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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마지막 회)] 자본주의는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환경 문제와 富의 양극화, 미래 세대를 덮치다 

개인주의 심화할수록 시장 메커니즘 더 강화, 메타버스·비트코인도 출현
생각과 관심까지 노출되는 디지털 사회… 개방과 다양성으로 극복해야


▎2005년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초래한 침수. 환경의 역습은 자본주의 발전에 가장 큰 위협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21세기에도 자본주의는 인류의 여전한 화두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저서 [21세기 자본]은 복잡한 이론과 통계를 동원한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약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경제학 교수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메시지를 학술적으로 ‘증명’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노동을 착취하는 사회제도라고 150여 년 전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 ‘증명’함으로써 ‘과학적 사회주의’의 전통을 세운 방식과 유사하다. 마르크스는 당시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불만을 학술적 형식으로 분석해 과학의 권위로 포장했다.

인류사에서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불평등이 아닌 물질적 풍요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충분히 먹고, 추위에 떨지 않도록 옷을 잘 입으며, 최소한의 주거 공간을 갖는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했다. 이젠 미래를 전망할 차례다. 자본이라는 개념은 원래 새끼를 낳는 가축에서 유래했다. 같은 돈이라도 마당에 묻어놓으면 자본이 아니다. 은행에 맡기거나 사업에 투자해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이자나 이윤을 창출해야 자본이라 불릴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미래를 준비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를 시간과 물질을 조화시키는 제도라고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2020년대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변하는 것도 모자라 있는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자본주의는 현재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안에서 다양한 문화는 어떤 방식으로 변할 것인가. [자본주의와 문화] 시리즈를 마치며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의 방향을 가늠하는 지적(知的) 여유를 부려보려고 한다.

프랑스어에는 ‘놈브릴리즘(Nombrilisme)’, 직역하면 배꼽주의라는 단어가 있다.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지칭하는 말이다. 주변의 상황이나 타인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몸 가운데 자리 잡은 배꼽만 바라보는 태도를 말한다. 영어에서는 ‘배꼽 바라보기(Navel-gazing)’라고 한다. 21세기 세상은 자기 자신에 도취한 사람들의 배꼽주의가 지배하는 듯하다. 사실 자본주의 발전사는 삶의 환경이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분산되는 과정이었다. 교통수단의 변천만 보더라도 집단으로 이동하던 기차에서 가족 단위의 승용차로 발전했고, 최근에 유행하는 킥보드는 100% 개인용 이동 수단이다. 기차 시간에 맞춰 이동 계획을 짜던 시대에서 자유롭게 자가용으로 여행하는 단계로 진화한 셈이다.

극단적 자기중심, 배꼽주의 세상


▎전자기기에 빠져 있는 21세기 어린이들은 자본주의를 구원할 수 있을까. / 사진:위키피디아
주거 공간이나 식사 방식을 보더라도 풍요로운 자본주의 덕분에 삶의 중심은 공동체 생활에서 개인으로 전환했다. 대가족이 한 방에 모여서 생활하던 패턴에서 점차 부부나 형제 단위의 침실로 진화했고, 최근 선진국에서는 1인 1실 독방 문화가 보편적이다. 식사도 함께 어울려 먹는 식구(食口)의 개념에서 각자 개인 접시에 자신만의 음식을 소비하는 문화가 대세다.

21세기 들어 휴대전화는 소비문화의 개인화를 상징한다. 2010년대 지구촌의 휴대전화 수는 이미 70억 인구수를 넘어섰다. 현재 세계 절반 이상의 국가에서는 국민의 90%가 휴대전화를 사용할 정도로 보편화됐다. 스마트폰 시대에 휴대전화는 단순한 통신수단이 아니라 사진을 찍고 음악을 듣고 뉴스를 읽는 다기능 첨단 장비다. 세계 대도시 지하철은 각자 휴대전화를 들고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승객으로 가득하다. 물리적으로 근접한 사람들보다 휴대전화를 통해 펼쳐지는 세상이 더 강한 흡수력을 발휘하는 모습이다. 휴대전화는 세상을 향한 개개인의 창이자 동시에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의 기능도 있다. 인류의 긴 역사를 놓고 사람들이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측정해본다면 아마도 최근에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것이다. 현대인은 종일 사방에 설치된 거울을 통해, 휴대전화 카메라를 통해, 심지어 그것도 부족해 컴퓨터 화면의 줌 회의에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에 열중한다.

