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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6)] 14세기 말, 고려의 토지와 인간 

백성의 땅에서 권력의 수탈 피할 곳 없구나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왕권 약화하고 대외무역 늘면서 토지 사유화 폐단 늘어…수확물보다 조세 많아 가족 빼앗기고 고향 떠난 유랑민 급증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이후 창왕이 아홉 살 나이로 즉위한 뒤 토지제도 개혁은 고려의 최대 현안이었다. 고려 말의 전제(田制)는 공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한 채 권문세족의 사익의 도구로 전락했다. 의식 있는 관료들은 전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나라를 일으킬 수 없다며 연일 개혁을 촉구했다.


▎1388년(우왕 14) 조준의 전제개혁 상소. 사전을 폐지하고 공전을 회복하기 위해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사진:네이버 국역 [고려사]
1388년 7월, 창왕의 즉위 직후 조준은 장문의 전제개혁 상소문을 올렸다. 토지문제의 난맥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외침이 하늘에 사무친다는 내용이었다. “백성이 사전(私田)의 세금을 낼 때 남에게 빌려서도 능히 충당하지 못 하며, 처자식을 팔아도 빌린 것을 능히 갚을 수 없고, 부모가 주리고 떨어도 봉양할 수 없으니, 원통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위로 하늘에 사무쳐 화기(和氣)를 해쳐서 물난리와 가뭄을 부릅니다. 이로 인해 호구가 텅 비게 되고, 왜구가 깊이 들어와 천리에 시신이 널려 있어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사전이란 국가가 관료나 공신 등에게 지급하고, 이들이 백성들에게 직접 조세를 받는 토지다.

전근대 민서(民庶)의 삶은 고달팠다. “봄에 쟁기질 하고, 여름에 제초질하고, 가을에 추수를 하여, 겨울에는 비축을 한다. 봄에는 풍진에, 여름에는 혹서에, 가을에는 습우(濕雨)에, 겨울에는 한랭에 내맡겨져 있다. 네 계절에 휴식이라곤 없다. 이렇듯 열심히 고된 생계를 꾸려 가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홍수와 가뭄과 재해, 정치적 탄압과 학대, 갑작스런 정세, 관아의 극히 변덕스런 명령들 등등이 가중된다. 재산이라도 가진 자들은 그것을 반 가격으로 팔아치우지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은 두 배에 달하는 이자로 빚을 낸다. 이러한 이유에서 많은 사람이 빚을 갚기 위해서 자기 땅과 집을 팔고, 심지어는 자기 자식들까지 팔고 있는 것이다.”([한서(漢書)] ‘식화지’ 上; 송영배, [중국사회사상사], 222쪽) 한나라 경제 때 조착(晁錯, BC 200~154)의 글이다.

고려 말 최대의 개혁 현안은 토지문제였다. 25세의 청년 이색은 공민왕 원년(1352)에 올린 상소에서, “신은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고 정전(井田)을 고르게 하는 일이야말로 치인의 급선무’라고 들었습니다. 조종이 만들어 물려준 제도와 지킬 규범은 지극히 옳은 것이었으나 400여 년이 흐른 지금 폐단이 어찌 전혀 없겠습니까? 그 가운데 전제(田制)가 특히 심각합니다”([이색전(李穡傳)])라고 말했다.

고려 말에도 수차 전제 개혁안이 제시되었다. 충목왕 원년(1345) 이제현의 개혁안, 위의 이색의 상소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제현의 개혁안은 왕의 식읍, 그리고 경기 지역 녹과전에 대한 겸병의 폐지만을 목표로 했다. 이색도 불법적 토지겸병과 과도한 조세 수취를 지적한 뒤, 충숙왕 원년(1314) 완성된 토지대장인 갑인주안(甲寅柱案)에 따라 불법을 시정할 것을 제안했다. 충목왕 원년 원순제와 기황후의 지지 하에 추진된 전제개혁이나, 신돈 집권기의 전제개혁도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국운 되돌릴 방법은 전제개혁뿐


