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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경성대 HK+ 한자문명연구사업단·월간중앙 공동기획 - ‘한자어 진검승부’(2)] 空間: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 

깊이 가라앉아 흐르는 시간 만끽해봄 직 

코로나19로 어려움 많았던 반면 긍정적 측면도 부각돼
자신을 알아가며 삶의 고유 리듬도 탐색해볼 만한 기회


▎2020년 12월 14일 일본 교토의 사찰 기요미즈 데라(淸水寺)에서 이 사찰의 관주(주지) 스님이 휘호를 통해 올해의 한자 ‘密’을 발표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1. 3밀(三密)

密(빽빽할 밀), 지난해 세밑에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에서 선정한 ‘올해의 한자’다. 이른바 3밀, 밀집(密集)·밀폐(密閉)·밀접(密接)의 영향임이 분명하다. 지난해 초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하고, 일본 정부는 ‘3밀 회피’를 방역 구호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일본 시민의 일상생활에 얼마만큼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을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솔직히 그 영향을 받는 이가 어디 일본 시민뿐이랴.

지난해 한 해, 인류는 사는 데 애를 참 많이도 태웠고, 먹었고, 또 썼다. 드문드문, 듬성듬성, 띄엄띄엄 살아 내느라 참 힘들었다. 마뜩잖은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버티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회(社會)라는 게 기본적으로 뭔가?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社) 또 그렇게 모이는(會) 일상생활의 실천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조차 없을 듯 보인다. 이른바 사회성이란 것이 인간의 동물성(Animality, Creatureliness)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질이란 점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기가 힘들 터이니.

사회 발전의 새로운 모습 엿볼 수 있었던 2020년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볼 때, 사회 발전의 새로운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는 긍정적 측면도 다른 한편으론 분명히 있을 것이다. 뉴노멀(New Normal)이니 온택트(ontact)니 하는 말과 함께 어느덧 세상에 자리를 잡은 모종의 낙관론은 어쩌면 새로운 ‘틈(사이·틈새)’에 대한 환호일는지도 모른다. 인류는 이제 그것을 통해 목격한 새로운 사회적 형식에 따라 그것에 걸맞을 만한 내용을 차곡차곡 채워갈 시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다. 뭔가를 잊어버리거나 빼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疏-密, 集-散, 開-閉, 離-接: 空間


▎행정안전부가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3행(行) 3금(禁)’ 캠페인을 열고 홍보 생활방역 용품을 나눠주고 있다. / 사진:행정안전부
그 틈을 통해 여기서 시도해볼 것, 하지만 무작정 낙관하기보다는 자칫 망각해버릴 수 있는 그 뭔가가 대체 무엇이 될지를 좀 더 찬찬히 고민해보기 위해 우선으로 해볼 것은 트랜스덕션(transduction)이다. 귀납(歸納, induction)과 연역(演繹, deduction) 각각의 결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인데, 달리 말하면 구체적 추상(Abstraction Concreté)이란 변증법적 접근과도 비슷하다. 이 방법론적 접근의 대상은 앞서 했던 얘기에 이미 다 있다.

疏(성길 소)는 갓 태어난 아기의 다리가 벌어져 있어 그 사이가 성긴 모습을 그렸고, 그래서 소통(疏通)의 뜻까지 나왔다. 통하려면 사이가 트여 있어야 해서 그렇다. 密(빽빽할 밀)은 산이 집처럼 높게 죽 늘어서 있다는 뜻에서 빽빽함을 나타내는데, 마치 그런 산속처럼 깊고 폐쇄된 곳을 뜻하기도 한다.

集(모을 집)은 나무 위에 새가 앉은 모습을 그렸다. 원래 글자는 雧으로, 나무 위에 새가 떼로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려 무리 지어 살기 좋아하는 새의 특성을 나타냈다. 散(흩을 산)은 몽둥이로 삼(麻)의 대를 두드리고 펴 흩는 모습을 묘사했다. 閉(닫을 폐)는 문에 빗장을 걸어 놓은 모습을, 開(열 개)는 그렇게 걸려 있는 문의 빗장을 두 손으로 여는 모습을 그렸다.

