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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5)] ‘영혼의 자식’ 남기고 간 히구치 이치요 

“당신 외에 누구에게 이 머리를 묶게 할까요” 

최치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24년 생애 동안 소설 22편 발표, 5000엔 권 삽화 인물로… 밑바닥 인생 사는 여인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어루만져

▎일본 영화 [신설국]의 한 장면. 중년의 실업가 시바노 쿠니오(오쿠다 에이지 분)는 선대부터 이어온 사업에 실패한 뒤 가족에게도 외면당하자 쓰키오카(月岡)를 찾아 이곳에서 생을 마무리하려 한다. 인근 온천의 젊은 게이샤인 모에코(유민, 일본명 후에키 유코)가 다가오면서 둘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된다.
"붓통의 애환이여, 뜻대로 안 되는 이 세상이여!” “나는 여자인 것을.”

절을 이어받아 운영해야 하는 남자 주인공 신뇨(神如)는 승려 수행 여행에 나선다. 수선화 한 송이를 당찬 소녀 미도리(美登利)의 격자문에 몰래 꽂아두고 떠난다. 미도리는 언니의 뒤를 이어 유곽(遊廓) 요시와라(吉原)에서 유녀(遊女)로 일해야 하는 소녀….

도쿄의 유곽을 배경으로 사춘기 청소년들의 다툼과 사랑, 이별을 그린 성장소설 [키 재기]는 일본의 ‘국민 소설’이라 할 정도로 유명하다.

메이지 시대 밑바닥 여인의 사랑과 삶을 그린 작가 히구치 이치요( 口一葉, 1872~1896). 이치요는 불꽃같은 24년의 짧은 삶을 살았다. 쌀독이 비어 끼니를 걱정하는 현실의 삶에서는 무참한 패배를 당했으나 문장으로 자신의 삶을 승화한다. 그녀는 마침내 2004년 일본 5000엔 권의 삽화 인물로 등장한다. 한 국가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고액권 화폐에 초상이 오르는 일은 불멸의 이름을 남긴 사람만이 가능하다.

아주 짧은 생애를 살다간 한 여류 소설가에게 일본인은 뜨거운 찬사로 화답했다. 일본 사회는 사랑으로 시작해 밑바닥 인생을 사는 여인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어루만진 이 작가의 진지함을 높이 샀다. 그녀는 소설 22편, 수필 5편, 통속 서간문을 발표하고 4000여 수의 와카(和歌)와 일기를 남겼다.

스승이자 마음속 연인이었던 그 남자

추운 아침이었다. 10시께부터 진눈깨비 섞인 비가 내렸다. 이치요는 홍고기쿠자카(本鄕菊坂)에 있는 집을 나왔다. 마사고(眞砂)마을 근처부터 마침내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키자카( 岐坂)에서부터 걷는 것을 포기하고 인력거를 잡았다. 구단자카(九段坂)를 오르자 호리바타거리(堀端通り)의 길에 쌓인 눈이 하얗게 빛났다. 히라카와 텐만구(平河天滿宮)를 넘어가면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 1861~1926)의 ‘은신처’는 이제 금방이다. 1892년(메이지 25년) 2월 4일 오후였다.

곧 스무 살이 되는 이치요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때였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도쿄 아사히신문의 소설기자 도스이에게 소설 지도를 받고 있었다. 알고 지낸 지 10개월이다. 도스이는 31세로 아내와 사별한 독신이었다. 결혼 후 1년 만에 죽은 아내의 관을 붙잡고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울부짖던 사내다. 이치요는 그런 남자로 살고 있던 도스이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눈은 계속 내렸다. 이치요는 처음으로 쓴 소설을 품속에 넣고 눈 속에서 도스이에게 가고 있다. 도스이는 신문에 통속소설을 연재하고 있었으며, 그 지도를 받는 것은 표면상의 이유였다. 도스이는 이치요에게 스승이자 연모의 마음을 품은 짝사랑의 정인(情人)이었다.