▎김홍도의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조선 후기에 본격화된 이앙법으로 수전에 모내기를 하는 모습이다.
전근대 국가에서 전제는 국가의 운명 그 자체다. 조준의 개혁상소를 보자. “대저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로부터 시작되니, 전제를 바르게 하여 국용을 풍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히 함은 당금의 급무입니다. 국가 존속의 장단은 민생의 고락에서 나오고, 민생의 고락은 전제의 균부(均否)에 있습니다. 문왕·무왕·주공은 정전(井田)에 의해 양민(養民)하였기 때문에 주나라가 천하를 800여 년 동안 유지했으며, 한나라는 전세를 가볍게 하여 천하를 400여 년 동안 가졌습니다. 진나라는 정전을 무너뜨려 천하를 얻은 지 두 세대 만에 망했습니다.”([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전제는 군사력보다 중요하다. 태조 왕건은 이 원칙의 신봉자였다. “태조께서 용흥(龍興)하시어 즉위한지 34일에 군신을 만나 개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근세에 포학한 수렴으로 일경(一頃)의 세금이 6석에 이르니 백성은 조금도 생을 편안히 할 수 없다. 나는 이를 심히 불쌍하게 여기니, 지금부터는 마땅히 십일제(什一制, 1/10세)를 써서 밭 일부(一負)에 세금 세 홉을 내게 하라’ 하시고, 마침내 3년의 조세를 민간에게 면제하였습니다. 당시는 삼국이 정립하여 군웅이 각축했으므로 재용이 매우 급하였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전공을 뒤로 하고 백성을 먼저 진휼하시니, 이는 천지가 만물을 기르는 마음이요 요순과 문무의 인정입니다.”([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그러나 전제는 국가재정과 민생 문제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전제는 관료제와 국방, 나아가 문명 그 자체를 결정한다. 조인옥의 견해다. “조종께서 밭을 나눈 제도에 따라 왕이 몸소 적전(籍田)을 경작하는 것은 천지와 종묘의 제사를 받들기 위함이요, 360장처의 전토는 주상께 봉공코자 함이며, 전시, 구분전(口分田)은 사대부를 우대하여 염치를 닦고자 함이며, 주·부·군·현·향·소·부곡·진·역의 아전부터 국역을 제공하는 모든 사람이 밭을 받지 않음이 없는 것은 민생을 후히 함으로써 국가의 근본을 키우려는 것이며, 42도부 4만 2천의 병사에게 모두 전토를 주는 것은 무비를 소중히 하려는 까닭이었습니다.”([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토지는 이처럼 상징적 제의로부터 국방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모든 기능, 그리고 이와 결부된 역할분담(國役)과 관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토지가 개인에게 점유되어 사전화될 경우, 국역자들은 공적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없었다. 국가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이다.

인륜도 전제에 달려 있다. 맹자는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고 말했다. 조준 역시 사전 개혁으로 “예의가 일어나고 염치가 행하며 인륜이 밝아지고 소송이 종식되어, 사직의 기초가 반석같이 편안하고 태산같이 튼튼해진다”고 주장한다. ‘필요(needs)’의 영역이 정의롭지 않고는 인간의 정신문명도 위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고려 말의 전제는 공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했다. 위기의 근본 원인은 ‘사전화(私田化)’에 있었다. 토지의 공적 기능이 대부분 잠식되고 사익만이 추구된 것이다. 구체적인 문제는 권문세족들의 겸병과 수조체제의 혼란이었다. 고려의 전제는 국전제였다.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에 속했다. 백성에게는 토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농민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소작인으로서, 땅을 경작하는 대신 조세와 공물, 부역을 바친다.

국전제 명분 뒤에 귀족들의 사익 도구화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논갈이’. 갈이는 풀을 제거하고 흙을 고르게 부수어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토지는 어떻게 분배했는가? 국가에서의 역할, 즉 국역에 따라 분배되었다. 고려의 전제는 크게 다섯 번 바뀌었다. 940년 태조 왕건 때의 역분전, 975년 경종 때의 시정전시과, 998년 목종대의 개정전시과, 1076년 문종대의 경정전시과, 1257년 고종대의 녹과전제다. 앞의 네 차례는 기본적으로 지방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해 가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역분전의 분배 기준은 인품과 관품이었다. 인품이란 건국 과정에서의 공로를 뜻한다. 즉, 공로의 다과, 관직의 고하에 따른 것이다. 건국기의 고려는 기본적으로 호족연합국가로서, 호족과 관료가 뒤섞여 있었다. 시정전시과는 인품을 약화시키고, 기본적으로 관품에 따랐다. 호족을 약화시킨 것이다. 토지는 전현직 관리 모두에게 지급되었다. 개정전시과는 오직 관품에 따랐다. 호족이 배제되고 중앙집권국가가 완성된 것이다. 경정전시과에서는 전직관리가 배제되었다.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전시과의 규정대로라면 약 87만 결의 토지가 필요했다. 그런데 1388년 위화도회군 뒤의 양전을 보면 가용 토지는 50만 결에 그쳤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222쪽)

