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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노믹스] 혹한기 접어든 암호화폐 시장 전망 

버블이 지나가면 옥석은 가려진다 

글로벌 경제 위기 부른 닷컴 버블, 리먼 사태와 판박이
시장 회복 낙관 이르지만 질서 재편 후 재도약 기대


▎2022년은 암호화폐 투자자들에게 혹독한 한 해였다. 루나 사태에 이어 세계 2위 암호화폐 거래소 FTX 파산으로 시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혹독한 겨울에 접어들었다. 루나와 테라USD(UST)가 폭락했던 지난 2022년 5월 서울 서초구 빗썸 고객센터 전광판. / 사진:연합뉴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상가 칼 마르크스가 한 말이다. 프랑스 혁명 후 벌어진 역사 반복 현상을 관찰하고 쓴 책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나온다. 1799년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집권해 황제에 올랐다. 1891년에는 단지 그의 조카라는 이유로 루이 보나파르트가 또 다른 쿠데타로 즉위했다. 비극의 역사가 희극으로 재현된 블랙 코미디다.

2022년 크립토 시장은 블랙 코미디 그 자체였다. 비트코인의 출발은 전통 금융시장에 대한 반성이자 반발이다. 중앙화된 금융 시스템의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이다. 하지만 2022년 크립토 시장에서 벌어진 사건·사고는 그렇게 비판해 마지않던 금융시장을 닮았다. 애초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크립토 시장은 어떻게 될까. ‘크립토 겨울’이라는데 봄이 오긴 오는 걸까. 이대로 빙하기에 접어드는 건 아닐까.

‘코인판 뉴데이터테크놀로지’ 광기


▎한때 기업 가치 42조원에 달했던 세계 2위 거래소 FTX를 창업한 샘 뱅크먼프리드는 혁신적인 청년 CEO로 주목받았지만, 그가 세운 FTX 제국이 사실상 자전거래로 쌓아올린 모래성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코인판 리먼 사태의 주범으로 몰락했다.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허구다. 다만 실제 인물과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세기말 불어닥친 정보기술(IT) 열풍의 시작과 끝을 ‘뉴데이터테크놀로지’라는 주식에 투영했다. 주인공(송중기분)의 고모(김신록 분)는 이 주식 투자로 큰 손실을 본다. 결국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순양백화점’을 조카에게 내준다.

뉴데이터테크놀로지는 현실 세계의 ‘새롬기술(현 솔본)’이다. 1999년 8월 2300원(액면가 500원 기준. 상장 당시에는 액면가 5000원 기준 2만3000원)으로 코스닥 시장에 입성했다. 그해 10월 1890원까지 하락했다가, 이듬해 3월에는 30만8000원까지 올랐다. 저점 대비 163배 상승이다. 한때 시가총액이 3조7000억원에 이르며 잠깐이긴 하지만 삼성전자 시총을 앞섰다. 급등의 재료는 무료 인터넷 전화다. 인터넷은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강력하게 밀었던 기술 테마다. 회사 이름 뒤에 ‘닷컴(.COM)’이라는 글자가 있고, 인터넷 홈페이지만 만들면 주가가 오르던 시절이다. 버블은 버블이다. 무섭게 오르던 주가는 무섭게 떨어졌다. 2000년 말에는 고점 대비 96% 넘게 빠졌다.

