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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1) 

한국 자본주의 싹을 틔운 거상(巨商)들 

일본에 의한 식민지공업화 재편성 과정은 토착 자본가들에겐 위기이자 기회
민족기업가도 있었지만 식민정책에 동화돼 경영활동 전념한 기업가 더 많아


▎동화약품의 모태인 서울 순화동 동화약방 입구. 동화약방은 활명수 등을 교인 등에 보급하다가 입소문이 나면서 1910년 ‘부채표 활명수’ 상표를 특허 등록했다. / 사진:동화약품
나라 경제가 어렵다. 어려울수록 선인의 경험과 배움을 통한 창의적 사고가 필요한 때다. 월간중앙은 새해를 맞아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경제 거인들의 창업활동과 기업가정신을 조명하고자 한다. 한국 경제 개척자인 대기업집단 창업자들은 1945년 해방과 남북분단, 6·25전쟁, 철권정치 등 한 치 앞도 예단되지 않던 한계상황에서도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며 경제 발전을 견인했다. 월간중앙이 기업사 연구 권위자인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의 육필 원고를 통해 기업가정신을 재조명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요즘 대다수 청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접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젊은이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웬만한 직장에 취직해 대리·과장 등을 거치며 때가 되면 좋은 짝을 만나 보금자리를 틀고 2세를 키우며 안정적 생활을 도모했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만 늘었다. 선망하는 직장에서 정규직이 됐어도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몰라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는 ‘3포 세대’가 늘어나는 이유다. 급격한 글로벌화와 디지털화가 초래한 정글의 법칙이 모든 경제주체의 보호막을 걷어낸 탓이다.

신은 인간에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시련을 준다고 했다. 글로벌 무한경쟁과 4차 산업혁명은 젊은 세대에 도전과 혁신, 창업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작가 모건 위첼(Morgen Witzell)은 한때 유럽 최고(最古) 경영전문대학원인 LSB(London School of Business) 경영사 강좌에서 수강생들에게 “CEO가 되려면 MBA 취득보다는 역사 공부를 하라”고 주문했다. 한국에도 미래를 꿈꾸는 청춘이 벤치마킹할 훌륭한 기업가가 적지 않다. 한국 경제 개척자인 대기업집단 창업자들은 “당신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 건설하라”는 독일 철학자 니체(F. Nietzsche)의 주문을 몸소 실천해 경제 번영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미국 유명 저널리스트인 파리드 자카리아(Fareed Zakaria)는 “한국은 불과 수십 년 만에 외국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바뀌었다”며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라고 격찬했다.

필자는 월간중앙의 이번 기획 시리즈에서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경제 거인들의 창업활동과 기업가정신을 조명하고자 한다. 이들의 혜안과 리더십, 열정적 경영활동은 우리 국민에게 양질의 일자리와 품질 좋은 상품, 국민소득 제고 등 물질적 풍요를 제공해줬다. 경제가 어려운 지금, 이들의 경험과 사례는 교훈이 될 수 있다.

영(榮)과 욕(辱)이 오버랩되는 기업가들


▎성공한 기업가들 대부분은 영욕이 오버랩된다. 미국인이 ‘번영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존 데이비슨 록펠러 등도 한때는 강도귀족 (robber baron)으로 불리며 국민적 지탄 대상이 됐다.
18세기 영국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A. Smith, 1723~1790)는 “우리는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업자 혹은 제과점 주인의 자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 이익에 대한 관심 때문에 맛있는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다”며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성공한 기업가들 대부분은 영(榮)과 욕(辱)이 오버랩돼 다루기 조심스럽다. 정경유착과 탈세, 해외 재산 도피, 부동산투기, 분식회계와 주가조작 등을 통한 오너일가 축재, 배임과 횡령,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몸집 불리기, 대마불사 실패에 따른 천문학적 부채 국민에 떠넘기기, 독과점 등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인이 ‘번영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존 데이비슨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제이 굴드 등도 한때는 ‘강도귀족(robber baron)’으로 불리며 국민적 지탄 대상이 됐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반재벌 정서 탓에 대기업 경영자가 테러당하기도 했다. 후진국의 공업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부정적 모습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연대 창업경영자들의 국민경제적 업적은 저평가될 수 없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만 집착하다 보면 숲 전체 모습은 못 보는 법이다.

