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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23)] ‘도시인의 스승’인 사막의 아이들 

사막에는 원초의 환희, 생명의 약동이 있네 

자연의 소박한 소재 이용한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몰라
풍요 속 빈곤과 권태가 일상화된 도시인에게 주는 깨달음


▎나무로 만든 허름한 시소 하나가 사막 마을의 유일한 놀이기구지만 아이들에게는 지루할 틈이 없다. 사막의 모든 일상이 아이들의 장난감이자 놀이터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닥쳐오는 질문은 왜 그토록 단순하고 소박한 무위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현란한 금·은 패물을 몸에 걸치고 살아가야만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다디야의 부인은 한 줄의 목걸이를 걸쳤는데 그 목걸이에는 직사각형의 은판이 주렁주렁 달리어 있고 정교한 염주와 함께 가슴팍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에는 둥근 은팔찌가 수갑처럼 여러 개 채워져 있는데 그 묵직해 보이는 은팔찌마다 징(작대기 모양의 못)이 돌출해 있고 또 그 징의 끝, 그러니까 주두(柱頭)는 동그란 모양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그 묵직한 주두가 손등 쪽으로 불쑥 나와 있으니 우리 상식에는 그런 팔찌를 끼고 온종일 생활한다는 것은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양쪽 발목에도 팔찌보다 더 두껍고 더 무거운 딱딱한 은발찌가 채워져 있다. 그리고 코의 한 쪽(보통 왼쪽)에는 콧방울을 뚫어 채운 매우 큰 골드 디스크(콧방울 전체를 커버하고도 남을 넓적한 금방패 모양의 장식)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있고 구멍마다 고리형 귀걸이가 달려있다.

나는 그곳에 엿새를 머물렀다. 내가 그곳에 머물러있는 동안 어느 시간대이든 단 한 번도 다디야의 부인이 보석치장을 벗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오두막집 밖에서 잤기 때문에 그녀가 잠잘 때 그 모든 것을 벗는지 안 벗는지조차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아마도 내가 추측컨대,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몸 자체의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것들을 몸에 부착된 채로 놓아두고 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다.

만약 잘 때 그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잔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사업이 될 것 같다. 그 장신구들은 그녀의 사지에 매우 밀착되어 있고 또 치밀하게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매일 밤 떼어낸다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그렇다고 그 묵직한 것들을 코와 귀와 사지에 다 채워놓고 잔다는 건 도무지 상상키 어렵다. 나는 사실 이런 궁금증들을 명쾌하게 풀지 못했다.

서양 교육을 받았고 여성을 억압하는 이 지구상의 전통사회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데 익숙하기만 했던 나로서는 여성이 결혼하게 되면 그 여성의 기동성을 제약하기 위해, 그가 가정에 보다 충실하도록 길들이기 위해 그런 거운 패물을 장착시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가설은 완벽하게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삶의 현장과 관념에 천착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전통사회의 여성들은 그들의 습속에 따라 패물이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아니라 그들의 몸을 보호해주고 강화시켜주는 좋은 장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믿는 전통의학 인체관과도 상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패물이 그들에게 건강과 특히 임신능력을 증대시킨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기실 더 중요한 패물의 기능은 그것이 혼인녀에게 더 많은 권세를 보장해준다는 것이다. 금과 은으로 된 묵직한 패물은 결혼과정에서 지참금의 일부로서 신부의 부모가 신부에게 보석으로 치장된 겉옷들과 함께 선물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고귀한 보석들은 온전히 여성의 소유로 남으며, 혼인녀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 보석패물을 처리할 수 있는 자유로운 권리를 끝까지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패물들은 여인들에게 확고한 삶의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녀의 은치장물이 무거울수록 그녀는 부유하고 고귀한 집안의 여성이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물론 금장식물은 은보다 한 차원 더 높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여인은 자신의 재산을 불완전한 은행에 맡기지 않고 자기 몸에 부착시킨다고 할 수 있다. 무거운 패물은 곧 그녀의 통장 저축액과 같다. 한 여인의 생애에 있어서, 결혼생활 과정을 통하여서도 남편은 자기 부인에게 보석을 선물할 수 있다. 그 선물 역시 부와 권력의 표상으로서 여성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석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통과의례의 절목마다 주어지는 중요한 재산이다.

