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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19)] 청(淸) 주도로 진행된 조미수호조약의 명암(明暗) 

친중 일변도에서 벗어나 미국화 열어젖힌 대사건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고종의 자신감 부족 탓에 ‘남’에게만 의존…준비 없이 진행하다 보니 여러 반발에 직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 루스벨트가 고종 황제를 만나기 위해 궁궐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르 프티 파리지앵] 1905년 10월 8일자에 실렸다.
도쿄의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밀파됐던 이동인은 1880년(고종 17, 광서 6, 메이지 13) 10월 30일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함께 밀파됐던 탁정식은 귀국하지 않고 뒤에 남았다. 하여장과의 사후 교섭을 마무리짓기 위해서였다.

반만년 한국사에서 밀사 이동인이 수행한 고종의 ‘연미국(聯美國)’은 통일신라 이래 천 년 넘게 지속된 친중 정책에서 벗어나 친미 또는 친구라파 정책으로 대전환을 의미했다. 통일신라 이래 친중 정책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정치·문화는 점차 중국화됐고, 조선 후기에는 중국 문화의 정통성이 한반도에만 남았다는 ‘소중화’ 사상이 횡행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고종의 친미 또는 친구라파 정책 역시 필연적으로 조선의 정치·문화를 미국화 또는 구라파화시킬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것이 수천 년에 걸쳐 중국화한 조선의 정치·문화에 심각한 변화와 충격을 줄 것 또한 충분히 예상됐다. 그 변화와 충격은 조선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 전체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미국화 또는 구라파화에 대한 반발과 부작용은 조선 내부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서 일어날 것 또한 충분히 예상됐다. 그런 반발과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사전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안 역시 충분히 검토해 마련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종은 러시아가 조만간 조선을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에 당장의 안보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연미 정책을 추진하게 됐다. 고종이 연미 정책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확고한 미래 전망이 아니라 당장의 안보 위기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충분한 준비와 대안이 없었고, 그런 고종인 지라 연미 정책을 추진한다고는 했지만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장기적으로 연미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또 그 결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설상가상 연미 정책의 대상인 미국이나 유럽 열강이 어떤 나라인지 또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나마 당시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 열강을 조금이라도 겪어본 사람은 이동인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연미 정책의 실무를 이동인에게 전담시켰다. 그렇지만 이동인 한 사람에게만 의지하는 것은 너무나 불안했기에 청나라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 같은 배경에서 고종의 연미 정책은 전격적으로 결정됐고, 이동인의 도쿄 밀파 역시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이동인을 밀파할 때만 해도 고종은 아주 낙관적이었다. 고종은 하여장의 도움을 확신했고, 조선 양반들의 반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일단 이동인을 하여장에게 밀파해 미국과 수교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개화 실무를 전담하던 이동인은 연미 정책 이외에도 할 일이 많아 곧바로 귀국하게 했고, 사후 교섭은 탁정식이 맡도록 했다.

이동인 귀국 후 탁정식은 몇 차례 하여장을 방문해 미국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필요한 초안을 요청했다. 예컨대 1880년 11월 21일 하여장을 방문한 탁정식은 “조선 신민은 평소 해외 안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용감히 떨쳐 일어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면서 “속히 상의하셔서 다년간 조선을 보호하고자 하셨던 큰 의도를 어기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하여장이 보낸 [조선책략]에 따라 고종이 연미 정책을 추진하게는 됐지만, 경험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중국 측에서 그 초안까지도 마련해 달라는 뜻이었다.

탁정식의 요청은 ‘불감청 고소원’


▎고종 황제(왼쪽 가운데)가 1918년 1월 15일 창덕궁 선원전(선대왕의 어진을 모신 곳)에 예를 올리기 위해 침소인 덕수궁 함녕전을 나서고 있다. 오른편 무리의 중심부에서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정면을 보고 있는 사람은 영친왕.
이미 하여장은 이동인을 통해 조선의 연미 추진을 통고 받고 곧바로 ‘주지조선외교의(主持朝鮮外交議)’를 작성했었다. 그 핵심은 조선의 연미 추진을 비롯한 외교정책을 청나라가 주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하여장에게 탁정식이 나타나 조미수호조약에 필요한 대안을 마련해 달라는 요청은 말 그대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 이었다.

