그의 할아버지 조휘(趙暉)는 몽고 침입 시 투항한 뒤 쌍성총관이 되었고 그 후손이 대를 이어 총관직을 세습했다. 그러나 조돈은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호응해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쌍성 지역의 수복에 기여하고 고려에 귀화했다. 남은, 이방원, 조인옥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보좌한 최측근이자 적극적 행동대원이었다. 이들 이성계의 핵심 그룹에서는 회군 과정에서 이미 역성혁명을 강력히 고려하고 있었다.


▎고려 후기의 무신 조인벽의 사당인 동명서원. 조인벽은 이성계의 누이와 결혼했고 그의 동생 조인옥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크게 기여했다. / 사진:김영수
둘째는 섭정이었다. 윤소종과 정지(鄭地)가 그 제안자였다. “처음에 태조가 회군했을 때 윤소종이 군문 앞에 나아가 정지를 통해 뵙기를 청하고 곽광전(霍光傳)을 품에서 꺼내어 바쳤다. 태조가 조인옥으로 하여금 읽게 해 들었는데, 조인옥이 다시 왕씨 중에서 세워야 한다고 극력 설명하니, 태조가 옳게 여겼다.” [곽광전]의 정치적 의미는 신하에 의한 섭정이다. 곽광(?~68)은 한 무제의 신하로서 무제의 유언을 받들어 8세에 등극한 소제(昭帝)를 13년간 보좌했다. 소제가 후사 없이 죽자 유하(劉賀)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그가 향락에 빠져 방탕하자 한 달도 못돼 폐위시켰다. 곽광은 다시 한 문제의 증손자 유순(劉詢)을 옹립했는데 그가 선제(宣帝)다. 곽광의 사후 선제는 곽광 일족을 멸문시켰다. 하지만 곽광은 집권 20년간 조금도 허물이 없어 전설적 재상 이윤이나 주공에 비유됐다.

조인옥과 조준, 윤소종은 모두 허금의 절친한 벗들이었다. 조인옥은 처음 역성혁명을 주장했으나 이방원의 지적처럼 곧 시기상조임을 인식한 듯하다. 아마 윤소종, 정지, 조인옥은 [곽광전]의 의미를 사전에 공유하고 이성계를 찾았을 것이다. 뒤에 윤이·이초 사건으로 국문을 받을 때, 정지는 “이시중이 대의를 바탕으로 회군할 때 내가 이곽(伊霍)의 고사를 들어 시중에게 풍간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사람이 나서 한 번은 죽는 법이니 목숨이 무어 그리 아깝겠느냐? 다만 왕씨가 다시 왕위에 올랐는데도 억울하게 죽는 것이 비통할 따름이다”고 한 것을 보면 종친 중 한 사람을 추대하려고 했던 것이다.

섭정은 위험하다. 정통성이 없으므로 종말이 필연적으로 예정돼 있다. 단지 얼마나 버티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고금의 역사가 그랬고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이 그랬다. 이런 위험에도 당시 이성계에게는 섭정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명의 간섭 때문이었다. 만약 우왕을 죽이고 역성혁명을 시도한다면 명은 분명히 군주를 시해한 죄를 들어 끝없이 압박할 것이다. 이인임이 그 전례였다. 그렇다면 이성계에게 역성혁명은 일단 논외의 문제였다.

이색 지지로 1차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조민수


▎서한 시대의 정치가 곽광의 초상. 그는 한 무제의 유언에 따라 어린 소제를 잘 보좌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창읍왕 유하가 방탕하자 폐위시키고 선제를 즉위시켰다.
그렇다면 섭정은 가능할까? 거기에도 일말의 불안이 있다. 필요하다면 명은 섭정 역시 군신의 강상을 해친 행위로 공격할 수 있고, 대명관계는 다시 악화할 것이다. 그러면 사대주의를 표방하여 전쟁을 막고 대외관계를 안정시켰다는 회군파, 특히 이성계 그룹의 정치적 명분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는 국내 정치투쟁을 곤경에 빠트리는 것이다.

셋째, 마지막 대안은 우왕의 소생을 옹립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대명관계는 불안 요소가 없다. 요동정벌에 대한 책임을 들어 명은 우왕의 폐위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계 그룹에는 매우 위험한 선택이다. 친우왕-최영 세력이 언제 반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정치 세력과의 투쟁은 극복 가능한 것이다. 이성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왕의 소생을 옹립하고 국내정치에서 우위를 장악하면서 명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성계 그룹의 급진파는 이 정도의 타협은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런 대안이란 회군의 의미를 오직 대외정책의 전환에 한정하고 우왕대의 정치를 그대로 답습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국내정치의 측면에서 보면 최영을 제거함으로써 그 반대로 이인임 그룹을 부활시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회군의 역사적 의미는 오히려 무진정변을 뒤집는 것이 된다. 역사의 반동인 셈이다. 이 무렵 정도전과 조준 같은 이성계 그룹의 급진적 경세가들은 고려왕조를 뿌리부터 뒤집을 개혁을 구상하고 있었다.


