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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경영자’ 이건희의 유산 | 독점비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건희 삼성 회장 이야기 

“당신들은 최선을 다하겠지만 나는 목숨을 겁니다” 

선택과 집중에 입각한 스피드 신봉자, 사장보다 더 받는 인재 영입 독려
품질개선에 이어 디자인과 마케팅 혁신으로 초일류 삼성 브랜드 각인시켜


▎이건희 삼성 회장은 삼성 임원들에게 파격적인 연봉을 지급하는 이유에 대해 “이 세상에 공짜도 없고, 거저 되는 것도 없다”는 말로 응수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면모를 담겠다는 목적으로 삼성 임원들과 접촉했다. 인터뷰를 정중히 고사하는 사람과 숙고 끝에 응한 사람 모두 공통적으로 꺼내는 말이 있었다. “내가 회장님의 한 면만을 보고 있어서….”

세상을 떠난 이건희 회장에 관한 취재에 임할 때, 처음에는 삼성 특유의 보안의식 때문에 접근이 힘겨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막상 해보니 어려움이 하나 더 있었다. “말해주고 싶어도 회장님 생각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측정하기 어렵다”고 그들은 고백했다.

1997년 펴낸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외에는 이 회장이 직접 쓴 책은 없다. 이에 월간중앙은 2020년 송년호에서 기존 자료나 어록과 더불어 삼성 인사이더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이 회장 관련 사실의 조각들을 채집해 ‘이건희 리더십’을 따라잡아보기로 시도했다.

신라호텔이 빵을 맛있게 만드는 비법


▎1972년 이병철(왼쪽) 삼성 선대회장의 장충동 자택에 셋째 아들 이건희(맨 위) 삼성 회장, 막내딸 이명희(왼쪽 둘째) 신세계 회장, 장녀 이인희(오른쪽) 한솔그룹 고문이 모였다. 맨 아래 소년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 사진:삼성전자
이 회장에 대한 일치된 증언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대면하는 사람들마다 숨 막힐 정도로 압도당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극단적으로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성 임원들만 모인 비교적 편한 분위기의 자리에서도 너무 말이 없어서 부인 홍라희 여사가 운을 띄울 때가 잦았다. “어쩌다 입을 열어도 한 마디하시는 게 전부”였다. 이 회장은 “삼성 직원들 대상으로만 선거를 해도 나는 떨어질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삼성 창업주이자 이 회장의 부친인 이병철 선대회장은 셋째 아들인 이 회장에게 그룹을 승계하며 ‘경청(敬聽)’이라는 유훈을 남겼다. 경청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다’는 뜻이다. “내 기억으론 단 한 번도 내가 얘기하는데 말을 끊으신 적이 없다. 언제나 끝까지 다 듣고 난 다음에 반응하셨다”고 전직 삼성 임원은 회고했다. 그러나 말하는 쪽은 이 회장의 속마음을 가늠할 길이 없기에 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회장님은 거짓말과 변명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반대로 “책임지겠다”는 말을 좋아했다.

경청에 기반을 둔 이 회장의 카리스마를 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비견하는 자료가 곧잘 발견된다. 일본 전국시대 난세를 통일한 인내의 상징처럼 추앙받는 존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생을 관통한 철학은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둘은 인생 궤적이 흡사하다. 어릴 적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았고, 평생 친구 없이 고독하게 살았으며, 변방에 가까웠던 조직을 변화시켜 천하를 호령한 점에서 겹친다.

그러나 정작 삼성 임원들 사이에서는 ‘이 회장은 오다 노부나가에 더 가깝다’고 바라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전국시대 통일의 초석을 쌓은 인물이다. 그는 혁신적이고 스피디하며 개방적이었다. 숱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단 한 번도 같은 방식으로 싸운 적이 없었다. 늘 정보에 굶주렸고, 신분이 아닌 실력 위주로 사람을 등용했다.