離(떼놓을 이)는 뜰채로 새를 잡는 모습을 그렸는데, 정작 그 뜻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흥미롭게도 잡히기 싫은 새가 도망치려 한다는 새의 입장이다. 接(이을 접)은 손으로 사람을 당겨 가까이 오게 한다는 뜻이다. 이 여덟 글자는 다시 이미 슬쩍 보인 네 단어, 疏密·集散·開閉·離接이 된다. 그렇다면 모두 다 해서 12개인 이 한자와 한자어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공간(空間, space), 곧 빈틈, 비어 있는 사이다. 하지만 이 공간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빽빽하거나 성기거나 하는 틈의 양태, 그 틈을 사이에 두고 모여 있거나 흩어져 있거나 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 열려 있는 틈을 가로막거나 다시 열거나 하는, 또 그 틈을 좁히거나 넓히거나 하는 인간의 행동 양식을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내포하고 있다.

norm 어원에는 인간의 존재론적 함의 깃들어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복수성(複數性, plurality)과 관계성(關係性, relationality)을 전제조건으로 하지 않으면, 또 그것을 충족하지 않으면 아예 성립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한자의 역사 그 자체가 자연과 인간, 자연물과 인공물, 물질과 관념, 구체와 추상 간의 끊임없는 진자 운동, 그렇다고 해서 늘 똑같지 않을뿐더러 같을 수도 없는 그 중층적 운동을 통해 전개·발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공간’을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그럼 한발 더 나아가서 서구는 어떤지, 거기에서는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 그것이 동아시아 문명하고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지, 그 관계엔 또 어떤 현시대적 함의가있을지를 한번 봐보도록 하자.

3. norm, tact: space


▎1. 중국 하남 남양에서 출토된 한대 화상석 탁본. 가운데 근육질의 거인은 풍요와 다산을 주관하는 신 ‘고매’이며, 그의 어깨 위 좌우 인물은 복희와 여와로 추정된다. / 2. 독일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프리드리히 니체.
앞서 뉴노멀과 온택트를 말했다. 여기서 좀 더 들여다 봐야 할 건 norm과 tact다. 보통 표준(標準), 기준(基準), 정형양식(定型樣式, pattern), 규범·규준·모범(規範·規準·模範, 특별히 복수형 norms로 쓰일 때)으로 번역되는 norm은 라틴어 norma, 그리스어 γνώμων(gnomōn)에서 비롯한다. 그 둘엔 아주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바로 carpenter’s square, 곧 곱자, 곡척(曲尺)이다─그리스어에는 그 밖에도 식별자(discerner), 해석자(interpreter), 해시계의 바늘(指時針), 그노몬(평행사변형의 한 각을 포함하는, 그러니까 한 귀퉁이에서 그것과 닮은꼴을 떼어낸 나머지 부분)이란 뜻도 있는데, 뒤의 둘은 현재 영어에서도 gnomon으로 변함없이 쓰이고 있으며, ‘그노몬’은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로도 실려 있다.

중요한 것은 γνώμων이 ‘깨닫다·알다, 곧 감지(感知)·지각(知覺)·의식(意識)·인지(認知)하다: to be aware of; to perceive; to know’의 뜻을 두루 갖고 있는 γιγνώσκω(gignoskō)에서 파생했다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norm에는 이미 공(시)간성이,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인간에겐 측정의 대상이자 앎의 대상으로서 공(시)간이란 뜻이 내포돼 있다. 요컨대 norm의 어원에는 공(시)간과 인간의 인식론적·존재론적·관계론적 함의가 뚜렷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공(시)간’은 좀 있다가 space를 볼 때 ‘공시간과 시공간’으로 바뀐다.

곡척이 중국의 신화에도 등장한다는 점은 한층 더 흥미롭다. 복희(伏羲)가 손에 쥐고 있는 것, 다름 아닌 곡척이다. 복희는 여와(女媧)·신농(神農)과 함께 중국 삼황(三皇)의 일원이면서 불을 발견하고, 팔괘를 만들고, 인간을 위해 어렵·수렵·농경·목축을 가르쳐준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 복희의 손에 곡척이 들려 있다는 점, 또 이를 앞서 살펴봤던 norm의 어원과 그 함의를 함께 고려해보면 인류 문명에서 공간 및 그것의 측정이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너무도 분명해 보인다.

