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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K컬처 톺아보기(9)] K콘텐트에 여풍(女風) 분다 

‘센 언니’ 여성 서사 바람, K콘텐트에 활력 

능동적인 여성상 그려낸 [슈룹], [옷소매 붉은 끝동] 등 인기 몰이
감각적인 영상미, 디테일한 감정 표현 강점 가진 여성 제작자 늘어


▎tvN 토일드라마 [슈룹]은 조신함·정숙함을 강요하는 조선 시대 상황을 뒤집어 능동적인 여성상을 그려냈다. / 사진:[슈룹] 공식 홈페이지 캡처
K콘텐트에 여풍(女風)이 거세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운 여성 서사도 부쩍 늘었고 작가와 PD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 제작자가 눈에 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었고, 이 변화는 과연 K콘텐트에 어떤 활력이 돼줄까.

‘조선에서 가장 걸음이 빠른! 중전마마 납시오.’ tvN 토일드라마 [슈룹]의 포스터에 들어간 이러한 문구는 파격적이다. 조선 시대 궁궐을 배경으로, 그것도 체통을 지키며 천천히 걸어야 할 중전이 거의 뛰듯이 걷는 모습이라니. 이런 설정은 이 사극이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가져오긴 했어도 역사적 사실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허구라는 걸 드러낸다. 하지만 이 임화령(김혜수)이라는 중전 캐릭터를 굳이 ‘조선에서 가장 걸음이 빠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설명해놓은 데는 그 외에도 두 가지 의미가 더 들어 있다. 그 하나는 이 중전이 자식들과 함께 궁에서 위기상황에 몰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제 한 몸 여유 부릴 여지가 없는 상황을 이 캐릭터로 설명하고 있는 것. 하지만 이러한 드라마 스토리적 설정을 넘어서는 노림수는 따로 있다. 그건 파격이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퓨전 사극인 [슈룹]은 조신함·정숙함을 강요하는 시대적 상황을 뒤집어 능동적인 여성상을 그려냈다.

이른바 ‘센 언니’가 자신을 궁지로 모는 대비(김해숙)나 황원형(김의성) 같은 대신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맞서는 모습은, 세상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어떤 전형화된 여성성을 강요하기도 하는 현재에 던지는 카타르시스가 만만찮다. 흔히 현실에서 이런 여성에 대한 보수적 시선이 던져질 때 “지금이 조선 시대냐?”고 묻는 그 정서처럼, 심지어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당당한 인물을 세우는 것이 주는 시원함은 더 짜릿해진다. 실제로 [슈룹]은 여성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사극이다. 세자(배인혁)가 죽고 다시 ‘국본’을 세워야 하는 상황 속에서 중전 임화령과 대비가 갈등하고, 이 때문에 적자인 임화령의 아들들이 국본이 되는 대신 모든 후궁의 아들들이 경합을 통해 세자 자리에 오르는 ‘택현’이 벌어진다. 세자 자리를 놓고 벌이는 왕자들의 경합과 그 뒤에서 중전과 후궁들이 치열하게 벌이는 치맛바람 그 이상의 음모가 펼쳐진다. 이른바 조선시대판 [SKY캐슬]로 불리는 이유다.