한국에 최초로 기업이 출현한 것은 1876년 개항 직후 부산에 출현한 일본 무역상 미쓰이구미(三井組)와 고니시키구미(小錦組)였다. 1878년에는 일본인이 국부(國父)로 추앙하는 시브자와 에이이치(澁澤英一)가 설립한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 부산 지점이 설치됐다. 한국 최초 은행이다. 이후부터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이 한국에서 경쟁적으로 기업을 설립했다. 한국인이 설립한 기업은 1880년대 중반부터 등장했다. 1896년 6월 25일 설립된 조선은행을 비롯해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마차회사, 대조선저마회사 등 주요 기업은 전부 주식회사였다. 1890년대 중반부터는 민족계 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주로 귀족·관료 출신이 주도했다. 친일 성향의 전·현직 고위 관료들이 은행, 운수업, 제조업 등 기간산업체의 발기인, 주주, 취췌역(주식회사의 이사) 등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정정 불안에다 자본 부족, 경영 미숙 등으로 대부분 도산했다.

엄청난 수업료 지불하면서 근대기업으로


▎이승훈은 1879년부터 보부상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전전하며 모은 자금으로 1887년 청정(淸亭)에 유기상점을 개설했다. / 사진:남강문화재단
민족계 기업 설립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말부터였다. 3·1운동으로 한껏 고무된 국내 자본이 대거 기업 설립에 나섰다. 1920년부터 추진된 산미증식계획은 토착기업 설립 붐에 일조했다. 일본은 한국 농업을 쌀 생산 위주로 단일화하고 인공시비(施肥)를 확대하며 개간과 간척 사업도 병행했다. 산미증식계획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됐다. 일본으로의 쌀 수출이 점증하면서 자본회전율이 높고 식민지적 초과이윤이 보장되는 정미, 식품가공, 운수창고, 유통, 금융업에서 토착기업 설립이 두드러졌다. 이 시기 한국인 소유 농장기업들도 대거 등장했다.

1930년대 이후에는 경영환경이 급변했다. 1929년 세계대공황 여파가 일본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이 결정적 이유다. 위기를 감지한 일본정부는 돌파구로 1931년 만주사변을 도발했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으로 비화됐다. 일본은 한국을 중국 침략을 위한 군수물자 공급기지로 전환했다. 이 시기에는 지하자원이 풍부한 북한지방을 중심으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다. 1936년 강원도 일대 풍부한 석탄채굴을 위한 삼척개발㈜과 다이너마이트 등을 생산하는 조선화약질소 흥남공장 등이 설립됐고, 조선질소비료 흥남공장, 조선이연 인천공장, 조선중공업, 조선기계제작소 등이 세워졌다. 1939년에는 조선마그네사이트개발이 설립됐고, 전력공급을 대폭 늘리기 위해 1940년부터는 평안북도 압록강변에 수풍발전소도 건설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내내 일본이 전시통제경제 체제로 전환하면서 국내 민족계 기업이 대거 몰락했다. 한국의 노동력은 물론 영세한 공장시설과 원료까지 모두 강제 동원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개항기 이후 일제 강점기까지 한국 토착자본은 엄청난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근대기업으로 변모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공업화 재편성 과정은 한국 토착 자본가들에게는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였다. 급변하는 정치·경제·사회적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한 기업가는 살아남아 후일을 기약할 수 있었지만 변화를 거부하거나 소극적이던 기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무렵 한국 기업가는 자본 성격상 두 부류로 나뉜다. 외세 침탈에 맞서 민족경제를 지키려는 우국충정 민족기업가와 일본 식민정책에 동화돼 경영활동에만 전념했던 기업가다. 먼저 일제에 저항했던 민족기업가를 살펴보자.

