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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15)] 이성계는 어떻게 반대파를 제거했나? 

권력은 말(言)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성계파, 정적 변안열 처형, 이색 숙청으로 조선 건국 길 열어
공양왕, 정몽주와 연대해 맞섰지만 윤이·이초 사건으로 몰락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봉안하는 의례가 2018년 10월 전주에서 재현됐다. / 사진:연합뉴스
1389년 11월, 김저사건을 계기로 흥국사 회의가 열려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했다. 그리고 우왕, 창왕이 왕씨가 아니고 신돈의 소생이라는 비왕설이 공식 선포되고, 두 왕이 처형됐다. 이로써 위화도회군은 정당화됐다. 이성계의 집권에 명분이 열린 것이다. 또 이성계에 반대하는 인물을 제거할 근거를 마련했다. 창왕 옹립에 찬성한 이색, 우왕 복립을 기도한 변안열이 그 대상이었다.

1389년 12월, 두 사람에 대한 이성계파의 공격이 개시됐다. 그 결과 1390년 1월 변안열이 처형되고, 2월에 이색은 국문을 당한 뒤 유배됐다. 조선 건국으로 가는 정지작업을 대략 마친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먼저 공양왕이 저항의지를 굳히고 행동에 나섰다. 그리고 정몽주를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1390년 3월, 공양왕은 이성계파 언론의 선봉장 윤소종을 유배시켰다. 4월엔 강경파 간관들을 모두 해임했다. 공양왕의 반격에 이성계는 사직으로 맞섰다. 그리고 5월에 중국에 가서 이성계를 무고한 윤이·이초 사건이 발생했다. 이성계파는 사건 관련자들을 대거 투옥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몽주가 입장을 바꿔 반(反)이성계파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7월 정몽주는 대사면을 건의해 관철시켰다. 이성계파는 일제히 정몽주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양쪽은 팽팽히 대치해 1391년 5월까지 소강상태가 지속됐다. 단지 정몽주 1인이 돌아섰을 뿐인데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정몽주의 정치적 힘은 그 정도로 강력했다. 정몽주는 거의 이성계까지 설득했다. 다만 그에게는 군사력이 결여돼 있었다.

다시 1389년 12월로 돌아가보자. 이성계파 간관인 좌사의 오사충과 문하사인 조박이 이색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색과 아들 이종학이 파면되고, 조민수는 서인으로 강등됐다. 권근·이숭인·하윤도 유배됐다. 이성계파는 진영을 새롭게 구성했다. 개혁을 총지휘했던 대사헌 조준이 물러나고 성석린이 임명됐다. 탄핵을 주도한 오사충·남재·조박이 물러나고 윤소종·이첨이 좌우상시에 임명됐다. 남재는 사헌집의에 임명됐다.

1390년이 시작되자 이성계파는 남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 윤소종과 이첨이 탄핵의 선봉을 맡았다. 정쟁은 4월까지 계속돼 그들이 지목한 모든 사람을 유배시켰다. 변안열이 첫 번째 제거 대상이었다. 그에 대한 탄핵은 무려 여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공양왕은 즉위에 즈음하여 이색을 판문하부사, 변안열을 영삼사사에 임명했다. 두 사람은 김저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됐지만 그것을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심덕부를 문하시중, 이성계를 수문하시중, 정도전을 삼사우사에 임명하는 동거정부를 구성함으로써 김저사건을 무마하려고 했다. 김저사건은 공양왕에게 양면적이었다. 그 사건으로 왕이 됐지만, 그의 보호막은 사실상 이색과 변안열이었다. 변안열과 이색을 제거하는 것은 자신의 울타리를 없애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김저사건을 부정할 수도, 지지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주도한 탄핵정국


▎이성계의 왜구 토벌을 적시한 전북 남원시의 황산대첩비각. 일제시대 때 비석이 깨졌다.
왕이 처벌을 거부하자 간관들은 대궐문에 엎드려 한낮이 되도록 물러나지 않았다. 조선의 정치세계에서 익숙한 광경이다. 그러나 고려에는 이런 관습이 없었다. 곤란해진 공양왕은 이성계와 심덕부를 불러 사건을 협의하고, 죄는 인정하지 않되 파직은 허용했다. 그러나 대사헌 성석린은 변안열의 참형을 주장했다. 윤소종은 우왕이 김저사건 후 강릉으로 옮겨질 때 “변안열 때문에 죽게 됐다”라고 한 말을 상기시켰다. 왕조의 존속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선 왕 개인이 사적인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공양왕은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결국 “귀양간 곳에 가서 다시 국문하지 말고 목 베라”고 지시했다. 변안열을 국문하면 또 다른 연루자가 생길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변안열은 죽기 전에 “신우를 맞아오려고 모의한 것이 어찌 홀로 나뿐이랴”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또 다른 옥사를 불러 일으켰다.