도스이는 장신에 미남자이며 언행도 부드러웠다. 10개월 전 처음 만난 날부터 이치요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계속 내리는 눈 속, 도스이와 이치요는 새롭게 창간하는 동인지 [무사시노(武野)]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치요는 품 안에 지참했던 [밤 벚꽃(闇櫻)]을 도스이에게 보여준다. [무사시노] 창간호에 게재한 그녀의 데뷔작이었다. 잠시 후 도스이는 이치요를 위해 팥죽을 만든다며 옆집에 솥을 빌리러 나간다. 옆집 젊은 아주머니가 “선생님 재미 좋겠어요”라고 놀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눈이 내리던 날 단 둘이 화로를 사이에 두고 팥죽을 먹으며 문학을 논했다. 정감은 그날의 눈처럼 쌓여갔다.

날은 어두워지고 도스이는 “눈이 많이 내렸으니 묵고 가라”고 말한다. ‘착각한’ 이치요는 몹시 동요한다. 도스이는 웃으면서 “나는 근처의 친구 집에 묵으니까”라고 덧붙인다. 이치요는 인력거를 불러 귀갓길에 나선다. 눈 덮인 마을을 보면서 머물 수 없어 떠나야만 했던 소녀의 가슴에는 눈물이 흘렀다.

이때 도스이는 31세, 이치요는 19세다. 화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팥죽을 먹는 정경의 이 [눈오는 날(雪の日)]은 가난과 고뇌로 점철된 이치요의 인생에서 큰 기쁨의 순간이었다. 살면서 아주 드물게 맞닥뜨렸던 진실의 순간이었다. 희망이 없는 희뿌연 세상 언뜻언뜻 보이는 푸르고 푸른 하늘 같았던 날의 풍경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단둘이 사제 이상의 정을 나눈다는 소문과 주변의 만류로 도스이와 단호한 결별의 수순을 밟는다. 이치요는 이날을 깊은 슬픔과 후회를 가져올 추억으로 가슴에 새겨둔다.

이치요는 그 눈 오는 날 1년 후, 일기에 도스이를 향한 연모의 정을 차곡차곡 기록한다. 일기가 공개된 것은 이치요 사후 16년이 경과한 1912년(메이지 45)이었다. 세상은 도스이에 대한 간절한 이치요의 사랑에 충격을 받는다.

열매 맺지 못한 수선화 같은 사랑

이치요가 2004년 일본의 5000엔 권 인물로 등장하면서 도스이는 이치요가 사랑한 연인으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다. ‘메이지, 다이쇼의 신문 소설가이며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남자’라는 타이틀이었다. 그러나 그는 메이지 문학사의 각주 정도에나 실릴 정도의 평범한 문인이자 신문기자였다. 둘은 열매를 맺지 못한 수선화 같은 사랑을 남겼다.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는 [춘향전]을 세계 최초로 번역한 아시히 신문의 조선 특파원이다. 유명한 여류 문인의 연모를 받은 덕에 나카라이 도스이는 고향인 쓰시마(對馬)에 문학관이 세워진다.

이 문학관이 게재한 설명을 보자. “도스이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약한 대표적인 대중 소설가다. 대륙으로 가는 관문 쓰시마 번 의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레쓰(洌), 아명은 센타로(泉太)다. 나카라이 가문은 속해 있었고 대대로 의사로 종사해왔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부산에서 소년기를 보내며 조선어를 익힌다.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 영문학학원에서 공부했다. 1881년에는 아사히신문 기자의 신분으로 조선에 건너갔다. 그 다음해에는 한국의 고전 [춘향전]을 세계 최초로 번역해 아사히신문에 연재했다. 1889년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연간 500회 이상을 게재한 해도 있다. 히구치 이치요가 소설 창작 지도를 받기 위해 도스이를 찾은 것은 1891년이며, 같은 해 도스이의 대표작인 [조선에 부는 모래바람(胡砂吹く風)]이 신문에 연재됐다. 1883년 [조선에 부는 모래바람]을 단행본으로 발간한 서적에는 이치요의 서가(序歌)가 머리말에 올려져 있다. 1904년에는 종군기자로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전후에는 후반기 대표작 [덴구회람(天狗廻)]을 신문에 연재했다.”

