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스페셜 리포트] 조선 사림(士林)과 586세대 정치인들은 닮은꼴? 

자신과 추종 세력은 ‘군자’, 반대파는 ‘소인’ 정치적 선악론 잣대 삼아 ‘내로남불’ 행태 

유성운 중앙일보 기자
실리·국익보다 명분과 도덕 앞세운 아마추어적 국정 운영
족보·계보 강조하며 폐쇄적 울타리 쌓아 올려 기득권 지키기


▎1987년 4월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민족민주운동 탄압하는 친미군사독재 타도하자”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펼치고 있다.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 ‘586 용퇴론’을 제기해 눈길을 끈 적이 있다. 하지만 송영길 대표의 총선 불출마 선언 외에는 그다지 힘을 받지 못하는 모양새다. 어쨌든 이들 내부에서 이런 목소리가 나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론의 지지를 상실했다는 것을 자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1987년 체제의 상징과도 같은 정치권 586세대는 도덕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이를 기반으로 이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 정치권에서 오래 머물렀다. 하지만 실리나 국익보다 명분과 도덕을 앞세우는 아마추어적 국정 운영과 ‘내로남불’ 등으로 인해 한때 촉망받던 ‘젊은이’가 ‘똥팔육 꼰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바로 이와 같은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사림(士林)이다.

우리는 조선을 떠올릴 때 작고 뒤떨어진 나라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14세기 말을 기준으로 볼 때 1000만 명 가까운 인구에 약 20만㎢의 영토를 지닌 강력한 중앙집권국은 세계사에서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필이면’ 중국 옆에 있어서 그렇지 이 땅을 떼어다가 유럽에 가져다 놓으면 프랑스나 잉글랜드 정도나 우열을 가릴 수준이 될 뿐 대부분 조선보다 ‘작은’ 나라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은 체계적인 조세제도를 운용했으며, 과거제라는 당시로서는 투명하고 공정한 제도로 인재를 선발했다. 귀족이 아니더라도 능력을 인정받아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사다리’가 보장된 나라였다. 전반기만 해도 조선은 세계사적으로 역동적 에너지가 살아 있는 나라였다.

그렇다면 엄격한 신분 질서, 장자 우선, 남녀 차별,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사대주의 등 조선과 관련돼 떠오르는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는 어디서 나온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중기 이후의 조선이다. 균분 상속은 장자 집중으로 바뀌었고, 사별한 여인의 재가는 엄격히 금지됐으며, 양반에 대한 이익 보호와 상공업에 대한 천시가 강력하게 작동하게 되는 사회다. 이런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사림이었다. 이념적 원리주의자였던 이들의 손에 국정이 넘어가면서 조선은 큰 전환을 맞이했다.

‘이념적 원리주의자’ 사림의 등장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새해 첫날인 1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사림이 정계에 등장한 것은 성종 때다. 이유가 있다. 사림이 정치적으로 결집한 계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사약까지 내린 일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물론 비슷한 일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태종(이방원)은 무려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골육상쟁을 벌였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을 막 건국한 때였다. 고려의 질서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이미 숱한 피를 본 터였다. 힘이 곧 질서가 되는 시기였다.

하지만 계유정난은 달랐다. 세종과 문종의 노력으로 성리학적 질서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시기였기에 충격이 컸다. 사육신 같은 반발이 나온 이유다. 대가는 참혹했고 충격을 받은 김시습 등 생육신은 시골로 숨어버렸다. 이는 성리학적 질서를 꿈꾸던 이들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현실 정치인보다는 학자나 학생들에게 더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계유정난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은 마치 전두환 정부의 12·12사태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연상케 한다. 유신 정부가 막을 내리고 서울의 봄을 만끽하던 상황에서 들이닥친 사태는 민주화를 바라던 지식인 및 시민층에 작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또한 은폐됐던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소위 민주화운동 세력에게는 하나의 트라우마이자 이들을 결속시키는 계기가 됐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지고지순’의 가치로서 배우고, 5·18에 분노한 민주화운동 세대처럼 조선의 사림 1세대는 계유정난에 분노하면서 땅에 떨어진 성리학적 가치를 회복시켜 조선을 바꿔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계유정난(1453)으로부터 16년이 지난 때였다. 계유정난에 가담한 한명회나 신숙주 등이 공신으로서 여전히 국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계유정난을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지켜본 사대부들이 조정에 들어와 한명회나 신숙주를 어떻게 봤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1990년대 후반 국회에 처음 입성한 586세대가 ‘군부독재’ 세력을 보는 시각과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림은 ‘소인과 군자’라는 선악의 개념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자신들은 군자이고, 기존 관료들은 소인이기 때문에 ‘중용하면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각종 도덕적 명분을 들어 반대파를 공격했고 이는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성종 때는 정치적 소수, 중종 때는 훈구파와 경쟁관계였던 이들은 선조 때 이르러 국정을 장악했다.