고려말의 정치사에서 변안열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변안열의 죽음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성계에 대항할 수 있는 실질적인 무력이 소멸됐기 때문이다. 변안열만이 처음부터 확고하게 반이성계 노선에 섰다. 회군 뒤 이색과 이임 등 문신과 외척 집단의 저항이 가능했던 것은 변안열의 무력이 지닌 잠재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저사건으로 그는 칼을 뽑아보지도 못하고 제거됐다.

변안열의 가문은 황주 호족으로서, 원나라 지배기에 가문의 지위를 크게 높였다. 그의 조상은 중국인으로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의 황주로 옮겨와 귀화했다고 한다. 황주는 황해북도 사리원 바로 위에 있다. 우리나라 족보의 80%는 그 시조를 중국에서 온 사람으로 하고 있다. 가문의 권위를 높이려는 것이다. 황주 황씨 13세가 변석이고, 동생이 변순이다. 변순은 1268년(원종 9) 원 사신 톡토르(脫朶兒)를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쿠빌라이를 알현했다. 그는 심양로 천호후에 봉해졌고, 고려에선 문하찬성사 판예의시사 상호군에 임명됐다. 당시 심양엔 고려인이 많이 거주했다. 충선왕이 1308년 심양왕에 봉해진 것도 그 때문이다.

변안열은 간신인가?


▎정몽주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경북 영천시 임고서원의 전경.
변안열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공민왕이다. [변안열평전]에 따르면 그는 변순의 손자로서, 1334년 요동 심양에서 태어났다. 1351년 18세에 원나라 무과에 장원 급제했다. 그해 12월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귀국하자 그는 부장(副將)으로서 조카 변숙, 서동생 변안서와 함께 고려에 왔다.

변안열은 10년간 왕의 경호를 담당했다. 1373년(공민왕 22) 의용군 좌우위가 설치됐을 때, 공민왕은 그에게 우군 지휘를 맡겼다. 그만큼 그를 신뢰한 것이다. 공민왕은 그를 명문벌족인 원의(元顗)의 딸과 결혼시키고, 원주를 본관으로 하사했다. 원의는 아들이 없어서 변안열은 큰 재산을 상속받은 것으로 보인다.

변안열은 뛰어난 무장이었다. 고려 말의 전란과 왜구전에서 최영과 이성계에 미치진 못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전공을 세웠다. 그는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에 참전해 공신에 책봉됐다. 1373년(공민왕 23)엔 최영과 함께 제주를 정벌해 원나라 목호들을 진압했다. 우왕대에는 왜구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380년(우왕 6) 진포해전에 참전해 적선 500척을 모두 불태웠다. 이때 도망친 2만여 명의 왜구를 격멸한 황산대첩에는 이성계의 부장으로 참전했다.

그런데 [고려사] 기록에 약간의 의문이 있다. 당시 이성계는 종2품 도순찰사이고 변안열은 정1품 도체찰사였다. 그렇다면 상급자가 하급자의 부장이라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두 사람은 또한 전공으로 모두 금 50냥을 하사받았다. 동격인 것이다. 하지만 변안열의 열전에는 오로지 이성계의 활약상만 그려져 있고, 변안열의 전공에 대해선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변안열 열전이 아니라 사실상 이성계 열전이다. 더욱이 이 열전은 ‘간신전’에 편제돼 있다. 그가 이성계의 집권에 반대하다 처형됐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고려사] 기록은 기본적으로 공정하지 않다. 조선의 사관들도 왕조의 기본 입장에 반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달리 해석할 수도 있는 흔적을 조금씩 남겨뒀다. 그 흔적에 근거해 보면, 변안열이 주장이고 이성계가 부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변안열 역시 이성계에 필적하는 전공을 세웠을 것이다. 그는 그 정도의 군사적 역량을 갖춘 무장이었다. 어떤 전투에서도 거의 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1358년(공민왕 7) 노복 300구와 말 5000필을 국가에 바칠 정도로 거부였다. 아마도 사병으로 거느린 그의 병력은 이성계를 능가했을 것이다.

이후 그는 이인임, 임견미와 함께 정방제조로서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인임의 신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위는 오히려 이성계를 능가했던 것이다.