하여장은 즉시 황준헌을 시켜 ‘조미수호조약 초안’을 마련하게 했다. 미리 조약 초안을 마련했다가 조선으로부터 공식적인 국서가 오면 그 국서와 초안을 근거로 주일 미국공사와 조미수호조약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여장과 주일 미국공사가 조미수호조약에 관한 기본 골격을 협의한 후 미국 대표가 조선으로 가서 수호조약을 맺게 되면 핵심 내용을 하여장 본인이 주도할 수 있고, 그렇게 되는 것은 자신의 ‘주지조선외교의’ 취지에도 부합했다.

황준헌 초안은 청나라와 미국의 요구를 중심으로 작성됐다. 조선의 요구사항은 나중에 황준헌 초안을 검토하면서 추가하라는 의미에서였다. 따라서 황준헌 초안은 당시 조선의 연미 추진에 대한 중국 입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황준헌 초안에서 중국 입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조항은 제1조의 ‘조선은 중국의 명령을 받들어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다’였다. 이 조항은 하여장이 ‘주지조선외교의’에서 제시했던 두 번째 방안, 즉 조선이 서구열강과 체결하는 조약문 중에 ‘이에 조선은 중국 정부의 명령을 받들어 OO국가와 수호조약을 체결하고자 합니다’를 그대로 이용한 것이었다.

‘주지조선외교의’와 ‘황준헌 초안’에서 공히 ‘조선은 중국의 명령을 받들어’라는 내용을 첨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공식화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청나라의 조공국은 조선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 조선마저 자주독립국으로 떨어져 나가면 청나라 패권 질서가 완전히 와해되므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 속방 내용을 반드시 넣으려 했던 것이다. 청나라가 동아시아 패권 국가이자 최고 국가라고 하는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나 같았다.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을 보고 전격적으로 연미 추진을 결심했던 고종의 최초 구상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이동인을 하여장에게 밀파해 미국과 수호하려는 자신의 뜻을 알린다. 이어서 조정 중신들의 이름으로 미국과 수호조약을 요청하는 국서를 작성해 탁정식에게 보내 사후교섭을 마무리하게 한다. 그러면 하여장이 조선의 국서를 근거로 일본 주재 미국공사와 협의하고, 뒤이어 미국 대표가 조선으로 와서 수호조약을 체결한다.

그 같은 구상은 기왕의 친중 정책에서 친미 정책의 전환에 따른 청나라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국내 양반들의 반발을 최소화 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즉 조약 초안을 하여장에게 부탁하는 것은 청나라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이고, 조정 중신 명의의 국서를 작성하는 것은 국내 양반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조치였던 것이다. 그 정도 조치로 중국과 조선 양반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는 점에서 당시 연미 정책을 추진하던 고종은 상당히 낙관적인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탁정식의 요청에 하여장이 곧바로 황준헌을 시켜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국의 반발을 무마하려던 고종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정 중신 명의의 국서를 작성해 국내 양반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조정 중신들이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정 중신들은 연미 정책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위정척사파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유교문명의 배신자로 낙인 찍힐 것이 두려웠던 그들은 고종 왕권과 양반 여론 사이에서 눈치 보며 갈팡질팡했다.

