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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35)] 정치 포기하고 이념 선택한 정몽주 

목숨을 버려 불멸의 師表(사표)가 되다 

현실 정치와 유교 이상론의 괴리 보여준 선죽교의 비극
절의 지키려 순교, 왕조 넘어 성리학 성인으로 추앙받아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골 문수산에 위치한 고려 충신 정몽주의 묘. 그는 조선시대에 더욱 추앙받았다.
정몽주의 죽음은 형이상학적이다. 그런 죽음은 희귀하다. 소크라테스, 예수의 죽음도 그랬다. 그들의 죽음은 당대에는 정치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죄로 기소됐다.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률과 신앙을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법률과 신앙은 근본적인 신념체계로서, 한 나라를 내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다. 그것이 무너지면 나라는 단순히 망하는 게 아니라 뿌리 뽑힌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신념체계를 위협했다. 멜레토스와 배심원이 유죄라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예수 역시 참다운 신을 소개하고자 했지만, 로마인에게는 반란자, 유대인에게는 율법 파괴자로 인식됐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가진 의미는 사후에 큰 변용을 겪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철학적 사건이 됐고, 예수의 죽음은 종교적 사건이 됐다. 정몽주의 죽음도 그처럼 정신적 사건이 됐다.

이런 종류의 죽음은 역설적이다. 현실에서의 실패가 오히려 역사에서의 영원한 승리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인간 정몽주의 역사적 성공도 바로 그 실패에 있었다. 가장 위대한 죽음은 그 위업의 절정에서 그 위업으로 인해 죽는 것이다. 그때 하나의 상징이 탄생한다. 위업이 죽음을 통해 하나의 순수이념으로 정화되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탄식


▎소크라테스의 흉상. 그는 죽음으로써 신념을 실천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1388년부터 1391년까지 정몽주는 정치 현실에 충실했다. 심지어 우왕, 창왕의 처형에도 찬성했다. 이는 유학의 정치이념과 정치윤리를 넘어서는, 아니 파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몽주는 그 길만이 고려왕조를 중흥하는 길이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1391년 중흥의 종말이 혁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이성계를 설득해 역성혁명파를 잠정적으로 제거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일종의 관망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다 1392년 이성계의 낙마로 절호의 기회가 도래하자, 정몽주는 아예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성계파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이성계가 최종 결단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공포에 사로잡힌 이성계파는 거의 정신적 붕괴 직전까지 갔다. 진위를 확인할 수 없지만, 조준조차 공양왕 앞에서 울며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력이 결여된 정몽주는 최후의 일격을 가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성계를 문병하러 갔다. 이성계의 집을 곧 떠난 것을 보면,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것도 아니며 죽음을 각오한 길이었다. 정몽주는 마지막 순간 입장을 전환함으로써 역성혁명에 반대하는 충렬의 화신으로 역사에 각인됐다.

정몽주같이 순정한 유학자가 정치가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 전근대 동양의 이념 중 유교는 정치 현실에 친화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래의 이념으로만 보면 쉽지 않다. 가능하다 해도 삶이 위태로울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정치 참여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평생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다. 공자가 고대의 어질고 성스러운(仁聖) 현자로 평가한 백이·숙제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는 것이 충효에 어긋난다고 반대했다. 맹자는 무왕의 거사를 천명으로 정당화했지만, 백이·숙제는 신하로서 주군을 치는 폭거로 보았다. 또한 부왕인 문왕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정벌에 나선 것을 불효로 비판했다. 백이·숙제는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기 위해 수양산에 은거, 고사리를 캐 먹다 굶어 죽었다. 유학의 가르침을 진실로 따르고자 한다면, 백이·숙제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사마천은 탄식했다. “혹자는 ‘하늘의 도는 치우침이 없어, 늘 좋은 사람을 돕는다’고 했다. 백이나 숙제를 좋은 사람이 할 수 있지 않나? 인덕을 쌓고 그렇게 착하게 행동했는데도 굶어 죽다니!”([사기열전]) 백이·숙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땅을 골라서 밟고 때를 봐가며 말을 하고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정하지 않으면 분을 터뜨리지 않았는데도 재앙을 만난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나는 몹시 곤혹스럽다. 이른바 하늘의 도란 것이라면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세상의 어질고 착하고 충량하며 도술이 있는 선비는 대체로 화를 당한다. 문왕이 주왕(紂王)을 간하자 주는 그를 가뒀다. 주왕에게 간한 익후는 구운 고기가 되고, 귀후는 포가 뜨이고, 비간은 심장을 도려냈고, 매백은 젓갈로 담겼다.([한비자])