도스이가 지한파(知韓派)였음을 밝힌 프리라이터 요시나리 시게유키(吉成繁幸)가 2004년 민단 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보자. “메이지 유신에 대한 조선정부의 대응을 두고 일본 조야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나오고 있었다. 도스이가 부산에서 체재하고 있을 때 신정부는 무역 업무를 쓰시마번(對馬藩)에서 상사(商社)로 일방적으로 변경한다. 미쓰이구미(三井組)의 종업원을 부산으로 들여보냈다. 조선 정부는 관례를 무시했다고 격노하며, 왜관(倭館)의 정문에 항의문을 게시했다.

잊지 못할 세 남자… 구원의 길은 소설뿐


▎1. 24년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또렷한 발자취를 남긴 히구치 이치요. / 2.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나카라이 도스이. / 3. 히구치 이치요는 방대한 양의 일기를 남겼다. 김만중의 [구운몽]을 필사한 기록도 있다. / 4. 팥죽을 사이에 두고 문학을 논하는 이치요(왼쪽)와 도스이를 형상화한 모형.
이 항의문을 번역한 사람이 도스이이며 그의 번역은 그대로 일본 정부에 전해지고 ‘정한론’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진다. 도스이는 이런 냉각된 관계를 자신이 부추겼다고 자책한다. 1875년, 강화도에서 일본 군함 ‘운요호 포격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태에 일본 여론은 흥분하지만 신문 논조는 의외로 냉정하여 유력 신문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나 [유빈호치(郵便報知)] 등은 무력 행사 반대론을 전개했다. 15세 학생이었던 도스이도 [도쿄니치니치]에 무력행사 반대를 주장하는 글을 게재한다.”

1882년, 아버지의 조수로 다시 부산으로 건너간 그는 아사히신문 촉탁으로 부산 특파원이 된다. 그가 체재한 1887년까지의 5년간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이 일어났다. 도스이는 이 보도로 이름을 떨쳤으며, 아사히신문의 판매부수는 일거에 늘어난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조선의 화류계나 서민의 풍속 등 조선의 일상을 전하는 르포기사나 한글 입문과 같은 문화 자료를 다루는 데 있었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춘향전]을 세계 처음으로 번역해 [계림정화춘향전](桂林情話春香傳)이란 이름으로 소개한 일이다. 1892년 아사히는 그의 번역을 연재했다.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귀국 후 소설기자로 아사히신문사에 정식으로 입사한다. 일본의 문호로 일컬어지는 나쓰메 소세키보다 16년 먼저 이 신문사에서 소설을 연재한 작가다. 그의 대표작은 [조선에 부는 바람]으로 한일 혼혈인 주인공 하야시 마사모토(한국명 임정원)가 조선을 배경으로 부모의 원수를 갚는 무용담이 펼쳐진다.

소설은 조선의 정치·지리·역사·풍물·인정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으로 아사히신문에 150회에 걸쳐 실렸다. 이 소설의 권두를 이치요가 단가로 장식했다. 연재했던 시기는 이치요가 그와 ‘사제관계’를 맺었던 때다.

24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이치요에게는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정혼자에서 파혼자로 바뀐 시부야 사부로, 스승이자 마음속 연인이었던 도스이, 그리고 그녀를 첩으로 만들려고 했던 유명 점성가 구사카 요시타가(久佐賀義孝)다. 그러나 어떤 남자도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인생 욕망의 이정표는 소설이었다. 붓으로 세상에 자신의 못다한 사랑의 상처와 욕망과 고독을 외치기 시작한다.

이치요의 소설은 초기 연애소설에서 후기로 접어들며 차가운 현실세계에서 분투하는 여성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소설이 [흐린 강]이다. ‘기적의 14개월’이라 불리는 기간 동안 모든 것을 불꽃처럼 사른다.

