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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36)] 죽음으로 절의 지킨 매천(梅泉) 황현 

“글만 아는 사람이 무엇에 쓸모가 있을까” 

1910년 경술국치에 절명시 남기고 자결로 항거
[매천야록]에 위정자의 무능과 의병 활약상 기록


▎매천황현선생기념사업회 정상영 회장이 구례 매천사 앞에 섰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가 체결한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됐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다. 이른바 ‘경술국치(庚戌國恥)’다.

나라가 망하고 순종이 통치권을 일왕에게 넘긴다는 양위조서(讓位詔書) 내용은 여드레가 지나 호남 땅 구례에 도착한다.

한 선비가 조약문을 읽어 내린다. 내용이 기가 막혔다. 더는 읽을 수 없어 조서를 기둥에 묶어 버린다. 그는 나라가 망했는데 무얼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문득 을사늑약 체결 이후 마음먹은 자결(自決, 의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이 떠올랐다. 밤이 깊어 4경(새벽 1∼3시)이 됐다. 그는 문을 걸어 잠그고 시를 쓴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沉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秋鐙揜懷千古(추등엄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


56세에 생을 마감하는 지사(志士)의 절명시(絶命詩)다. 스스로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는 선비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선생이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이란 저술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글 아는 선비가 500년 조선의 망국을 접하고 선택할 길은 달리 없었다. 죽음으로 항거하며 절의를 지키는 순절(殉節)뿐이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금산군수 홍범식, 러시아 공사 이범진, 승지 이만도, 진사 황현 등 그 시기 목숨으로 지조를 지킨 28명의 이름을 기록했다. 이들의 죽음은 올해로 100년째를 맞는 3·1 만세운동을 태동시키는 한 발단이 됐다.

“선비는 당당히 죽어야 한다”


▎1. 1911년 채용신이 사진을 보고 그린 황현 초상화. / 2. 1909년 서울 천연당 사진관에서 찍은 황현 사진.
1월 21일 전남 광양과 구례로 매천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았다. 행장(行狀) 같은 기초 자료도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평전에 가까운 [매천 황현을 만나다]란 책을 접했다. 광양제철고 이은철 교사가 현장 답사를 통해 2010년 펴낸 역작이다. 그 책을 많이 참고했다.

매천이 주로 활동한 구례에는 사단법인 매천황현선생기념사업회(회장 정상영)가 있었다. 정 회장의 안내로 먼저 매천이 순절한 현장을 찾았다. 지리산 쪽으로 이어지는 길 이름은 매천로. 눈앞으로 멀찍이 노고단이 보였다. 도로변에 ‘매천사(梅泉祠)’ 안내판이 나타났다. 매천이 마지막 8년을 살았던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로 들어섰다. 지리산 앞자락 널찍한 터전이다. 매천의 위패를 모신 사당 매천사 앞에서 먼저 예를 표했다.

사당 앞쪽에는 ‘대월헌(待月軒)’이 있었다. 매천이 살았던 ‘달을 기다리는 집’이다. 달은 사육신 박팽년이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노래했듯 높은 절개를 상징한다. 매천은 주변에 매화와 오동나무를 심고 지조를 지키며 삶을 마치고 싶었다. 그는 대월헌 오른쪽 방에서 목숨을 끊었다.

매천은 절명시 4수와 유서를 쓴 뒤 더덕주에 아편을 넣어 음독한다. 그는 동생 황원에게 “세상 일이 이리 되었으니 선비는 당당히 죽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런 말도 덧붙인다. “약을 마실 때 입에서 뗀 것이 세 번이다. 내가 이렇게 어리석구나!” 그도 본능적으로 순간 죽음이 두려웠던 것이다.

동생은 형의 의로운 죽음을 널리 알렸다. 또 남긴 글을 모아 [매천집] 간행에 앞장선다. 당시 [경남일보] 주필이던 장지연은 한 달 뒤 매천의 순절 소식과 절명시 4수를 실었다.

매천은 어떤 인물일까. 그는 문장가이면서 동시에 지사였다. 글과 행동은 일치했다. 문사로서 그는 시인이자 사가(史家)였다. 감성과 통찰력이 번득이는 시 2500여 수를 남기고, 또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비판적으로 기록했다.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저술은 [매천야록]이다.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매천은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반목, 고종과 순종의 무능력, 외세를 업은 개화파, 선비의 비리 등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또 을사늑약 시기 자결한 이들을 신분에 관계없이 기록했다. 민영환·송병선 등 조정의 중신과 군인 김봉학,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력거꾼까지 적었다. 그 반대편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을사오적의 추태도 기록했다. 한 대목을 보자.