토지의 분배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왕실 비용을 충당하는 내장전(內庄田)이다. 둘째, 중앙정부의 운영비를 조달하는 토지다.(공해전, 둔전, 학전, 적전 등) 이상 둘이 공전(公田)이다. 셋째, 왕족, 사원, 관료, 중앙군에 지급된 사전(私田)이다.(궁원전, 사원전, 양반전, 군인전) 조세를 개인이 직접 거두므로 사전이다. 문관 424명, 무관 3589명, 마군과 보군 약 3만~4만 명, 군현의 호장층을 합해 약 5만여 명이 농민의 소출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호장층을 빼면 모두 개경에 사는 군인이었다. 개경 근교까지 약 50만 명이 모여 살았다.

그런데 경정전시과는 곧 중단되고, 녹봉제가 시행되었다. 국가가 조세를 일괄 수령하여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전시과 체제에서는 관인 등 수조권자가 농민에게 직접 조세를 받았다. 녹봉제는 양자의 직접적 관계를 끊은 것이다. 요컨대 중앙집권화의 완성을 의도한 것이다. “녹봉제의 시행은 모든 직역자에 대한 보수체제를 통일적인 관료제적 질서로 정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려왕조의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에 있어서 일대 획기를 이루었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224쪽) 이를 계기로 “10~11세기 전시과체제에서 귀족, 관료의 세습적 가산으로 존재한 사전은 12세기 이후 점차 그 모습을 감추었다.”(이영훈, 앞의 책, 227쪽)

농민도 전호(佃戶)의 신분을 획득했다. 국가의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전 농민이 국가와 직접 연결된 것이다. 그런데 통일신라의 왕토주의나 고려의 국전제는 그저 이념일 뿐 토지는 실제 사유지였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고려의 전제가 공전제이며 토지의 사유는 인정되지 않았다고 한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토지의 매매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물론 공전이라 해도, 국가의 소유권과 귀족·관료의 수조권, 농민의 경작권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했다.

고려의 공전제가 결정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무신 집권기 때부터였다. 몽고와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녹봉을 지급할 수 없었다. 녹봉 360석의 재상이 고작 30석을 받았다. 그래서 1257년 녹봉제가 폐지되고 녹과전제가 시행되었다. 182년 만에 다시 토지를 분급한 것이다. 단지 사전의 확대를 막기 위해 경기도에 한정했다. 단 왕족, 귀족에게 지급한 별사전, 사급전은 예외였다. 이것이 문제였다.

국가 기강 무너지고 백성들은 피폐해져


▎정전제(井田制)의 도해. 사방 1리의 토지를 9개로 나눠 8개 구역은 사전으로 하고 가운데 1개는 공전으로 정해 이 구역의 소출은 조세로 바치도록 했다. / 사진:중국 [유기백과]
공민왕 15년(1366), 신돈이 전제개혁을 단행할 때 공포한 방문을 보자. “최근 국가 기강이 크게 무너지고 백성의 재물을 탈취하는 일이 유행을 이루어 종묘·학교·창고·사사(寺社)·녹전(祿轉)·군수전(軍須田) 및 국인의 세습 전민(田民)을 권세가가 거의 다 점탈했다. 반환 결정이 내려도 그대로 차지하고 있고, 혹 양민을 노비로 만든다. 주·현의 역리·관노·백성 가운데 국역을 피한 자들을 모조리 숨겨 놓고 농장을 크게 일으켜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쇠잔케 하니, 하늘도 분노해 홍수와 가뭄을 내리고 돌림병 또한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신돈전(辛旽傳)])