▎우왕 때 관음포에서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운 정지 장군의 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동지인 그는 회군 후 윤소종과 함께 이성계에게 섭정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후 이성계 그룹의 견제를 받아 유배됐다. / 사진:김영수
결과적으로 회군파 내의 1차 권력투쟁에서는 조민수파가 승리했다. 조민수는 이색의 지지를 받았다. 조민수가 왕위계승 문제를 자문하자 그는 “마땅히 전왕(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왕조의 왕위계승 원리는 적장자 승계였으므로 이색의 의견은 원칙상 정당했다. 사실 종친을 옹립하려는 이성계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곤란한 점이 있었다. 우왕의 아들이 있는 한 종친을 옹립하려면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부정할 수 있는 더욱 강력한 논리가 필요했다. 이성계 그룹이 뒤에 주장한 논리는 우왕, 창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후손이라는 것이었다. 우왕의 혈통은 확실히 논란이 많았다. 공민왕 사후의 왕위 계승에서 공민왕의 친모 명덕태후는 우왕이 아닌 종친을 옹립하고자 했다. 우왕의 혈통을 의심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명덕태후가 그런 입장을 취했으므로 우왕의 정통성은 근본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14년이 지난 뒤 이것이 다시 문제가 된 것이다. 정통성 같은 근본 문제들은 정치에서 생명이 길다. 역사에서 그냥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반복된다.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무성한 가지를 뻗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돼 나타난다. 이것이 역사의 고질이 돼 긴 시간에 걸쳐 국가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조민수에게 일격을 당한 이성계는 분노했다. 이성계가 조민수에게 “회군할 때 한 말은 무엇인가?”라고 항의하자 조민수는 불쾌한 얼굴로 “원자를 세우는 일은 한산군(韓山君, 이색)이 이미 정한 계책이다.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연려실기술])라고 반박했다. 국가 중대사에 대한 이색의 절대적 권위를 느끼게 한다. 사실 개성 전투가 끝난 직후 이성계도 이색과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이를 보면 일개 문신인 이색이 왕실 어른이 가짐직한 정치적 권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종을 뛰어넘어 국사(國師)의 지위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조민수는 이를 이용해 무력의 열세를 극복했다. 이렇게 보면 회군 후 권력의 향방을 쥔 것은 이색이었다. 누가 왕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 했을 때 정통성에 대한 해석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권력은 관습상 왕실의 최고 어른이 가진 것이었다. 명덕태후 사후 그런 인물은 공식적으로 공민왕비 정비(定妃) 외에 없었지만 권위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이다.

이색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경쟁에서 조민수의 정치적 수완은 이성계보다 한 수 앞섰다. 조민수는 역사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무장은 아니고 상당한 정치적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다. 우왕 초기 대왜구 전투에서 그는 패전을 거듭했지만 많은 지휘관처럼 전투를 회피하지는 않았다. 그는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고 수차 작은 승리를 거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381년(우왕 7년) 종2품 지문하부사로 승진해 서북면 도체찰사가 되었다. 그때 정료위(定遼衛) 도사(都事) 고가노(高家奴)가 군졸 200여 명을 보내 압록강을 건너 무역하는 체 하면서 고려 국경을 정탐하게 했다. 나하추(納哈出)와 북원이 수차례 사자를 파견해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다는 소문을 듣고 진위를 알아보려 한 것이다. 정료위는 1371년 명이 요동에 처음 설치한 군정 기관이다. 고가노는 원의 요양행성 소속으로, 요양 노아산(老鴉山)에 주둔했다. 하지만 그는 1372년 9월 요동의 심장 요양을 들어 명군에 투항했다.