“진주 기생 산홍(山紅)은 빼어난 미모와 기예를 갖췄다. 이지용이 천금을 주고 불러 첩으로 삼고자 했다. 산홍은 사양하며 ‘세상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 합디다. 첩은 비록 천한 창기이오나 어찌 역적의 첩이 될 까닭이 있겠습니까?’ 하니 이지용이 대노하며 두들겨 팼다. 누가 시를 지었다. ‘세상 사람들이 나라 팔아먹은 놈을 좇아/ 비굴하게 웃으며 굽신거리는구나/ 그대들 금과 옥이 넘쳐도/ 산홍의 일점 단심을 사기는 어려우리.’”

기생도 을사오적에겐 몸을 더럽히기 싫다는 이야기다. 민심은 소문에 녹아들었다. 매천은 그 가운데 보존할 만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매천야록]은 이렇게 정사와 함께 생생한 야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광양에서 태어난 매천은 1886년 32세에 구례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사한다. 스승 왕석보의 아들 왕사각을 찾아서다. 그는 만수동에서 16년을 보낸 뒤 매천사가 있는 월곡마을로 한 번 더 옮긴다. 만수동은 그의 시와 역사 기록 대부분이 탄생된 마을이다.

구례 만수동을 찾았다. 월곡마을에서 남쪽으로 17㎞쯤 떨어진 곳이다. 마을 입구에 ‘만수동(萬壽洞)’이란 표석이 보였다. 길은 가파르게 산으로 올라간다. 길옆으로 돌담을 두른 집이 올망졸망 이어졌다. 마을이 끝날 때쯤 계곡 위로 작은 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그 난간에 ‘구안실’ ‘일립정’ ‘매천샘’ 표지판이 나란하다. 대나무 숲이 보이는 산자락으로 들어서자 길 아래 얼어붙은 옹달샘이 보였다. 바윗돌에 ‘梅泉(매천)샘’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매화나무는 샘 가까이서 벌써 망울을 머금고 있었다. 자신이 붙인 ‘매천’이란 호도 여기서 유래한다.

의병 대열 뛰어들지 못한 것 자책


매천은 만수동 거친 땅에 띠로 엮은 세 칸 집을 지었다. 한 칸 서재엔 ‘그런대로 편안히 지낼 만하다’며 ‘구안실(苟安室)’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는 구석진 이곳에서 3000여 권 책 더미에 묻혀 독서하며 제자 50여 명을 가르쳤다. 또 한 칸 ‘일립정(一笠亭)’을 지어 벗들과 시를 지었다. 안내 표지판에는 “그가 지은 시 1451수 가운데 400여 수를 빼고는 모두 이곳에서 완성했다”고 적혀 있다. 그와 함께 [매천야록]과 [오하기문(梧下記文)]에 보고 들은 사건을 기록했다.

매천은 만수동으로 들어온 2년 뒤 아버지의 권유로 식년 소과에 응시한다. 매천은 1등 5명 중 두 번째로 합격하지만 대과는 응시하지 않았다. 시험장의 부정부패를 겪고 나서다. 대신 산골 은둔을 선택한 것이다.

만수동에는 그러나 복원된 매천샘을 빼고 더이상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구안실은 불타고 빈터만 남았다. 구례군은 올해부터 구안실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매천이 만수동을 떠나 사방이 트인 광의면 월곡마을로 옮긴 것은 1902년이다. 명성황후 시해와 을사늑약 등 일본의 야욕으로 나라가 급속히 기울던 때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참판을 지낸 최익현은 정읍 태인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최익현은 체포돼 3년 감금형을 선고받아 일본 쓰시마로 끌려간다. 그는 그곳에서 음식을 거부한 끝에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천은 자신이 존경한 최익현의 최후를 [매천야록]에 남겼다. 그러나 그가 남긴 죽음의 원인은 다르다. “…연로한 데다 위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먹는 것이 점차 줄었다. 병이 깊어졌다. 여기다 곱사등이 병이 겹쳐 10월 16일 자리에 눕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매천은 최익현의 죽음을 미화하지 않고 보고 들은 그대로 기록했다. 진실이 가장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907년 해산된 군인들이 동참하면서 의병은 더 조직화된다. 한번은 호남지역 의병장 고광순이 더 많은 의병을 모을 수 있도록 매천에게 심금을 울리는 격문을 써달라고 요청한다. 매천은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나 마음에 걸려 그날 밤 격문을 쓴다. 하지만 전하지 못했다. 얼마 뒤 매천은 고광순이 지리산 연곡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달려가 무덤을 만들고는 “나같이 글만 아는 사람이 무엇에 쓸모가 있을까”라며 문약(文弱)함을 자책했다. 자신은 붓을 들어 애국 대열에 서지 못했고 총을 들고 의병 대열에 뛰어들어 목숨 바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구례에 사립 호양학교 설립 참여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황현 생가 인근에 마련된 매천역사공원 전경. 산 아래 보이는 묘역의 아랫줄 가운데가 황현의 묘소다.
매천은 이후 다짐한다. 직접 의병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신 그 활동을 소상히 남기기로 했다. [매천야록]에는 1908년 1월부터 의병의 활약상을 기록한 ‘의보(義報)’가 실려 있다. 순천대 홍영기 교수는 “글 아는 사람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한 매천을 상기하면 항상 자괴감이 든다. 그래서 지식인에게 더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말했다.