배꼽주의는 이처럼 단순한 개인주의를 넘어 자신만을 바라보는 삶의 양식이 됐다. 배꼽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인지, 아니면 인간의 본성을 자본주의가 활용하면서 편승했는지는 또 다른 논쟁거리로 남겨두자. 2020년대 자본주의는 개인의 선호와 특성까지 고려한 맞춤 상품과 서비스의 시대로 돌입했다. 배꼽주의 소비자들이 크게 환영할 만한 변화다.

개인주의 확대되면서 가족 해체

자본의 무한 축적을 지향하는 논리가 공동체나 집단에서 점차 가족과 개인으로 확산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을 공동체보다 가문의 수가 더 많고, 대가족이 핵가족으로 전환하면 그만큼 소비자가 늘어난다. 또 핵가족을 넘어 개개인이 소비의 주체가 되면 자본의 확장과 축적의 대상은 밤하늘의 별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자본주의 물질문명과 인류의 문화는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진화하는 관계다. 핵가족으로 분산하면 문화적·정신적으로도 대가족에서 멀어진다. 젊은이들이 가족과 분리된 주거의 독립을 생활의 해방으로 인식하는 이유다. 개인주의는 1인용 상품과 서비스를 양산하게 만든다. 문제는 개인주의가 가족을 분해한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인류가 재생산되는 가장 핵심적인 단위이자 제도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선진국일수록 1인 가구 비중은 높고, 결혼 비율은 낮으며, 여성의 출산율은 바닥으로 내려간다.

2022년 현재 선진국은 거의 예외 없이 출산율이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2.1 이하다. 특히 한국, 싱가포르,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유럽 국가는 모두 1.4 이하로 최저 수준이며 한국은 2018년부터 1.0을 밑돈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개인주의 사고와 전통적 가족관에 대한 저항이 어우러져 만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호주, 프랑스, 스웨덴 등이 출산율 1.8 수준을 유지하는 이유는 이민 사회라는 특징 때문이다. 전통적인 가족관을 가진 외부의 이민자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 통계적인 평균을 높여준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이민 온 집단조차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 가족의 규모를 줄이곤 한다.

부유할수록 더 많은 자식을 낳아 키울 수 있을 텐데 왜 오히려 자녀 수를 줄이거나 아예 출산 자체를 포기하는 것일까. 자주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식을 키우는 데 비용이 많이 들어 숫자를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리는 있으나 결혼 자체가 줄어들고 1인 독신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설명은 자기 자신이 너무 소중해 부모나 자식 같은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흐려진다고 본다. ‘우리’라는 인식은 희미해지고 개인으로서 ‘나’라는 주체가 점차 확대돼 모든 공간을 점유해버리는 현상은 아닐까.

물질문명의 관점에서 피임도구나 피임약의 보편화는 이런 문화적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성욕과 임신의 운명적 고리를 끊어주면서 가족이 형성되는 힘을 크게 약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포르노 산업의 발전이나 다양한 시청각 매체를 통한 성의 보편적 소비는 성행위조차 타인과의 대면이나 접촉 없이 가능한 1인 시대를 부상하게 한다. 사회는 점점 풍요를 쌓아가는데 미래의 생산자나 소비자는 사라지는 한계에 직면한 셈이다.

비(非)물질로의 진화가 대세


▎감시의 상징인 팬옵티콘,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구상한 것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자본주의를 물질문명으로 보는 시각은 이전의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 즉 정신적 세상과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도 완전히 정신이 지배하는 영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느님의 말씀은 문자로 표현됐고, 가죽이나 종이로 만든 경전(經典)이라는 물질적 토대를 활용했으니 말이다. 성당이나 교회, 절과 같은 성전(聖殿)도 인간의 엄청난 노동과 거대한 물질적 축적을 통해 탄생했다. 다만 자본주의는 물질을 활용할 뿐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이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회라는 특징이 있다.

흥미롭게도 자본주의는 발달을 거듭할수록 물질적 성격은 오히려 가벼워지면서 비(非)물질(Immaterial)적 특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특허는 아이디어라는 비물질적 대상을 보호하는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장치다. 과학 기술이 핵심으로 떠오른 21세기 자본주의에서 특허의 개수는 국가 경쟁력을 비교하는 중요한 잣대 가운데 하나로 부상했다.

소유권은 인간이 활동하는 대부분 영역으로 확산해 별의별 아이디어나 형태가 모두 ‘새끼를 치는 자본’의 위상을 확보했다. 책이나 미술, 음악 등 예술작품은 자본주의적 소유의 대상이 된 지 오래고 작가가 사라진 다음에도 한동안 소득을 만들어낸다. 유명인의 경우 자신의 외모 자체가 초상권이라는 이름으로 소득을 창출하는 자산으로 탈바꿈했다.