▎사마천이 [사기열전]에서 정신적 가치와 정치 현실의 괴리를 설명하는데 예로 든 백이(왼쪽 사진)와 숙제. / 사진:위키피디아
군주는 통치자이자 교육자


▎중국 한나라를 유교 국가로 만든 동중서. / 사진:위키피디아
근대 이전 동아시아 정치사상 중 정치 현실에 가장 가까이 간 이념은 법가였다. 하지만 정치는 현실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다. 법가에 의해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16년 만에 망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나라 초기의 사상가 가의(賈誼)는 취천하(取天下)와 치천하(治天下)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진나라를 대체한 한나라는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였고, 비로소 현실과 이념이 균형을 잡았다. 유교 정치 이념의 핵심은 ‘위민’(爲民)이다. “인민은 국가의 근본이고, 군주의 근본이고, 관리의 근본이다. 따라서 국가의 안위, 군주의 위모(威侮), 관리의 귀천은 모두 인민에게 달려 있다.” 가의의 말이다.

결정적으로 한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것은 동중서였다. 유교의 역사에서, 유교가 현실정치와 접점을 이루고,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동중서 덕분이었다. 유교는 사실 정치 현실과 친화적이지 않다. 위민 이념은 통치자에게 불편하다. 게다가 너무 합리적이어서 신앙적 호소력도 없다. 인간은 대체로 신은 믿지 않지만 종교는 좋아한다. 그래서 대중의 마음을 얻으려면 사상은 신비주의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런 점이 결여된 유교는 통치자나 대중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동중서는 추연(騶衍)의 오덕종시설로 유교를 보완했다. 전국시대에 오덕종시설은 왕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 추연은 거의 성인으로 추앙됐다. 공자와 맹자가 길에서 헤매며 풍찬노숙하는 동안 추연은 왕들의 초대를 받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추자는 제나라에서 존중받았고, 양 나라를 들렀을 때는 혜왕이 교외까지 나와 빈객과 주인의 예로 맞이했다. 조나라에 들렀을 때는 평원군(平原君)이 비켜서서 길을 안내하고 소맷자락으로 자리를 쓸 정도였다. 연나라에 들렀을 때는 소왕(昭王)이 빗자루로 길을 쓸고 가면서 앞장섰고, 제자의 자리에 서서 수업하기를 청했으며, 갈석궁(碣石宮)을 지어 몸소 가서 스승으로 모셨다. (…) 그가 제후들에게 유세하며 받은 존귀한 예우가 이와 같았는데, 이것이 어찌 중니가 진(陳)나라, 채(蔡)나라에서 굶주렸던 일이나 맹가가 제나라와 양나라에서 곤경을 당한 일과 같을 수 있겠는가?”([사기열전]) 오덕종시설은 오행이 상극하는 토목금화수의 순서로 왕조의 흥망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황제는 토덕이고, 우왕은 목덕이고, 은나라 탕왕은 금덕이고, 주나라 문왕은 화덕이고, 진나라 진시황은 수덕이다. 진시황은 오덕종시설의 충실한 신도였다. 다만 한고조는 적제(赤帝)로서 처음에는 화덕을 자처했다. 이는 오덕종시설에 어긋나므로, 뒤에는 수덕을 주장했다.

어쨌든 왕들이 오덕종시설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신봉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오덕종시설은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신앙이었다. 동중서는 [공양춘추]를 오덕종시설에 의해 재해석하여 [춘추번로]를 지었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공맹의 가르침은 고원하기만 하고 무용하다고 생각했지만, 오덕종시설로 장식된 유학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나라의 흥망이 달려있고, 통치자의 안위가 좌우되는데 무심할 수는 없다. 동중서에 따르면, 사람은 하늘의 소생이다. 인간이 천지간에 태어나, 그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아주 합리적인 설명이다. 그렇다면 하늘과 인간은 서로 통한다. 부모 자식 관계이기 때문이다.(천인감응론) 고로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의 도에 따라 사는 게 마땅하다.(法天) 창조론에서 관계론으로, 그리고 윤리론까지 확장됐다.