단 5개월 만에 주가를 163배 띄우고, 1년도 안 돼 먼지로 만들어버린 건 인간의 광기다. 어리석은 투자는 개미에게나 어울린다지만, 극단의 광기 앞에서는 예외가 없다. 삼성그룹 계열사들도 새롬기술에 880억원을 투자했다. 당시 주가수익비율(PER)이 2000배를 웃돌았다. 이는 곧 수익이 지금과 같다면 2000년 후에나 지금의 주가로 새롬기술의 기업가치를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가격만 놓고 보자면 코인판 뉴데이터테크놀로지는 발에 채일 정도다. 고점 대비 90% 하락한 코인이 널렸다. 다만 새롬기술처럼 시장의 총애를 받다가 기관도 물리면서 나락으로 보낸 대표적 코인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FTT다. 한때 글로벌 2위 암호화폐 거래소였던 FTX가 자체 발행한 토큰이다. 고점 대비 98% 하락했다. 기업가치 320억 달러(약 42조원)인 회사(FTX)가 1년도 안 돼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분식회계가 의심됐고, 뱅크런이 일어났다. 고객 자금을 빼돌려 몰래 썼다는 의혹도 나왔다. FTX의 신임 CEO로 선임된 구조조정 전문가도 “40년 구조조정 경력 중 이처럼 완전한 기업 통제 실패를 본 적 없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크립토 시장 버전의 광기에 기관도 동참했다. 실상은 기관이 더 크게 물렸다. 구글·유튜브 등을 발굴한 세계 최강의 벤처캐피털 세콰이어도 FTX에 2억1400만 달러(약 2800억원)를 투자했다. 투자 과정이 희극이다. 온라인 미팅을 통해 투자 결정을 내리는 동안 FTX 창업주 샘 뱅크먼프리드는 ‘리그오브레전드(LOL)’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몰래했느냐고? 아니다. 이 투자 에피소드는 세콰이어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다(FTX 사태 이후 비공개 전환됐다). 뱅크먼프리드가 비범한 ‘괴짜형 천재’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책임 있는 경영자로서의 자세를 따지기보다 천재의 성공에서 나만 소외될까봐 조급해했다. 이른바 FOMO(Fear Of Missing Out). 싱가포르 국부펀드, 캐나다 온타리오주 교원연금도 FOMO에 사로잡혀 FTX에 투자했다. 삼성전자 산하의 벤처투자사인 삼성넥스트도 이름을 올렸다. 투자 적격성을 따지다 투자를 못하면 바보가 될 정도의 과열이 20여 년 간극을 두고 반복됐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영화 [빅쇼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다뤘다.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제라드 베넷(실제 인물은 그렉프리먼 도이치뱅크 트레이더)은 헤지펀드를 찾아가 신종 금융상품을 판다. 부동산 시장이 무너지면 돈을 버는 구조다. 상품 구조 설명을 위해 젠가를 쌓는다. 블록 한 개를 빼도 젠가가 무너지지 않는다 . 하지만 둘, 셋, 넷… 제거하는 블록 개수가 늘어날수록 탑은 위태롭다. 그러다 결정적 순간, 젠가가 무너진다. 미국 부동산 시장의 붕괴다.

‘코인판 리먼’ 사태로 기록된 FTX 사태


▎2000년대에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닷컴 버블 붕괴와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신기술과 금융기법에 대한 감독 장치가 마련되면서 시장의 건전성을 높인 계기가 됐다.
2022년 5월 테라-루나 붕괴로 촉발된 크립토 시장의 위기는 젠가와 닮았다. 권도형 대표의 독선적 리더십은 생태계를 빠르게 성장시켰다. 크립토 VC 자금이 몰렸다. 대표적으로 스리애로스캐피털(3AC)은 2021년 루나 투자로 큰 재미를 본 뒤 지난해에는 투자금액을 6억 달러로 올렸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그 가치는 지금 0으로 수렴했다.