'슈룹', 사극 속 센 언니들이 주는 카타르시스

그런데 임화령과 대비의, 칼만 안 들었지 말로 상대를 씹어 먹을 듯 쏟아내는 독설의 향연을 보다 보면, 이미 예전에도 있었던 사극 속 센 언니들이 떠오른다. 바로 궁중 여성들의 암투를 그렸던 [여인천하](2001)의 정난정(강수연), 문정왕후(전인화) 같은 여성들이 그들이다. 실제 역사적 인물들을 내세운 [여인천하]는 당대에 최고 시청률인 49.9%(닐슨 코리아)를 기록할 정도로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흔히 사극하면 주로 남성이 등장하는 영웅 서사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운 이른바 ‘여성 사극’이 또 한 축을 이루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끝내 기지를 발휘해 살아남으며 성장해간 [대장금](2003)의 서장금(이영애)이 있었고, [선덕여왕](2009) 같은 작품에서 치열하게 대결하던 덕만(이요원)과 미실(고현정)이 있었으며, 또 무수리로 시작해 숙빈 자리에까지 오른 [동이](2010)도 있었다. 그만큼 드라마의 주 시청층이 여성이기 때문에 사극 속에서도 끊임없이 여성 영웅을 찾았고, 그러한 여성들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지금까지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이 단지 주인공으로 세워졌다고 해서 그 사극들이 젠더적 관점을 드러내는 본격적인 ‘여성 서사’를 담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를테면 [대장금]은 수라간 나인에서 시작해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녀까지 오르는 장금의 성장드라마를 그린 건 맞지만, 그 캐릭터는 다소 보수적이었다. 결국은 중종(임호)의 지지와 선택을 받는 입장이었고, 민정호(지진희)라는 인물 앞에서는 여지없이 가녀린 여성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슈룹]의 임화령이 왕인 이호(최원영)와 대등한 면면을 보이고 나아가 대비와도 맞서는 모습은 조선 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현대적 관점을 담은 허구의 사극으로서는 훨씬 진취적인 면이 있다(물론 고증문제와의 균형점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이러한 달라진 여성에 대한 관점이 최근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작년 말에 방영된 [옷소매 붉은 끝동]이다. 이미 [이산](2007)에서 다뤘던 정조와 의빈 성씨의 이야기를 소재로 가져왔지만, [옷소매 붉은 끝동]은 이산(이준호)의 시점이 아닌 성덕임(이세영)이라는 궁녀의 관점으로 이 시대의 서사를 새롭게 그려냈다. 그저 왕에 의해 천거돼 후궁이 되는 궁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끝까지 자신으로서 살고 싶었던 궁녀의 능동적인 서사가 담겼다. “전하. 정녕 신첩을 아끼셨사옵니까? 그럼 부디 다음 생에서는 신첩을 보시더라도 모르는 척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 주시옵소서. 전하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미워하는 것도 아니옵니다. 그저 다음 생애는 신첩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것이옵니다.” 이 대사는 성덕임이 원했던 진짜 삶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주체적인 삶’이었다는 걸 말해준다.

'이산'과 달랐던 '옷소매 붉은 끝동'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은 여성 주인공이 주체적인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 사진:MBC
[옷소매 붉은 끝동]이 이처럼 제대로 된 여성 서사를 담아낼 수 있었던 데는 정지인 감독 같은 여성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사극 연출은 주로 남성 연출자의 영역처럼 여겨졌던(사실 사극만이 아니라 드라마 연출 자체가 그렇지만) 공고한 장벽은 최근 들어 조금씩 깨져가고 있다. 정지인 감독을 비롯해 [왕이 된 남자](2019)를 연출한 김희원 감독, [붉은 단심](2022)을 연출한 유영은 감독까지 여성 연출자들이 연출한 사극들은 감각적인 영상미와 디테일한 감정 표현을 얹으며 사극 연출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본래 드라마는 주 시청층이 여성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찍부터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그려온 바 있다. 그런데 이것도 결국은 여성 작가들이 드라마 업계에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생겨난 흐름이다. 그 첫걸음을 내디뎠던 인물이 바로 김수현 작가다. 김수현 작가는 남성 작가가 대부분이었던 1970년대 [새엄마]라는 작품을 내놓으면서 여성 서사로 시청자들을 본격적으로 사로잡기 시작했다. 당대만 해도 재취(再娶)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 새엄마는 ‘계모’라는 편견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이 작품은 새엄마가 들어와 따뜻하게 가정을 이끌어가는 획기적인 모습을 그려내 주목받았다. 가부장적인 시대에 얼마나 파격적인 여성 서사였던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김수현 작가가 일궈놓은 길을 통해 무수히 많은 여성 작가들이 등장했고, 사실상 드라마 업계에서는 남성 작가가 귀해지는 성비 불균형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 작가들이 대거 활동하면서도 여성을 신데렐라로 그리거나 가부장적 시스템 안에서 순응하는 인물로 그리고, 그 바깥으로 나가는 인물은 악녀로 그려지는 방식은 여전했다. 그건 아무리 여성 작가들이 주축이어도 가족주의 시대의 관성이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 이어졌고, 방송사 편성 권력은 이러한 보수적 관점을 그저 상업적으로 수용하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양성평등 이슈들이 화두로 떠올랐고,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요구도 높아지면서 콘텐트를 이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려는 시각도 늘어났다. 이러한 시대적 감수성의 변화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같은 글로벌 플랫폼이 실시간으로 가져오는 다양한 전 세계 콘텐트의 영향도 적지 않다. 한국이라는 로컬 역시 글로벌에 자연스럽게 편입되면서 K콘텐트에서도 양성평등 관점을 담는 것을 자연스럽게 요구받게 됐던 것이다.