여인의 패물은 부와 권력의 바로미터


▎금붙이 장신구로 멋을 낸 사막의 여인.
탄생·성장·결혼·임신 등등 인생의 통과의례마다 보석에는 그 의미가 새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마킹은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다디야와 그의 부인은 나에게 한 살짜리 아들의 발목에 채워져 있는 아름다운 금발찌와 은방울을 보여주면서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이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기에 그들의 독생자에게 이러한 고급스러운 보석선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매우 행복한 프라이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디야와 그의 부인은 자식 둘을 두었는데 큰 아이는 베키(Becky)라 불리는 세 살짜리 딸이었고, 둘째는 한 살 먹은 아들이었다. 다디야의 형들은 다디야 패밀리보다는 나이가 많은 자식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8살, 10살짜리 두 아들과, 십대 초반과 십대 후반의 두 딸이 있었다. 이 두 딸은 얼마나 착한지, 베키와 베키의 남동생을 거의 전적으로 보살펴주고 있었다. 우리의 도시 삶에서 볼 수 없는 고립된 사막의 단란한 대가족 패밀리였다.

다디야는 아이들의 나이를 내게 알려줬다. 그 나이는 틀림없이 맞는 나이이겠지만, 정말 그들의 삶의 행태를 보면 믿기 어려운 구석이 너무 많았다. 도시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아이들의 성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달리며 빠르게 성숙하는 것이다. 돌밖에 안 되는 꼬맹이가 하루 종일 혼자 뛰놀고 스스로 대소변을 해결한다. 집에 너무 가까운 곳이 아니면 어디든지 똥오줌을 싸도 된다. 그리고 세 살 먹은 베키는 집 주변의 모든 살림살이를 능숙하게 처리한다. 염소를 묶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하고, 이동시키기도 하며, 불쏘시개를 보이는 대로 거두어들이고, 연료로 쓸 동물의 똥을 잘 펴서 말리며, 집 주변을 항상 빗자루로 쓴다. 그리고 물을 나르고, 식구들이 먹고 남긴 그릇을 씻는다.

세 살 먹은 꼬마가 이 모든 일들을 능란하게 해낸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베키는 그녀의 언어로 매우 또박또박 말을 하면서 어떻게 그 일들을 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베키는 모든 음절을 매우 명확하고 아름답게 발음했다. 나는 대학시절 뉴욕의 어마어마한 부잣집에서 3살짜리 남자아이의 베이비시터 노릇을 한 적이 있다. 사막의 같은 나이의 아이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너무 엄청나서, 도무지 그 뉴욕 아이의 성장단계를 적절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사막의 나이는 도시와 다르다


▎땔감으로 쓸 나무를 줍는 세 살짜리 소녀 베키.
도시의 남자아이는 베키와 같은 나이인데도 기저귀를 차고 있고,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유모차를 타고 나가며, 엄마가 옆에 없으면 항상 울어댔다. 사막의 자족적인 아이들을 관찰하면서 도시의 삶, 도시의 문명이 기준으로 삼는 교육방식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방해하는 너무도 많은 장애물을 설치해놓고 있다는 잔인한 사실을 깊게 통찰할 수 있었다. 룻소의 [에밀]을 논할 것까지도 없다.

저녁 식사가 그 작은 집 안에서 장작과 말린 낙타똥을 태우는 화력에 힘입어 만들어진다. 진흙을 구워 만든 작은 화덕이 통풍용으로 뚫린 작은 창문 밑에 자리잡고 있다. 보통 식사라는 것은 손으로 만든 짜파티(chapati) 빵과 인도인의 대표적인 스튜라고 할 수 있는 달(dal)로 이루어진다.