이를 보면, 강력한 겸병운동이 발생해 공사전은 물론이고 왕의 소유지까지 잠식당했음을 알 수 있다. 조준의 상소를 보자. “근년에 이르러 겸병이 더욱 심하여 간흉한 무리가 주군을 포함하여 산천으로 표를 삼아 모두 이를 가리켜 조업전(祖業田)이라 하여 서로 밀치고 서로 빼앗아 서로 훔치고 서로 빼앗으니 1무의 주인이 대여섯 명을 넘기기도 하며 1년에 가져가는 조세가 여덟아홉 차례에 이르기도 합니다. 위로는 어분전(御分田)으로부터 종실·공신·시조(侍朝)하는 문무관원의 전지, 외역(外役)·진(津)·역(驛)·원(院)·관(館)의 전토와 무릇 사람들이 누세에 걸쳐 심은 뽕나무와 지은 바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빼앗아 가지매 슬프게도 우리 무고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조정에서 분급한 토지는 신민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제는 신민을 해치기에 알맞게 되었으니 이는 사전(私田)이 난리의 괴수가 된 것입니다.”([고려사], ‘식화1’, 전제-녹과전)

탈점의 방법은 첫째, 권력을 이용한 것이다. 원 지배기의 권문세족은 왕도 제어하기 어려웠다. 대개 원 조정에 후원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344년 전제개혁 때, 기황후가 “무릇 나의 친척은 세력을 믿고 남의 전민을 빼앗지 말라. 만약 어기면 반드시 죄주리라”고 경고하였던 사례는 이를 보여준다. 심지어 개혁의 심벌인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조차 남의 노비를 빼앗아 피해자가 문 앞에서 목을 매고 죽기도 했다. “이진이 이제현의 세력을 믿고 남의 노비를 많이 빼앗자, 애소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그 집 앞에 줄을 섰다. 교감(校勘) 최면이 이진의 집 문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이진전(李傳)])

둘째, 지방관과의 결탁이다. 지방관은 대개 중앙관청의 하급보조직인 부사(府史)와 서리 출신이었다. 이들은 “남의 전답과 백성을 빼앗아 권문에 바치고, 권신의 우마와 매, 개를 길러 아첨하여 승진의 매개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탐오하고 잔폭한 화가 서리보다 심했다.”([고려사], ‘선거지3’, 선용수령, 창왕) 지방의 서리도 비슷했다. 충목왕 3년, 양광도 안찰사 김두는 재상 채하중에게 공전을 뇌물로 바친 이천현리의 귀를 베었다.([왕후전(王傳)]) 이런 일은 고려 중기 이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주현의 서리가 공사전을 주인 없는 땅(閑地)이라고 하여 권세가에 바친 결과 한 토지에 여러 명의 주인이 생기고, 그 부담은 농민이 모두 지게 되었다.

셋째, 사급전(賜給田)을 이용한 탈점이다. 사급전은 왕족이나 공신에게 하사하는 것이다. 원래는 노는 땅(閑田)을 개간하려는 국가의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패를 빙자하여 비록 주인이 있고 전적에 올라 있는 전토도 모두 빼앗”는 폐단이 보편화되었다. 고려 후기의 왕들은 충성을 확보하고자 측근들에게 무분별하게 사패를 나눠주었다. “여러 공신과 권세가가 사패를 함부로 받아 스스로 본전(本田)이라 칭하고 산천으로써 표를 삼아 앞다투어 문서를 위조해 탈점(據執)”했다.([고려사], ‘식화지1’, 녹과전, 충목왕)

그런데 왜 강력한 사전화 운동이 발생한 것일까?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농업생산성의 향상이며, 둘째, 국가의 약화다. 9세기 후반 고려 인구는 200만이었다. 12세기 전반은 300만, 1392년은 555만으로, 고려 초에 비해 약 3배 증가했다. 그만큼 농업생산력이 높아진 것이다. “11~14세기에 걸쳐 수전의 생산성이 2~3배 증가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324~325쪽)

농업생산성이 증가한 원인은 팍스 몽골리카 하의 농업기술의 발전, 그리고 대외무역의 확대로 인한 것이었다. 28년에 걸친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는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었다. 1254년에는 포로로 잡혀간 남녀가 20만680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13세기 말 피해가 거의 복구되었다.

