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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19)] 안경, ‘유리창’ 너머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다 

19세기 말 들어 노안 극복 위한 필수품으로 정착… 노년을 품격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구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전남 무안 초당대 안경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조선시대 여러 형태의 안경을 보며 신기해 하고 있다.
홍대용(洪大容)이 홍억(洪檍)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온 것은 1765년 겨울부터 1766년 봄까지의 일이다. 그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것 중에 [건정동필담(乾淨洞筆談)]([항전척독(杭傳尺牘)]에 수록)이 있다.

홍대용은 연경으로 가면서 중국의 이름난 선비를 만나 진리를 논하고 교유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연경에 머무는 동안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말을 걸고 자기 생각을 펼치는 한편 뛰어난 선비들에게서 한 수 배우고자 했다. 중국말을 못했으니 모두 필담(筆談)으로 진행됐다.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홍대용은 많은 양의 종이를 가지고 갔다. 그의 소망은 이뤄져서 중국의 여러 선비와 천애지기(天涯知己)의 관계를 맺었다. 홍대용은 조선으로 귀국한 뒤 연경과 항주(杭州)로 편지를 보내서 평생토록 교유를 이었다. 그 교유는 홍대용의 아들과 중국 선비들의 자식대까지 계속됐으니, 대를 이은 교유라 할 만하다. 홍대용은 이들을 처음 만나게 된 계기를 [항전척독]에 기록으로 남겼다.

1766년 2월 1일, 사신단 일행으로 함께 참여한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원시경(遠視鏡)을 사기 위해 유리창(琉璃廠)에 갔다. 그는 이곳에서 두 사람의 중국 선비를 만나는데, 모두 안경을 끼고 있었으며 용모가 단정해서 문인으로서 기품이 보였다. 이기성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안경을 구하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거리에서 파는 것은 진품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대가 끼고 있는 안경은 아마도 진품일 테니 제게 파시지요. 그대는 여분으로 하나 더 가지고 계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진품을 구하기 쉽지 않습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자기 안경을 선뜻 벗어주면서 안경이 필요하다고 하는 그대의 지인은 자신과 비슷한 눈병이 걸린 사람일 터이니 그 안경을 그냥 주겠다고 했다. 이기성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안경을 받는 것이 민망하고 실례를 범한 것 같아서 그를 좇아가서 값을 치르고자 했다.

그러나 그 선비는 눈이 나쁜 사람이라면 동병상련의 처지인데 안경 하나 가지고 너무 소심하게 굴 것 없다면서 돈을 받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인사를 나누게 됐다. 중국 선비는 원래 절강(浙江) 지역 사람인데, 과거 시험을 보려고 연경에 와 있으며, 정양문(正陽門) 밖 건정동(乾淨洞) 골목에서 잠시 집을 얻어 지내고 있다고 했다.

사신들이 묵는 숙소로 돌아온 이기성은 그들에게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홍대용을 찾아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종이를 빌려 달라고 했다. 종이로 답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기성은 화전지(花箋紙)를 받아가면서 중국 선비들이 괜찮은 사람들로 보이니 한 번 찾아가 보라고 권했다. 이기성이 그들에게 가서 화전지뿐 아니라 부채·먹·청심환 등을 선물로 가져가니 그들은 다시 붓·먹·차·담배 등으로 답례했다.

이 일이 계기가 돼 홍대용은 2월 3일 바로 그들을 찾아가서 필담으로 교유를 시작하게 됐는데 이들이 바로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이다. 머나먼 중국 강남 항주의 선비와 조선의 홍대용이 공간과 시대를 넘어서 아름다운 교유를 이어간 기록인 [항전척독]은 안경을 둘러싼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노인을 젊은이로 만들어 주는 마법사


▎조선 후기의 금속코 소뿔테 실다리안경.
옛날 어른들이 연세가 들면 늘 눈이 침침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나이가 들면 노안이 따라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나이가 들어도 시력이 좋은 분들을 보면 복을 하나 타고 태어난 듯한 느낌이 든다. 근대 이전의 책은 글자가 커서 어느 정도 노안이 와도 읽을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모든 책이 그렇지 않다.

19세기가 되면 작은 판형의 책도 많이 나왔고, 큰 판형이라 해도 협주(夾註)의 경우는 작은 글자로 돼 있기 때문에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옛 사람들의 글에서도 노안으로 인한 독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이 자주 있다.

일단 노안이 오면 독서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독서가 평생의 업(業)이자 일상이었던 사대부에게 노안은 하나의 천형(天刑)과도 같은 것이었다. 노안을 극복하기 위한 많은 방법이 개발됐지만, 노안이 온 사람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꾼 사건은 바로 안경의 발명이었다.