변안열은 위화도회군에 참여했다. 그의 평소 입장을 보면 회군에 찬성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 그는 우왕과 구원이 있었다. 전공판서 왕흥의 딸은 원래 변안열의 맏아들 변현의 정혼녀였다. 그런데 우왕이 그녀에게 흑심을 품었다. 시중 조민수가 우왕을 만류했으나, 우왕은 그녀를 선비(善妃)로 맞아들였다. 명예를 크게 손상당한 변안열이 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에 회의를 품었음직하다. 회군파 군대가 개성을 점령하고 최영을 체포한 날 저녁, 우왕은 환관 80여 인과 함께 이성계·조민수·변안열의 집을 기습했다. 이를 보면 변안열은 회군파의 3대 주력에 속했던 듯하다.

이색의 ‘곡학아세’


▎강화도에서 바라본 예성강 하구. 공양왕은 이곳에서 군함을 시찰했다.
그러나 그는 우왕의 폐위에는 반대하고 은거했다. 또한 전제개혁 때 명백히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고려사절요]에는 이색이 “옛법을 경솔히 고쳐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이임·우현보·변안열이 개혁에 반대했다고 한다. 이들은 문신, 외척, 무장세력의 대표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1389년 5월 우왕,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중국 외교문서가 도착했을 때, 변안열은 권근을 통해 그 내용을 미리 들었다고 한다. 이때 그는 여흥으로 우왕을 찾아갔다고 한다. 진위가 명확하지 않은 변안열의 [한양유소음](漢陽流所吟)에는 1389년 7월로 나온다. 이것은 이성계파에게 매우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그가 이성계에 필적할 무력을 지닌 무장이었기 때문이다. 김저사건은 그 와중에 터진 것이다.

1389년 10월 11일은 이성계의 생일이었다. 이성계는 정몽주와 변안열을 연회에 초청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었다.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를, 변안열은 불굴가(不屈歌)를 읊었다. 그 내용을 보자.

내 가슴에 말(斗)만한 구멍을 뚫어 긴 새끼줄 꿰어 / 앞에서 끌고 뒤에서 당겨 찢길망정 너희가 그리하겠다면 내가 참을 수 있지만 / 내 임금 빼앗고자 하는 일에는 나는 굽힐 수 없다 ([원주변씨세보] 庚申譜 권1 雜錄附)

이는 정몽주의 [단심가]와 같은 에토스로서, 당시 반이성계파의 정신적 경향과 결의, 명분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방원의 하여가, 정몽주의 단심가, 변안열의 불굴가는 진위가 명확히 입증된 것이 아니다. 영·정조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변안열이 죽었음에도 사건은 그대로 끝나지 않았다. 윤소종은 변안열의 심복 이을진의 국문을 요청했다. 고문에 못이긴 이을진은 원상(元庠), 정주목사 이경도, 정지, 이림, 이귀생을 실토했다. 관련자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가 재개됐다. 청백리로 명성을 얻었던 원상은 변안열의 처족이었다. 그는 우왕 복립계획이 “다만 사전 개혁을 원망하여 신우를 맞아 세워 그 일을 저지하고자 하였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이 과정에서 변안열의 진술을 상세히 문초하지 않고 처형시킨 한양윤·김백흥이 옥사했다.

2월 들어 이색조차 고문을 받았다. 이성계파는 이색을 반드시 처형하고자 했다. 유배중인 조민수도 고문했다. 심문관 전시(田時)는 창왕의 옹립이 이색에게서 나왔다는 진술을 받기 위해 조민수를 취조했으나, 조민수는 “신창을 세운 죄는 내가 원래 단독으로 한 것이며, 이색은 사실상 참여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일에 걸친 심문을 받자 마침내 굴복했다.

이색을 국문하기 위해 오사충과 전시가 장단에 파견됐다. 1389년 12월 6일, 순위부의 제강(提控) 박위생이 장단에 나가 있으라는 왕명을 이색에게 전했다.([목은집]) 일종의 가택연금 명령이었다. 그가 길을 떠나 대덕산 감응사라는 절에서 유숙하는데 유경(劉敬)이 술을 가지고 왔다. 유경은 이색의 문생이다. 그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군막에서 [대학연의]를 가르쳤다. 조선 개국공신이기도 하다. 비록 이성계파이지만 62세 스승의 비색한 처지를 위로하고자 따라온 것이다.

이튿날 이색은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시를 지었다.

