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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8)] 도산 안창호, 성재 이동휘를 상해로 불러오다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 통합해 자유민주주의 노선 주도 

자유민주주의 공포한 상해임정과 사회주의 선택한 대한국민의회 연결하는데 힘써
러시아 이동휘·중국 이동녕·미국 이승만이 공동 통치하는 3거두 체제 실현에 노력


▎1919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 / 사진:백범김구사진자료집
현순 목사는 [나의 자사(自史)]에서 안창호 취임 후 정부청사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상해임시정부 청사는 2층 건물이었다. 2층은 전면, 중앙, 후면의 3공간으로 구분되었다. 중앙 공간은 내부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의 집무실이었다. 총리실 앞의 전면 공간에는 법부와 서기관장의 집무실이 자리했고, 총리실 뒤의 후면 공간에는 외부와 군부의 집무실이 자리했다.

한편 정부청사 1층은 전면과 후면의 2공간으로 구분되었다. 전면의 서측 방은 내부와 교통부의 집무실, 전면의 동측 방은 재무부의 집무실이었다. 후면의 우측 방은 접대실이었다. 정부청사 앞쪽의 장랑(長廊)에서는 경무국장 김구 휘하의 경호원 20명이 정복으로 근무했고, 정문에서는 인도인 순경이 근무했다.

당시 6부 총장 중에서는 오직 내부총장 안창호만 취임했고, 나머지 5총장은 취임하지 않았다. 반면 6부 차장은 6명 전원이 취임했다. 내부차장 현순, 외부차장 여운형, 법부차장 신익희, 재무부차장 윤현진, 군부차장 이춘숙, 교통부차장 김철 등이었다. 이렇게 임시정부가 6부 차장으로 운영되었기에 당시를 차장내각으로 부르기도 한다. 6차장 중에서 안창호가 가장 신임하고 의지한 사람은 재무부차장 윤현진이었다.

그런데 당시 임시정부가 6부로 편성된 이유는 아마도 조선시대 6조(曹)를 모방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즉 내부는 이조, 재무부는 호조, 외부는 예조, 군부는 병조, 법부는 형조, 교통부는 공조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국무총리의 비서관장 즉 서기관장은 조선시대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 도승지를 모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부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의 서기관장은 최창식이었다. 내부차장 현순은 서기관장 최창식과 한집에서 함께 생활했다.

임시정부 직원들은 오전 9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한 직원들은 집합실에 모여 애국가 1절을 제창하고, 내부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의 훈계를 들은 후 각자 집무실로 가서 근무했다. 이런 모습을 현순은 “일대수양소와 흡사하였다”라고 묘사했다. 아침마다 훈계를 들어야 하는 자신을 흡사 어떤 수양소에서 교장 선생님께 훈계를 듣는 어린 학생 같다고 느낀 것이었다. 아마도 당시 42살의 안창호는 대부분 20대 청년에 불과한 6차장 및 직원들을 어린 학생으로 간주하고 매일 아침 훈계했을 듯하다. 하지만 안창호보다 겨우 2살 아래이고, 한양의 정동제일 감리교회 담임목사까지 역임한 현순 입장에서는 아침마다 훈계를 듣는 것이 거북했을 법하다. 그럼에도 안창호는 현순을 특별대우하지 않고 다른 차장들과 똑같이 훈계를 듣게 했던 것이다. 이는 매사에 주도면밀하면서 특히 교육을 중시했던 안창호의 특성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된다.