한동안 글이 안 나와 고민하던 이치요는 글을 쓰려고 하는 주체할 수 없는 욕구에 사로잡힌다. 마법처럼 인물을 창조해내고 자신을 소설 주인공들에게 투영한다. 그 인물들을 통해서 자신의 사랑과 고독과 운명을 노래한다. 1894년 12월 이치요는 [섣달 그믐]을 발표한다. 그 후 [키 재기] [흐린 강] [열사흘 밤] [갈림길]을 차례차례 발표한다.

[흐린 강]은 그런 의미에서 이치요의 대표작이랄 수 있다. 오리키라는 작부의 삶과 죽음을 통해 사회의 냉혹한 현실과 삶의 지난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 것을 아는 듯 그녀는 격렬함 속으로 들어간다.

그중에서도 1년에 걸쳐 [문학계]에 연재한 [키 재기]는 모리 오가이(森鷗外), 고다 로한(幸田露伴), 사이토 로쿠(齋藤雨) 등 문단의 거두에게 격찬을 받는다. 히구치 이치요의 매력은 무엇일까? 예리하고 아름다운 문어체의 아름다움이 그 하나이지만 그것뿐은 아니다. 그 기적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분투를 거듭했던 삶이 그녀의 매력이다.

이치요는 여러 이유로 정규학교 교육을 제때 마치지 못하지만 그녀의 재능을 아쉽게 생각한 부친의 배려로 14세 때인 1886년 나가지마 우다코(中島歌子)의 가숙(歌塾) 하기노야에 입문한다. 이곳은 귀족 살롱의 정취가 있었으나 재능이 있는 사람도 모여들었다. 고전의 소양과 치카게류(千蔭流)라고 불리는 서법을 익힌다.

이치요는 다나베 다쓰코(田邊龍子), 이토 나쓰코(伊東夏子)와 함께 3대 재원으로 불린다. 다쓰코의 존재는 작가 이치요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치요는 와카(和歌)의 수행에 전력을 쏟는다.

1887년이 저물 무렵 15세인 이치요의 삶에 돌연 암운이 드리운다. 오빠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2년 후에는 아버지 노리요시(則義)가 사업 실패의 여파로 병사한다. 이치요는 시부야 사부로라고 하는 약혼자가 있었지만 이 일로 상대방으로부터 파혼을 당하기에 이른다.

1890년 9월 이치요는 어머니 다키(多喜), 여동생 구니와 함께 혼고기쿠자카(本鄕菊坂)로 이사한다. 그리고 일가는 바느질과 빨래로 생계를 이어가기 시작한다. 이치요는 다쓰코가 [덤불 속의 새]를 간행해 거액의 원고료를 받는 것에 놀란다.

진눈깨비 흩날리던 차가운 밤 세상과 작별

그리고 수입을 얻기 위해 소설을 쓸 결심을 한다. 이치요는 친구로부터 아사히신문 소설기자 도스이를 소개받는다. 이치요는 도스이를 소설의 스승으로 우러르기에 이른다. 이치요는 우에노의 도쿄 도서관에 다니며 도스이의 가르침을 받아 습작에 몰두한다. 도스이의 도움으로 작가의 길을 걷지만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동인지 [무사시노]가 곧바로 폐간됐기 때문이다.

도스이와 이치요의 사이에 소문이 일자 이치요는 도스이와 일방적으로 절교한다. 당시 미혼의 처자가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다소 이기적인 감이 있으나 작가를 꿈꿨기 때문에 스승으로서 도스이에게 한계를 느꼈을 수 있다. 도스이로부터 멀어진 이치요는 다나베 다쓰코에게 부탁해 소설 [버림받은 신세]를 잡지 [미야코노하나(都之花)]에 발표한다. 드디어 이치요는 문단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는다.

1893년 7월 이치요 일가는 지금의 이치요 기념관이 있는 시타야류센지초(下谷龍泉寺町)로 이사를 하고 잡화와 과자를 파는 가게를 연다. 그러나 생활 곤궁함은 나아지지 않는다. 류센지초(龍泉寺町)는 환락가 요시와라와 함께 살아가는 거리다. 이 빈곤한 거리에서 듣고 본 일이 이치요를 인간적으로 성장시켜 문학적 재능을 개화시킨다.