“1296년에는 개경에 1008개의 기둥으로 연결된 긴 복도의 시전(市廛)이 다시 세워졌다. 그보다 앞서 1279년에는 원과의 역참로가 개통되었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한반도에서 발칸반도까지, 베트남에서 헝가리까지, 시베리아에서 인도까지의 광활한 유라시아대륙과, 지중해에서 인도양을 거쳐 동지나해와 발해만에 이르는 광대한 해원(海原)을 종횡으로 엮는 대몽골 울루스에 깊숙이 포섭되었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277~280쪽) 국제무역도 번성했다.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무역선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배는 1323년 중국 영파를 떠나 일본으로 가던 중 난파했는데, 발굴된 2만 점의 자기 중에는 고려청자도 포함되어 있다.

팍스 몽골리카 하 고려의 대외무역은 [노걸대(老乞大)]라는 책에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원제국을 방문하던 상인들의 언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려 정부가 발행한 일종의 어학 교습서”다.(이강한, [고려와 원제국의 교역의 역사], 193쪽) 책이 나올 정도로 고려 상인의 수가 적지 않았다. 책은 “상인이 고려를 떠나 원 대도에 도착, 무역을 벌이는 과정을 따라간다. (…) 관인 무역 허가증을 지니고 있고, 고려-원 간을 정기적으로 왕래하며, 원내에서 모시천을 파는 친척을 가진 자”로 설정돼 있다.

인삼과 모시가 유력한 수출품이었다. “고려 인삼의 경우 ‘선상(船商) 거상(車商)이 다퉈 인삼을 매입하여 원방(遠方, 중국)에서 높은 가격으로 팔았으며 이에 따라 관가도 이익을 탐했다.’는 기사를 통해 이전부터 그 수출 규모가 컸음을 엿볼 수 있다. 고려 모시의 경우도 원제국의 수요가 높아 수출 열기가 지속되었다. 특히 견직업, 저직업의 규모가 비대해져 생산구조가 왜곡될 정도였다.”(이강한, [고려와 원제국의 교역의 역사], 195쪽)

무역에 투자한 권세가들이 농장에 밭작물 대신 모시를 심게 해 소작농이 곡물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역에 대한 욕망은 꽤 크고 일반화되었던 듯하다. “권세가들이 다투어 무역을 하느라 초피(貂皮)·송자(松子)·인삼·봉밀(蜂蜜)·황랍·미두 등 거둬들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너무 고통을 겪는 나머지 노인과 어린 아이를 데리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유랑을 떠나니 참으로 통곡할 만한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백성들로부터 억지 구매하는 짓(抑買)은 일절 금지하고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엄격히 법에 따라 처벌하소서.”([조준전(趙浚傳)])

왕은 장사치로, 장사치는 돈으로 권력 매수


▎13세기 팍스 몽골리카 시대의 세계 무역지도. 몽골은 정복지역 전체에 역참을 두고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해 세계적인 규모의 안정적인 교역 시대를 열었다. / 사진:지식공유사이트 ‘슬라이드셰어’ (www.slideshare.net)
고려는 모시, 인삼, 말을 수출하고 견직물을 수입했다. “고려 상인들은 직물류 등 고려 물자를 원에 수출해 3분의 1 정도의 차익을 얻고, 중국 물자를 수입해 고려에서 두 배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함으로써 100%의 이익을 거두는 식의 무역전략을 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들도 직접 무역에 나섰다.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이 대표적이다.

1342년 충혜왕은 의성·덕천창·보흥고의 포 4만8000으로 점포를 열고 시중에서 거래했다. 또한 2만 필의 포화를 원에 보내, “측근 남궁신으로 하여금 금은·초 그리고 포를 유(幽)·연(燕) 지역에서 무역하게 했다.”([고려사] 세가 충혜왕 복위3년 3월 병신; 이강한, 앞의 책, 237쪽) 충혜왕의 대리상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무슬림 상인인 회회인(回回人)이었다.