이들의 흑백론은 효과가 있었지만 부작용도 극심했다. 중종 때 수원부사 이성언 같은 관료는 “그들은 자기네와 뜻을 같이하는 자는 선인이라 하고 달리하는 자는 악인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국사를 논의할 때 혹 자기들과 의견이나 방식을 달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혹은 공론을 억누른다고 비난하고 혹은 심술이 악한 사람이라고 욕하며 당장 의혹의 눈으로 봅니다”라고 지적했는데, 이는 비(非)사림 세력이 느끼는 피로감이 어땠는지를 보여준다.

상대의 존재 가치 부정하고 극단적 대결 투쟁


▎전남 화순 조광조 유배지에는 조광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정치적 선악론이 조선 사회에 끼친 악영향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일단 정치에서 타협이 불가능해졌다. 생각해보라. 군자가 어떻게 소인과 타협하겠는가.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소인을 물리치되 멀리 내쫓지 아니하면, 소인은 반드시 앙심을 품고 틈과 기미를 보아 그의 흉모를 부리는 세력”이라고 했다. 이들을 축출하지 않으면 올바른 정치가 불가능해지고, 따라서 타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민주당의 주류인 친문 586세대의 시각에서 국민의힘은 친일파의 후예이고, 군사정권의 명맥을 이은 적폐의 본산인 것과 마찬가지다. ‘군자-소인’의 세계관은 상대의 존재 가치를 철저하게 부정하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를 좁히고 극단적인 대결 투쟁으로 이끌고 갔다.

정치에 선악을 잣대로 삼으면 내로남불이 활성화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군자의 당에서는 절차상 흠결이 발견돼도 이것은 나쁜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선한 결과를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니 크게 문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 군자당을 자임했던 노론의 김종수는 “작은 흠이 있다는 이유로 군자를 버리고, 재주가 있다는 이유로 소인을 등용하면 국가가 망할 것”이라면서 인재는 노론에서만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공정한 시험 제쳐두고 내 사람 천거에 혈안


▎1979년 10월 15일에 발행된 한국 근현대사 분야 단행본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586세대의 가치관과 역사관에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평가받는다.
조광조 세력이 기존 과거제로는 참인재를 구할 수 없다며 ‘무시험’으로 관직을 준 현량과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훈구파 측에서 “절차의 공정함이 의심받을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격렬한 논쟁 끝에 중종이 사림의 손을 들어줘 통과됐다. 그런데 결과가 흥미롭다. 현량과 합격자 28명 중 19명이 서울 거주자였는데, 특히 상위 16명 중 15명이 여기에 포함됐다. 기묘사림이 ‘지방에 은거한 인재를 찾아낸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서울 싹쓸이였다.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비판하던 과거제보다 훨씬 심각한 한양 집중화였다. 또 현량과 합격자 대부분이 부, 조부, 증조부 중에서 2명 이상이 문과에 급제했거나 장인이 세종의 손자이거나 했으니 평범한 집안, 다시 말해 ‘게, 가재, 붕어’들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논란이 된 것은 합격자 28명의 명단에 안당(安瑭, 1460~1521)의 세 아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안당은 조광조와 특수 관계였다. 그는 이조판서 시절 성균관 학생이던 조광조를 천거해 시험도 안 보고 종6품에 올려준 적이 있다. 그 덕분인지 안당은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묘사림의 지원을 받아 우의정에 올랐다. 그래도 조광조 세력은 이에 위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한 의도’를 갖고 추진한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기묘사림이 명분을 잃은 것은 공신 특권을 없애서가 아니라 현량과 같은 내로남불의 모습을 보여서였다.