주도면밀하면서 교육 중시한 안창호


▎상해임시정부청사. 2층의 중앙공간이 내부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의 집무실이었다. / 사진:국가보훈처
김기승은 1963년 4월호 [사상계(思想界)]에 ‘상해 시절의 도산’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는 상해 시절 안창호의 개인 거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글에 의하면, 안창호는 상해 법조계(法曹界) 하비로(霞飛路) 종점 선종로(善鍾路)에서 전차를 내려 서북쪽 마을인 태평촌에 살았다. 그 마을에는 남향의 2층 목조건물 6-7동이 연이어 있는데, 안창호는 마지막 목조건물에서 살았다. 2층 목조건물 중에서 아래층은 흥사단 사무소, 위층은 안창호의 개인 거처였다. 남향으로 햇빛이 잘 들어오는 안창호의 개인 거처는 앞쪽에 큰 유리를 써서 유난히 밝았다고 한다. 또 안창호는 여러 색감으로 수놓은 개성직물(開城織物)을 커튼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이처럼 큰 유리와 화려한 커튼은 밝고 명랑한 안창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안창호의 방 한편에는 책장이 놓였고, 작은 책상 위에는 어항이 있었다. 그 어항에는 송사리같이 홀쭉한 고기들이 경쾌하게 놀고 있었다. 또한 화분이 두서너 개 놓여 있었으며, 침대에는 언제나 깨끗한 침대보가 덮여 있었다. 이는 청결함과 '무실역행'을 중시하는 안창호의 개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침실 다음에 거실이 있고, 거실 다음에 주방이 있었다. 그런데 안창호가 사는 건물 마당에 6~7세 된 마을 아이들 4~5명이 놀러 와 싸우곤 했는데, 안창호는 부모들에게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신용을 지키시오. 어물어물 임시방편으로 아이들을 속이지 마시오. 그리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보십시오. 왜 싸우겠습니까?”라고 훈계했다 한다. 이 또한 주도면밀하면서 교육을 중시하는 안창호의 특성에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안창호의 주도면밀함은 그의 임시정부 운영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현순 목사의 [나의 자사(自史)]에 의하면, 안창호는 제1차 내각회의 때 “총리 이승만이 총리 말고 대통령으로 개칭할 것을 요구한 사안, 총리 이승만이 애국금 대신 공채금을 요구한 사안, 상해임시정부를 한성정부로 개조하고 이동휘를 맞이해 올 사안” 등 세 가지 의안을 제출했다. 이 의안들은 안창호가 내부총장 및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하기 전부터 주장하던 ‘3거두 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창호는 1919년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한 이래로 상해임정이 명실상부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러시아 연해주 동포, 중국 만주 동포, 그리고 미국 동포들이 대동단결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해주 동포의 대표 1명, 만주 동포의 대표 1명, 그리고 미국 동포의 대표 1명 이렇게 3명이 상해임정에 모여 공동통치하는 ‘3거두 체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당시 ‘3거두’는 러시아의 이동휘, 중국의 이동녕, 그리고 미국의 이승만이었다.

독립운동 노선 두고 달라진 신민회 동지들


▎1913년 5월 13일 안창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흥사단을 창립한다. 흥사단은 해방 시기까지 조국의 광복과 새로운 나라 건설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고,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적 재정후원과 일꾼양성을 통해 민족독립의 사명을 완수했다. / 사진:흥사단본부
그들은 과거 신민회에서 안창호와 함께 활동한 동지들이었다. 하지만 1919년 6월 현재 각각 러시아, 중국, 미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독립운동 노선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동휘는 1918년 4월 동북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면서 사회주의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했다. 반면 명문 양반출신인 이동녕은 입헌군주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 대종교(大倧敎-단군교) 노선 즉 민족주의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했다. 이에 비해 이승만은 외교노선과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주장했다.

이런 노선들은 실력양성과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던 신민회 노선과 융합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랐다. 1907년 신민회의 실력양성과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융합했던 안창호, 이동휘, 이동녕, 이승만은 12년이 지난 1919년 서로 융합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노선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불행한 일이기도 했다.

이동휘의 사회주의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은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에 대한 믿음 즉 레닌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믿음이 근거였다. 이동휘는 레닌 혁명의 성공을 보면서 세계역사가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이라는 사회주의 역사관을 믿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믿음에서는 실력양성과 자유민주주의라는 신민회 기치는 철 지난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이동녕의 민족주의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믿음이 근거였다. 단군조선 이래 반만 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의 생명력과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대종교에 대한 믿음이었고, 그 믿음 위에서 민족 독립운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믿음에서는 실력양성과 자유민주주의라는 신민회 기치가 외국 문화에 대한 섣부른 맹종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승만의 외교노선과 자유민주주의 노선은 미국의 힘과 기독교 문명에 대한 믿음이 근거였다. 미국의 힘이 현재 세계는 물론 미래 세계도 주도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대미중심 외교노선이 나오고, 기독교 문명에 대한 믿음에서 자유민주주의 노선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에서는 실력양성이라는 신민회 기치가 국제현실 또는 국제정치를 잘 모르는 순진한 구호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1919년 6월 당시 이동휘의 사회주의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 이동녕의 민족주의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 그리고 이승만의 외교노선과 자유민주주의 노선, 안창호의 실력양성과 자유민주주의 노선은 나름대로의 근거와 현실성을 갖는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각자의 근거와 현실성만 주장하고 상대를 비난, 타도하려 든다면 독립운동 역량은 크게 분열, 약화될 것이 분명했고, 그것은 독립 달성 그리고 근대문명국가 건설이라는 최종 목표와 어긋나는 일임도 분명했다.