장년엔 나도 신세좋다고 사람들 비난을 받았는데 / 궁한 줄 알게 된 오늘날엔 문득 망연하군그래 / 묘당에 다행히 이 몸을 알아주는 분 계시니 / 별장에 물러가 안거하며 좌선이나 배워야지

이색은 길을 가는 도중 이성계에게 감사의 시를 지어 보냈다.

나의 죄 죽어 마땅한데 임금님 인자하시어 / 경기에 물러나 몸 편히 살도록 해 주셨네 / 하늘이 주신 행운(天幸)을 어떻게 얻었느냐고요 / 그거야 바로 송헌이 나의 친구이시니까

송헌은 이색이 지어준 이성계의 호이다. 차남 이방과의 이름도 이색이 지어준 것이다. 12월 18일 지은 시에서도 다시 이성계를 충신으로 찬양하고, 당시를 태평성대로 평가했다.

송헌의 충의심 드높아라 하늘에까지 잇닿아서 / 한강(漢絳)이며 당량(唐梁)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도다 / 태평시대의 진짜 기상을 알아보고 싶으신가 / 문 닫고 베개 높이 편안히 잠드는 모습 보소

공양왕의 ‘단식투쟁’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릉인 건원릉. 아들인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의 억새를 옮겨와 봉분에 심었다. / 사진:문화재청
다소 낯간지러운 내용이다. 한강은 한나라 강후 주발, 당량은 당나라 양국공 적인걸이다. 모두 사직을 지킨 충신이다.

그러나 다른 시에서 아들들을 걱정했다. 큰아들 이종덕은 1년 전 곤장을 맞아 죽을 뻔했고, 차남 이종학은 당시 순천에 귀양을 갔으며, 3남 이종선은 탄핵을 받고 있었다.

송헌이 국정을 맡는데 나는 떠돌이 신세라니 / 꿈속에서도 이런 생각을 그 누가 했으리오 / 지금 두 분 정씨가 또 대의에 참여한다는데 / 우리 가족이 모여서 살날은 과연 언제 일꼬

12월 29일쯤엔 이성계에게 보내는 시를 썼다.

흰머리 내 신세 석양에 접어들었으니 / 관직 없고 땅 없어도 아무 상관없소이다 / 단지 하나 산 놀러 다니는 고흥은 남았으니 / 귀찮겠지만 조정에서 한번 상량해 주셨으면

무직무전(無職無田), 이제 지위도 재산도 없어도 좋으니, 산에 놀러다니며(游山) 살도록 생각해달라는 간청이었다. 그리고 2월 4일 입춘쯤 다시 이성계에게 시를 썼다.

남은 인생 절간에서 부쳐 살고 싶은데 / 묘당의 친구는 나의 소원 들어주시려나 / 세상일은 만사가 갈가리 찢기고 말았으니 / 목숨 바쳐 삼세가 헛됨을 깨닫고자 하오

이 역시 불도에 정진할 뿐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이색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색과 이성계의 교분은 깊었다. 정몽주·정도전과의 관계는 더욱 깊었다. 그러나 정치노선이 달라지자 그런 관계는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정치에서는 인간의 기본적 관계조차 파괴되는 경우가 많다. 공양왕은 이색에게 예우를 갖추도록 지시했다. 심문은 하되 “이색을 놀라지 말게 할 것이며 만약 불복하거든 마땅히 다시 그 뜻을 알려라”라고 말했다. 이색은 불복하고 조민수와의 대질을 요구했다. 이를 보고받은 왕은 고문을 명령했다. 심문관들은 옥졸에게 곤장을 잡고 좌우에 서서 하루 종일 밤새도록 핍박하면서, 조민수의 진술을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이색은 끝까지 불복했다.