‘여성 서사’가 갖는 새로움이라는 경쟁력


▎정서경 작가는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통해 ‘여성들의 누아르’라는 색다른 영역을 열었다는 평가는 받는다.
여성 서사를 담는 K콘텐트는 남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스토리를 여성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새로움을 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종영한 [작은 아씨들]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을 쓴 정서경 작가와 [왕이 된 남자], [빈센조] 같은 작품을 연출한 김희원 감독이 손잡고 내놓은 [작은 아씨들]은 제작진부터가 여성들로 채워졌다. 또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인주(김고은), 인경(남지현), 인혜(박지후) 세 자매가 주인공이다. 게다가 이들이 싸워야 할 최강 빌런(Villain) 역시 원상아(엄지원)라는 여성이다. 제목을 보면 원작소설이 가진 ‘로맨스’가 떠오르지만, 이 작품은 원작의 캐릭터만 빌려왔을 뿐 그것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누아르 색채가 짙은 스릴러다. 살인까지 자행하는 권력자와 대결하는 소시민 영웅들의 누아르는 익숙한 서사일 수 있지만, 이것을 온전히 여성 주인공들로 그려내면서 서사는 새로움을 갖게 됐다. 이들이 보여주는 자매애나 끈끈한 연대의식 같은 것이 작품을 새롭게 만들었고, 최강 빌런이 된 원상아라는 인물에게는 폭력적인 가부장적 세계가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새로운 특징도 생겨났다. 결국 ‘여성들의 누아르’라는 색다른 영역을 열어준 작품이 됐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글리치] 역시 그간 K콘텐트에는 많지 않던 여성들의 버디 무비 형식을 취함으로써 참신한 작품이 됐다. 외계인을 추적하며 벌어지는 불가사의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결국은 지효(전여빈)와 보라(나나)가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며 갖게 되는 워맨스(Womance, 여성 간의 친밀하고 깊은 우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간수업]이라는 파격적인 작품을 내놨던 진한새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지만, 여성 서사라는 점 때문에 이를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여성 감독 노덕이 연출을 맡은 것도 이 작품에 여성들 간에 이뤄지는 연대의식과 감성이 더 잘 담기게 된 이유가 됐다.

남성 중심 서사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균형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에 의해 여성 서사가 늘어났지만, 그 자체로서 정해진 틀 안에서 늘 비슷한 문법으로 흘러가던 K콘텐트의 서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 됐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OTT 등으로 글로벌화되는 콘텐트 시장 속에서 요구되는 다양하고 균형 잡힌 K콘텐트에도 부응하는 일이 되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글리치]는 K콘텐트에는 많지 않던 여성들의 버디 무비 형식을 띠고 있다. / 사진:넷플릭스
※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MBC 시청자 평가원, JTBC 시청자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 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며 SBS [열린TV 시청자 세상], KBS [연예가중계]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저서로 [숨은 마흔 찾기],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웃기는 레볼루션] 등이 있다.

202212호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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