특히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에 대한 믿음 즉 레닌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하는 이동휘의 사회주의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상해임정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그것은 불같은 성격을 가진 이동휘의 개성과 관련해 더욱 심각했다. 감정이 앞서는 이동휘가 자칫 오판하면 당장의 독립운동은 물론 미래 민족운명도 심각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이동휘가 1919년 3월 연해주에서 선포된 임시정부 즉 대한국민의회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졌기에 특히 이동휘가 중요했다.

둘로 나뉜 상해임정과 대한국민의회


▎안창호(맨 오른쪽)는 상해임정에 모여 공동통치하는 ‘3거두 체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왼쪽부터) 3거두에 해당하는 이동휘, 이동녕, 이승만. / 사진:중앙포토, 연합뉴스
1919년 2월 25일, 연해주에서는 ‘노중령(露中領) 독립운동단체 대표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러시아 연해주는 물론 중국 북간도, 서간도 그리고 국내의 독립운동 대표 80여 명이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전민족의 독립운동을 지도할 임시정부기관으로 대한국민의회가 선포되었는데, 1919년 3월 17일이었다. 의장은 문창범, 부의장은 김철훈이었고, 이동휘는 선전부장에 당선되었다. 뒤이어 4월에 상해임정, 한성정부 등 국내외에서 수많은 임시정부가 선포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조직과 인력 등 실체를 갖춘 곳은 상해임정과 대한국민의회의 두 곳이었다.

그런데 상해임정은 자유민주주의를 공포했다. 반면 대한국민의회는 외형상 의회제이지만 실제는 소비에트 체제를 택했다. 1919년 당시 러시아 연해주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 상황이 지속되면 대한국민의회는 사회주의 체제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임시정부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순탄치 않았던 임시정부 통합 과정


▎국가보훈처는 2022년 8월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아 도산 안창호 선생 장녀인 고(故) 안수산 여사를 독립유공 포상자로 선정했고, 김영완 LA 총영사는 9월 26일 대통령 표창을 안 여사의 딸인 크리스틴 세라 커디(72)에게 전달했다. / 사진:LA총영사관
대한국민의회가 선포될 때에도 장소문제가 심각했다. 현지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상해에 임정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과 수십만 동포가 생활하는 연해주에 임정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충돌했던 것이다. 하지만 연해주에 임정을 두어야 한다는 측이 1919년 3월 17일 일방적으로 대한국민의회를 선포했다. 이에 상해임정을 주장하던 이동녕, 조완구, 조성환 등이 상해로 가서 신한청년당과 함께 4월에 상해임정을 조직했던 것이다.

이렇게 상해임정이 선포되자, 대한국민의회는 상해임정과의 통합교섭을 벌였다. 대한국민의회는 원세훈을 교섭위원으로 상해에 파견했고, 원세훈은 1919년 5월 7일 상해에 도착했다.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조건은 간단했다. 상해임정이 연해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곳에 수십만 동포들이 거주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해임정 측은 연해주의 위험성 즉 일본의 영향력이 강하고, 대부분 함경도 동포라는 점을 들어 상해를 주장했다. 이렇게 양측 사이에 통합협상이 한창이던 5월 25일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19년 6월 28일 상해임정의 내부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한 안창호에게 가장 중요한 현안은 그 무엇보다도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이었다. 당시 상해임정과 대한국민의회의 통합문제는 당장의 독립운동은 물론 장래의 민족운명과도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통합임정이 어느 곳으로 결정되느냐에 따라 독립운동노선 나아가 미래 독립국가체제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로 통합된다면, 독립운동은 이동휘의 사회주의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이 주도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상해임정으로 통합된다면, 독립운동은 안창호의 실력양성과 자유민주주의 노선이 주도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배경에서 상해임정의 내부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는 제1차 내각회의에서 ‘상해임정을 한성정부로 개조하고 이동휘를 맞이해 올 사안’을 의안으로 제시했던 것인데, 이 의안은 대한국민의회를 상해임정으로 통합한다는 의미였다.