현시대에 이르러 공간의 중요한 위상을 노정하는 또 다른 말에는 tact가 있다. 콘택트(contact), 온택트 따위의 어간인 tact는 라틴어 tangere에서 비롯하며, 그 뜻은 ‘to touch’, ‘접촉하다’다. 그러니까 콘택트는 ‘(함께) 접촉하는 것’, 온택트는 ‘온라인 접촉, 곧 가상공간을 통해 현실공간(오프라인)에선 접촉하지 않되 그 가상공간을 현실적으로 획정하는 스크린 내에선 접촉이 가능하게끔 하는 것’이 된다. 이쯤 됐으니, 이젠 space 얘기도 하지 않을 순 없을 것 같다.

뉴노멀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척도

space가 온전히 공간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 때는 1300년경으로, 당시엔 ‘(뭔가를 하기 위한) 범위나 면적, 자리’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엔 시간의 의미가 공존했음을 알 수 있는데, 12세기의 고대 프랑스어 espace엔 ‘기간·거리·간격’의 뜻이, 그 어원이 되는 라틴어 spatium엔 ‘자리·면적·거리·시간의 연장’이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에 이르러 단순히 공간으로 번역되곤 하는 space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늘 시간과 함께하는 공시간 또는 시공간의 뜻이 있었던 것이다(현실공간에선 공간이, 가상공간에선 시간이 우세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론 이렇게 구분해서 부른다).

지금껏 해온 모든 얘기를 이른바 현시대의 뉴노멀이란 것에 적용해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뉴노멀은 기본적으로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척도’로, 한발 더 나아가서는 그 공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척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에 tact까지 더해 함께 고려해보면, 뉴노멀은 ‘인간 간 접촉에 필요한 공시간 또는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척도’, 그렇기에 ‘사회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척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온택트는 그런 의미의 뉴노멀에 따른 구체적인 시공간 생산의 양상, 곧 가속화 사회 또는 사회적 가속화와 맞물려 있는 ‘공간의 사회적 생산(Social Production of Space)’에 새로운 물꼬를 트는 것으로 검토해볼 수 있다.

4. 공간의 사회적 생산


▎‘2020 더팩트 뮤직 어워즈’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온택트 방식으로 개최됐다. 화려한 공연을 펼치고 있는 방탄소년단(BTS). / 사진:더팩트 뮤직 어워즈
프랑스의 사상가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0~1991)는 자신의 1974년 저서 [공간의 생산(La production de l’espace)]에서 아주 중요한 말 한마디를 한다. “(사회적) 공간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여기에서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 그 자신의 용어로 더 정확하게는 신자본주의(Néo-Capitalisme)를 일컫는다. 흔히 산업화와 도시화가 마치 동궤에 오른 것처럼, 그래서 유사한 양상과 속도로 전개돼온 것으로 간주되곤 하지만, 르페브르는 그렇지 않다고 봤다. 산업화가 도시화를 수반하는 건 맞다.

“이미지는 이데올로기를 지니면서 동시에 은폐하기도”


▎코로나19로 인해 인류는 뉴노멀 시대를 맞게 됐다
그러나 본격적 도시화는 실제로 좀 더 뒤늦게 이뤄진다고 본 것이다. 본격적 도시화는 맑스·엥겔스가 실지로 자신의 시대에서는 목도하지 못한 것으로, 르페브르는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공간의 사회적 생산이란 테제(thesis)를 내놓기에 이르는 것이다. ‘농촌사회에서 도시사회로’라는 역사적 이행 속에서 도시화는 자본주의 발달의 핵심 기제로 작동함과 동시에 그 내적 모순의 극대화 또한 조장하게 되고, 결국 ‘내파(內破, implosion)’를 촉발하는 사회적 공간으로 변태(變態, métamorphose)하기에 이른다.

르페브르는 그 과정의 극적인 예로 파리코뮌과 68혁명을 든다. 하지만 현시대의 도시는 어떤가? 사회 변혁의 추동력으로 변모하긴커녕 그 가능성에서도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듯 보인다. 뉴노멀이나 온택트 같은 낙관론적 수사의 남발과 함께.