가상(假像) 현실이라는 표현이 명확히 보여주듯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려지고 현실과 다른 또 다른 현실 같은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기술적 단계에 이르렀다. 메타버스(Metaverse)의 세계는 2020년대의 화두로 등장했다. 자신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메타버스가 현실을 대체하는 시나리오가 비현실적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자본주의의 핵심을 형성하는 화폐도 비물질화의 길로 가고 있다. 비트코인을 위시한 암호화폐가 다수 등장해 세계의 가치 체계를 뒤흔들고 있다. 사과상자나 007 가방에 현찰을 잔뜩 넣어 거래하는 방식은 이제 구시대적 관습이다. 이미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가치를 순식간에 옮기는 시스템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대의 대립은 일반화됐다. 아날로그 세대가 물질주의 세상의 자식들이라면, 디지털 세대는 비물질적 시대의 첨단을 누리는 개척자들이다.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분화하는 과정이 자본주의 역사의 큰 흐름이었듯,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세상으로의 전개는 또 다른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보인다.

20세기 후반부터 지구촌은 소위 정보통신 혁명으로 급속한 변화를 맞고 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도 정보사회로 진입하는 거대한 변화의 한 부분인 셈이다. 긴 맥락에서 살펴보면 자본주의뿐 아니라 인류의 발전은 항상 물질적 기반을 활용해왔다. 다만 자본주의가 그 효율성을 높였을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문명의 새벽에 돌입하는 데 공헌한 본격적인 지렛대는 언어와 문자였다. 언어는 혀, 치아, 입술, 목 등 신체의 한 부분을 활용하여 소리를 내는 물리적 현상을 활용하는 기술이었고, 문자도 언어를 모양으로 형상화해 물질로 표현해서 남기는 기술이었다. 21세기 현대인이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는 세상도 어딘가에 실존하는 칩과 배터리와 메모리에 의존한다.

자본주의가 가족을 분해하면서 개인을 향한 변화를 주도했듯, 정보사회로의 진입은 점점 많은 대상에 대한 소유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면 소유 대상을 기록하고 관리하고 지켜주는 사회제도가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인류 초기 문명인 바빌로니아에서 대부분의 문자 기록이 토지 관리나 상거래에 관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한다. 돌에 어렵게 기록을 하던 문명이 가죽을 사용하고 종이를 활용하면서 재산 관리가 훨씬 수월해졌다.

소유권의 무한 확장 시대 도래


▎메타버스 세계에 만들어진 플랫폼. 만질 수 없는 것의 가치가 커지고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물질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자본주의의 피라고 할 수 있는 화폐에 정확하게 적용된다. 금이나 은, 조개껍질 등을 화폐로 사용하던 문명에서 신용 문서나 지폐가 등장하면서 경제활동은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자기앞 수표를 들고 다니던 불안과 수고도 정보사회에서는 인터넷, 모바일 뱅킹으로 대체되었다. 은행 메모리에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기술 혁신으로 이런 서비스가 가능해진 것이다.

문제는 개인주의로의 돌진이 인류 재생산을 가로막는 부작용을 낳았듯이 관리와 통제 기술의 첨단화에 대한 대가나 폐해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요즘 미술계에서는 NFT(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능한 토큰)가 유행이다. 기존 작품을 암호화된 방식으로 저장하는 기술이다. 영국의 예술가 데미안 허스트는 최근 자신의 작품을 NFT로 암호화한 뒤, 진품은 파괴하고 디지털 형식만 남겨두는 이벤트를 벌였다. 디지털 소유권이 예술품 원본보다 가치 있는 시대로 진화하는 셈이다. 이처럼 과장된 전위적 행태가 아니라도 기록과 통제 능력의 놀라운 발전은 소유권을 무한대로 확장할 가능성이 크다. 공공재의 논리는 점차 사라지고 소비자 부담의 원칙에 따라 도로나 공원 같은 공공시설도 이용한 만큼 비용을 치르는 시스템이 등장할 수도 있다. 개인에 특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소비한 만큼 경제적 부담을 지는 세밀한 기록과 통제가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미국 하버드대 쇼샤나 주보프 교수는 [감시 자본주의 시대]라는 저서에서 정보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조망했다. 현대인은 모바일 휴대전화나 스마트워치와 같은 웨어러블 기기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다 보니 개인의 활동 내용이 손쉽게 기록된다. 집이나 자동차 같은 개인 공간도 안전과 편리함을 위해 카메라와 녹음 장치에 노출한 결과, 사적인 은밀한 장소는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쇼핑이나 오락을 즐길 때도, 심지어 데이트 장소와 진료 내역까지 모두 컴퓨터나 모바일을 통해 이뤄진다. 우리의 생각과 관심도 모두 기록에 남는 세상이다. 바야흐로 개개인을 총체적으로 관찰하고 감시하는 시대가 열린 셈이다. 전체주의 독재 체제가 이런 상황을 놓칠 리 없다. 중국은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총괄적 감시 체계를 이미 구축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운영한다는 서방 세계도 정보사회에 내포된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주보프가 지적하듯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이미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억 명의 개인 정보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의 행태를 정밀하게 감시할 수 있는 기술력이 있다. 개인의 생각이나 주장, 이동 경로나 쇼핑 행태, 선호도와 행동은 개인에게 특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밑천이 된다.