사림의 배경에 대해서도 잘못 알려진 것이 많다. 사림은 조선의 건국에 반대해 지방으로 낙향한 사대부들의 후예이며, 지역에서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썼고, 조선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로 진출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중소지주인 이들은 기득권 타파를 위한 개혁에 앞장섰고, 나라의 온갖 이익을 착취하던 훈구파에 의해 억울한 탄압을 받은 세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광조만 해도 서울 토박이였고, 그의 고조부는 건국 2등 공신으로 책봉된 조온이다. 또 사림에서 받들었던 김굉필, 정여창을 비롯해 훗날 성리학의 대가로 숭앙된 이황도 사정은 비슷하다. 모두 전국 각지에 걸쳐 거대 규모의 전답과 노비를 보유한 대지주 세력이었다.

사림과 훈구의 결정적인 차이는 개혁성이나 재산의 유무가 아니라 성리학에 대한 믿음과 의지다. 조선 전기에는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기는 했지만, 사회 전반에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당시 과부의 재혼이 드물지 않았고, 아들과 딸이 균분 상속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많이 접했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지도층이 성리학을 통치에 필요한 도구로 접근했다면, 사림은 사회의 근본적이고도 절대적인 이념과 질서로서 자리 잡도록 했다. 이런 차이가 조선 전기와 후기를 다른 시대로 만들어냈다.

특히 사림은 [소학]을 중시했다. 이 책은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잘 때까지 옷매무새와 띠를 단정히 하고 부모가 계신 곳에 도착하면 숨소리를 낮추는 등 유교 사회에서 지켜야 할 도리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담은 책이다. 사림은 [소학] 실천 운동을 벌이며 남녀 및 신분 차별, 여성의 정절, 장자 우선주의, 중화주의를 강화했다. 마치 586세대 정치인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세상을 보는 리트머스지로 생각하며 그 세계관을 정책에 반영했듯이 말이다.

능력보다 정통성과 계보 만들기 중시

“우리 역사의 지형을 보면 정조 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 220년 동안 개혁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어요. 조선 말기에는 수구 쇄국 세력이 집권했고, 일제강점기 거쳤지, 분단됐지, 4·19는 바로 뒤집어졌지, 군사독재 했지, 김대중-노무현 10년 빼면 210년을 전부 수구보수 세력이 집권한 역사입니다.”

2020년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가 어떤 인터뷰에서 했던 발언이다. 정조 이후 약 200년 동안 수구보수 세력이 집권했고, 그 끊어진 개혁 세력의 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의해 이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 조선의 국왕과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하나의 계보라고 묶어서 설명하다니 말이다. 한 정당의 대표가 20년이든 100년이든 장기 집권 의지를 내보이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다만 200년 전 조선왕조의 군주를 끌어들여 ‘정조-김대중-노무현(-문재인)’이라는, 이른바 개혁의 계보는 참 난감하기 짝이 없는 접붙이기였다.

586세력과 민주당은 족보나 계보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자신들이 배출한 정부에 대해서도 민주정부 1기(김대중), 2기(노무현), 3기(문재인)라는 명칭을 붙인다. 민주공화정에서 저런 계보를 만드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무늬상 민주공화정인 북한에서 ‘백두혈통’을 강조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사림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계보는 집권의 정당성이자 능력이다. “아, 조광조의 학문이 바른 것은 전해온 데에 유래가 있습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도(道)를 찾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김굉필에게서 수업하였습니다. 김굉필은 김종직에게서 수업하고, 김종직의 학문은 그 아비 사예(司藝) 김숙자에게서 전해졌고, 숙자의 학문은 고려의 신하 길재에게서 전해졌고, 길재의 학문은 정몽주에게서 전해졌는데 정몽주의 학문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그 학문의 연원이 이러합니다.”([인종실록] 1년, 3월 13일)

조광조가 위대한 정치가인 것은 그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정몽주로부터 이어져온 정통 사림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정 운영의 능력이 아니라 계보였다. 그래서 누가 주자의 가르침을 바르게 계승하는 라인에 섰는지가 정권을 잡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됐다. 마치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전직 대통령들의 무덤을 찾아다니며 ‘계승자’를 자임하는 정치인들처럼 말이다.

능력보다 정통성과 계보 만들기가 중요시되는 나라가 어떠했는지는 조선의 역사가 잘 보여준다. 백성이 이재에 눈독을 들이면 욕심이 생긴다며 상업을 천시하고, 망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몰래 지내주던 후기의 조선은 20세기 초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쇠약한 나라가 됐다. 그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 유성운 중앙일보 기자 pirate@joongang.co.kr

202203호 (2022.0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