‘복심’ 이유원의 반대에 당황하는 고종


▎한미수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고종은 1883년 민영익·홍영식 견미(遣美)사절단 11명을 미국에 파견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고종의 최측근으로 꼽히던 이유원이었다. 수년에 걸쳐 고종과 이홍장 사이의 비밀 연락을 맡았던 이유원은 정작 고종의 연미 정책에 반대하고 나섰다. 만약 고종과 이홍장 사이의 비밀 연락을 이유원이 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조선 양반들은 고종의 연미 정책 배후가 이유원이라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연미 정책에 대한 모든 비난이 이유원에게 집중될 것 또한 분명했다. 이유원은 그것이 두려웠기에 고종의 연미 정책에 반대했던 것이다. 이유원이 그럴 정도였으니 적지 않은 조정 중신들이 연미 정책에 부정적이었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믿었던 이유원이 반대하고 나서자 고종은 자신감을 잃었다. 자칫 연미 정책을 강행하다가는 조정 중신은 물론 양반 전체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불러 왕위 자체가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고종은 그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의 권위를 빌리고자 했다. 즉 기왕에 자신이 주도하려던 연미 정책을 중국 주도로 바꾸고, 자신은 중국 배후에 숨으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고종은 조정중신 명의의 국서를 작성하지 못하고, 대신 김홍집 명의의 편지를 작성해 하여장에게 보냈다. 1880년 9월 16일에 작성된 김홍집 편지는 11월 24일 탁정식을 통해 하여장에게 전달됐다. 그 편지에서 김홍집은 “비록 현재 조선의 논의가 깨우쳤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예전과 같지는 않으니 큰 깨우침(大誨)을 내려 주신다면 받들어 행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같은 언급은 기왕에 탁정식이 초안을 요구하면서 했던 말, 즉 “[조선책략]에 따라 고종이 연미 정책을 추진하게 됐다”는 언급과는 전혀 달랐다. 탁정식의 언급은 조선이 이미 미국과의 수호통상을 결정했지만 그 방법을 몰라 도움을 요청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음에 비해 김홍집의 서한은 미국과 수호통상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라 할 수 있었다.

하여장은 왜 그렇게 됐는지 물었다. 그러자 탁정식은 대답하기를 고종이 조정 중신 몇몇과 연미를 결정하기는 했지만, 이유원을 꺼려서 공개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만약 중국 황제가 권유(勸諭)한다면 공개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이 같은 탁정식의 언급으로 본다면 당시 고종은 예상치 않게 이유원이 반대하자 중국 황제의 권위를 빌려 조선 양반들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김홍집 서한은 하여장으로 하여금 고종의 입장과 뜻을 해명하기 위해 쓰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고종의 연미 정책은 처음과는 전혀 다르게 추진됐다. 처음에는 하여장의 도움을 받아 주일 미국공사와 일본에서 협의하는 것으로 했지만, 이제는 중국 황제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서 협의하는 것으로 하게 됐던 것이다. 그것은 도쿄의 하여장 대신 천진의 이홍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나 같았다. 결국 김홍집은 이제 하여장의 도움은 더 이상 필요 없으니 양해해 달라는 취지의 서한을 썼던 것이다.

도쿄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된 탁정식은 12월 2일 귀국길에 올랐다. 그 길에 탁정식은 황준헌 초안을 가지고 왔다. 아마도 탁정식이 가져온 황준헌 초안은 12월 말께 고종에게 보고됐을 것이고, 뒤이어 이동인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1881년 연초에 이동인은 황준헌 초안을 참고해 조선 측 초안을 작성했다. 이른바 ‘이동인 초안’과 황준헌 초안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조선은 중국의 명령을 받들어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다’는 조항이 삭제됐다는 것이었다.

이동인은 조선이 중국 속방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동인 초안에는 ‘불립교당(不立敎堂)’ 즉 교회를 세우지 못한다는 조항이 추가됐는데 이는 위정척사파를 고려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종은 1880년 11월 중순 역관 이용숙을 이홍장에게 파견해 기왕에 하여장에게 요청했던 도움을 또다시 요청하도록 했다. 1881년 1월 20일 천진에 도착한 이용숙은 이홍장을 방문해 연미 정책을 결심한 고종의 뜻을 전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이용숙은 ‘영의정 이최응 계본(啓本)’, ‘김홍집이 하여장에게 보낸 서한’, ‘이유원이 이홍장에게 보내는 서한’을 제시했다.