여기에 3AC는 12억 달러어치의 GBTC(그레이스케일비트코인신탁)를 들고 있었다. 창업자 쑤주는 지나친 낙관론자다. 비트코인이 곧 10만 달러까지 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비트코인 가격이 오를 것으로만 가정하고 투자 전략을 짰다. 그러다 테라-루나 사태가 터졌다. 시장은 스테이블코인 UST의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루나파운데이션가드(LFG)가 보유한 비트코인을 던질 거라고 우려했다. 우려대로 비트코인 가격은 급락했고, 3AC는 큰 손실을 봤다. 결국 극단적 레버리지 롱 포지션을 취한 3AC는 지난 6월 파산했다. 3AC의 파산으로 대출 플랫폼에 비상이 걸렸다. 보이저디지털은 3AC에 제공한 무담보 대출 6억5000만 달러를 받지 못해 파산했다. 블록파이는 FTX의 구제로 살아나는가 싶더니, FTX가 파산을 신청하면서 역시 파산으로 결론 났다. 최대 대출 플랫폼 셀시우스도 테라-루나, 3AC 등 연쇄 파산 도미노에서 문을 닫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 11월에는 FTX 사태가 터지면서 ‘코인판 골드만삭스’라고 불리는 디지털커런시그룹(DCG)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자회사 제네시스트레이딩이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그리고 그 여파는 국내 투자자들이 이용하는 고팍스의 예치서비스 ‘고파이’의 상환 중단이라는 사태를 불러왔다). 긴급 자금 수혈로 테라-루나 사태 위기는 넘겼는데, 자금이 바닥난 이번 FTX 사태가 고비다. 만약 제네시스트레이딩을 살리기 위해 DCG가 또 다른 자회사인 그레이스케일이 보유한 GBTC 상환에 나설 경우 65만 개 비트코인이 시장에 쏟아질 수 있다. 물론 이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문제가 된 대부분의 기업이 처음에는 “우리는 괜찮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웃프게도 며칠 뒤 사고는 정말 터졌다. 극단적 레버리지를 추구하다가 일어난 연쇄 파산은10여 년 간극을 두고 반복됐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시장은 나선형적으로 발전한다

닷컴 버블 붕괴는 후유증만 남겼을까. 기술은 버블을 먹고 자란다. 버블이 꺼지고 난 뒤 진짜만 살아남았다. 아마존,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20년 뒤 시장을 지배한 FAANG 기업들의 자양분은 버블이 만들어냈다(물론 그렇지 않은 기업은 버블 붕괴 과정에서 가루가 됐다). 닷컴 버블의 종언을 고한 세기적 분식회계 사건인 엔론 사태 이후에는 제도적 정비도 이뤄졌다. 2002년 제정된 ‘사베인스-옥슬리법’의 핵심은 기업의 내부회계관리 강화다. 이를 통해 공정하게 투자할 수 있는 시장환경이 조성됐다. 닷컴 버블 이후 미국 증시 대세 상승의 기틀을 마련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어떨까. 전 세계인, 특히 미국인에게 우리의 IMF와 맞먹는 수준의 트라우마만 남겼을까. 2010년 ‘도드-프랭크법’을 제정해 금융회사의 무분별한 투자를 막았다. 대형 은행의 자본 확충을 강제했다. 그 덕(?)에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금융회사의 건전성 지표는 탄탄하다(물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8년 법안을 개정해 도드-프랭크법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크립토 시장은 어떨까. 금융시장에서 20여 년에 걸쳐 벌어진 일이 올 한 해 터졌다. 아직까지 일련의 사태가 끝났다고 말하기도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크립토 시장 역시 금융시장과 마찬가지로 위기에서 배웠다. FTX 사태 이후 바이낸스를 중심으로 ‘거래소 준비금 증명(거래소가 보유한 자산이 고객이 맡긴 자산과 일치하는지 여부)’에 나섰다. 그간 제도 도입에 굼떴던 각국 규제당국도 투자자 보호 관점의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돈 냄새에 민감한 골드만삭스는 최근 크립토 스타트업 투자에 수천만 달러를 쓰겠다고 밝혔다. 빅테크 기업의 인재들이 독립해 설립하는 스타트업의 대부분은 블록체인·웹3 등 크립토 분야다.

2022년 초만 해도 새 정부 출범 기대감과 함께 코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테라-루나 사태로 그 인식은 몇 걸음 후퇴했다. FTX 파산 사태, 위믹스 상장폐지 사태까지 겹치면서 코인에 대한 인식은 2017년보다도 안 좋은 듯하다. 시장은 정말 발전하는 게 맞을까.

의심하지 말자. 역사적으로 돈과 인재가 모이는 곳은 언제나 발전했다. 다만 그 발전이 일직선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 뿐이다. 발전은 나선형으로 이뤄진다. 비슷한 모습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보여도 결국 시장은 발전한다. 착시 효과에 좌절하지 말자. 겨울이 가면 언젠가는 봄이 온다.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 고란(유튜브 ‘알고란’ 대표) algorantv365@gmail.com

202301호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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