매천은 계몽운동에도 나선다. 그는 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신학문의 필요성을 인정해 1908년 월곡마을 인근 지천리 ‘호양학교(壺陽學校)’ 설립에 참여한다. 발기인 자격이다. 매천은 학교 설립에 필요한 의연금을 독려하는 ‘사립 호양학교 모연소(募捐疏)’를 썼다.

구례군은 2006년 호양학교를 복원했다. 호양학교는 ‘지리산 남쪽’이란 뜻 그대로 노고단이 보이는 마을에 있었다. 정 회장은 “학교 옆 천변마을이 매천의 스승 왕석보가 살았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구례군은 주민들이 많이 찾는 서시천 체육공원에 ‘매천황현선생시비’를 세우고 건너편에 ‘매천도서관’을 지어 그를 기리고 있었다.

매천은 스승을 찾아 구례에서 제자를 기르고 삶을 마쳤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남쪽 광양시다. 광양읍에서 매천로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면 봉강면 석사리가 나온다. 백운산 앞자락 마을이다. 동네 어귀 벽화가 매천의 생가로 길잡이를 한다. 출입문 위에 ‘매천황현선생생가’라 적혀있다. 오전 10시 문화관광해설사가 나왔다. 이어 연락을 받고 광양시 최상종 학예연구사가 들어섰다. 복원된 초가는 ‘매천헌(梅泉軒)’이란 이름이 걸려 있다.

방문을 열자 눈에 익은 초상화가 있었다. 정자관에 심의를 입고 동그란 안경 너머 눈동자가 강렬한 모습이다. 구한말 최고의 초상화가 채용신의 작품이다. 매천이 삶을 마감하기 직전인 1909년 서울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그렸다. 매천은 초상화의 바탕이 된 사진에 일생을 응축한 시를 남겼다.

‘세속의 시류를 따르지 않으려 하니/ 비분강개에 쌓인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네/ 독서를 즐겨했지만 홍문관에는 이르지 못했고/ 유람을 좋아했지만 발해를 건너지 못했네/ 다만 옛 사람이여, 옛 사람이여 크게 외치며/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평생 가슴속에 불만만 쌓이는가’

김혜경 문화관광해설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2016년 여름 이곳에 들러 초상화 앞에 큰절을 올리며 선생의 비판정신을 기렸다. 이곳을 둘러보는 학생들은 선생이 왜 자결했는지 궁금해 한다”고 설명했다. 망국의 선비가 지조를 지키는 마지막 수단이 자결임을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매천은 할아버지가 일군 재력 덕택에 일찍이 수많은 책을 쌓아놓고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또 20대에는 강호의 인물과 교류할 수 있었다.

매천은 당대의 문장가 김택영과 마음을 나눈 친구가 된다. 김택영이 지리산 일대를 여행하다 그의 시를 읽은 것이다. 김택영은 을사늑약 전 중국으로 망명하고도 우정을 이어갔다. 그는 중국에서 매천 사후 유고를 정리해 [매천집]을 간행했다. 또 다른 문장가 이건창과도 교유하며 그에게 ‘명미당(明美堂)’이란 편액을 남긴다. 이건창은 임종 직전 “매천을 한번 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며 숨을 거두었고, 매천은 강화도로 천리 길을 달려가 조문한 일화가 전한다.