‘영의정 이최응 계본’은 미국과의 수호통상을 요청하는 영의정 이최응의 계본으로서 이는 고종이 영의정의 요청에 따라 미국과의 수호통상을 결심했음을 증명하고자 제시됐다. 결국 ‘영의정 이최응 계본’은 미국과의 수호통상을 추진하는 고종을 신뢰하고 도와달라는 의미에서 제시됐다고 할 수 있다. ‘김홍집이 하여장에게 보낸 서한’은 고종이 처음에는 하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내부 사정 때문에 하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홍장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과정을 알리기 위해 제시됐다.

조선 외교정책 쥐락펴락한 이홍장의 음모

마지막으로 ‘이유원이 이홍장에게 보내는 서한’은 연미 정책에 반대하는 이유원의 입장을 알리고, 그 같은 이유원을 설득해 달라는 취지에서 제시됐다. 요컨대 고종이 역관 이용숙을 이홍장에게 보낸 이유는 이유원 때문에 연미 정책을 공식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중국 황제 또는 이홍장의 권위로 이유원을 비롯한 반대론자들을 제압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용숙과의 회담 그리고 이용숙이 제시한 문서들을 통해 이홍장은 고종의 입장과 요청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홍장은 하여장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이후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은 이홍장 주도로 천진에서 추진됐다. 먼저 이홍장은 광서 황제에게 주청해 황제의 이름 아니면 총리아문의 이름으로 조선에 공문을 보내 미국과의 통상외교를 권고하도록 요청하면서 향후 조선 관련 외교와 통상 사무를 기왕의 예부 대신 북양아문에서 관장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에 따라 광서 황제는 총리아문 명의의 권고문을 조선에 보내게 하면서 향후 조선 관련 외교와 통상 사무는 이홍장이 주관하도록 했다. 한편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편지를 보내 조미수호조약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반대하지 말라 권고했다.

또한 이홍장은 자신의 측근 참모인 마건충에게 조미수호조약에 참조할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 37세의 마건충은 프랑스에서 3년간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인물로 당시 중국인 중에서는 서구열강을 가장 잘 아는 인물로 손꼽혔다. 이홍장 명령에 따라 마건충은 총 10개 조항으로 된 ‘대의조선여각국통상약장(代擬朝鮮與各國通商約章)’을 작성했다. ‘조선이 각국과 통상조약을 맺을 때 필요한 초안을 대신 마련함’이라는 뜻이었다. 이 ‘약장’은 향후 이홍장이 조미수호조약을 추진할 때 주요 참고자료가 됐다.

마건충의 ‘약장’은 통상 관련 조항이 대부분이지만, 그중에는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암시하는 구절도 있었다. 예컨대 제2조항에는 조선에 다만 영사와 총영사만 설치하고, 그 영사와 총영사는 중국 북경 주재 공사관의 지휘를 받도록 했는데 이는 조선에 설치되는 외국 외교관의 지위를 북경 공사관의 휘하에 둠으로써 사실상 조선이 중국 속방임을 공인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제 9조항에선 조약문을 한국어·외국어·중국어로 작성하되 중국어 조약문을 정본으로 한다고 했는데 이 또한 조선이 중국 속방임을 공인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조미수호조약을 추진하던 이홍장의 궁극적 목표도 조선을 중국 속방으로 묶어두려는 데 있었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준비를 마친 이홍장은 마건충의 ‘약장’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고종에게 보냈다. 추가할 내용 또는 수정할 내용이 있으면 추가하거나 수정하라는 뜻이었다. 이어서 이홍장은 조선이 수호통상을 희망한다는 사실을 미국 측에 알렸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전권대표 슈펠트가 1881년 5월 천진에 와서 이홍장과 회담했다. 슈펠트는 1867년(고종 4)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선에 왔던 해군 제독으로 조선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이홍장을 통해 조선 측 전 권대표가 조만간 천진으로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슈펠트는 천진에서 대기했다.