그런데 범인은 하늘의 도를 잘 알 수 없다. 이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 존재가 군주이다. 교육론에서 정치론에 이른 것이다. 군주는 통치자이기에 앞서 교육자이다. 천자는 하늘과 사람을 잇는 매개자다. “오로지 천자만이 하늘로부터 명을 받고, 천하는 천자로부터 명을 받는다.”([춘추번로]) 여기까지는 군주에게 매우 유리한 논리이다. 군주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유학자의 정치 참여

이제부터가 의무론이다. 천명을 받은 “왕은 하늘의 뜻을 계승하여 실천한다. 무엇을 하려면 마땅히 그 단서를 하늘에서 구해야 한다.” 이제 군주는 자유롭지 않다. 하늘의 뜻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천지의 기는 하나로 합쳐지고, 음양으로 나뉘고, 4시로 갈라지고, 5행으로 배열된다.” 하늘은 일월, 성신, 풍우에 상을 드리우고, 금수, 충어, 초목에 명을 드러낸다. 자연 전체가 하늘의 뜻을 나타내는 거대한 스크린이라는 뜻이다. 천자는 자연에 나타난 이 하늘의 뜻을 해독하고, 그에 따라 정치를 시행해야 한다. 가뭄이 들고, 물난리가 나고, 지진이 일어나고, 형혹성(화성)이 나타나는 일은 재이(災異)의 조짐이다. 천자의 정치에 모종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가뭄이 드는 것은 사람들의 원통함이 쌓인 것이다.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하극상의 조짐이다.(災異論) 이런 재해는 하늘이 천자를 사랑하여 미리 경고하는 것이다.(譴告論) 그러면 어찌해야 하나? 천자는 반성하고 정치를 새롭게 해야 한다.(修省論) 반성하지 않고 계속 악정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늘은 천명을 거둔다. 역성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가 무도하자 은이 그것을 주벌했고, 은이 무도하자 주가 그것을 주벌했고, 주가 무도하자 진이 그것을 주벌했고, 진이 무도하자 한이 그것을 주벌했다. 유도한 자가 무도한 자를 주벌하는 것은 천리(天理)라는 것이다.”([춘추번로]) 동중서의 논리는 이렇게 정치변동론으로 끝난다.

이제 천자가 왕조를 보존하고 제위를 지키려면, 구체적으로 “전답의 소유를 제한함으로써 부족한 것을 채우고 겸병의 길을 막아야 한다. 염철은 인민에게 돌려야 한다. 노비를 마음대로 죽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부렴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줄여 민력을 여유 있게 해야 한다.”([한서] 24상) 천자를 도와 이 모든 것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유학자다. 이렇게 해서 천자는 유학을 받아들이고, 유학자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동중서 자신은 재이론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요동의 한고조 사당에 발생한 화재를 재이론적 관점에서 해석한 글이 한무제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동중서는 사면을 받았지만, 그 후 다시는 재이론을 강론하지 않았다. 재이론은 역시 통치자에게 불편한 이론이었다.

사마천은 “동중서의 사람됨은 청렴하고 정직했다”고 평가했다. 같은 [춘추] 전문가인 공손홍은 학문적으로 동중서보다 못했다. 하지만 세속에 영합해 일처리를 잘했기 때문에 공경대신의 지위에 올랐다. 동중서는 공손홍을 저속한 아첨꾼으로 여겼다. 공손홍 역시 동중서를 질시해, 한무제에게 악랄하고 난폭한 교서왕의 재상으로 그를 추천했다. 교서왕은 동중서의 덕행을 듣고 잘 대해줬다. 그러나 죄를 얻을 것을 두려워한 동중서는 질병을 핑계로 사임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학문연구와 저술에 열중하며 일생을 마쳤다. 깊은 학문과 원대한 포부를 마음껏 펴지 못한 것이다.