안경이 어디서 시작됐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는 것 같다. 13세기 영국에서 발명됐다고도 하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인용하면서 중국에서 시작됐으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시력 교정용 안경은 대체로 13세기 유럽에서 나왔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청나라 조익(趙翼)이 쓴 [해여총고( 餘叢考)] ‘안경(眼鏡)조’에 의하면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옛 형태의 안경은 명나라 때 서역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도 안경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력 교정용이 아니라 돋보기용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볼록렌즈 개념을 활용해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안경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애체’라는 단어가 있다. 이것은 투명한 수정을 깎아서 만든 돋보기를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경주 남산에서 나오는 수정으로 만든 안경, 흔히 남석안경(南石眼鏡)으로 불리던 이 안경이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누구에게나 노안은 찾아오는 법이어서 안경이 없던 시절부터 그 존재는 꾸준히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러다가 안경을 깎아서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게 되자 그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수요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해서 값은 제법 비쌌겠지만, 돈보다는 늙어서까지 책을 읽거나 작은 물건을 봐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불가결의 물품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한양성 안에 안경을 파는 점방인 ‘안경방(眼鏡房)’이 있었다. 이 책의 증보판이 1530년(중종25)에 완성됐으니, 최소한 그 이전에는 안경이 사회적으로 꽤 보급돼 있었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겠다.

안경에 대한 기록을 비교적 많이 남긴 사람은 조선 후기 학자인 이익(李瀷)이다. 이익 자신에게 노안이 오면서 안경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여러 편의 글에서 안경을 묘사하거나 그 유래를 탐색하고 있다. 이익이 사용하던 안경은 그의 재종질 이복휴(李復休)가 선물로 준 것이었다. 당시 이복휴는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를 지내고 있었는데, 이익은 어떤 보물보다도 귀중하다며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안경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편의 시문에서 노래했다. [애체가]([성호전집]권4) [애체경명]([성호전집]권48)에서 안경의 효용과 그것을 사용하는 즐거움을 드러냈다. 안경 덕분에 늙은이가 다시 젊어졌다면서 기뻐한 것은 만년까지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기록을 살피노라면 안경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된 것은 18세기 후반 이후로 보인다. 여전히 서양에서 들어온 안경은 구하기 어려웠지만 책 읽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라도 구해야 하는 물건이었다. 박지원(朴趾源)도 읽고 쓸 때 안경을 사용했다는 기록을 남겼고, 이덕무 역시 안경을 사용했다. 이덕무의 편지에는 ‘애체’ 즉 안경의 어원을 상고하면서 명나라 선종(宣宗) 때부터 좋은 말과 바꿔 거래했지만 이제는 누구나 사용한다고 했다.

안경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공급량도 많아지면서 안경 값은 점점 떨어졌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의 [청성잡기(靑城雜記)]를 보면 정승을 지낸 이성원(李性源, 1725~1790)의 일화가 수록돼 있다. 이성원이 금강산 유람을 가서 바위 절벽에 자기 이름을 새길 때였다. 자신을 따라왔던 사람이 암벽에 글자를 새기던 각수(刻手)의 안경을 떨어뜨려 깨뜨리는 일이 생겼다.

18세기 무렵 가격은 2만~3만원?


▎2016년 4월 열린 제15회 대구국제안경전시회 (DIOPS 2016)에서 전문모델들이 여름용 선글라스를 끼고 한껏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공정식
이성원은 미안해 하면서 변상하려고 했는데 60세쯤 돼 보이는 그 각 수가 그럴 필요 없다면서 웃었다. 그리고는 안경집을 보여주는데 거기에는 안경을 30전에 구입한 날짜와 함께 이 안경이 깨질 시간을 정확하게 예언해서 적혀 있더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인(異人)일 듯한 그 각수는 이후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이 일은 18세기 후반에 있었던 일일 텐데 그것으로 미뤄보면 이 시기에 안경은 지금 화폐로 2만~3만원가량 됐을 것이다(‘냥’의 시세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신병주 건국대 교수의 계산에 의해 1냥을 7만원이라고 보면 그렇다). 각 수가 사용하던 안경이 저렴한 것이었으리라 추정되며, 구입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세기가 되면 웬만한 사람들은 안경을 필수품으로 여기게 됐다. 1832년 중국 연경에 시사신으로 다녀온 기록인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燕轅直指)]를 보면 사신단의 주요 책임자 세 사람 즉 ‘삼사(三使)’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복색을 묘사한 부분이 나온다. 그들은 전립(戰笠)을 쓰고 허리에는 남색 전대를 차고 약낭(藥囊)·패도·수건·담뱃갑 등과 함께 안경을 좌우에 차고 간다고 했다. 이 시기에 안경은 문서를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필수품이 됐다.