슈펠트는 조선에 미국의 조약 체결 의사를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고, 증거물로 국무성에서 발급함 문서를 제시했다. 이홍장은 천진을 방문한 조선의 고위관리에게 이미 자신이 조약 체결을 설득했으며, 조선정부에도 서한을 보냈다고 하면서 미국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물론 이런 언급은 지난 1월에 있었던 이용숙과의 회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은 천진에 파견되는 영선사를 이용해 조미수호조약을 추진하고자 했다. 최초의 영선사 조용호와 수행인원 및 경비는 1881년 2월 27일 확정됐고, 준비가 끝나는 4월 11일에 출발하기로 결정됐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는 위정척사 운동이 격렬하게 진행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영선사는 위정척사파의 표적이 됐다.

결국 조용호를 영선사로 한 사절은 파견되지 못했다. 고종은 위정척사운동이 잠시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렸다. 이른바 이재선 역모사건이 일단락된 9월 26일에야 김윤식을 영선사로 한 사절 80여 명이 파견됐다. 영선사에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선발된 38명의 학생들이 포함됐다. 양반들은 기술을 배우지 않았으므로 학생들은 천민 기술자들이었고, 통역을 위해 중인 출신 학생이 몇몇 있었다.

“미국 원하는 대로 될 것이외다”

11월 17일, 영선사 김윤식 일행은 북경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청나라 예부에 자문을 접수한 후 김윤식은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보정으로 출발했다. 공식적으로는 학생들 교육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는 미국과의 수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김윤식은 수교통상에 필요한 3종류의 초안 즉 황준헌 초안, 이동인 초안 그리고 마건충 약장을 휴대하고 있었다. 11월 27일, 보정에 도착한 김윤식은 다음 날 이홍장을 만났다. 이후 김윤식은 보정과 천진에서 이홍장과 회담했다. 회담 장소가 보정과 천진 두 곳으로 된 이유는 이홍장이 직예총독과 북양대신을 겸임했기 때문이었다.

김윤식은 이홍장을 따라 보정에도 가고 천진에도 가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총 7차례에 걸쳐 회담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12월 26일 보정부에서의 회담이었다. 김윤식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둘 사이에 필담(筆談)이 오갔는데 주로 조선의 속방 여부가 토론됐다. 당시 이홍장의 주요 관심이 조선의 속방 여부였기 때문이었다.

김윤식: 삼가 세 개의 초안(황준헌 초안, 이동인 초안, 마건충 약장)과 더불어 강화도조약 등본을 가져왔는데 보시겠습니까?

이홍장: 보여 주십시오.

김윤식: 여기 급하게 베낀 사본을 올려 드립니다.

이홍장: 이동인 초안은 말뜻이 너무 간단해 미국 대표가 동의하지 않을 듯합니다. 예컨대 ‘외교관 파견과 통상 장정은 5년 후에 다시 논의한다’는 제7조는 더욱 힘들 듯합니다. 반드시 조약 첫머리에 한 조항 대의를 첨부해 이르기를, ‘조선은 오래도록 중국의 속방이었으나 외교와 내정은 모두 자유로이 해왔다’고 해도 다른 나라에서 보고 문제삼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윤식: 비록 초안 세 개가 있었지만 조정에서 회람시키지 않아 편리한지 아닌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여쭈어 훗날 큰 후회에 이르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이 과군(寡君-고종)의 뜻입니다. 외교관 파견과 통상은 미국이 굳게 주장하면 또한 예외의 일이 아니니 끝내 거절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그것이 처음이라 일마다 서로 대립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일본 공사가 한양에 주재하는 것은 지금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들은 스스로 일을 핑계하며 와서 머물 뿐입니다. 내년 봄에 조정에서 누구를 전권대표로 보낼지 모르지만 그 때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야 하니 지금은 답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조선이 중국에 대하여는 속국이고,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자주국가라는 것은 명분도 바르고 말도 바르므로 일과 이치에 모두 편리합니다. 조약 중에 이 한 조항을 첨부하는 것이 아주 좋을 듯합니다.[김윤식, [음청사(陰晴史)] 고종18년(1881) 12월 26일]