과거시험 부정부패 겪은 뒤 벼슬길 단념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백운산 자락 황현이 태어난 생가.
1883년 매천은 29세에 별시 문과에 응시한다. 그는 첫 시험에서 당당히 1등 합격했다. 그러나 시험관이 그가 시골 출신임을 알고 2등으로 바꾸고 마지막 시험에선 떨어뜨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택영이 쓴 ‘성균생원황현전(成均生員黃玹傳)’에 나와 있다. 매천은 과거시험의 부패를 경험한 뒤 낙향한다. 그리고는 출세 지향을 단념한다.

생가 왼쪽 600m 떨어진 곳에 매천역사공원이 있었다. 최상종 학예연구사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100년이 되는 해인 2010년 광양시가 중심이 돼 묘소를 중심으로 성역화했다”고 설명했다. 묘역은 4대가 모여 있다. 위쪽에는 매천의 할아버지, 아래는 왼쪽부터 매천의 아버지, 중간에는 매천, 오른쪽에 아들이 묻혀 있다. 묘역 앞에는 매천의 의로움을 기리는 ‘창의정(彰義亭)’이 있었다. 순천에 살고 있는 주손 황승연(74)씨는 “후손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신용하(81) 서울대 명예교수는 “매천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성리학적 질서의 수호)는 오늘날 관점에선 낡은 사상이요, 그 현대적 의의를 재발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 포함된 ‘의(義)’와 ‘절(節)’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귀중한 가치로 재평가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학(學)’만 있고 의와 절이 없으면 ‘참 선비’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매천은 2500여 수의 시를 남긴 시인이었다. 또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기록한 역사가였다. 조선이 망했을 때는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하며 절의를 지켰다. 매화는 추위 속에서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 지조로 매화는 눈을 뚫고 맨 처음 봄을 알린다. 매천은 암울한 시기에 글 아는 사람의 노릇을 절의로써 보여준 매화를 닮으려는 선비였다.

[박스기사] 매천, 동학농민운동의 양면성 고찰 - 부정적인 관점에도 기록의 객관성은 지켜


▎황현이 은둔했던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 구안실 아래 복원된 매천(梅泉).
황현은 [매천야록]과 함께 [오하기문(梧下記聞)]이라는 역사서를 남겼다. 여기에는 동학농민운동의 전 과정이 기록돼 있다. 호남 지역 유학자의 눈에 비친 동학농민운동은 어떤 성격으로 규정됐을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것은 1894년. 40세로 접어든 그가 [매천야록] 기록을 시작한 해다. 죽창 들고 일어선 동학과 농민들의 저항은 위정자는 물론 구례에 은둔하고 있던 매천에게도 충격이었다.

[오하기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호라! 재앙과 변괴의 일어남이 어찌 우연이랴!… 오랫동안 누적된 추세로 그렇게 된 것이지 일조일석에 조성된 것은 아니다.” 매천은 동학농민운동 발발도 필연으로 보았다. 그는 당시 지배층이 백성을 지나치게 수탈했고 그게 원인이 돼 동학과 농민이 손잡고 봉기를 일으킨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지만 매천은 동학을 백성을 선동한 요술로 봤다.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과 김개남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전봉준은 요사한 지식에 미혹돼 울분에 차 있고 김개남은 포악하고 잔인한 인물로 인식했다. 그래서 동학을 믿는 자들을 동비(東匪)로 표현했다.

매천은 왜 동학농민운동을 부정적으로 보았을까. 동학교도는 불평등한 신분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물리력 동원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유학자로서 조선의 신분제도를 당연시했다. 매천은 동학을 보는 관점이 보수적이지만 그래도 기록만큼은 본 대로 들은 대로 일관성을 지킨다. 박맹수 원광대 교수는 “매천은 실사구시적 입장에서 동학농민군에 나타난 긍정적인 부분을 객관적으로 기술했다”고 평가했다. 관군과 동학농민군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관군은 교만하고 거칠어서 다루기 어려운데 이런 것은 오늘 하루의 일이 아니다. 행군하면 연도에서 닥치는 대로 노략질했고 점포를 망가뜨리고 상인의 물건을 빼앗는가 하면 마을로 몰려가 닭이나 개가 남아나는 게 없었다. 백성들은 이를 갈면서도 겁이나 피했다… 적은 관군의 소행과 반대로 백성들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명령을 내려 이를 어기지 않으면서 쓰러진 보리를 일으켜 세우며 행군했다.”

매천은 동학농민운동을 보고 겪은 뒤 치유를 위한 ‘갑오평비책(甲午平匪策)’을 집필한다. 매천은 사실을 기록한 뒤 ‘난의 원인을 찾아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수습책을 제시하는 등 지식인의 의무를 다한 것이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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