이 회장은 “업(業)의 개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누가 먼저 정확하게 변화하는 업의 개념을 잡느냐가 기회 선점의 관건”이라고 설파했다. ‘빨리’가 아니라 ‘먼저’가 핵심이다. 삼성 브랜드경영의 최전선에 섰던 배동만 제일기획 전 사장의 기억이다. “내가 신라호텔 이사로 일할 때 회장님께 호되게 혼난 적이 있다. 어느 날인가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회장님이었다. ‘신라호텔 빵 맛이 그게 뭐냐? 그게 빵이냐?’라고 마구 야단을 치셨다. 그러더니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시더라. 나는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서 캐나다 밀가루를 쓰고, 발효 등 공정과정, 수증기의 양, 굽기 온도, 에이징(aging) 등을 깊이 관찰하겠습니다. 직원들을 프랑스나 일본으로 연수를 보내서 품질을 높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회장님께서 ‘엉뚱한 답을 이야기하고 있다’며 ‘지금 내가 기다릴 테니 답을 찾아보라’고 하시더라. 정말로 1분 이상 전화를 안 끊고, 아무 말 없이 계시더라. 나는 계속 멍 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번쩍하고 생각이 났다. ‘유능한 기술자를 스카우트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까 그제야 회장님께서 ‘왜 알면서도 못하느냐’고 하시더라.”

배 사장은 “그게 바로 스피드경영이다. 빵을 세상에서 가장 잘 만드는 기술자를 임원보다 더 봉급을 많이 주고 데려오면 더 좋은 빵을 만들 수 있다”며 “물론 장기적으론 공정도 체크하고, 해외연수도 병행해야겠지만 당장 시장경쟁력을 선점할 수 있으면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했다”고 밝혔다.

회장님이 달동네에 간 까닭은?


▎1987년 취임식에서부터 이건희 삼성 회장은 변화를 강조했다. / 사진:삼성전자
2013년 [삼성 웨이]를 쓴 이경묵 서울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이건희 회장은 (업계 1등을 목표로 선제적·장기적 투자를 감행하는) 지르기의 달인(達人)”이라고 표현했다. 이 회장이 이런 리스크 높은 경영 방식을 채택한 건 삼성이 후발주자였기 때문이다. 신경영 선언 전 삼성전자의 위상은 국내에선 재계 1위였지만, 글로벌에선 소니·노키아·모토로라 등에 한참 뒤지는 전자제품 회사였다. “타이밍의 업”인 반도체사업으로 번성했지만, 초일류 브랜드 이미지는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브랜드는 품질과 디자인과 마케팅의 결합으로 완성된다. 이 회장은 이를 한꺼번에 끌어올리는 속도전을 불사했다. “나는 삼성본관 28층 내 사무실에서 아래층 직원들 사무실까지 걸으면서 이동 시간을 재보고, 가장 빠른 코스가 어디인지를 찾아본 적 있다”던 이 회장은 후발주자가 격차를 단축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으로 인재를 꼽았다.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편집광적 집착을 일관되게 보였다. “기업이 인재를 양성하지 않는 건 일종의 죄악이며, 부정보다 더 파렴치한 건 사람을 망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에서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 권오현 삼성전자 회장 등 ‘샐러리맨 갑부 신화’가 잇따라 출현한 건 우연이 아니다. 계열사 사장보다 외부 영입인사가 더 많은 연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회사가 삼성이다.

삼성의 지역전문가 제도도 이 회장의 속도를 향한 강박이 낳은 산물이다. 이 교수는 “연봉과 체재비 합쳐 당시 돈으로 대략 1인당 2억원은 들어갔을 텐데도 (1990년 시행 이후) 매년 200명 이상씩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수를 합치면 아마 5000~6000명은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삼성 지역전문가로 채택되면 아무 조건 없이 해당 국가에 체재할 수 있다. 회사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지원만 해줬다. 이렇게 전 세계 80개 이상 국가에 파견된 인재는 그 나라의 역사·문화·사회제도 등을 학습했다. 그리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배 사장은 “아무 경험도 없는 직원들을 해외로 보내면 아마 1~2년은 헤맬 것이다. 적을 알고 나가는 것과 모르고 나가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며 “삼성은 지역전문가 제도를 거친 직원을 1~2년간 본사로 복귀시켰다. 그 다음에 해당 국가로 다시 내보냈다. 이러면 (본사와 해외지사의 상황을 두루 이해하고 현지에 실전 투입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을 단축하고) 기회를 선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에 “21세기는 탁월한 천재 한 명이 10만~20만 명 직원을 먹여 살린다”는 전제에서 시스템과 조직문화를 확립했다. 지역전문가 제도에만 삼성은 1조원 이상을 투입했다. 원기찬 삼성 라이온즈 구단주는 2014년 지역전문가(미국) 출신 첫 사장(삼성카드)으로 임명됐다. 또한 “앞으로 여성의 역할이 늘고 파워도 더 강해진다. 여성인력 활용이 선진국의 척도가 될 것”이라며 여성에게 공정한 승진 기회를 제공했다. 여성의 육아부담을 덜어줘야 국가경쟁력이 올라간다며 달동네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지어줬다. 학력 차별을 철폐해 공채제도를 실시했다.