지사형 기업가 이승훈과 동화약품 민병호


▎부산 출신 윤상은은 낙동강 하구를 간척해 지주로 변신했을 뿐 아니라 경남은행 최대 주주로 부상했다. 사진은 창원 마산회원구의 BNK경남은행 본점.
먼저 이승훈(李昇薰, 1864~1930)이다. 그는 평안북도 정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9세에 정주 마산면 납청정(納淸亭)의 유기상점 사환으로 사회와 인연을 맺었다. 1879년부터 보부상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전전하며 모은 자금으로 1887년 청정(淸亭)에 유기상점을 개설했다. 공장주 이승훈은 종업원에게 매일 일정 시간의 휴식을 제공하고 임금도 올려주는 등 온정주의 경영으로 일관했다. 유기 판매도 늘어 단기간 평양에 지점을 개설하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청일전쟁(1894~1895)으로 사업 터전을 잃었다. 1901년 평양에 새로 무역상을 오픈하고 인천과 서울 등을 오가며 석유·양약·종이류를 취급해 큰돈을 벌었지만 러일전쟁(1904~1905)으로 다시 사업에 실패했다.

1906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安昌浩)와 조우한 뒤부터 이승훈은 기업 활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한다. 1907년에는 서선(西鮮) 지방 최초 소학교인 강명의숙(講明義塾)과 4년제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고 안창호,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지도자가 주도한 국권회복과 민중계몽 단체인 신민회에도 참여했다. 1908년에는 평양 유지들과 합자해 평양 도자기회사를 창업하고, 같은 해 별도로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했지만 그가 투옥되면서 평양도 자기회사의 경영권은 일본인 회사에 넘어갔다. 이후 빈번한 투옥과 애국계몽운동 탓에 그의 경영활동은 더는 확인되지 않는다.

궁중 선전관이자 기독교도였던 민병호(閔竝浩)는 수년의 연구 끝에 국내 최초 양약(洋藥)인 활명수(소화제)를 만들고, 1897년 서울 순화동 5번지(지금의 서소문로9길 14) 자신의 집에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을 설립했다. 초기에는 활명수, 인소환(引蘇丸)을 교인 등에 보급하다가 입소문이 나면서 1910년 ‘부채표 활명수’ 상표를 특허 등록했다. 이 무렵 동화약방은 의약품을 86종이나 취급할 정도로 사세가 확장됐다.

동화약방은 1912년부터 민병호의 장남 민강(閔橿, 1883~1931)이 사업을 승계한 후부터 판로를 만주까지 넓히는 등 전성기를 구가한다. 한편 민강은 1919년 3·1운동 때 최남선, 함태영 등과 함께 독립선언문 기초에 참여하고 비밀결사 조직인 대동단(大同團)에도 가입했다. 1919년 7월 상해 임시정부는 국내 각 시·군·면 단위에 연락사무소인 연통부(聯通府)를 설치했는데 민강은 동화약방 본사에 서울 연통부를 설치하고,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다가 1922년에 투옥됐다. 그는 출옥 후 1923년 4월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방규환, 김원벽, 이승훈 등과 함께 공칭자본 100만원(圓)의 대흥사(大興社)를 설립하기도 했다. 동화약방은 꾸준히 성장, 1931년 동화약품㈜으로 재발족했다. 그러나 그해 민강이 사망하면서 사세(社勢)가 기울었는데 일제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탄압 때문이었다. 이 회사는 1937년 독립운동가 윤창식(1890~1963)이 인수해 100년이 넘은 현재까지 영업 중이다.