달은 마른 렌즈콩(dried lentils)을 양념과 오일과 함께 볶아 끓여서 만든다. 렌즈콩은 사막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식재이다. 그것은 냉장고 없이도 장기간 보존할 수 있고 밀가루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영양소를 내포하고 있다. 단백질·섬유질·비타민·광물질 등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곁들여지는 양념들도 많은 비타민과 무기질을 첨가해주며, 기름 또한 많은 칼로리를 제공한다.


▎사막의 소박한 집. 아이는 집 주변에서 혼자 노는 게 일과다.
다디야의 부인은 보통 인도음식을 먹는 여인들과는 달리, 짜파티 빵을 잘게 찢어서 달에 그냥 섞어 버무린 것을 오른손으로 꾹꾹 움켜쥐어 먹는다. 이러한 방법은 손가락에 달이 직접 묻기 때문에 좀 덜 고상한 듯이 보인다. 처음에 나는 빵을 찢어서 손가락에 직접 묻지 않게 빵으로 달을 집어 올렸으나, 결국 나도 다디야 부인처럼 잘게 찢은 빵을 달과 섞어서 빵에 달이 다 스며들도록 한 뒤 편하게 손가락으로 집어먹었다. 다 먹고 나서 손가락을 핥으면 되니 말이다. 그리고는 손을 따끈한 모래에 비벼대면 다시 깨끗해진다.

사막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열과 신체적 활동으로 인해 존재를 유지하는 그 자체에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는 것 같다. 사막에서는 항상 배고프다. 매일 똑같은 음식을 잔뜩 먹어도 그저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항상 많이 먹게 된다.

저녁을 먹고 나니, 다디야는 집밖에 한 작은 메탈 프레임의 침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위에 카펫을 깔고 두꺼운 담요들을 제공해주었다. 집이라고 하지만 너무 작아서 침대를 펴놓을 공간이 없었다. 나는 이미 별 하늘을 덮고 자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야외 숙박이 낯설지 않았다.

내 침대는 다디야의 예쁜 집과 돌벽돌을 쌓아 둥글게 만든 헛간 사이에, 맞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자리에 놓여졌다. 물론 침대는 안락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침대를 놓고 잘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치였고, 더구나 덮을 수 있는 두툼한 담요가 몇 개 있다는 것으로도 행복했다. 나는 여행으로 지쳐있었고, 지독한 감기에서 회복된 직후였다. 침대에 기어 올라가자마자 안락한 꿈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아침에 상쾌하게 눈을 뜰 때까지 단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다음날 내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의상을 바르게 차려입는 것을 배우는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가 머리에 쓰는 베일이었다. 원주민 여자들이 쓴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뒤집어쓰면 곧바로 흘러내렸다. 어떻게 그 머플러 천들이 클립이나 휘감아 고정하는 장치 없이도 느슨한 상태에서 계속 머리에 머물러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나는 그 비결이 스카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머리카락의 특별한 손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그들과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십대 소녀들에게 내 머리를 가리키며 그들과 똑같은 머리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손짓발짓 다 해가며 그들과 소통했다.

그 서먹서먹했던 소녀들은 곧 내게 친근감을 갖게 됐고, 내 머리를 손질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곧바로 그들은 무슨 가루물질과 뜨거운 물을 섞어서 좀 뿌연 일종의 풀을 만들었다. 그것을 뒤집어쓴다는 게 내심 걱정되어 다디야에게 달려가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다디야는 그것이 식물에서 추출된 순수하게 자연적인 풀인데, 헤어스타일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발라야만 하는 풀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오케이! 나는 소녀들이 내 머리와 머리카락 전체에 그 풀을 발라댄 뒤에야 비로소 그 풀의 성격과 용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내 머리 정중앙에 가르마를 타서 두 편으로 나누고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뒤통수까지 양갈래로 줄기를 땋아 내렸다. 보통 ‘더블 프렌치 브레이드’라고 부르는 스타일이다. 그 소녀들이 내 머리를 너무 세게 잡아당기는 통에 두피가 아플 지경이었다.