2007년 [로마인 이야기 길라잡이]에 공동저자로 참여한 배 사장은 “삼성은 로마와 흡사하다”고 말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07년 ‘위기를 맞지 않으려면 로마제국의 전철에서 교훈을 얻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어떤 조직이든 융성기 때 발생하는 안일함이 내부 경쟁력을 갉아먹는 요인이 되고, 여기에 외부 위협이 더해지면 쇠락의 길을 걷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건희 회장의 ‘뒷다리론’이 등장한다.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나온 발언이다. “뛸 사람은 뛰어라. 바삐 걸을 사람은 걸어라. 걷기 싫으면 놀아라. 그러나 남의 뒷다리는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왜 앞으로 가려는 사람을 돌려놓는가?” 이 회장이 “신상필상(信賞必賞)”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부정한 일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저질러라.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 뛰어들어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독려였다.

일본 전자제품으로 가득한 호텔 방


▎1994년 2월 미국 [비즈니스위크] 표지 모델로 등장한 이건희 회장. 삼성의 경영 혁명이 헤드라인이다. / 사진:삼성전자
일본 와세다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공부한 이 회장은 1968년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이사로 경영을 시작했다. 이제훈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회장이 당시 [중앙일보] 편집국장이었다. “보통 자기가 흥미 있는 분야 기사만 읽지 않나? 그런데 이분은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회장님의 두 가지 주문이 기억난다. 하나는 ‘지엽적·말초적 기사를 지양하고, 사회의 큰 방향을 제시하는 질(質) 중심의 기사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광고는 선(先)투자’라는 말씀이었다. 실제 삼성은 IMF로 경제가 어려웠을 때 가장 많이 광고를 집행했다.”

당시 [중앙일보] 안에서 이 회장의 침묵과 개(犬) 사랑은 유명했다. 세세하게 간섭하지 않았지만, 사람 만나는 게 업인 [중앙일보] 임원들조차 그를 어려워했다. 이 회장은 임원들 앞에서 “나보다 일본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는 자신감을 내비치며 주변을 압도했다. 일본에서 자란 이 회장은 영화를 보며 일본어를 독학으로 마스터했다.

이 회장의 응축된 집중력은 1987년 삼성 회장 취임 후 은둔의 시간을 보낸 뒤 바깥으로 발현됐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자”는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그것이다. 이 회장은 “1992년 하루 4시간도 못 자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간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게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해에 체중이 10㎏ 이상 줄었다”, “삼성은 1986년에 망한 회사다. 나는 이미 15년 전부터 위기를 느껴왔다. 지금은 잘해보자고 할 때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때”라고 토로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4개월 전인 1993년 2월, 이 회장은 삼성 임원들을 미국 LA 전자제품 판매장에 데려갔다. 임원들은 매장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돼 있던 삼성 TV를 목격했다. 이 회장은 9시간에 걸쳐 “이것은 물건이 팔리고 안 팔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종업원, 주주, 나아가 국민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자극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프랑크푸르트, 런던, 오사카, 도쿄로 이어졌다. 48차례, 350시간에 걸쳐 이 회장의 메시지가 전파됐다. 한 번에 무려 16시간 동안 이어진 것도 있었다. 녹취록은 8500쪽 분량에 달했다. 이는 삼성 ‘신경영’의 뼈대를 이뤘다.

당시 [중앙일보] 임원이었던 이제훈 회장도 오사카에 호출됐다. “회사에서 ‘비즈니스클래스 타고 오라’는 지시가 있었다. ‘서비스가 뭐고, 퀄리티가 뭔지 체험하라’는 회장님 뜻이었다.” 도착해 오사카 호텔에서 회의를 마치니 밤 11시였다. 긴장이 풀리려는 찰나, ‘내 방으로 오라’는 이 회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들어갔더니 일본 전자상가에서 사 온 제품들로 방 안이 가득했다. 그곳에서 이 회장은 다시 새벽 5시까지 임원들과 말씀을 나눴다.”