4월 들어 간관들은 여러 사건에 관련된 모든 인물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왕은 견디지 못해 이성계와 심덕부를 불러 대간의 탄핵을 중지시키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왕이 이성계와 협의하고자 하자 지신사 이행은 “대간의 탄핵이 어찌 공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배후에는 이성계가 있었다. 결국 왕안덕과 우홍수, 원상을 제외한 모든 관련자는 유배됐다. 세 사람도 결국은 유배됐다. 개혁파는 일단 원했던 것을 얻었다. 그들은 잠재적인 군사실력자들과 외척, 이색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 지식인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양왕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왕은 대간들의 탄핵에 대항해 음식을 먹지 않았다. 두려움에 떨던 그는 이성계에 대항해 싸우려는 의지를 굳혔다. 공양왕은 유약하고 무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은 왕에게 공공연히 그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다만 공양왕은 끝까지 모욕을 참는 인물은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을 계속했다. 공양왕은 이 정쟁의 와중에서 추대공신호를 내렸다. 여기에는 탄핵 대상인 우홍수와 정희계가 포함돼 있었다. 우홍수는 우현보의 아들이자 공양왕의 부마 우성범의 아버지였다. 김백흥이 옥사하자 왕은 정몽주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무릇 죄인의 국문은 서서히 그 정을 살피는 것이 마땅한데, 이제 순군이 법률에 의하지 않고 문득 참혹한 독을 가하여 무고한 사람이 죽으니, 내가 심히 민망하게 여긴다. 하물며 재상은 비록 중죄라도 죽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거늘, 한번 죄망에 걸려들면 함부로 고문을 가하여 혹은 옥중에서 죽고, 혹은 저자에서 베니 내가 일찍이 심히 이를 싫어했다. 오늘에도 또한 이와 같은가.”([고려사] 공양왕 2년 2월 계축)

이것은 정당한 불만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정몽주에게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공양왕은 정몽주를 설득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정몽주, 왕의 조력자가 되다


▎이성계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이제에게 내린 공신교서. 국보 324호로 지정됐다. / 사진:연합뉴스
왕은 원상을 과감히 석방시켰다. 이것은 왕 자신의 의지를 명시적으로 표명한 첫 번째 조치였다. 이어서 대간들이 왕의 면전에서 직접 논박하는 면계(面啓)를 폐지시켰다. 이성계파 간관들에 대한 반감을 표시한 것이다. 그는 또한 문묘를 직접 배향하고 전함을 순시하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문교와 무비를 어느 한쪽이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데, 근년 이후로 법제가 점점 해이하여 인재는 일어나지 않고 도적이 일어나 돌아다니니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한다. 벽옹(성균관)에 나가서 국로(國老)를 배알하고, 농한기에 무예를 연습하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내가 문묘에 배알하여 유학을 권장하고, 전함을 시찰하여 군용(軍容)을 사열하고자 하니, 맡은 관사에서는 아뢰어 시행하라.”([고려사] 공양왕 2년 2월 계해)

성균관과 군함은 문무의 상징적 표상 같은 것이다. 그곳을 방문하겠다는 것은 왕다운 왕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더 이상 꼭두각시로 남아 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성계파가 예상하지 못한 일어났다. 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은 공양왕을 그 정도의 결기를 가진 인물로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간은 성균관과 군함의 시찰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자 공양왕은 기지를 발휘했다. 왕릉 참배를 명분으로 예성강에 나가 전함을 관람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태도와 조치가 공양왕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변안열과 김백흥의 죽음을 계기로 정몽주가 결심을 굳힌 것으로 생각된다. 공양왕은 정몽주의 조언과 격려를 받았을 것이다.

공양왕 2년 3월, 왕은 홍영통을 영삼사사, 우현보를 판삼사, 왕안덕을 강원군, 우인열을 계림윤에 임명했다. 이들은 이성계파가 제거하고자 했던 핵심 인물들이었다. 이는 이성계파의 계획에 대한 공개적인 역공이었다. 겁먹은 우인열이 “신을 한 변방으로 폄출시켜 여생을 보전하게 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자, 왕은 “만약 스스로 폄출되기를 원하면 이는 그 죄를 시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소종과 오사충은 언관직에서 배제됐다.

공양왕과 헌납 함부림과의 논쟁은 당시 공양왕의 취약한 입지를 잘 보여준다. 이성계파는 공공연히 왕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공양왕이 함부림을 불러 “내가 대간과 형조에 명하여 왕안덕·우인열·우홍수 등을 논핵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너는 이를 아는가?”라고 물었다. 함부림이 그렇다고 답하자, 왕은 “네가 이미 이를 알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논하여 고집하기를 그치지 않는가? 내가 비록 덕이 없지만 이미 임금이 되었는데 너희들이 내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이 옳으냐?”라고 강하게 질책했다. 그러나 함부림은 “상벌이 적당하지 않으면 대간이 논박하는 것은 진실로 그 직책입니다”라고 답했다. 화가 난 왕은 “너희들이 내 명을 따르지 않으면 마땅히 죄를 주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함부림은 “예로부터 임금이 언관에게는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현릉(공민왕) 시대에도 죄를 얻은 간관이 많았다”고 반박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 3월)