생활이 궁핍했던 이치요는 추가로 부채를 더 짊어진다. 스승인 나카지마 우다코에게 진 빚도 늘고, 첩이 되면 생계를 보장해주겠다는 제의를 유명한 점성가 구사카 요시타가(久佐賀義孝)에게서 받기도 한다. 동문인 다쓰코 등이 가숙(家塾)을 연 것을 듣고 질투와 초조함으로 애를 태우기도 한다.

1894년 6월 이치요는 혼고구마루야마후쿠야마초(本區丸山福山町)로 이사한다. 그리고 하기노사의 조교가 되지만 급료는 2원으로 집세에도 못 미쳤다. 이치요는 가난한 자신에게 유곽에서 삶을 버텨내는 슬픈 여인들의 모습을 중첩시킨다. 여자 혼자 살기에 이 시기는 너무 힘들었다. 이때부터 이치요의 집에는 히라타 도쿠보쿠(平田禿木), 바바고초(馬場孤蝶)등 문학계 동인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들이 방문한다. 이치요의 집은 마치 근대 일본문학 살롱 같았다. 청년들과 열띤 토론을 거치면서 이치요의 창작의욕은 더욱 타올랐다.

그러나 드디어 작가로서 절정을 향해 치닫는 무렵 이치요의 신체에 이상이 나타났다. 모리 오가이의 소개로 동경제대의 아오야마(靑山) 교수로부터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이내 손을 쓸 수 없었다. 1896년 11월 23일 이치요는 겨우 24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철야의 밤, 도스이 등 일부 문인이 이치요 집에 모여들었다. 진눈깨비가 비에 섞여 내리는 차가운 밤이었다. 장례식 참가자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변화의 여명을 붓으로 열다


▎히구치 이치요가 삽화 인물로 등장한 일본의 5000엔 권.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니 참으로 나는 여자인 것을, 무슨 생각 있다한들 그대로 이뤄지겠는가? (…) 나는 여자요, 아무리 좋은 뜻이 있다한들 그대로 이 세상에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_[수상일기](1896년 2월)

그녀의 사후 여동생 구니, 그를 따르던 문인 바바 고초, 사이토 로쿠 등이 전력을 기울여 이치요의 작품을 모아줬기 때문에 초고(初稿)·일기·편지 등이 세상에 나와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를 읽는 한 우리는 이치요가 불행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치요는 당시의 낭만적인 정열을 지닌 청년들이 동경하는 대상이었다. 빈곤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 닫혔거나 닫았던 마음을 열게 해줬기 때문이다. 이치요의 기적의 14개월은 실로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래도 5000엔 권 지폐 안에 무표정하게 있는 이치요를 바라보면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든다. 곤궁한 삶을 산 예술가가 고액권 화폐에 등장하다니 정말로 얄궂은 일이다.

일본의 엔카 가수 가와노 나쓰미(川野夏美)가 2007년 발표한 [사랑의 수선화(戀水仙)]라는 노래는 바로 소설 [키 재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승려 신뇨가 격자문에 두고 간 수선화 한 송이를 보면서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한층 성숙해진 소녀 미도리가 부르는 사랑노래다.

어릴 적부터 키 재기 놀이를 하면서 지낸 편한 사이였지만 어느덧 사랑의 감정을 품는 남녀로 자리를 잡았다. 뭐든지 서투른 신뇨는 나막신 끈도 묶지 못했다. ‘어떻게 수행을 떠났을까’ 걱정하는 미도리는 자신이 신을 묶어줘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혼자 부끄러워하면서 추억을 생각한다. 이 소재는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

9세기 초 일본 최초의 노래 이야기 소설집인 [이세 이야기(伊勢物語)]는 총 125단의 이야기가 있다. 제23단은 ‘우물벽(筒井筒)’이다. 이치요의 [키 재기]라는 제목이 이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보인다. 이야기는 소꿉친구가 자라서 사랑으로 감정이 변화하는 흐름이다.