프라이버시 사라진 감시 자본주의

[거대한 전환]으로 유명한 칼 폴라니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사탄의 맷돌이라는 비유를 사용했다. 원래 상품이란 ‘팔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을 지칭한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상품이 아닌 것도 상품처럼 팔려고 혈안이 된 악마 같은 존재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자연은 하느님이 내려준 선물이지 누군가가 거래하라고 만든 상품이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자연을 상품처럼 부동산과 토지라는 이름으로 사고판다는 뜻이다.

자본주의의 맷돌은 인간은 노동이라는 상품으로, 인간 사이의 신뢰 관계는 화폐라는 상품으로 포장한다. 주보프의 분석은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행태에 대한 기록도 사탄의 맷돌을 통해 유용한 정보,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주보프는 미국인으로서 감시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했으나 실제 자본주의와 별개로 감시 사회와 관련된 문제는 현대인이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다. 개인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인류의 재생산조차 어려운 지경에 처했지만, 동시에 하나의 그물망으로 연결돼 소통하거나 교류할 수 있는 공동체로 떠오른 모습이다. 분산과 집중의 성향이 완결된 셈이다.

앞으로 100년 뒤에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는 경제사회 시스템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미국과 유럽, 그리고 중국이라는 자본주의 세계의 강자들은 어떤 모습일까. 또 그들 사이에서 한국은 어떤 위상을 차지하게 될까. 자본주의와 문화 시리즈를 마치며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들이다. 100년은 길게 느껴지지만 2020년대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노인이 돼서 22세기를 경험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분석한 19세기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체적 모순으로 멸망한다고 예측했고, 20세기의 슘페터는 사회 민주주의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21세기 자본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확산력으로 세계를 향해 팽창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정면 도전했던 소련은 멸망했고, 중국은 우회된 경로로 변형 자본주의 독재를 실험 중이다.

22세기 한국, 국가 생존의 위기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팀, 다양한 지역과 인종의 융합을 상징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자본주의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인들은 체제의 모순이나 계급투쟁과 같은 내부적 사안이 아니다. 또 슘페터의 예상처럼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 탓에 창조적 파괴의 힘이 약해지는 사회문화적 요인 때문도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은 자본주의가 너무 성공적이기에 드러나는 환경의 한계 상황이다. 지구 온난화와 그에 따른 기후 변화, 자연재해는 심각한 정치적·경제적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100년 단위로 예측되는 환경은 인류가 감당하기 어려운 미지의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미국, 유럽, 중국의 경쟁은 현재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하지만 폐쇄적이며, 노화하고 인구도 감소하는 중국이 미국이나 유럽을 넘어 자본주의의 중심으로 부상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위기는 중국의 도전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에서 소외된 지역에서 초래될 위험이 크다.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면 지구촌의 환경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 발전에 동참하지 못할 경우 테러리즘이나 극단주의, 대량 이민과 사회적 혼란 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현재의 트렌드가 계속된다면 100년 뒤 한국은 국가의 생존 자체가 위험한 지경에 도달할 가능성이 크다. 2021년 합계 출산율은 0.81명으로 출생아 수는 26만 명에 불과하며 앞으로 이 숫자가 대폭 늘어 날 확률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 싱가포르, 대만 등 동아시아 선진국은 물론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후발 주자들도 유사한 인구 문제를 안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유럽은 수백 년 동안 인구를 수출하는 지역이었으나 20세기 인구 위기를 맞아 외국인 이민을 받아들이는 사회로 전환했다. 한국과 동아시아도 비슷한 경로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서서히 다가오는 고사(枯死) 상황을 무기력하게 맞을 것인가. 개방과 다양성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보수와 안정의 길을 걸을 것인가. 이와 같은 문화적 선택이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2212호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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