함부림의 답변은 유교의 정치원리 상 모두 옳은 말이다. 문제는 왕에 대한 존경심이나 삼가하는 태도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처벌하겠다는 왕의 위협이야말로 오히려 왕권의 취약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위협도 결국 말이며, 왕권은 말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공양왕의 결의, 이성계의 사직

1390년 3월 왕은 마침내 윤소종을 금주(현재 금산)에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윤소종은 이성계파 언론의 선봉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이 시중은 군자를 천거하고 소인을 물리치지 못하니, 만약 하루아침에 소인의 계략에 빠진다면 후회한들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경고했다. 이는 당시 이성계파의 위기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다소 의외이다. 김저사건과 공양왕의 즉위, 변안열의 처형, 이색의 유배를 통해 이성계파는 반대파를 거의 제거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마 정몽주였을 것이다. 정몽주의 본래 노선은 연립내각이었다. 개혁과 왕조의 공존, 이색과 이성계의 공존이 그 실체였다. 그러나 이성계파의 진로가 점차 역성혁명으로 진행되자 정몽주는 다시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이성계도 이에 대해 확고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정몽주가 격살될 때까지 주저했다. 이른바 혁명파는 이성계의 주저하는 모습에 더 큰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심덕부가 윤소종의 이 말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좋은 기회를 잡았다. 이성계를 모욕했다는 명분을 들어 윤소종을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조정 신하로서 기탄없이 바른말 하는 사람은 오직 소종뿐이오니, 이 사람에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왕은 이성계의 공개적 의사에 반하여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했다. 공양왕이 상당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그가 항의를 표시할 때 언제나 쓰는 방법이었다. 그러자 공양왕은 환관을 이성계의 집에 보내 위문하고 억지로 조정에 나오게 했다. 또한 9공신에게 교서를 내려 칭송하고, 말 1필과 백금 50냥을 하사한 다음 내전에서 위로연을 베풀었다. 공양왕의 조치는 상당히 능란해졌다.

4개월에 걸친 격렬한 정쟁이 지나간 뒤 윤4월 한 달은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 시기에 공양왕은 강경파 간관들을 모두 지방관으로 좌천시켰다. 그리고 이색을 지지하는 김진양과 이확을 좌우사의에 임명해 언론을 장악했다.

그러나 새로운 태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1390년 5월, 명에서 귀국한 왕방과 조반은 폭발성을 가진 소식을 가지고 왔다. 이른바 ‘윤이·이초 사건’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다시 전개됐다. 사건의 내용인즉, 윤이와 이초라는 사람이 중국 조정에 와서 이색·우현보 등의 이름으로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군대를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실제 전언은 이렇다. “너희 나라 사람 파평군 윤이와 중랑장 이초란 자가 와서 황제에게 호소하기를, ‘고려의 이 시중이 왕요를 세워 왕으로 삼았으나 왕요는 종실이 아니고 곧 그 인친입니다. 왕요가 이 시중과 함께 병마를 움직여 중국을 범하려고 하므로, 재상 이색 등이 옳지 않다고 하자, 즉시 이색·조민수·이임·변안열·권중화·장하·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 등을 살해하고, 우현보·우인열·정지·김종연·윤유린·홍인계·이인민 등을 멀리 귀양보냈습니다. 귀양가 있는 재상들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에게 고하고, 이내 친왕(親王)이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토벌하여 주기를 청합니다’하였다.”

역성혁명 방아쇠 당긴 윤이·이초 사건

그러면서 윤이와 이초가 제출한 청원자 명단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중국 예부의 관원은 “성스럽고 밝은 천자께서는 그것이 무고인 것을 알고 있으니, 네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과 재상에게 말하여 윤이의 글 속에 있는 사람들을 힐문하고 와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것이 중국 조정의 문서를 통한 공식 통보가 아니라 예부의 단순한 전언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조반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진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다. 이 때문에 좌사의 김진양은 “윤이와 이초의 일은 3살 어린아이라도 조반의 무망인 줄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저사건에서 이성계파는 명나라의 권위를 이용해 우왕, 창왕은 물론 정적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정몽주가 공양왕과 연합해 반격에 나서고, 이성계파 중 급진파가 수세에 몰린 상황을 감안하면, 급진파의 조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공양왕도 이런 근거로 대간의 탄핵을 불허했다. 그러나 조반이 전한 사건 관련자 중 한 사람인 김종연이 두려움에 차서 도망쳤다. 그러자 이 사건은 갑자기 사실이 돼버리고 말았다. 우현보 등 11인이 하옥되고, 유배된 인물들은 모두 국문을 받기 위해 청주옥에 갇혔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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