조민수는 요동을 둘러싼 명과 고려의 국제정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압록강을 건너온 장사치들이 정료위 군사임을 간파한 조민수는 “황제가 사무역을 엄금했다고 들었는데 너희가 어찌 명령을 어기고 우리 강토를 소란케 하느냐?”고 질책했다. 우왕 5년 주원장이 공공연히 고려와의 전쟁 가능성을 선언한 이래 우왕 7년은 양국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아 고려는 사신 파견조차 중단한 상태였다. 그런데 조민수의 조치는 고려가 주원장의 금령을 충실히 준수하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그는 또한 수시중에 임명되자 퇴직을 간청했다. 또 재상들과 함께 “군대와 나라를 유지할 비용이 넉넉하지 못하니 사급전(賜給田)·구분전(口分田)·사사전(寺社田)의 조세는 모두 국가에서 거두어 비용을 충당하게 하라”([曺敏修傳])고 건의했다. 권문세족과 승려의 특권을 제약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보면 조민수는 정치적 명분으로 세심하게 자신을 감쌀 줄 아는 무장이었다.

조민수의 의도는 단순했다. 이인임 노선으로의 복귀가 그의 대안이었다. 그것은 결국 유력한 권문세족들의 연합에 의한 지배, 즉 관습적 과두정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했다. 요컨대 위화도회군은 1차적으로 이인임 그룹에 의한 반격을 의미했다. 최영, 우왕과 제휴했던 이성계가 다시 이인임 그룹과 손을 잡고 회군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두 집단은 다시 분열됐다.

이색, 반개혁노선으로 이성계와 맞서다


▎1. 고려 말 국사(國師)이자 국가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색의 초상. 이색은 위화도회군 이후 조민수 노선을 지지해 창왕의 왕위계승을 찬성했다. 이후 그의 선택에 대해 많은 논쟁이 일었다. / 2. [고려사]에 기록된 이색의 행적. / 사진:김영수
이색은 결과적으로 이인임 노선을 지지하고 이성계 그룹을 위험시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반개혁노선이다. 그러나 공민왕대 이후 이색은 개혁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이색은 왜 이런 모순적 선택을 한 것일까? 아마 급진적 개혁이 왕조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을 예견했을 것이다. 급진적 개혁을 지지하던 정몽주는 1391년에 들어서야 이색의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런데 이색의 선택에는 훨씬 복잡한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첫째는 이색이 조민수의 위압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위험이 닥치자 이색은 자신이 창왕 옹립을 지지했다는 발언을 부인했다. 그는 조민수와의 대질심문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조민수가 이성계를 기만한 것인가? 또 이색은 왜 그 당시 즉각 항의하지 않은 것일까?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색은 자신이 조민수의 세력에 위압됐을 뿐만 아니라 우왕의 치세가 오래됐기 때문에 창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색의 위신에 상당한 손상을 끼치는 것이다. 1491년(공양왕 3년), 살벌한 권력투쟁 과정에서 이색을 구원하고자 했던 정몽주도 정적들에게 같은 논리를 제시했다.

“조민수는 창의 근친이니, 창을 세우고자 한 것은 조민수의 뜻입니다. 이때에 이색이 비록 종실을 세우고자 할지라도 조민수의 뜻을 빼앗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색의 죄는 응당 가벼운 죄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9월) 정몽주는 이색이 살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의 명예를 약간 훼손시키는 쪽이 좋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해 고려 말 정계의 중심으로 떠오른 조민수 장군의 묘. 회군 후 이인임 노선의 세력을 부활시키려고 했다. 훗날 이성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창녕에 유배됐다가 죽었다. / 사진:김영수
이색의 선택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상황논리다. 이색은 사적인 자리에서 “창왕이 왕씨가 아닌 사실을 알긴 했으나 정치적 혼란기에 새로운 분쟁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국에 그런 역사적 사례가 있었다. “옛날 진원제(晋元帝)가 왕위를 이었는데, 치당(致堂) 호인(胡寅)이 ‘원제의 성은 우씨(牛氏)인데 외람되게 (司馬氏인) 진의 종실에 붙었다. 동진(東晋)의 군신들이 어떻게 이를 그대로 두고 개혁하지 않았는가 하면 이는 필시 호갈(胡羯)이 번갈아 침입하여 강좌(江左, 양쯔강 남쪽)가 미약하므로, 만약 예부터 내려오는 왕업에 의지하지 않으면 인심을 안정시킬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두었으니 어렵고 쉬운 것도 없다. 이 또한 형세를 따라 일을 성취할 적에 부득이해서 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신씨를 세울 때에 감히 다른 의견을 내지 않은 것도 이러한 뜻에서다.([李穡傳]) 그는 원칙상 옳지는 않으나 상황에 적절한 방식을 택했다고 본 것이다.