이 회장은 말이 없었지만, 작정하면 두세 시간은 거뜬히 격정적으로 얘기했다. 한남동 승지원에 불려간 삼성 임원들은 이럴 때마다 경영인 이건희의 몰입과 통찰에 압도됐다. 이 회장은 1994년 [비즈니스위크] 인터뷰에서 “(삼성 경주로 혹은 독일 아우토반에서) 시속 200마일(시속 약 320㎞)로 질주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러면 완전히 집중하게 되고 대부분의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인간이 0.3초 동안 볼 수 있는 정보량은?


▎1990년 7월 삼성복지재단이 건립해 서울시에 기부한 ‘꿈나무 어린이집’을 이건희(왼쪽) 회장이 찾았다. / 사진: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은 에세이에서 “잘 버리고 잘 집중하는 것. 이것이 미래가 요구하는 지혜이고, 경영의 요체라고 생각한다”고 적시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고 결단의 순간을 거쳤지만 반도체 사업처럼 내 어깨를 무겁게 했던 일도 없는 것 같다”고 회상했다. “시대 조류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중 핵심인 반도체 사업이 우리 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했고, 1983년 반도체 칩셋을 처음 제조했다. 그리고 1988년 4MB D램을 세상에 내놓았고, 1993년 메모리반도체 세계 1등이 됐다. 1980년대만 해도 한 세대 이상의 차이로 여겨졌던 일본과의 격차를 따라잡고, 끝내 추월한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994년 [먼나라 이웃나라]로 알려진 이원복 덕성여대 산업미술학과 교수에게 ‘만화로 보는 삼성 신경영이야기’를 의뢰했다. 책의 제목은 [나부터 변하자]였다. 1995년 3월에는 경북 구미공장에서 ‘불량제품 화형식’을 열었다. 제프리 케인은 [삼성 라이징]에서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공장 근로자들과 엔지니어들은 공장 마당에 집합했다. 그들은 모두 ‘품질 우선’이라고 쓴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마당에는 ‘품질은 내 자부심’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들 앞에는 휴대폰과 팩스 기기들을 비롯해 형편없다고 간주된 여러 종류의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총 14만 개가 넘는 물품들로, 시가 5000만 달러에 달했다. (…) 그들은 불을 붙였다. 모두 녹아내리고 불타버린 후에 불도저 한 대가 나타나 바닥에 남은 잔해를 치웠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들처럼 품질이 형편없는 제품을 계속 만든다면, 내가 다시 찾아와 지금과 똑같이 할 것입니다’라고 이 회장은 직원들 앞에서 선언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건희 회장을 “미래인”이라고 칭했다. 이 회장의 고교 동창인 고(故) 홍사덕 전 국회의원이 에세이에서 소개한 에피소드는 이를 뒷받침한다. “(이 회장이) 와세다대에 다니다가 방학을 맞아 돌아왔다. 드라이브로 우리는 양화대교에 닿았다. 나는 ‘이게 우리 기술로 만든 다리다. 대단하재?’라고 자랑했다. 그러자 이 회장이 받아쳤다. ‘이눔아, 생각 좀 하면서 세상을 봐라. 한강은 장차 통일되면 화물선이 다닐 강이다. 다리 한복판 교각은 좀 길게 잡았어야 할 것 아이가?’”

품질경영으로 세계 일류와의 격차를 따라잡자 그다음에는 마케팅과 디자인으로 시야를 확장했다. 삼성 브랜드경영의 모멘텀은 뉴욕 타임스퀘어 옥외 전광판 광고였다. 2002년 제일기획은 마케팅 비용 1000만 달러, 운영비용 600만 달러를 베팅하기로 결정했다. 삼성이라는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를 실행한 배동만 사장은 “회장님께 보고드리자 즉각적으로 이렇게 반응하시더라. ‘옥외광고는 0.3초에 정보 전달이 돼야 한다. 그러니까 제품 관련 콘텐트 숫자는 6개 이내(제일기획은 24개로 준비)로 줄이고 삼성 오벌마크가 (전체 사이즈의) 3분의 2 이상 노출되도록 해서 삼성의 인지도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리고 절대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이 지금도 기억난다”고 말했다.