원작은 역시 힘이 세서 자손을 많이 거느린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소꿉친구 첫사랑을 늘 ‘우물벽’이라 칭한다. 시·노래·소설·드라마에 등장하는 단어다. 내용이 우선 흥미롭고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감동적이다.

어린 시절 우물 주위에서 놀던 소꿉 남녀가 있었다. 두 사람은 커서 서로 얼굴을 마주 바라보는 것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소년은 가슴속에 그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고 소녀도 이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싶었다. 성인된 남자가 여인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우물벽’이라는 노래다.

“이제 우물 난간을 넘어버린 것 같아요. 당신을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筒井つの 井筒にかけしまろがたけ/ 過ぎにけらしな 妹見ざるまに)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첫사랑 그녀도 답가를 보낸다.

“(당신과 길이를) 견주던 나의 가르마 탄 머리도, (길게 자라) 어깨를 넘었습니다. 당신 외에 그 누구에게 이 머리를 묶게 할까요.”
(くらべこしふりわけも 肩すぎぬ/ 君ならずて たれかあぐべき)


이런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결혼에 이른다. 첫사랑을 떠올리는 일본인의 심성에는 어린 시절 함께 키를 재며 같이 놀던 ‘우물벽’이란 이야기가 자리를 틀었다.

2004년 일본 정부는 이치요를 5000엔 권의 인물로 선정한다. 지폐의 도안은 20년마다 신권 디자인으로 바뀐다고 한다. 이전에는 [무사도]로 일본의 정신을 세계에 알린 작가 니토베 이나조(新渡造)가 5000엔 권 인물이었다.

사랑과 불멸의 이름을 사람들 가슴에

도안 변경 당시에 이미 여성 인물을 내세우기로 내정했었다. 여성으로는 1881년 발행한 지폐에 등장한 신공황후 이후 123년 만에 두 번째다. 일본은 1999년 남녀공동참여사회기본법을 제정한다. 이 법률은 남녀평등과 상호존중을 추진해 여성이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취지다.

히구치 이치요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가장 심했던 메이지 시대에 변화의 여명을 붓으로 연 작가다. 여성으로 이름을 남긴 문화인이자 여러 조건을 충족시킨 인물이다. 바야흐로 화폐에서도 사무라이 시대가 저물고 여성들의 시대가 열린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사무라이의 칼이 아니라 이제는 대지의 품성을 지닌 여성의 덕이다.


▎기모노를 곱게 차려 입은 일본 게이샤들.
한 사람의 가슴속에 사랑의 기억을 남겨놓기도 지난(至難)한 일이다. 히구치 이치요는 1억3000만 일본 국민과 매년 일본을 찾아오는 30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의 가슴에 사랑의 수선화를 건네고 있다. 소설을 포함한 문학은 존재의 어둠 속에서 세계를 향해 부르짖는 고독한 외침이다. 삶이 고독을 견디는 일이듯이 문학도 고독을 이기려는 의지다.

이치요는 궁핍하고 외로운 삶에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간 작가다. 그녀는 외롭게 죽어갔으나 사랑과 불멸의 이름을 사람들 가슴에 심었다. 가부장적 사회의 치부가 잘 드러나는 유곽을 작품 배경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계층적 질서를 뒤집어버림으로써 일약 유명해진다.

이치요가 사랑·곤궁함·고통을 불사르며 남긴 것은 처연한 슬픔과 불멸의 이름이다. 맺을 수 없는 슬픈 사랑으로 시작해 현실에 존재하는 가련한 밑바닥 인생을 자신의 삶과 견주면서 시대와 세상을 그린 작가였다. 그의 시선은 뜨거웠고 세상은 차가웠다. 이치요는 에로스의 사랑 대신 밑바닥 여인들의 삶을 사랑하며 ‘영혼의 자식’을 남기고 갔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 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805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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