결국 최종적 모습은 내 머리의 상단에 평평한 면적을 각지게 만들어놓았다. 양쪽에서 땋은 머리의 옹이가 양쪽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풀이 말라가면서 나는 머리 전체를 옥죄는 느낌이 들었다. 다디야는 그곳 여인들이 이런 머리를 한 달가량 지속시킨다고 했다. 그 말은 곧 한 달 동안 머리모양을 만지지 않고 그대로 잔다는 뜻이다. 그리고 3주 만에 머리를 풀고, 씻고, 또 다시 모양을 만든다는 뜻일 게다. 첫날 이후로 마른 풀이 박편이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꼭 내가 비듬이 극심하게 많은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그 풀은 머리모양을 유지하는 데도 유용하지만, 머리카락 자체를 깔깔하게 만들어 머리에 쓴 베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만드는 효과를 내는 거였다. 나는 이런 실천을 통해서, 인도 여인들의 스카프가 아무런 장치 없이 흘러내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알아냈다. 비결은 머리카락의 모양과 질감에 있었던 것이다.

삶에 스며들어 있는 예술과 수행


▎베키와 필자.
후에 나는 이러한 헤어스타일이 또 다른 실용적 기능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헤어스타일은 머리 위에 똬리를 놓는 것과도 같이 정수리 면적을 평평하게 넓혀주기 때문에 여인들이 항아리를 머리 위에 얹을 때, 균형을 유지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물을 퍼올 수 있는 샘(실제로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샘 같지는 않고, 일종의 물탱크인 것 같다)이 집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소녀들은 부지런히 머리 위에 꽤 커다란 물동이를 이고 걷는다. 물론 물을 가득 채웠는데 그 물동이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균형을 잡아가며 여유롭게 걸어가는 모습을 쳐다보는 것은, 그 소녀들의 호리호리한 몸매와 제대로 차려입은 의상과 함께 그것은 실로 하나의 예술이라 해야 할 것이다.

동이에는 귀가 달리지도 않았다. 보통 때는 머리와 동이 사이에 똬리를 놓지만, 어떤 때는 똬리 없이 맨머리로 잘도 이고 다닌다. 내가 처음 동이를 이었을 때, 나는 똬리를 머리에 얹고 두 손으로 물동이를 잡았지만 그래도 계속 동이가 기울어져 떨어질 뻔했다. 그 무슨 낭패인가! 수십 번의 연습을 거쳐, 나는 머리에 똬리를 놓지 않고 한 손만 동이를 잡고 직선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경지까지는 도달할 수 있었지만, 도저히 소녀들처럼 손을 놓고 목의 밸런스만으로 걸어가는 경지에는 도달할 길이 없었다.

삶의 곳곳에 ‘도의 경지’가 있다. 그것은 스님이나 도사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 소녀들의 경지가 용맹정진을 하는 스님의 경지보다 더 지고한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서투름이 소녀들을 낄낄거리게 만들었고, 베키와 꼬마 사내들은 우리 주변을 돌면서 명랑하게 뛰어놀았다.


▎사막의 여인들은 물동이를 이고도 자유자재로 걸어다닌다.
한 번은 물동이를 나르는 내 모습을 집중적으로 영상화하는 다큐 작품을 만들고 있었는데, 베키와 사내아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뛰놀았다. 나는 내가 찍은 필름을 되돌려볼 때 비로소 그 사실을 알았는데,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그들에게는 신기했고 신선한 기쁨을 선사하는 퍼포먼스였나 보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된 것은, 이들이 항상 웃고 야외에서 즐겁게 논다는 매우 단순한 사실, 그리고 극히 단순한 오브제를 가지고도 재미를 창조하면서 논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을 즐겁게 만드는 사태를 고안해낸다. 그리고 울거나 싸우거나 하는 법이 거의 없다. 도시 문명의 아이들이 하루 종일 울거나 찡얼거리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일례를 들자면, 어디서 볼펜 하나를 얻든지, 전등 하나를 얻든지 하면 그걸 가지고 수없는 종류의 오락을 끊임없이 지어내고 또 그것에 열중한다.