세계에 삼성 브랜드를 알리기 위한 또 하나의 포석은 스포츠마케팅이었다. 어렸을 적 레슬링과 럭비를 했던 이 회장은 “최선을 다하는 정신, 정정당당한 페어플레이, 규칙과 에티켓을 존중하는 스포츠 정신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덕목이자 가치라고 생각한다”는 지론의 소유자였다. 이 회장은 1996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 됐고, 2017년까지 활동했다. 삼성은 1997년부터 IOC와 톱(TOP) 계약을 체결했고,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부터 메인스폰서 자격으로 후원했다. 삼성은 2028년 LA 하계올림픽까지 계약을 연장해 IOC 최고 레벨 후원사 지위에 올랐다. 이 회장은 이렇게 쌓은 인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2011년 7월 확정)에 기여했다.

“너희 가족 같으면 그리 뒀겠나”

삼성 브랜드를 세계에 각인한 다음 수순은 애니콜 휴대폰, 보르도 TV 등 개별 제품의 프리미엄시장 진입이었다. 배 사장은 “삼성 제품의 성능과 디자인이 소니, 모토로라, 노키아를 능가하자 고급화 전략을 고민했다”며 “회장님께 ‘유럽에서 축구 인기가 높습니다. 광고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건의했더니 아무 말씀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하셨다. 해보라는 뜻이었다”고 떠올렸다. 매년 2000만 달러의 예산이 책정됐다. 삼성이 내민 손을 잡은 팀은 EPL의 첼시였다. 삼성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첼시의 공식 스폰서로 나섰고, 이 기간 첼시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4회 우승, UEFA 챔피언스리그 1회 우승을 달성했다. 첼시 스폰서십 이후 삼성전자의 유럽 판매는 북미의 그것을 넘어섰고, 영국 내 브랜드 인지도는 20% 이상 상승했다.

또 다른 공략 포인트는 세계 주요 공항이었다. 예전에도 외국 공항 카트에 삼성 광고를 달았지만, 이번에는 애니콜을 특화하는 홍보에 주력했다. 코트디부아르 출신 화가 프레데릭 브룰리 부아브레의 드로잉 ‘무지갯빛 관대한 손’과 컬래버를 기획했다. 애니콜을 쥔 손 조각을 제작해 전 세계 20개 국 주요 공항에 설치했다. 삼성은 2005년 브랜드 가치에서 소니를 역전했다. 2020년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에 이어 세계 5위다.

고독하고 냉철한 오라(aura)를 지닌 이 회장이었지만, 인재에 관한 한 인내심이 강했다. “한번 일을 맡겼으면 거기에 맞는 권한을 주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용인술의 혜택을 입은 이가 삼성화재 배구단 감독과 단장, 제일기획 부사장을 역임한 신치용 국가대표 진천선수촌장이다. 그는 삼성 체육인 중 최초로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을 받을 정도로 이 회장의 각별한 애정을 받았다. 신 촌장은 “언젠가 삼성화재가 꼴찌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회장님이 신라호텔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시다가 뉴스를 보셨다. 당시 곁에 있던 사위 김재열 사장한테 ‘도대체 이것들이 어떻게 지원하기에 팀이 이따위가 됐나? 이건 선수나 감독 문제가 아니라 구단 대표 문제’라며 역정을 내셨다고 하더라.” 이 소식을 접한 배구단 대표이사는 지체 없이 용인 훈련장에 출동해 “어떻게 해주면 되겠느냐”며 신 감독에게 매달렸다. 구단의 전폭적 지원이 나왔고, 삼성화재는 그 시즌도 우승으로 마무리했다.

우승 보고를 받은 이 회장은 “이 봐라. 위에서 관심 가지고 지원해줘야 팀이 되는 거다. 느그 가족 같으면 그리 뒀겠나”라고 말했다. 신 촌장은 “성적이 안 날수록 ‘선수, 감독 자르라’가 아니라 보호해주고 관심 가져줘야 팀이 된다는 걸 아신 분이었다. 그때 삼성 스포츠단이 괜히 강했던 게 아니다”라고 회고했다. 1995년 공주여고 3학년 골프선수 박세리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간파한 곳도 삼성이었다.

생전 이건희 회장은 “이 세상에 공짜도 없고, 거저 되는 것도 없다”고 되뇌었다. “인센티브는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이며,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와 대결해서 승리한 원인”이라고 봤다. 그는 입이 아닌 지갑으로 칭찬해줬다. 이 회장은 숙원인 초일류 삼성에 도달한 뒤 임원들 앞에서 이렇게 진심을 털어놨다. “당신들은 최선을 다하겠지만, 나는 목숨을 겁니다.”

-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202012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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