1892~1893년 무렵에 작성된 지규식(池圭植)의 일기인 [하재일기(荷齋日記)]에는 안경과 관련된 기록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안경을 도둑맞기도 하고, 안경집을 7전에 구입하기도 하며, 안경을 고치기 위해 이현(泥峴)에 있는 일본 사람 가게에 가서 맡기기도 한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만도(李晩燾)의 기록에서 안경을 도둑맞아서 불편하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으며, 이 시기 유학자 황현(黃玹)도 안경을 쓴 사진을 남겼다. 19세기 말이 되면 웬만한 사람들은 안경을 사용해서 노안을 극복하고 있었다.

누구나 사용하는 물건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나 예절 같은 것을 만들게 된다. 안경 사용에도 그 나름의 예절이 있고 법도가 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내가 살던 강원도 산골에서는 어른을 만날 때 안경을 벗는 분들이 계셨다. 처음 안경을 쓰게 됐을 때 부모님뿐 아니라 고향에 갈 때는 늘 안경을 벗었던 기억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안경을 벗어서 가방에 넣었던 것이다. 이런 행동은 어디서 온 것일까.

19세기 후반에 집필된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권 26)에는 당대 재상을 지닌 조두순(趙斗淳)이 헌종과 철종의 어진(御眞)을 볼 때 안경을 쓰고 보도록 명령을 받았지만 끝내 쓰지 않더라는 목격담이 들어 있다. 자신도 임금으로부터 안경을 쓰고 보도록 허락 받았지만 쓰지 않았노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른 앞에서는 벗는 것이 ‘예의’였던 시절


▎작고 희미한 글씨를 크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돋보기는 그 자체로 마법사다.
그보다 앞 시대에 살았던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편지에서도 “임금 앞에서 경연(經筵)을 할 때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어찌 안경을 쓸 수 있겠느냐”고 말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 보건대 안경은 임금을 비롯해 어른들 앞에서는 벗는 것이 예의였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지금 수준으로 생각해 보면 수정을 깎아서 만든 돋보기가 잘 보이면 얼마나 잘 보였겠는가.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최첨단 하이테크 기술이었을 것이다. 돋보기의 볼록 면을 얼마나 잘 다듬는지, 그 각도를 얼마나 잘 맞추는지에 따라 글자의 선명도와 확대 정도가 큰 차이를 보였을 것이다.

평생 독서로 살아온 선비들의 인생에서 노안이 온다는 것은 눈이 어두워지는 것과 함께 자신의 생애가 어두워지는 것 같았으리라. 예전의 필사본을 뒤적거리다 보면 놀라울 정도의 세필(細筆)로 쓴 글씨가 자주 발견된다. 아주 가느다란 펜으로 쓴 요즘의 글씨보다 더 가느다랗게 쓴 글씨를 보며 이런 글씨는 도대체 어떤 분들이 쓴 것일까 하는 궁금증마저 생긴다.


▎책을 읽을 때는 안경을 쓰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뒹군다는 배우 김혜수. 김혜수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집 안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 사진:김혜수
이렇게 작은 글씨를 자주 쓰다 보면 눈에 피로가 쌓이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 사람들에게 노안은 빨리 찾아오는 법이다. 윤기(1741~1826)는 어떤 사람에게 안경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생토록 책에 미쳐서 늘 등불 밑에서 글을 읽었다. 파리 대가리처럼 작은 글씨를 가느다랗게 써서 정신을 소모했으며, 다섯 수레의 책을 읽는 동안 눈을 비비게 됐고, 결국은 한 점 한 획이 두셋으로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다가 ‘쌍원경(雙圓鏡)’을 쓰게 되면 가느다란 가을 터럭을 나뭇단처럼 볼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서양 물건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노안이 와서 평생 해오던 것을 못하게 되는 순간 그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비단 윤기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절망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안경을 선물로 준다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보배요,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일 것이다.

이제는 콘택트렌즈처럼 눈 안에 안경을 집어넣거나, 심지어 망막을 깎는 시술을 통해서 시력을 회복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인간의 노쇠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가상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의술로는 잃어버린 시력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한다. 눈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이 얼마나 많은가.

오직 읽고 쓰는 일만 해온 사람에게 나이가 들수록 안경은 가장 가까이 두고 살아갈 친한 벗이다. 어둑한 세상을 환하고 분명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의 물건이면서, 내가 노년을 품격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고마운 물건이다.

※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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