진원제의 본명은 사마예(司馬睿, 276~323)로, 서진(西晉, 265~316)이 남흉노에게 멸망한 뒤 양쯔강 이남에서 동진(東晉, 317~420)을 건국했다. 사마예의 부친은 낭야공왕(琅邪恭王) 사마근(司馬覲), 모친은 하후광희(夏侯光姬)이다. 사마예는 어머니의 간통으로 낳은 자식이라는 설이 있다. [현석도](玄石圖)라는 참서에 ‘우계마후’(牛繼馬後), 즉 “소가 말의 뒤를 잇는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우씨가 사마씨를 잇는다는 예언이다. 그래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사마중달, 즉 사마의(司馬懿)는 수하의 장군 우금(牛金)을 독살했다. 그런데 후대에 하후광희가 우씨 성의 하급관리와 사통해 사마의를 낳아 예언이 실현됐다고 한다.([晉書] 卷6, ‘帝紀’6, 中宗元帝睿) 남북조 시대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에는 하후광희가 사마근의 부장 우금과 간통(與金姦通)했다고 직접 기술했다.([魏書] 卷96, 列傳 84, 僭晉司馬睿)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조선에서도 이익은 부인했고, 정약용은 믿었다. 호인(胡寅, 1098~1156)은 송의 학자이자 정치가다. 저서로 역사를 기술한 [독사관견](讀史管見), [서고천문](敘古千文)이 있는데, 주희가 [자치통감강목]을 저술할 때 많이 인용했다. 호갈은 돌궐계의 갈족이다. 5호16국 시대 초기 갈족의 지도자 석륵은 후조(後趙, 319~333)를 세워 양쯔강 이남의 동진과 대치했다.

이색이 실제로 이런 말을 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런데 세종대의 설순(偰循)에 의하면, 이색이 “세상사람이 나를 풍도(馮道, 882~954)라고 하지만 나는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고 했다 한다. 이색이 자신을 시세에 영합해 일신의 안일만 도모한 사람으로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풍도는 당 말기의 인물로 박학다식하고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다섯 왕조(후당·후진·요·후한·후주) 11명의 천자(天子)를 섬기며, 30년간 고관을 지냈고 20년 이상 재상을 지냈다. 유능하지만 지조 없는 인물의 전형이다. 하지만 풍도는 자신이 황제가 아니라 국가를 섬긴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세종은 “그 사실이 바로 풍도(馮道)와 같다. 이색은 진나라 때 사실을 이끌어 말했으나 그때는 북방의 오랑캐가 강성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다. 이것을 고려에 비교할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세종실록] 12년 11월 23일) 이색의 결정을 비판한 것이다.

이색의 선택에 대한 세 번째 해석은 이색이 확고하게 우왕의 편에 섰다는 것이다. 이색이 우왕의 복립을 꾀하면서, “이미 15년간 몸을 맡겨 신하가 됐으므로 가히 다시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없다”([李穡傳])고 말했다는 것이다. 설사 우왕의 혈통이 의심스럽다 해도 이미 15년간 복종한 이상 이를 부정하는 것은 의리에 합당치 않다는 주장이었다. 이색이 조민수의 위세나 상황의 불가피성 때문이 아니라 ‘군신의 의리’라는 보편적 가치에 의해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색 정적들의 견해다.

이 같은 논쟁은 단순한 권력투쟁을 넘어서 인간의 행위기준에 대한 복잡한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다. 이것은 이 시대의 권력투쟁이 지닌 특성이었다. 그 이전의 고려 정치에서는 이런 형이상학적 논쟁이 거의 없었다. 성리학이 도입된 이래 한국인들은 정치 세계를 보다 추상적인 이념의 틀에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식론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것이 진실인지 모른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진실일 뿐이다. 인간의 현실은 이처럼 다층적이고 다면적이다. 다만 이색이 명예를 지키고자 했다면 세 번째 해석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대체로 세 번째 입장을 지지했다. “임금(우왕, 창왕)을 폐한 뒤에도 목은과 같은 분들이 아직 남아 있어서 한 가닥 공정한 의논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때 정도전과 윤소종 등이 신우(辛禑)를 왕씨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충성한다고 하고, 왕씨라고 말하는 자는 반역자라는 논의를 부르짖어 조정을 혼란하게 하고 인심을 현혹해, 드디어 문학과 덕행이 있는 선비들을 살육하고 입을 봉하게 한 지 겨우 5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그러니 그 시대에 나서 바르고 곧은 것으로 굽히지 않는 이들은 삶의 고생이 어떠했겠는가.”([象村集])