청년 정몽주의 절규

정몽주는 청년기에 이미 정치의 부도덕성을 절절히 체험했다. 좌주 김득배가 처형된 사건 때문이었다. 1361년(공민왕 10) 제2차 홍건적의 난 때, 고려는 개성을 함락당했다.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을 떠났다. 버려진 개경 백성들은 “늙은이와 어린이가 자빠지고 엎어지며, 자식과 어미가 서로 버리고, 밟고 쓰러져 들에 가득 차고,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개경에 입성한 홍건적은 “사람을 토막 내 태워버리기도 하고, 아이를 밴 여인의 젖을 구워 먹는 등 잔학한 짓을 저질렀다.”([고려사]) 하지만 고려군은 1362년 1월, 20만의 병력으로 총공격을 감행해 개경을 수복했다. 홍건적 10만여 명이 죽었고, 나머지 10만여 명은 도주했다. 역사에 남을 대첩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더 큰 비극이 발생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총병관 정세운과 휘하의 장군 안우, 김득배, 이방실이 모두 죽음을 당한 것이다. 먼저 안우, 김득배, 이방실이 왕명으로 정세운을 죽였다. 그런데 왕명은 전 총병관이자 공민왕의 최측근인 김용이 조작한 것이었다. 그 결과 안우 등은 졸지에 왕명 없이 총병관을 죽인 역적이 됐고, 마침내 반역죄로 처형됐다. 이 사건은 사실 공민왕의 책략이었다. 개성을 함락당하고 피난을 떠난 공민왕의 위신은 크게 손상됐다. 그런데 고려를 국난에서 구함으로써 명예가 한껏 높아진 장군들에게 20만 대군의 지휘권이 장악돼 있었다. 정세운 등이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쿠데타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현명한 왕은 타인의 선의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공민왕은 측근 김용을 이용해 사전에 위험을 제거한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이런 책략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보통사람의 상식에서 보면, 극도로 범죄적이며 반인륜적이다. 장군들은 반역의 마음을 품지 않았고, 모두 충성스런 무장들이었다. 더욱이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진 나라를 몸 바쳐 구한 영웅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런 무도하고 비극적인 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가!

당시 정몽주는 26세 청년으로서, 1360년 과거에 합격한 지 겨우 2년째였다. 그런데 당시 과거 시험관이 김득배였다. 고려사회에서는 과거 시험관을 좌주, 합격자를 문생으로 칭했고, 양자의 관계를 부자관계만큼 중시했다. 김득배의 잘린 목이 고향인 상주에 내걸리자, 문생 정몽주는 왕에게 요청해 시신을 수습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그 제문에는 정몽주의 슬픔이 문장 마디마디 서렸다. “아아 황천이여! 나의 죄가 무엇이며, 아아 황천이여!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嗚呼皇天 我罪伊何 嗚呼皇天 此何人哉)” 이것이 하늘을 향해 외치는 정몽주의 절규였다. 인간이 하늘을 향해 외치는 것은 이 땅에서는 호소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의 뜻은 이렇다. “대개 듣건대 선인에게 복을 주고 음란자에게 화를 내림은 하늘이요, 선인을 상주고 악인을 벌함은 사람이라 하였습니다.(福善禍淫者, 天也, 賞善罰惡者, 人也)” 선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화를 당하는 게 정몽주가 배운 유학의 가르침이다. 주자와 제자들도 그런 문답을 했다. 제자가 “‘선인에게 복을 주고 음란자에게 화를 내린다’는 천도는 확실한 것이 아닙니까?” 물었다. 주자의 답은 이렇다. “어떻게 확실하지 않겠는가? 이 도리의 마땅함이 이와 같다. 선인을 복주고 악인을 벌주는 것 또한 이치의 마땅함이 이와 같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곧 마땅한 이치(常理)가 아니다.”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물었다. “만약 이와 같지 않은 일이 있다면, 왜 그렇습니까?” 주자가 답했다. “선인을 복주고 악인을 벌주는 것이 마땅한 이치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는 하늘이 아직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주자어류]) ‘복선화음’이 천도이며 상리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아직 하늘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때가 되면 결국 복선화음이 실현된다는 뜻이다. 군자가 천명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공자에 따르면, “군자는 세 가지를 두려워한다.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을 두려워한다.”([논어]) 그 해설(疏)은 이렇다. “천명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선을 지으면 백 가지 상서로운 일이 내리고, 선하지 못함을 지으면 백 가지 재앙이 내리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길함을 따르고 흉함을 맞이하는 것은 하늘의 명이니, 군자가 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謂作善,降之百祥;作不善,降之百殃. 順吉逆凶,天之命也,故君子畏之) 또 “귀신과 더불어 길흉에 합하니, 선인에게 복을 주고 음란자에게 화를 내림과 같은 것이다”라고 한다.([논어정의])