김윤식과의 회담에서 속방 문제를 결정지은 이홍장은 곧바로 슈펠트와 조약문 협상에 들어갔다. 1882년 2월 7일 이홍장과 슈펠트는 천진에서 1차 회담을 가졌다. 예비회담의 성격을 가진 1차 회담에서는 특별한 논의 없이 상호 간 전권 자격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조선은 중국에 대해서만 속방일뿐이다”


▎1. 1882년 조미수호조약 체결 당시 미국 측 대표였던 슈펠트 제독. / 2. 1882년 조미수호조약 체결 당시 조선 측 대표였던 신헌 전권대사.
예비회담 이후 이홍장은 본회담에 대비하기 위해 조미수호조약 초안을 마련했다. ‘이홍장 초안’이라 불리는 그 안은 황준헌 초안, 이동인 초안, 마건충 약장을 참조해 마련됐으며 총 10개 조항이었다. 이홍장은 그의 초안에 ‘대의조선여미 국수호통상조약(代擬朝鮮與美國修好通商條約)’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을 대신 마련함’이라는 뜻이었다.

이홍장 초안의 핵심은 제1조에 있었으며 그 내용은 ‘조선은 중국 속방이지만 내정과 외교는 자주로 했다’는 구절이었다. 황준헌 초안, 마건충 약장 그리고 이홍장 초안에 이르기까지 초지일관 중국의 입장은 조선을 속방으로 묶어 두려는데 있었고, 그것이 각각의 초안에 노골적으로 명문화됐던 것이다. 이홍장은 슈펠트와의 본회담을 앞두고 측근을 보내 ‘조선은 중국 속방이지만 내정과 외교는 자주하여 왔다’는 구절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혹시 몰라 예비 공작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총 10조로 된 미국 측 초안에는 속방 조항이 없었다. 미국 측 초안은 강화도조약문을 참조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이홍장과 슈펠트 사이의 조약문 담판에서 핵심은 속방 구절을 넣을 것인지 아니면 삭제해야 할 것인지가 핵심이었다. 이홍장은 조선은 오래전부터 중국 속방이었으며, 그 사실을 고종도 인정했다는 점을 들어 조약문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슈펠트는 조선이 내정과 외교를 자주 해 왔다면 미국은 중국의 종주권과 관계없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할 수 있다며 삭제를 주장했다. 수많은 논쟁 끝에 이홍장과 슈펠트는 속방 구절을 삭제하는 대신 부속문서에 넣어 조회하는 것으로 봉합했다.

이 결과 1882년 3월 1일에 이홍장과 슈펠트는 전문 15조로 된 조미수호조약문에 합의하게 됐다. 사실상 조미수호조약은 이것으로 끝났다. 나머지는 형식적으로 슈펠트가 조선으로 가서 조선 대표와 만나 조인하는 절차만 남게 됐다. 그것도 슈펠트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마건창이 함께 수행하는 것으로 했다.

이에 따라 슈펠트와 마건창이 조선 인천으로 함께 가서 조선 측 대표인 신헌·김홍집과 만나 조미수호조약에 조인했다. 그때가 1882년 4월 6일이었다. 과거 천 년을 지속해 온 친중 정책에서 친미 정책으로의 대전환을 뜻하는 조미수호조약은 명색으로는 조선과 미국 사이의 조약이었지만 실제 조약 체결을 주도한 인물은 고종이 아니라 이홍장이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연미 정책을 추진하는 고종의 자신감 부족 나아가 미래 전망에 대한 확신 부족 때문이었다.

그 같은 자신감 부족 및 미래 전망에 대한 확신 부족은 조약 체결 이후 나타난 국내외 반발에 대한 대처에서도 또다시 반복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에서 본격적인 미국화 또는 구라파화를 열어젖힌 조미수호조약의 역사적 의미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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