천민 중에도 거상이 탄생했다. 우왕대의 지불배(池佛陪)와 변벌개(邊伐介)라는 인물이다. 우왕 9년(1283) 어떤 사람이 도길부의 문에 글을 써 붙이기를, “지불배가 대사헌이 되고 변벌개가 장령이 되었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신분이 본래 용렬하고 미천하니 시정(市井)에서 생장하여 간사하고 탐욕스럽고 아첨을 일삼은 자로 일찍이 한 번도 진신(縉紳, 고급관인)과 나란히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글로써 희롱한 것이다.([이인임전(李仁任傳)])

시정(市井)에서 생장했다고 하니, 이들은 시전의 상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인임의 사위 도길부를 재력으로 매수해 고관에 올랐을 것이다. 변벌개는 실제로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385년(우왕 11)에는 사복부정(司僕副正)으로서 국가의 마필을 관리하였다. 당시 고려 정부도 납속보관제(納粟補官制)를 실시해 관직을 팔았다.(강재광, ‘고려 거상의 현대적 조명: 변벌개’)

농업기술의 발달을 보자. 고려전기의 경지이용방식은 휴한농법이었다. 토지가 척박하여 해를 걸러 농사를 짓는 것이다. “10세기만 하더라도 1년 1작의 상등전은 드물었고, 2년 1작의 중등전이나 3년 1작의 하등전이 일반적이었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288쪽) 12세기 이후 농업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수리사업의 발전, 신품종의 벼 종자 도입, 소와 말의 분뇨를 이용한 우마구분법(牛馬廐糞法) 등 시비법의 발달, 윤답법, 심경법, 이앙법 보급에 의해 상경농법이 확대되었다.(위은숙, ‘12세기 농업기술의 발전’; 이태진, ‘14~15세기 농업기술의 발달과 신흥사족’)

공민왕 21년(1372)에 간행된 [농상집요(農桑輯要)]는 한국 최초의 농업서로서, 이 시대의 농업 발달을 보여준다. 농업 기술의 발전을 주도한 집단은 개성에서 내려온 이른바 재향품관층이었다. 농업기술의 발전은 대규모의 농장 경영을 가능하게 했다.(안병우, ‘고려후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농장’)

생산성의 향상에 따른 잉여는 누가 가져갔을까? 기록들을 보면, 열심히 겸병에 나선 대농장주에게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국가가 대단히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무신집권기의 왕은 허수아비였다. 원 지배기에도 왕권을 회복하긴 했으나 여전히 취약했다. 원 조정이 왕을 임명했다.

충선왕은 즉위 후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했으나, 귀족들의 반대와 원의 간섭으로 실패했다. 7개월 만에 폐위된 그는 원에 소환당했다. 충혜왕, 충정왕도 폐위당한 뒤 살해되었다. 충숙왕도 심왕 왕고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다, 연경에 5년간 유폐되었다. 한편 고려의 귀족들도 원 조정에 자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황후의 일족 기철 등이 대표적이다. 기철의 권력은 왕을 능가했다.

왕권 약화 틈타 권력가의 부정축재 횡행

겸병운동이 강력히 전개된 것은 이처럼 국가가 약화되면서 발생한 것이다. 우왕대의 집권자 이인임의 사례를 보자. “나라에는 열흘간의 비축도 없었으나 이인임은 전원(田園)과 노비를 온 나라에 걸쳐 소유했으며 그의 힘으로 고위관직에 오른 자들이 다투어 그를 본받아 남의 전민(田民)을 빼앗고 국사를 돌보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두고 ‘제조노비(提調奴婢)’라고 불렀다.”([이인임전]) 그의 측근들도 다르지 않았다. “우왕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이인임과 우왕의 장인 이림 및 임견미·염흥방·도길부·이존성·최렴 등이 호종하면서 각자 자신들의 겸종을 보내 가는 곳마다 떼를 지어 백성의 전려(田廬)를 끝없이 탈취했다.”

강제적인 점탈이 아니라 스스로 개간에 나서 농장을 조성한 사례도 있다. “팍스 몽골리카의 번성한 국제적 교류는 고려의 경제를 자극하였다. 농지의 개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근기에서 개간의 주체는 개경의 국인들이었다. 잘 알려진 사례로서 안목(安牧, ?~1360)의 농장을 들 수 있다. 그는 개경 부근 파주의 서쪽 들을 개간하였다. 그의 손자 안원(安瑗, 1346~1411)에 이르러서는 개간지의 규모가 무려 수만 결에 달하였고, 경작 노비가 수백 호나 되었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291쪽) 이처럼 귀족·관료층은 점탈과 개간을 통해 농장을 조성하고, 새롭게 증가한 잉여를 독차지한 것이다.