그 한가운데에는 ‘미디어적 나날’이 있다. 르페브르는 유작 [리듬분석(Éléments de rythmanalyse: Introduction à la connaissancedesrythmes, 1992)]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마주리(imagerie, 화상·사진·영상 따위)는 현대에 와서 시간의 신성화, 곧 의식과 장엄한 제스처들로 채워진 시간을 대체했다. 이마주리는 일상을 생산하고 주입하고 수용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기만(단순화)을 위해 교묘하게 사용되는 기술화된 형태로서 이마주리는 사진이 사진 찍힌 인물에 접근하듯이 실재와 현전성(現傳性)에 접근한다. 그러나 겉모습은 닮았을지 모르나 깊이도, 두께도, 살(肉)도 지니지 못한다. 현재의 모습을 띤 이미지 속에는 이데올로기가 스며들어 있다. 이미지는 이데올로기를 지니면서 동시에 은폐한다.”

5. 다시 空間으로: 거리의 파토스


▎1월 5일 경북 포항 영일고에서 3학년 학생이 차에 탄 채 졸업장을 받고 있다. 이 학교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드라이브 스루 졸업식을 개최했다. / 사진:연합뉴스
다시 空間으로 돌아가보자. 두 글자 가운데 좀 더 집중할 것은 후자다. 空(빌 공)은 공구(工)로 굴(穴)을 파 만든 곳을 뜻한다. 間(사이 간, 틈 한)은 문(門) 틈새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日)을 그려 간극(間隙)을 표현한 글자다. 본래는 문 사이에 달을 그려 넣은 閒(틈 한, 사이 간)을 썼다. 이 달을 해가 대신하면서 中間(중간)과 空間(공간)은 물론 추상적 개념으로서 時間(시간)의 뜻까지 갖게 된다. 앞서 뉴노멀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공간 생산 양식으로서 온택트는 사이를, 틈을, 한가로움을 우리한테서 앗아간다. 그래서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언택트(untact), 접촉하지 않기’를 한 번쯤은 진지하게 시도해보는 건 어떨지 하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맑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니체(Friedrich Wilhelm Niet zsche, 1844~1900)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둘을 비판적으로 절합(節合, articulation)한다. 그러는 가운데 생산(生産, production) 못지않은 인간 특유의 능력으로 창조(創造, creation)를 강조한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전자는 물질적 영역, 후자는 정신적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이 둘이 단순한 이항 대립 구도를 형성, 공고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둘은 끊임없이 귀납과 연역, 구체와 추상 간을 오가며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추동해간다. 이런 측면, 더 구체적으로 ‘새로운 가치의 창조’란 관점에서 니체가 자신의 1887년 작업 <도덕의 계보: 하나의 논박서(Zur Genealogie der Moral: EineStreitschrift)>에서 얘기한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는 눈여겨볼 만하다.

이 책을 니체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 우리는 한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 충격이다. ‘우리가 자신을 알지 못한다니? 게다가 그 까닭이란 것이 우리가 자신을 단 한 번도 탐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니?’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거리(距離, distance)’라고 하는 공간, 그 공간에서 발생하는 시간, 또 그 둘 모두와 관계를 맺을 때 촉발되는 창조적 감각이나 감정 따위가 거의 부재한다.

‘거리의 파토스’는 그 부재를 다시 생성으로 전환할 수 있는 창조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거리, 또 그 거리에서 생성하는 정념(情念, pathos)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기존의 가치 평가에 대한 탈가치화’를 시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도가 성공적으로 될 때, 우리는 공리(功利)와는 무관한 가치를 창조하고 그 가치의 이름을 새기는 권리를 비로소 획득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이 감정은 온갖 타산적인 영리함이나 공리적 계산이 전제하는 저 미온적인 것과는 정반대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험난한 시대 극복 위한 침잠(沈潛)을

이 험난한 시대의 한 극복 방안으로서 언택트, 또 그것을 통한 침잠은 어떨까? 방방 뜨기에 바쁜 시대, 쉼 없이 자신을 띄우기에 급급한 시대에 한번쯤은 깊이 가라앉아 거기서 한층 더 더디게 흐르는 시간을 만끽해보는 건 어떨까? 그러면서 자신을 탐구하며 알아가고, 자기 삶의 고유한 리듬 또한 함께 탐색해보는 건 어떨까?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이 갈급해 하는 차이와 그것의 창조적 가치라는 것은 어쩌면 이 거리의 파토스를 통해서 비로소 생성시킬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의미에서 한번 더 나직이 외쳐본다. 거리의 파토스!

- 전국조 경성대HK+ 연구교수 gukjojeon@daum.net

202102호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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