사막에는 ‘권태(倦怠)’가 없다


▎다디야의 부인이 화덕에 빵을 구워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하룻밤은 나이가 좀 있는 소년이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의 손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놀이를 고안해냈다. 그 손바닥그림은 매우 정교했다. 나는 그가 손바닥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그 손바닥을 전등으로 비쳐주었는데 어두운 방에 모두가 옹기종기 웅크리고 있는 판에 집중된 스포트라이트가 생기고 또 그림이 그려지는 그 장면 자체가 매우 신비롭고 인간적인 훈기가 느껴졌다. 그들은 그 그림을 그리는 소년이 여러 가지 패턴과 글자와 숫자를 쓰면서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비상하게 집중하고 웃곤 했다. 그 행위 자체가 위대한 연극이었다.

낮에 밖에서 놀 때도 그러했다. 동네에는 딱 하나의 시소가 있었다. 새총처럼 갈라진 나무 하나가 땅에 굳건히 박혀 있다. 그리고 그 위로 기다란 통나무 하나가 횡으로 걸쳐져 있다. 두 개의 큰 나무로 구성된 초라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었지만 아이들은 그 나뭇가지에 매달려 끊임없이 다양한 놀이를 만들어냈다.

베키는 시소의 한 편에 남자아이들과 함께 타려고 하다가 땅에 떨어지곤 했다. 도시아이들 같으면 울면서 짜증을 낼 텐데, 베키는 웃고 또 웃으면서 천진난만하게 그곳에 기어이 올라타려는 노력을 반복했다. 그 순결한 시도와 웃음, 그리고 끊임없이 재미를 만들어낼 줄 아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 문명사회에서 말하는 ‘교육’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지, 더구나 ‘덕성교육’, ‘인성교육’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되묻게 된다. 자연이 그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도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다아니(dhani)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공동체에 사는 여인들의 일상생활을 한번 살펴보자! 다아니는 세 가족의 집과 샘 하나로 구성된 아주 작은 마을이다. 이들이 집밖을 다니는 것은 오직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것뿐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단조로운 환경 속에서 권태를 느끼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처럼 생각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과 함께 권태를 창조했다고 한다. 인간이 산다고 하는 것 자체가 권태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사실 도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실존주의철학이 매우 그럴싸하게 느껴지겠지만, 이들의 삶에 적응하게 되면 그런 도시인들의 권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매우 빨리 이들의 삶에 적응하였고 특히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일순간도 권태라는 것을 느껴볼 기회가 없었다. 발랄한 생명의 약동만 있었을 뿐이다.

세 살짜리 ‘스승’의 인생 가르침


▎1. 사막의 아이들은 밤이 되면 작은 플래시 불빛에 의존해 손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한다. / 2. 물이 부족한 사막에선 식기들을 모래로 씻는다. / 3. 사막의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자이살메르 궁전의 레스토랑 음식.
베키는 항상 나와 같이 있었다.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했는데 베키가 쓰는 언어는 마르와리(Marwari)였다.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심전심으로 통했다. 베키는 하루 종일 연속되는 일들을 즐겁게 수행했다. 단 한순간도 쉬는 법이 없이 계속 움직였다. 동물의 똥이라든가, 조약돌이라든가, 나무조각 같은 쓰레기들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지루한 작업도 아주 익사이팅한 놀이로 만들어냈다. 하루의 일과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과업은 그릇을 씻는 일이다. 3살짜리 베키는 이 일에 매우 숙련되어 있었다. 물이 워낙 없기 때문에 그릇을 씻는 주재료는 모래였다.