안창호가 상해임정과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는 방법으로 첫째 상해임정을 한성정부로 개조, 둘째 이동휘를 맞이해 옴이라는 두 가지를 제시한 것은 당시 상황과 이동휘 개성을 고려한 최선의 방책이었다. 우선 상해임정을 한성정부로 개조한다는 것은 명분과 실력에서 대한국민의회에 밀리는 상해임정을 고려한 방책이었다. 냉정히 말해, 상해임정은 대한국민의회에 불만을 품은 일부 인사들이 상해로 와서 조직한 임시정부였다. 그런 면에서 상해임정은 명분이나 인력 면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앞설 수 없었다. 대한국민의회를 선포한 주도자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알았고, 그렇기에 교섭위원 원세훈도 대한국민의회로의 통합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역전시키려면 한성정부를 활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상해임정이나 대한국민의회는 둘 다 해외 망명자들이 선포한 임시정부였음에 비해, 한성정부는 국내 13도 대표가 서명한 정부라는 점에서 최고의 정통성을 가졌다. 그런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상해임정과 대한국민의회는 각자 해체, 통합하고 장소는 상해로 해야 한다는 것이 안창호의 ‘한성정부로 개조’였다. 이는 결국 상해임정으로 통합하자는 것과 같았다.

민족운동 최고통치기관으로 우뚝 서다


▎도산 안창호함은 우리 해군이 보유하게 된 첫 중형 잠수함이다. 주요 무장체계로는 SLBM과 중어뢰-Ⅱ, 어뢰기만장치, 자항기뢰 등이 탑재됐다. / 사진:대우조선해양
그런데 그렇게 하자고 하면, 대한국민의회에서는 이전부터의 주장, 즉 수십만 동포가 거주하는 연해주에 임시정부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양측은 각자 주장을 반복할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대한국민의회의 실력자 중에서 상해임정으로의 통합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런 사람으로는 열정가 이동휘가 적격이었다. 안창호가 ‘이동휘를 맞이해 옴’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안창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이동휘를 맞이하기 위해 현순과 김성겸을 파견하면서 이강에게 밀서를 보냈는데, 그 핵심내용은 “해삼위에 있는 정부 성질을 가진 국민의회를 될 수 있는 대로 취소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합류하게 하라. 만일 국민의회가 해소되지 않더라도 이동휘만은 꼭 배를 태워 이리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1919년 8월 중순 현순과 김성겸은 대한국민의회 교섭위원 원세훈과 함께 상해를 떠났고, 8월 말경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강의 집에서 숙박하며 작전을 논의했다. 그리고 1919년 8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대한국민의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 자리에 현순과 김성겸이 참석했는데, 당시 총회 모습을 이강은 이렇게 회상했다.

“국민의회 의원 대회가 열리는 날 나도 그 의원의 한 사람으로 두 분과 같이 갔더니, 현순 목사와 이동휘씨는 전부터 아는 사이라 손목을 잡고 서로 운단 말이오. 그들이 한참 우는 광경을 보고 모두들 감동하였다. 그리고 의사가 진행되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그날 저녁으로 국민의회가 취소되었다. 조건은 국민의회 의원의 5분지 4가 상해임시 의정원으로 들어오라는 것인데, 이에 대하여 이동휘씨가 찬성하니까 만장일치로 국민의회가 취소되었다. (주요한, 『안도산전서』, 214쪽)”

이처럼 간단명료하게 대한국민의회는 취소되었다. 이동휘는 비서 김립 그리고 현순 목사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상해로 왔다. 1919년 9월 18일이었다. 이로써 상해임정은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고 명실상부 민족운동의 최고통치기관으로 우뚝 섰는데, 이 모두가 내부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의 업적이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211호 (202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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