승자의 역사에 기록된 이색 평가는 정당한가


▎조선 중기 지방 유림들이 목은 이색과 그의 부친인 이곡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충남 서천군에 문헌서원을 세웠다.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서원철폐령으로 한때 폐쇄되기도 했다.
공민왕대 이후 이색의 거취를 보면 조민수의 위세에 굴복했다는 정몽주의 설명은 이색을 구하려는 선의에서 나온 것이나 사실은 아닌 듯하다. 이색의 성품은 온화하고 타협적이었지만 중요한 문제에서는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유종이면서도 아버지 이곡을 위해 대장경을 간행했다. 고려왕조의 국시가 숭불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이념적으로 척불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국가의 안녕과 부모의 행복을 비는 불교행사는 관용한 것이다. 20대 초반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불의에 대해서도 극력 비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사 왕명이라 해도 부당한 것에는 결코 따르지 않았다. 1368년(공민왕 17년), 노국공주의 영전공사에 반대하는 시중 유탁을 처형하고자 공민왕은 이색에게 문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색은 “신이 차라리 죄를 받을지언정 어찌 감히 문서를 만들어 그 죄를 구성하겠습니까”라며 끝까지 거부했다.

이성계파가 왕조를 위협하는 가운데 길재는 장단의 별장에 은거한 이색을 찾아가 거취의 의리를 물었다. 이색은 “마땅히 각자가 자기의 뜻을 행할 것이다. 나 같은 무리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와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해야 하니 물러갈 수 없거니와 그대는 물러갈 만하다”([月汀漫筆])고 했다. 왕조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우왕이 폐위돼 강화에 유폐갔을 때, “미복(微服)으로 몰래 가서 뵈었다”([松窩雜記])고 한다. 반역죄의 혐의를 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1388년 이색은 명에 사신으로 갈 것을 자원했다. 집정대신의 친조는 우왕대 14년간 명의 요구였다. 중국에서도 명성을 지닌 이색의 사행은 그 요구에 부합했다. 표면상 이는 회군뒤 명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이성계의 외교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이색이 앞장서 돕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색의 목적은 그 반대였다. 그는 명의 감국(監國)과 창왕의 친조(親朝)를 요청했다. 이는 외형상 고려가 명에 철저히 복속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명과 대결할 의지가 없는 한 누구도 고려 왕실을 넘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1259년 고려가 원에 항복할 때 뒤에 원종이 된 태자 전(倎)이 쓴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색의 예상은 빗나갔다. 명은 고려의 내정에 개입할 의사가 없었다. 어쨌든 회군 뒤 이색의 행동은 매우 적극적인 것이었다. 1392년 정몽주가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했을 때도 적극 참여했다.

그런데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후예라는 입장(非王說)은 언제 결정된 것일까? 이성계에 따르면 회군 당시 이 점에 합의했다고 한다. 그것은 회군 이후의 정치적 계획에 대한 기본규약에 해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조금 의심스럽다. 그 경우 회군의 정치적 의미는 처음부터 일종의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회군 시 우왕에 대한 어떠한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고 회군의 정치적 의미를 최영의 제거로 극히 한정했다. 우왕의 제거를 결심한 것은 오히려 우왕의 야간기습이 감행된 후였다. 따라서 비왕설이 제기됐다면 아마도 회군 당시보다 우왕의 기습 뒤에 열린 숭인문 회의에서였을 것이다. 기록상으로도 이 시기에 윤소종이 이성계를 찾아가 [곽광전]을 바쳤다. 조선의 역사편찬자들은 회군 뒤의 역사적 진행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회군 초부터 비왕설이 합의됐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려주는 기록은 근거가 매우 모호하다.

결론적으로 조민수파와의 권력투쟁은 정치적 생존뿐만 아니라 회군의 정치적 의미를 둘러싼 정쟁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색에 대한 평가도 그가 누구를 지지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지지의 정치적·역사적 의미가 무엇이냐는 문제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이색의 선택에 대한 당대의 논쟁은 매우 정치적이고 공식적인 언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로가 언급할 수 없는 영역들이 숨겨져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예컨대 우와 창의 비왕설은 이성계파가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시키고 정적들을 공격하기 좋은 명분이었다. 창왕의 옹립을 주장한 이색을 반역자로 비판하는 것이 대표적 일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색이 아니라 이성계파야말로 왕 씨의 사직을 무너뜨린 존재였다. 이처럼 공식적 논쟁은 기만적인 언어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성계파가 득세한 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누구도 이 기만성을 폭로할 수 없었다. 단기적인 정국에서 볼 때 이색은 왕씨를 배반한 반역자로 비판받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반면 역사적 의미에서 볼 때 이색은 왕조의 수호자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반혁명 세력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만성이 이성계파의 혁명적 개혁이 지닌 의미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색이 지닌 역사적 의미는 조민수의 정치노선을 통해 이해할 수밖에 없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804호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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