그릇은 스테인리스나 양철로 되어 있다. 그릇을 씻기 위해서는 먼저 좀 떨어진 곳으로부터 작열하는 태양에 소독된 깨끗한 모래를 퍼 와야 한다. 깨끗한 모래를 두둑하게 쌓아놓은 후에 그릇 씻는 작업이 시작된다. 큰 대야에 약간의 물을 붓고, 가루비누를 섞어 휘젓는다. 그리고 불결한 그릇들을 그 비눗물에 담가 씻어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그 물이 시커멓게 변해버리지만 모든 그릇이 정해진 양의 물을 통과한다. 그런 후 그릇들은 깨끗한 모래 위에 놓이게 되며, 하나씩 문질러대기 시작해 완전히 마를 때까지 비벼댄다. 그리고 나중에는 모래를 털어내면 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그릇을 씻고 나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생적이고 깨끗한 그릇이 된다. 베키는 그 과정을 너무도 명랑하게, 너무도 솜씨 있게, 너무도 즐겁게 해냈다. 베키의 몸짓 하나하나가 모두 엘랑 비탈(élan vital)이었다. 그것은 삶의 환희였다. 권태의 그림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게 느꼈던 순간 중의 하나가 아마도 베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베키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 지구상의 그 많은 지역을 여행하고 사람을 만났어도 베키는 좀 특별했다. 엿새 동안의 고립된 공간에서 그토록 어린아이와 특별한 일체감을 느끼는 체험은 물론 나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베키는 아주 특별한 천부의 재능을 부여받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어린이였다. 베키는 나에게 무엇이든지 가르쳐주려는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모든 성의를 다했다. 그런데 베키는 단지 3살의 어린이였다. 그렇지만 내 인생에서 만난 매우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 시간 그 공간에서 더없는 교사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베키의 움직임과 베키의 언어를 또렷이 기억한다. 한 인간으로서 어린이의 경이로움을 나는 처음 느꼈던 것 같다. 그러한 레벨에서 어린이와 교감을 가질 기회는 별로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 일어났던 것이다.

사막의 삶을 뒤로 하고 다시 도시로


▎사막의 가장 작은 마을 단위는 서너 가족들이 모여 사는 형태다.
사막을 떠난 후에 나는 자이살메르성채 밖에 있는 아주 깨끗한 신식 호텔로 거처를 옮겼다. 경치를 바꿀 필요도 있었지만 또 아주 오랫동안 뜨거운 물 샤워를 할 수가 있었다. 성채 안에 있는 호텔에서는 그러한 시설을 향유할 수가 없었다. 우선 6일 동안 이상한 풀로 덕지덕지 덮인 머리카락을 깨끗하게 풀어내야 했다. 내 원래 머리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선 여러 번 머리를 감아야만 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두피가 매우 신선한 호흡을 하는 것을 느꼈다. 기분이 좋았다.

나는 멋있고 모던한 인도에서 산 면제품의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뒤 곧장 옛 궁전을 개조한 화려한 레스토랑으로 갔다. 팬시한 음식과 프랑스제 와인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이런 새로운 환경을 접할 때면 그토록 어렵게, 그토록 극한에 가까운 다른 환경에 적응해버린 내가, 원래의 관습대로 돌아오는 과정이 그토록 쉽고 빠르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롭게 느껴진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속담도 이에 맞는 이야기이겠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무위에서 유위로의 복귀는 너무도 쉽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 문명인들의 본질적인 문제점일지도 모른다.

며칠 동안 자이살메르에서 피로를 푼 후, 그 타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상의 음식과 더운 샤워를 실컷 즐긴 후, 나는 아니켓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비카네르로 가는 로컬 버스에 올라탔다. 이 버스는 밤새 달리는 야간 버스였다. 그래서 레귤러 시트 위로 옛 열차 위 짐칸 같은 곳에 침대칸이 있었다. 침대칸이라지만 온갖 때와 음식나부랭이들이 더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그것을 덮을 깨끗한 시트를 준비해왔다.

쿵쾅거리는 버스에서 8시간을 잔 후에 눈을 떠보니 이미 날이 밝았고, 버스는 종착지에 닿았다. 그날 나는 비제이 게스트하우스, 그러니까 내가 이전에 묵었던 바로 그 방으로 복귀했다. 그것은 2013년 2월 16일의 일이었다. 내 방에 히투(Hitu)로부터 하트모양이 그려진 환영카드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반가운 느낌이 솟구쳤다. 보통 하트그림은 밸런타인데이에 통용되는데 밸런타인데이는 이미 이틀 전에 지나가버렸다. 왜 하트가 그려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 그러한 환영사는 언제나 반갑다. 우의의 표시로 받아들였고, 나는 카드를 보낸 그의 세심한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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