이에 반해 1388년 조준의 전제개혁 상소에서 묘사된 농민의 처지는 눈물겹다. 부모와 처자를 먹이고 입히기는커녕 빌린 조세를 내고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처자식을 팔아야 했다. 그들의 슬픈 외침이 하늘에 사무쳤다. 분노한 하늘은 홍수와 가뭄을 내렸다. 그런데 이것이 과장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고려사]의 이 같은 서술에는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녹과전과 별사전은 수조율 10분의 1의 수조지에 불과했다. (…) 왕실과 귀족의 대규모 농장이 야기한 폐단은 개경과 가까운 경기도와 충청도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이 두 도에서 망성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타 도에서 사정은 달랐다. 13~14세기 원 복속기의 여러 기록을 세밀하게 읽으면 일반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개선되고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285쪽)

고향 등지고, 빌린 돈 갚으려 가족마저 팔아


▎[고려사] 열전 ‘안목(安牧)’. 안목은 한국 성리학의 시조 안향의 손자다.
망성(亡姓)이란 “13세기 후반과 15세기 전반 사이에 유망하여 그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된 토성집단을 말한다.” 13~14세기에 고려의 농촌사회는 큰 구조적 변동을 겪었다. “군현의 지배 세력인 토성이 해체되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몽고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3세기 후반부터 부쩍 활발해졌다. 그 양상은 “15세기 전반의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전국 334개 군현의 토성(土姓), 망성, 속성(續姓)의 실태로부터 그 정보를 구할 수 있다. (…) 전국의 2281개 토성 가운데 망성은 542개로서 24%의 비중이다. 망성은 경기도에 159개, 충청도에 120개로서 전체 망성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이 두 도에서 망성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은 아무래도 개경과 가까워 중앙의 착취나 압력이 강하였기 때문이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282쪽) 경상도와 전라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경상도의 망성은 17개, 전라도는 72개에 불과했다.

14세기 후반 전라도 농촌의 모습은 한가하고 유족했다. 1374년 정도전은 회진현(會津縣, 나주) 거평부곡(居平部曲)의 소재동에 유배되었다. 마을은 10여 호가 살았다. 부곡민들은 그를 따뜻하게 대해줘 그는 큰 감동을 받았다. 백성에 대한 정도전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도 이곳에서였다.

“동리 사람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기를 업으로 삼는데, 그 중에서도 황연은 더욱 그러했다. 그의 집에서는 술을 잘 빚고 황연이 또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술이 익으면 반드시 나를 먼저 청하여 함께 마시었다. 손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어 대접하는데 날이 오랠수록 더욱 공손했다. 또 김성길이란 자가 있어 약간의 글자를 알았고, 그 아우 김천도 담소를 잘했는데 모두가 술을 잘 마셨으며, 형제가 한집에 살았다. 또 서안길이란 자가 있어 늙어 중이 되어서 안심(安心)이라 불렀는데, 코가 높고 얼굴이 길며 용모와 행동이 괴이했으며, 모든 사투리·속담, 여항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또 김천부·조송이란 자가 있는데, 그들도 술을 마시는 것이 김성길·황연과 비슷했다. 날마다 나를 찾아와 놀고, 매 철마다 토산물을 얻게 되면 반드시 술과 음료수를 가지고 와서 한껏 즐기고서 돌아갔다.”([삼봉집] ‘소재동기(消災洞記)’)

부곡은 특수 행정구역으로 노비와 천민과 유사한 비천한 자들이 사는 곳이다. 전국 군현 수가 580개인데, 향, 부곡이 똑 같이 580개이니 그 규모가 상당했다.

부곡에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후삼국 통일전쟁기에 왕건에 대항한 호족 세력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국가의 공전을 경작하거나 축성에 동원되었다. 다른 하나는 신라 말 호족세력의 집단 예속민 지역이라는 설명이다. 다른 민전의 조세가 10분의 1인 반면, 이곳은 4분의 1이었다. 이들은 국학에 입학하지 못했고, 승려가 될 수 없었다. 부곡의 향리는 5품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열악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농사를 짓고, 계절 따라 술을 빚고 음식을 나누며 담소를 즐겼던 것이다. “14세기 나주 농촌사회의 넉넉한 분위기는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전한 가운데 수조율이 10분의 1로 낮아진 덕분이었다. 농민들은 농민적 토지소유를 구가하는 자영농으로 성립해 있었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291쪽) 농장주만이 아니라 농민들도 생산력 발전의 혜택을 누렸던 것이다.