‘복수가 과하면 천벌을 받을 것’


▎과도한 복수로 하늘의 도리를 깬 오자서의 초상. / 사진:위키피디아
그렇다면 김득배에게 일어난 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주자의 말처럼 아직 하늘이 모르는 일인가? 이제 하늘이 안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는가!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나 그 이치는 하나인즉,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김은 과연 무슨 이치며,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함은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天人雖殊, 其理則一. 古人有言曰, ‘天定勝人, 人衆勝天.’ 天定勝人, 果何理也, 人衆勝天, 亦何理也?) 하늘과 사람은 이름이 다르나 이치는 하나다. 동중서는 [춘추번로]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늘 또한 기쁘고 노한 기운, 슬프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과 같다. 유사한 것으로 맞춰 보면,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다. 봄은 기쁜 기운이므로 살린다. 가을은 노한 기운이므로 죽인다. 여름은 기쁜 기운이므로 기른다. 겨울은 슬픈 기운이므로 감춘다.”(天亦有喜怒之氣, 哀樂之心, 與人相副. 以類合之, 天人一也. 春, 喜氣也, 故生; 秋, 怒氣也, 故殺; 夏, 樂氣也, 故養; 冬, 哀氣也, 故藏.)

그런데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이기고 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원래 초나라의 충신 신포서(申包胥)의 말이다. 그는 오자서(伍子胥)의 친구였다.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와 형 오상은 충신이었지만, 참소를 입어 초평왕에게 처형당했다. 초나라를 탈출한 오자서는 복수를 다짐하고 오나라에 망명했다. 마침내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키고, 죽은 초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에 300번의 채찍질을 가했다. 신포서는 오자서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다. “그대의 복수가 이렇게 심하다니! 내가 듣기에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기지만 끝내는 하늘이 사람을 물리친다고 했소.(人眾者勝天 天定亦能破人) 그대는 과거 평왕의 신하로서 북면하고 그를 섬겼거늘, 지금 죽은 사람을 욕보이니 이 어찌 하늘의 도를 어기는 극한 행동이 아니리오!”([사기열전] 오자서편) 사람의 세력이 크면 하늘의 도리를 깨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언젠가는 하늘의 도리가 회복돼 사람을 벌한다는 의미다. 오자서의 복수극이 도를 넘었고, 언젠가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정몽주가 이 말에서 의문을 제기한 것은, ‘그렇다면 하늘과 사람의 이치는 대립적인가’라는 것이다. 실제로 김득배의 죽음은 그런 전형적 사례였다. 공민왕은 순전히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고한 김득배를 죽였다. 단순히 무고한 것뿐만 아니라 방금 전쟁에서 나라를 구했고, 말의 땀이 마르지도 않았고 승리의 노래가 끝나지도 않은 때였다. 설사 불가피하게 죽여야 한다고 해도, 말의 땀이 마르고 승전가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는가? 이 무자비하고 짐승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은 누구인가? 왜 하늘은 이들에게 천벌을 내리지 않는가? 하늘은 참으로 존재하는가? 하늘의 도리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가?

이어 정몽주는 지금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것이 누구의 공인지를 묻는다. “지난날 홍건적이 침입하여 임금이 서울을 떠나시니, 국가의 운명이 한 가닥 실 끝에 달린 것처럼 위태롭거늘, 오직 공이 먼저 대의를 선창하자 원근이 향응하였고, 몸소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능히 삼한의 대업을 회복하였으니, 무릇 이제 사람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자는 것이 그 누구의 공입니까?” 왕조차도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기에 지금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죽일 수 있는가. 조금이라도 고마움을 안다면 설사 그들이 죄를 지었다 해도 공으로 덮어야 한다. 죄가 더 크다 해도 죄를 자복시킨 다음 죽여야 한다. 그러나 한 마디도 묻지 않고 한칼에 죽였다. “하늘이여,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써 묻는 바입니다. 김득배의 충혼장백은 영원히 구천을 떠돌며 그 원통함을 통곡할 것입니다. 나는 인간도, 하늘도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다. 아, 천명이로구나!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조선인은 모두 정몽주의 분신