안희제와 백산무역, 경주 최부자 최준


▎지주 출신 기업가로서 발군의 실력으로 대기업집단을 형성한 사례는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고 경성방직, [동아일보], 고려대학교 등을 설립한 김성수와 친동생 김연수가 꼽힌다. 사진은 김성수. / 사진:위키피디아
안희제(安熙濟, 1885~1943)는 보성전문을 졸업한 뒤 1907년부터 부산 구명학교(龜明學校), 고향인 경남 의령의 의신학교(宜新學校), 창남학교(刱南學校)를 잇따라 설립·운영했다. 1909년에는 신민회에 참여하는 한편 김동삼, 서상일 등과 함께 대동청년단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펼쳤다. 1914년에는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민족경제 발전을 위해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고, 1918년에는 공칭자본 100만원(圓)의 백산무역㈜으로 재발족했다. 대구, 서울, 원산, 중국 봉천 등에 지점을 설치할 정도로 사세가 확장됐고, 안희제는 부산 일대 거물 기업가로 부상했다. 백산무역은 상해임시정부 운영자금의 60%를 담당한 것으로 추정됐지만 1928년 해산됐다. 일제의 집요한 감시와 통제로 사업 영위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희제는 3·1운동을 전후해 의령지역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한편, 기미육영회를 조직해 인재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최준, 윤현태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백산무역을 상해임시정부 부산 연통부로 활용했다. 1933년에는 만주 닝안(寧安) 동경성에 발해농장을 세워 조선농민 300호를 유치하기도 했지만 이후 그의 기업가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흉년에 재산을 늘리지 말라”며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주의 만석꾼 최준(崔浚, 1884~1970)도 지사형 민족기업가였다. 백산상회가 백산무역㈜으로 재발족했을 때 최준은 안희제에 이은 2대 대주주로 지금의 사장인 대표취체역을 맡았으며, 1921년 백산상회가 경영난에 직면하자 자신 소유 재산을 저당 잡아 회생시켰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발기인으로, 1921년부터 경남은행, 고려요업, 경주상회 등의 경영진으로 참여했으며, 대구은행과 해동은행, 경일은행, 대동사 등에서는 대주주로 직접 경영에 관여했다. 최준은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회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다가 1918년 체포됐다. 출옥 후에는 임시정부에 거액의 군납금을 헌납하는 등 물심양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부산 출신 윤상은(尹相殷, 1887~1984)도 민족기업가였다. ‘조선 철도는 조선인 손으로’라는 신념으로 국내 철도건설에 진력했던 박기종(朴琪淙, 1839~1907)의 사위이며, 1912년 부산에 민족은행인 구포은행을 설립했다. 구포은행은 한국인이 설립한 최초 지방은행이었지만 일본계 경남은행에 인수됐다. 윤상은은 낙동강 하구를 간척해 대지주로 변신했을 뿐 아니라 경남은행 최대 주주로 부상했다. 또 그는 1919년 기미육영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 제공은 물론 교육사업도 전개했지만 일제의 탄압과 감시로 해방 무렵까지 고향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정재완(鄭在涴)은 경남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출신이며 근검절약을 통해 만석 거부(萬石巨富)가 됐다. 그는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 주식 500주를 소유한 대주주이자, 상해 임시정부에도 독립 자금 5만원(경작지 500마지기 상당)을 지원했다. 한편 그는 부산 동래에 산해관(山海館)을 건립해 경제활동과 함께 독립지사 연락·은신처로 제공했다가 일제의 박해로 몰락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이 무렵 민족기업가들은 경영자라기보다는 독립운동가였다. 민족기업이 해방 뒤 계속기업으로 번영할 수 없었던 이유다. 지사적 기업가의 나라 사랑 정신은 한국민 모두에게 영원히 귀감으로 각인될 것이다.

지주 출신 토착기업가 현준호, 김성수


▎상인·서민 출신 기업가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화신그룹 창업자 박흥식이었다. 사진은 박흥식이 세운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의 1949년 전경. / 사진:위키피디아
한편 이 무렵 타고난 이재(理財) 능력과 기업가정신을 발휘해 성공한 토착 기업가도 많이 나왔다. 이들 토착 기업가는 귀족·관료 출신, 지주 출신, 상인·서민 출신 등으로 구분된다. 당시 귀족·관료 출신 기업가가 적지 않았던 것은 이들이 대부분 부자로서 시대변화를 통찰할 수 있었던 데다 권력과 지근거리에 있어 사업 관련 관청업무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다.