원래 고려의 조세는 공전 4분의 1, 사전 2분의 1이었다. 12세기 초 예종대에는 공사전 모두 실질적으로 4분의 1이 되었다. 다시 13세기 초반까지 10분의 1로 낮아졌다. 국가가 일부러 수조율을 낮춘 것은 아니다. 농업생산력이 높아진 만큼 저절로 낮아진 것이다. 수조량이 늘지 않은 것은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농민의 자기 노동에 기초를 둔 사유(私有)가 크게 신장된 결과에 다름아니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289쪽)

땅 하나에 주인은 7~8명


▎정도전의 유배지에 세워진 초가집과 소재동비.
하지만 [고려사]의 기록은 압도적으로 농민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건국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고려사] 편찬자들의 과장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학인이나 관인들의 기록은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 1352년 청년 이색의 복중상서를 보자. “백성은 오로지 토지만을 하늘로 삼고 살아가는바, 몇 뙈기 밭에서 일 년 내내 부지런히 일을 해도 부모처자를 부양하기조차 힘든 판에 조(租)를 거두는 자가 들이닥치게 됩니다. 만약 그 밭의 주인이 하나면 다행이지만 혹 서너 집이거나 심지어 일곱 여덟 집인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그 가문의 권세가 서로 엇비슷하다면 누가 양보하려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조(租)를 바치고 부족하면 남에게 빌려서라도 더 바쳐야하니 백성들은 무엇을 가지고 부모를 봉양하며 처자를 양육하겠습니까? 백성이 곤궁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시경]에도 ‘부자들은 그래도 괜찮거니와, 외로운 이 사람들 불쌍하도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이색전(李穡傳)])

이색이 지적한 바처럼 토지의 주인이 7~8명이나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준 또한 “1무(畝)의 주인이 5~6명을 넘으며, 1년의 세금을 8~9차나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의 약화로 소유권을 특정하지도 못하고, 부당한 수취를 금지할 수도 없었다. 조세가 10분의 1로 줄었어도 백성에게는 무의미했던 것이다. 견디지 못한 농민은 자녀를 팔았다.

1356년 공민왕은 “부호들이 돈을 빌려주고(稱貸) 이식을 취하는데 이자가 또 이자를 낳으므로 빈민은 조석을 걱정하여 자녀를 전매하기까지 하니 심히 불쌍하다”고 말했다. “13세기 후반 이래 상업경제의 발전으로 사회적 유동성이 일층 높아졌다. 그에 따라 공적 조부나 사적 채무의 부담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자녀를 팔거나 인질로 빼앗기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이영훈, [한국경제사(I)], 275쪽)

14세기 이후 국가는 더 빈번하게 민간의 고리대에 개입하여 채권이나 인질을 해소했다. 몰락한 농민의 마지막 방법은 대농장에 투탁하거나 초적이 되는 것이었다. 우왕대에 왜구를 가장한 다수의 천민집단이 비적화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1388년 조준은 “그 형세가 두렵다”고 말했다.

13세기말 이래 고려는 농업생산성이 높아져 사회적 잉여가 2배 이상 커졌다. 그 결과 새로운 잉여를 둘러싼 격렬한 경쟁이 발생했다. 국가와 특권층, 그리고 농민이 서로 경쟁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약화로 인해, 새로운 잉여는 대부분 소수 특권층에 독점되었다. 그 결과 사회적 참상이 초래되고, 농촌사회의 해체가 촉진되었다. 13~14세기의 고려는 사적인 이익들이 각축하는 일종의 투기장이었다. 플라톤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의 국가 안에 다시 여러 계급들로 분열된 다수의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 각자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국가다. 적어도 두 개의 국가가 서로 전쟁 중이다. 하나는 부자의 국가이며, 다른 하나는 가난한 자의 국가이다. 그리고 각각의 국가는 다시 더 많은 국가로 분열된다.” (Plato, Republic, 422e~423a.)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807호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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