▎신흠의 묘. 조선 전기의 유학자들 대부분이 그랬듯 신흠도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교가 정치와 역사의 세계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당혹감과 비통함은 “하늘만은 나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는 공자의 말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유교가 바다를 건너 조선에 왔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유교의 진정한 실천자들은 정치와 역사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상처받고 추방됐다. “아조에서 유종(儒宗)으로 숭앙을 받으며 세상의 사표가 된 분들 가운데 한훤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이 공무(孔廡)에 배향됐다. 아, 다섯 사람뿐인데, 복주되어 죽은 자가 세 사람이고, 유배됐다가 죽은 자가 한 사람이고, 오직 퇴계만이 간신히 살아남아 고종명(考終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중년에 형인 감사공(監司公) 이해(李瀣)의 화를 당한 결과 당시에 삭직되어 쫓겨난 뒤 외군(外郡)에서 배회하고 임야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 유학자 중 이황만이 가까스로 자연 수명을 다하였다.

그런 점에서 정몽주의 죽음은 조선의 정신과 정치 사이에 놓인 크레바스를 보여주는 최초의, 그리고 전형적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분열에 대한 비장감이 [춘추]와 [자치통감강목]의 파토스다. 정몽주의 죽음은 그러한 정서를 격렬하게 환기시킨다. 정몽주는 청년 시절 김득배의 죽음을 통해 이미 유교와 정치의 분열을 통절히 체험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정치를 포기하고 이념을 선택했다. 현실에서 이념을 실현할 수 없다면, 그 이념을 위해 죽을 수밖에 없다. 그 결단이 유교가 칭송하는 ‘절의’이다. 정몽주가 죽자 그는 절의의 상징이 됐으며, 선죽교는 절의가 현실로 나타난 유교의 성지가 되었다. 순교를 통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이념의 횃불을 점화시킨 것이다. 그 횃불이 조선에서 500년간 불타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인은 모두 정몽주의 분신들이다. 송시열의 평가를 보자. “우리 포은 선생께서 고려 말에 빼어나게 태어나시어, 섬기던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사직을 갈아 조선이 될 때에 목숨을 다하였으니, 그 인륜과 천이(天彝)를 붙들어 세우신 공은 참으로 천지에 우뚝하고 일월에 빛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원찬(袁粲)과 문산(文山, 문천상)의 한 일일 뿐이고 선생께서 하신 지극한 일이라 할 수는 없다. 멀리 은사(殷師, 기자)의 도를 이어받고 가까이 회옹(晦翁, 주자)의 법을 지켜 우리 조선의 성대한 문명을 열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끝없는 은혜를 받게 하신 것이야말로 셈할 수도 없고 셈하여 두루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원찬은 남북조시대의 송나라, 문산은 남송인으로 모두 왕조를 지키다 죽은 충신이다. 송시열은 정몽주가 단순한 충신을 넘어 성인이라고 인식했다. 성리학이라는 참다운 가르침을 조선에 전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유교가 종교가 되기에는 너무 현세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초월적 가치가 결여돼 현실과 이상의 긴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와 역사에서 진리를 실현하려는 한 성리학자들의 분열은 필연적인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정몽주처럼 세속적 삶에서 구원을 발견하려는 유형의 인간들이었다. 세속적이면서도 종교 수행자에 필적하는 신념의 인간들이었다. 프로테스탄트는 인간과 신을 분리시켜 인간사를 신에게 바치는 공헌물로 여겼다. 그 반면 성리학자들은 세속 그 자체에서 초월성을 성취하려고 하였다. 그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분리는 무의미하며, 세계는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 구원은 이 세계의 종말에 저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행위 속에 함축돼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현실고착적 인간이자 땅의 인간으로서, 정신적이고 보이지 않는 것조차 철저하게 현세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세계의 실제는 언제나 분열의 위기에 가득 찬 세계이며, 그것이 고려 말 정몽주가 경험했던 역사의 세계였다.

500여년 뒤 한말의 최익현조차 그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열과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조선의 정치 세계에 내재한 고유한 특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몽주와 최익현 같은 이들은 죽음을 통해서라도 그 분열을 뛰어넘고자 하였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묘사하고 있는 ‘춘추의 인간’이며, ‘이(理)의 모험가들’인 것이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2012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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