‘을사오적’의 한 명인 이근택(李根澤)과 이근호(李根澔), 이윤용(李允用), 윤덕영(尹悳榮), 박영효(朴泳孝), 한상룡(韓相龍), 민영휘(閔泳徽), 예종석(芮宗錫), 석진형(石鎭衡), 원덕상(元悳常), 박영철(朴榮喆)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중 기업가로 성공한 사례는 드물고, 대부분은 기업 활동을 측면에서 돕는 주변적 존재였다.

지주 출신 기업가는 귀족·관료 출신보다 경영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토지자본을 활용해 근대적 기업가로 거듭났는데, 비교적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경북 출신 정재학(鄭在學), 이병학(李丙學), 서병조(徐丙朝), 장길상(張吉相)·직상(稷相) 형제, 호남의 현기봉(玄基奉)·준호(俊鎬) 부자, 박기순(朴基順), 문재철(文在喆), 김성수(金性洙)·연수(秊洙) 형제, 개성전기 설립자인 김정호(金正浩), 강릉의 최준집(崔準集)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만석꾼 대지주였다.

이들 중 발군의 실력으로 대기업집단을 형성한 사례는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고 경성방직, [동아일보], 고려대학교 등을 설립한 김성수(1891~1955)와 친동생 김연수(1896~1979)다. 김성수는 호남 대지주의 후예로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1919년 토착 제조업체 중 규모가 가장 큰 공칭자본 100만원인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동생 김연수는 1924년 농장기업인 삼수사(삼양그룹의 모기업)를 설립해 경영하는 등 해방 무렵 경성방직은 굴지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한편 당시에는 상인·서민 출신 기업가의 창업이 가장 활발했다. 이들은 개항 이후 외세 침략을 가장 먼저 경험했지만 지식도 자본도 별로 없는 데다 배경도 없어 초기에는 민족계 기업 설립활동에서 주변적 존재였다. 그러나 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근검정신으로 기업을 키워 점차 국내 기업설립 활동의 중심적 존재로 부상했다.

상인·서민 출신 기업가 화신그룹 박흥식

대표적 인사가 김상섭(金商燮), 조진태(趙鎭泰), 백완혁(白完爀), 김윤면(金潤冕), 장석우(張錫禹), 김갑순(金甲淳),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朴承直), 개성상인 출신 손봉상(孫鳳祥), 공성학(孔聖學)·진항(鎭恒) 부자, 경남 하동 출신 정재완, 서울 시전(市廛)상인 출신 백윤수(白潤洙)·낙승(樂承) 부자, 함경도 ‘자동차 왕’ 방의석(方義錫), 평안남도 출신 박흥식(朴興植) 등이다.

이들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기업가는 화신그룹 창업자 박흥식(1903~1994)이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며 1918년 평남 진남포에서 쌀장사로 출발해 1926년 서울에서 선일지물을 설립, 1932년 국내 최대의 지물상으로 키웠다. 1931년에는 서울 종로2가의 화신상회(백화점)를 인수하고, 1934년 국내 최초로 연쇄점사업을 전개해 굴지의 화신그룹을 세웠다.

이들 기업가는 일제 식민지 정책에 적극적 혹은 암묵적으로 동조하면서 오로지 경영에만 전념했다. 일제하에서 성공한 대부분 국내 기업가가 해방 직후 반민족행위자로 시련을 겪은 이유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은 토착기업의 주요 고객이 일제에 핍박받는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절대다수의 한국인 기업가는 일본 식민정책과 민족정서라는 양날의 칼 위에서 성장했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등이 있다.

202301호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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